한국어
조회 수 721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2과 언약의 믿음

(61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56)

 

연구 범위: 6:14, 6:23, 요일 5:11, 13, 4:1~7, 17:1~4, 5:1

기억절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기원전 7세기경, 시인 호머(Homer)는 오디세이(Odyssey)라는 서사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위대한 전사 오디세우스(Odysseus)가 트로이(Troy) 전쟁에서 트로이라는 도시를 약탈한 후에 그의 고향 이타카(Ithaca)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던 10년간의 긴 항해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선과 군사들의 반란과 폭풍과 괴물의 출현 등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해 그 항해는 길어지게 된다. 마침내 신들은 오디세우스가 충분히 고난을 당한 것으로 결정하고 그 위대한 전사가 가정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준다. 신들은 그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죗값을 충분히 지불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오디세우스와 같이 본향으로 가는 긴 여정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와 오디세우스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한다 해도 그 고생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결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잘못을 보상하기에는 하늘과 땅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향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예수님을 믿을 때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2. 갈바리를 깊이 묵상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6:14)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3.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요?(벧전 1:18, 19)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사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이 믿음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15:6, 4:1~7)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약속을 순종하고 굴복했기 때문이다.

5. 우리에게 부여된혹은 입혀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3:1~5)

예수께서 이루신 것은 우리가 이룬 것으로 여겨준다는 뜻이다.

6. 어떻게 하면 십자가에서 발견되는 약속과 희망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된다.

 

결론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하는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본성은 순결하신 하나님의 의 앞에서 무가치하고 죄 많은 모습일 뿐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 지급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질 뿐 아니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613() 갈바리를 묵상함

 

모세와의 언약 아래서 주어진 구약에서의 구원의 방법이나 새 언약 아래서 주어진 신약에서의 구원의 방법은 서로 다르지 않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옛 언약에서나 새 언약에서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만일 구원이 행위와 같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면 그 구원은 우리의 공덕으로 얻는 것이요, 창조주께서는 당연히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지시게 될 것이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대로 의무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한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물론 그 의무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의무를 충족시키셨다.

 

사람이, 하늘 왕께서 인간 대신 죽음으로 이루어진 큰 희생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구원의 경륜은 광대하게 될 것이며, 갈바리를 회상하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부드럽고, 거룩하며, 쾌활한 감정이 일깨워질 것이다. 그들의 마음과 입술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한 찬송이 늘 있을 것이다. 갈바리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자들은 교만과 자긍의 정신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고 계셨다. 비록 그분이 흑암의 세력으로 더불어 가장 격심한 투쟁을 겪으셨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갈바리의 장면은 가장 깊은 감동을 요구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열심을 보이는 것은 무방하다. 탁월하고, 무죄한(무리한 아님-That Christ, so excellent, so innocent,) 그분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의 막중한 짐을 지고 고통스런 죽음을 왜 당하셔야 했는지는 우리의 사상과 상상력으로 도무지 다 이해할 수 없다. 그 놀라운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구주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명상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며, 영혼은 감동되어 마음이 녹고 애정은 세련되고 고상하게 되며 모든 품성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교회증언 2, 212, 213).

 

<묵상>

오늘 교과에 인용된 엘렌 화잇의 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더불어 갈 6:14을 읽고 내 삶 속에서 십자가를 높이며 사는 방법이 무엇일지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예수님을 만난 후 과거 자신의 삶을 정의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예수님과 복음만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의 삶이 십자가를 높이며 사는 삶의 좋은 모본이 됩니다. 비록 쉽지 않은 일이지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부가설명> 오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하여서는 구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 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을까? 이 문제를 바르고 확실하게 깨닫기 위하여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럴 때만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인데, 사람이 자기 노력과 행위로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죄를 짓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바울은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4:4)라고 고백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6)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받는데 해로운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7~9)라고 단언했다. 인간이 행위로 하는 의로운 것이 예수님 앞에는 다 해로운 것이다. 이유는 이런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다 구원받는데 해로운 것이다. 왜 그런가? 죄를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 볼 때 이런 것을 이()로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본질을 인간의 사망이라고 가르친다.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를 죄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고전15:22, 2:3).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육체뿐이다. 그에게는 생명이 없다. 생명 없는 자가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5:24).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요일5:11,12). 죽은 자를 살려주는 생명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것을 마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해로울 뿐인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바울이 바로 그것을 깨닫고 전에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을 해롭다는 것을 알고 다 배설물로 버린 것이다. 이 결단이 믿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생명이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생명이신 분이 아담 대신 죽어서 사망을 처리하지 않으면 사망을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말씀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첫 아담이 죽은 그 죽음이 처리되었다(딤후1:10). 아멘.

