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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과 자유롭게 누리는 쉼

(82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17)

 

연구 범위: 2:1~12, 왕상 18, 왕상 19:1~8, 5:1~3, 53:4~6, 왕하 2:11.

 

기억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병자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정도로 아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치료를 받고 고통으로부터 쉼을 얻기 위해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원하는 것을 공급받았다. 어떤 때는 그저 한마디 말씀을 하셨을 뿐인데, 그들이 완전히 나음을 받았다. 어떤 때는 병자들을 직접 만져 주셨는데, 그들이 그 만짐을 통해 기적적인 치유함을 받았다. 어떤 때는 그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치유함을 받았다.

이번 주 우리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치유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한 경우에는 병자가 너무나 아픈 나머지 혼자서는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눈에 띄는 확실한 증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함의 은혜가 주어졌다.

아픔과 고통으로부터의 쉼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 삶을 사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께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으나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심으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온전한 치유와 자유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행하기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간다.

 

2. 중풍병자를 힘들게 했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2:1~4)

자기 죄책에 눌린 상태요 또 자기를 움직여서 치료의 자리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3. 중풍병자를 고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2:5)

죄짐을 벗겨주시는 것이다.

4. 엄청난 기적과 승리를 경험했던 엘리야가 도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왕상 19:1~3)

자기 봉사의 결과가 기대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도망하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왕상 19:4~5)

그때 그가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확실히 듣고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에서 엘리야는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왕상 19:8~15)

세미하고 쉼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과 사명을 받았다.

7.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기 위해 내 삶에 필요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더 굴복하고 주님의 뜻을 늘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질병까지 잘 알고 계시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고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고 자유함을 주십니다.

 

 

815() 치유가 되는 쉼

 

몸이 아플 때야말로 쉬어야 할 때이다. 몸이 면역체계를 회복시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쉼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쉼도 필요하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을 앓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잠들지 못한 채 누워서 얼마 전 받았던 병원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잘못된 건강 습관 때문이었을까? 20년 전에 복용했던 그 약 때문이었을까? 지난 몇 년간 살이 좀 쪘기 때문일까?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둔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일까?

 

2:1~4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2:1~4]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달아서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대의 소망에(267~271) 기록된 내용을 통해 그 배경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중풍병자는 모두에게 감추고 싶은 일을 저질렀다. 그의 죄 된 삶이 이러한 질병을 초래했으며, 영적 지도자들은 그가 병들게 된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병들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며 치료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매우 일반적일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자주 이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추궁하곤 한다. 어떤 범죄가 일어나게 되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딘가에서 사고가 나면, 누군가는 고소를 당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픔 중에 있는 사람에게 치유함이나 회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지고 계셨던 계획 속에는 아픔과 질병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질병은 죄가 지구에 들어온 이후에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 법칙을 주셔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건강 법칙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항상 건강하게 살리라는 보장은 없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아프든지 건강하든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쉼을 주실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질병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소홀함 때문인지 아니면 유전적 문제인지 아니면 죄 된 세상에 사는 자연스러운 결과인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쉼을 주실 수 있는지 알고 계신다.

 

<묵상>

죄악 세상에 사는 동안 육신의 질병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의술의 도움조차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통의 순간 우리가 기억하고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 부활의 날 완전한 건강과 죽지 않을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중에 쉼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이다.

 

<부가설명> 이 땅은 죄의 세상이고 아담의 후손인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육신의 질병이 들었을 때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 나았다해도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받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 할 것없이 다 신한부 인생이다. 암이나, 그 외의 어려운 질병이 들어서 의사가 몇 개월, 혹은 몇 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면 시한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시한부 인생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다만 그 시한(時限)이 좀 길고 짧은 차이밖에 없다. 고난이나 질병이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재난들은 다 사망이 가져온 증상들이다. 건강한 사람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불안해하는 사람이 없다. 다음 아침에 기력이 회복된 건강한 몸으로 일어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다. 만이 그 밤에 잠 자는 중에 그가 죽을 것이라고 하면 쉽게 잠이 오겠는가? 아마도 잠을 자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날 생명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 확실하다면 소위 말하는 죽음의 잠이 드는 것이 불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다 불치병 환자라는 사실을 시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예수님이 치유하시고 그날 아침에 완전한 건강으로 일어날 것이 확실하다면, 죽음 앞에서나 몸의 질병이 있어도 마음의 쉼은 잃지 않을 것이 아닐까?

 

<교훈>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의 문제 앞에서 그렇게 된 원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쉼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816()

근원부터 치료하심

 

중풍병자는 예수님 앞에 내려졌고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너무나도 확실한 이 죄인을 치료하실 것인가? 아니면 그의 질병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실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중풍병자를 고치기 시작하셨는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첫 번째 일은 무엇이었는가? 2:5~12을 읽어 보라.

[2:5~12]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그의 죄를 사하셨다는 선언을 하셨다.

 

중풍병자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진 병의 증상들을 치료하시기 전에, 그 병자를 괴롭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먼저 치료하셨다. 그 중풍병자는 그가 가진 병에 대한 고통보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죄의 무게와 그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것에 대한 부담을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찾은 사람은, 죄로 병든 이 세상에서 어떤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다 해도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바로 접근하셔서 먼저 그를 용서해 주셨다.