 

교훈: 예수께서 갈바리 십자가에서 치르신 구원의 대가를 깊이 명상할수록 우리는 죄의 흉악성을 더 깊이 깨닫고 그분을 향한 더욱 굳센 믿음을 갖게 된다.

 

 

614() 언약과 희생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가 대속함을 받았다는 베드로의 말은 무슨 뜻인가?

 

: 우리의 죄 값을 우리 대신 갚으셔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가 언급한 대속혹은 속전(贖錢)’의 개념은 몸값이 지불된 노예가 그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던 고대의 풍습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에서 자원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와 그 결과인 사망에서 구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과 보혈의 공로는 모든 언약의 기초이다. 그것이 없다면 언약은 무효하며 그 효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 없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시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공의롭게 성취하지 못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6:23, 요일 5:11,13을 찾아보라. 다음 성경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기별은 무엇인가?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일5:11,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어째서 그런가? 창조주의 의로우심과 그분의 무한한 희생의 대가만이 율법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지게 된 죄의 빚을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유한한 존재인 피조물이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을 감당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률을 범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고유하고 파생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과 동등한 분만이, 율법을 범함으로 빚진 자들을 위해 속전을 지불하고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시다. 모든 언약으로 주어진 약속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성취된다. 영생의 약속도 이렇게 얻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속함을 받게 된 것이다.

 

<묵상>

죄로 인해 잃어버린 바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셔야 했습니까?

 

: 자기 피로 값을 치르셨다.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귀한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기쁨으로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부가설명> 왜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생명을 내주어야 했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하지 않고는 죄값을 치르신 방법이 없었는가? 참 심각한 질문이다. 죄가 인간이 그냥 불변하는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 자체라면 그것을 용서하시고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을 조치를 취해주시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창조주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하는가? 분명한 대답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성경에서 가능한 대답을 찾아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닐까? 루시퍼가 창조주께 도전한 본질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보는 것이 답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루시퍼는 자기를 창조주와 동등하겠다고 주장했다(14:12). 그러나 그는 피조물이다.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했을 것이다(쟁투494,495 참고). 그래서 그는 말씀 하나님께 당신은 자존자인가? 그것을 증명해보라고 큰소리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스스로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자존성을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온 우주에 증명하셨다(10:17,18). 그래서 그분은 자기를 위하여 우리 허물을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 우주적 사건이고 동시에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이 된 아담의 후손들의 죽음을 처리하신 사건이며 동시에 사망을 끌어들인 루시퍼를 영원히 사망으로 처리하여 존재 자체를 상실하게 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다. 독자들에게 찾고가 되었으면 한다.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감사합니다.

 

교훈: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함으로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구속하심으로 영생의 소망을 허락하셨다.

 

 

615() 아브라함의 믿음 1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위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은 성경상의 매우 중요한 교리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바울이 로마서에 그 진리를 언급하기 이미 수세기 전에 기록된 것이다. 이 구절은 구원이 에덴에서부터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아브람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육체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었다. 그 믿음은 자신의 무력함을 완전히 인정하는 믿음이었고, 철저하게 자아를 굴복시켜야 하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믿음이었으며,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이었으며, 그것은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성경은 왜 아브람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혹은 간주되었다고 하였는가? 아브람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은 를 가지고 있었는가?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지 오래지 않아서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이 사실은 아브람의 의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임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아담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면 창조주이신 것을 굳게 믿었다.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존재하게 하시고 죽었어도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굳게 믿었다.

 

아브람의 생애의 많은 부분은 믿음과 순종의 생애였으나, 완벽한 믿음과 완벽한 순종의 생애는 아니었다. 때때로 그는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연약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핵심을 일깨워 주는데, 우리를 구원하는 의는 부여된 의이며, 입혀진(imputed) 의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에게 결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시기에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를 의롭게 봐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이렇게 바라보셨으며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4:16)으로 그분에게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묵상>

로마서 4:1~7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그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4:1~3).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4:4~7).

믿음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

 

<부가설명> 로마서 4:16은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요소를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즉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15:6에는 이 설명이 없어도 롬4:17에 설명이 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이 두 가지 기본 요소를 확신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천사 기별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엘렌 화잇 선지는 세 천사의 기별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라고 했다. 첫째 천사는 창조주를 경배하라고 했고 셋째 천사의 기별에 성령께서 보충한 내용이 바로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임하는 복이 그들의 수고가 따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하였다. 죽었으나 부활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기별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다. 그래서 생산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창조와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도 부활할 것을 믿었다(11:17,18). 세 천사의 기별을 뒤집어 표현하면 첫째는 제7일 안식일을 지키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바벨론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는 기별이고,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은 부활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도 바벨론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사단은 두 큰 오류, 영혼 불멸설과 일요일 신성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의 기만 아래 들어오게 할 것이다.”(대쟁투 588) 이것으로 세상을 속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이 기별을 힘있게 외치라고 한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회복하라는 기별이다. 우리는 세 천사의 기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임을 확인하고 증거하자.

 

교훈: 아브람은 비록 믿음과 순종의 생애를 살았으나 그의 행동이 완벽하게 의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616() 아브라함의 믿음 2

 

15:6여기다로 번역된 말(, 하샤브)의 다양한 용례를 우리는 볼 수 있다. 같은 단어가 모세의 글의 다른 본문에서도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으로 여겨지거나’ ‘간주될수 있다. 예를 들어, 31:15에서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가 딸들인 자기들을 외인으로 여겼다고 말하였다. 또한 레위인들의 십일조는 분명히 곡물이 아니었으나 타작마당의 곡물처럼 여겨졌다’(18:27, 30)고 했다.

 

희생 제도에서 여기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7:18, 17:1~4)

[7:18]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시다 하라 3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4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 7:18에는 예물답게에서 답게라고 번역한 말이 하샤브이다. 17:4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에서 여길 것이라하샤브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다고 보는 것을 뜻한다.

 

흠정역에서는 하샤브(chashab)라는 히브리 단어를 여기다’(imputed) 또는 간주하다로 번역한다. 화목제와 같은 특정한 희생 제물은 제3일이 되기 전까지 먹지 않으면 그 가치가 상실되었으며, 희생 제물을 바친 자에게 예물답게 여겨지지않았다(7:18). 7:18은 희생 제물이 죄인에게 이롭게 여겨짐으로써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게 하는 규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비교, 17:1~4).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이 실제로 의롭지 못할지라도 그 개인을 의롭다고 간주하고 계신다.

 

우리가 결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롭게 여겨질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이 위대한 진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그 자체가 아니다. 믿음은 의의 선물을 받는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놀라운 개념에서 중요한 신앙의 기초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 곧 순종, 성화, 거룩함, 품성계발, 사랑 등은 이 중대한 진리로부터 비롯된다.

 

<묵상>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죄인 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실까요?

 

: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사실을 근거로 그를 믿을 때 의롭다고 여기신다.

 

나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바라볼 때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붙잡을 때 우리는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확신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부가설명>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으나 실상은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출생할 때부터 죽음의 시점을 향해 벋어간다. 아담의 씨로 출생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예외없이 죽음에 이르는 불치 병자로 태어난다. 그가 가진 수명이 다하는 날 그의 생명은 사라지고 존재를 상실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치유되어 영생의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는 것은 그가 가진 영생의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뿐이다(3:3). 우리 생명이신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그 생명이 다시 우리에게 돌려진다. 그것이 생명의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님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11:25,26)라고 선언하셨다. 나아가서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8:51). 이것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멸망하지 않는다는 요3:16의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는 날마다 이 생명의 활동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능력이다. 이 생명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이다. 이 생명이 바로 구원받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인데 나에게 주신 생명이다. 그래서 영생하는 자로 여기신다. 그것이 의로 여기신다는 말씀의 실상이다(4:23~25 참고). 아멘.

 

교훈: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진다.

 

 

617()

약속에 의지함

 

하나님의 입혀 주시는 의로만 의롭게 된다는 기별을 위해 일생을 싸웠던 카톨릭의 유명한 변증가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누군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을 가져와서 죽기 전에 성인들의 공로를 의지하여 확신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벨라민은, “이것을 치우시오. 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에 그들의 행위와 업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심을 얻기 위해 임종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언약은 지금 하나님의 안전한 약속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한 오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며, 더욱 공고히 한다는 차원에서 다음 성경절들을 찾아보고 주어진 질문들에 답해 보라.

 

34:8 -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가?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말씀을 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맛본다는 히브리어 타암은 경험한다는 뜻이 있다.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는 것이 맛보는 방법이다.

11:30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쉽게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친히 멍에와 짐을 지셨다.

5:1 - 의롭게 되는 것과 화평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믿음으로 이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서 산 존재가 된 것을 뜻한다. 산 자의 하나님과 친교할 수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게 된다.

2:7,8 - 그대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2:7,8]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동시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복종할 줄 아는 삶을 이룰 수 있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묵상>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들을 더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쉽지 않다. 믿음이라는 말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헬라어는 피스티스이고 동사 믿는다는 피스튜오이다. 피스투오는 맡긴다는 뜻이다. 묵상 문제가 말한 대로 믿고 의지하며라는 말대로 믿는 것은 의지하는 것인데 자기를 예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맡아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닐까? 늘 하나님 앞에 황송하고 안타깝다.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 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잡기보다는 나의 의로움을 앞세우려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가설명> 우리는 신앙적인 문제를 당면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기 보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경향이다.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다(12:2). 그런데 자신이 믿음의 주인 노릇하려는 경향이 재림 신자들 사이에 만연한 것 같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자기 노력으로 성품 변화를 이루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면 자기가 믿음의 주인 노릇 하려는 경향이다. 성품 변화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나의 생명이 될 때 그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에 성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루아흐네페쉬두 말이다. 이것을 개역성경에 성품이라고 17번 번역했다. 신약에는 성품이라는 말이 한 번만 있다(벧후1:4). 그것은 헬라어 피시스이다. 이 말은 본질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바울은 현재 우리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식’(2:3)이라고 했다. 여기 본질로 번역된 말이 피시스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면(믿으면) 본질이 변한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 신자 안에서 계셔서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믿음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이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니 고되고 확신이 없다. 맡기자. 정말 전적으로 맡기자 맡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기도하며 굴볻하며 맡겨야 한다. 그때 갈2:20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다. 성령님 전적으로 주장해서 도와주소서.

 

교훈: 우리 자신의 의는 구원을 얻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해 준다.

 

 

618()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이며 용서받은 영혼은 은혜에서 은혜에 이르게 되며 빛에서 더 큰 빛으로 나가게 된다”(가려뽑은 기별, 1, 367).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율법을 범함으로 규정된 형벌을 되돌리신다. 그 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하늘의 호의를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 성취되어야 할 다른 일이 남아 있는데 이 일은 점진적인 성격의 것이다. 영혼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 역시 믿음으로 성취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써만이 우리의 품성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가려뽑은 기별, 3, 19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무엇으로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을 구별할 수 있는가?(2:17, 18) 바울은 살아 있는 믿음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16:26) 믿음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드러내는 핵심 단어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생명이 생활(행동)로 드러나는 것으로 구별된다.

 

2.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분명 오직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이며 선행은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사랑이 작용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공이 되지 못하며 우리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의 선한 행실로 인해 우리에게 부여된 어떤 것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그는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간구로 그의 선한 행실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가려뽑은기별, 3, 199). 엘렌 화잇의 이 진술을 기억한다면 선한 행위가 여전히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이유가 무엇인가?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서 자기 생명의 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06 제8과 자유롭게 누리는 쉼(질문, 대답, 설명) 08/21/21 김명호 2021.08.13 7113
1005 제7과 쉼, 관계, 그리고 치유(질문, 대답, 설명) 08/14/21 김명호 2021.08.06 5959
1004 제6과 가족 관계 속에서 쉼을 누림(질문, 대답, 설명) 08/07/21 김명호 2021.07.30 6441
1003 제5과 “내게로 오라...” (질문, 대답, 설명) 07/31/21 김명호 2021.07.23 6890
1002 제4과 쉼의 대가(질문, 대답, 설명) 07/24/21 김명호 2021.07.17 6413
1001 제3과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질문, 대답, 설명) 07/17/21 김명호 2021.07.09 6625
1000 제2과 불만족과 반역(질문, 대답, 설명) 07/10/21 김명호 2021.07.02 6333
999 제1과 쉴 틈 없이 바쁜 세상에서 살아가기(질문, 대답, 설명) 07/03/21 김명호 2021.06.25 6683
998 제13과 새 언약의 삶(질문, 대답, 설명) 06/26/21 김명호 2021.06.18 6077
» 제12과 언약의 믿음(질문, 대답, 설명) 06/19/21 김명호 2021.06.11 7215
996 제11과 새 언약의 성소(질문, 대답, 설명) 06/12/21 김명호 2021.06.04 7001
995 제10과 새 언약(질문, 대답, 설명) 06/05/21 김명호 2021.05.28 6583
994 제9과 언약의 표징(질문, 대답, 설명) 05/29/21 김명호 2021.05.21 6147
993 제8과 언약의 율법(질문, 대답, 설명) 05/22/21 김명호 2021.05.14 6506
992 제7과 시내산에서의 언약(질문, 대답, 설명) 05/15/21 김명호 2021.05.07 6934
991 제6과 아브라함의 후손(질문, 대답, 설명) 05/08/21 김명호 2021.04.30 6305
990 제5과 약속의 자녀들(질문, 대답, 설명) 05/01/21 김명호 2021.04.23 7034
989 제4과 영원한 언약 (질문, 대답, 설명) 04/24/21 김명호 2021.04.16 6720
988 제3과 후대의 모든 사람들(질문, 대답, 설명) 04/17/21 김명호 2021.04.09 6786
987 제2과 언약 입문(질문, 대답, 설명) 04/10/21 김명호 2021.04.02 6991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58 Next
/ 58
Copyright© 2011 www.3amsda.org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