현장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셨을 때 충격을 받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 마음 가운데 품고 있던 비난에 답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셨다.

 

2:8, 9을 읽어 보라.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에게 어떤 도전을 주셨는가?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다루시고자 했던 문제는 무엇인가?

[2:8,9]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는지 물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말은 가볍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1). 비록 용서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분명하다. 용서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능력과 실체를 보여 주시기 위해, 그 중풍병자를 낫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먼저 고쳐주시고자 하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육체적인 질병을 즉시 고쳐주시기도 하신다. 하지만 때론 육체적인 치유함을 경험하기 위해 부활의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우리의 구주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라도,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에 대한 확신 안에서 참된 쉼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묵상>

하나님께서 우리가 경험하기를 바라시는 참된 치유는 무엇일까요?

 

: 죄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구원하는 생명을 받음으로 사망에 이르는 불치병을 치료받기를 원하신다.

 

<부가설명> 이 질문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하는 것을 봤다. 둘 다 어렵다. 쉬운 것이 없다는 반응과 질문에 대답하리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많은 대답은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것이 쉽다고 대답하는 쪽이었다.

교과 저자도 그런 시각으로 교과를 쓴 것 같다. 그는 죄를 사했다는 답이 어려운 것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깔고 있다. 그렇게 확대하면 이 말은 맞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병을 낫게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보는데 나타나는 현상이 없다. 그래서 고해신부들이 마음놓고 그 말을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죄 사함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러니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고 했을 때는 그 말이 치유의 능력이 되어 실제로 환자가 일어나서 걸어가야 한다. 그당시는 그거 일어나 걸어가는 것으로 그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일어나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야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발씻는 속죄를 경험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속죄 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오직 믿음으로 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백하면 주님은 용서하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이 약속을 실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쉼을 허락하시고자 하신다.

 

817() 도망치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울증은 매해 3억 명 이상에게 영향을 끼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질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울증은 믿음 없음의 증거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쁘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는 표시가 되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 우울감을 겪을 수 있다. 특별히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이러한 증상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것은 믿음의 부족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도 아픔과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 고통당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로 우울증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우리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였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후에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심각한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보았다.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비가 내려서 삼 년간이나 이어지던 가뭄이 끝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왜 이세벨의 협박을 듣고 도망하였는가? 왕상 19:1~5을 읽어 보라.

[왕상19:1~5]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 이세벨이 엘리야가 한 그 큰 능력의 역사를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기 때문에 갑자기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엘리야는 기진맥진해 질 수밖에 없는 힘든 24시간을 보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험하게 된 갑작스런 불청객의 방문과 살해 협박은 엘리야를 극도의 우울감으로 몰아넣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던 현장에 엘리야도 있었으며 아마도 엘리야가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왕상 18:40). 아무리 의로운 목적을 가지고 행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건은 현장에서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과 그 일을 실제로 행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엘리야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했다. 우리는 때로 기분 전환을 위해 냉장고로 달려가 실컷 먹기도 한다. 정서적으로 지친 것을 잠으로 해결해 보려 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부터 도망하기 위해 새로운 관계나 직장이나 장소를 찾기도 한다. 우리의 기쁨과 쉼을 빼앗아 간 무언가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더 바쁘게, 더 열심히 일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아픔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약물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노력들은 증상을 가릴 뿐이다. 그러한 시도는 모두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키곤 한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해결하기가 너무 막막하게 보이면 그런 문제에서 도망치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안전한 도망은 죽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버리면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책임을 물을 길이 없게 된다. 엘리야가 그렇게 도망하려고 했다. 하나님께 그렇게 대답했다. 여호와를 위한 특심한 열심히 일했는데, 나라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때에 무엇하고 계시는가? 아마도 엘리야는 이런 생각에 빠져서 심기가 우울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는 맥이 빠져서 로뎀나무 그늘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기력을 도왔다. 이 능력의 선지자,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 전에 친히 목격한 선지자가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는 위로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실망을 합리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이런 일이 닥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요나도 니느웨성이 망할 것이라고 열심히 예언했는데 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도 우울증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 숨어야 한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참고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며 이런 정서감에서 속이 헤어 나와야 한다. 주님 주님의 백성들에게 힘을 주소서.

<묵상>

40:30, 31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 속에서 어떤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십니까?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여호와를 앙망할 때 새 힘을 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일어서여 한다.

 

<교훈>

엘리야의 경우처럼 아무리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우울감에 빠질 수 있으며 그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칠 수 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우리의 현실을 잘 아십니다. 그대가 만약 지금 그런 상황 속에 있다면 하나님을 불러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세요.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818() 지쳐서 더는 달릴 수 없게 됨

 

엘리야는 너무 지쳐서 더는 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기도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드린 기도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여러 백성들 앞에서 응답받았던 믿음으로 가득 찬 기도와는 매우 달랐다(왕상 18:36, 37). 이 기도는 매우 짧고, 절박한 기도였다.

 

왕상 19:4에서 엘리야는 자신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왕상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 엘리야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참고 견딘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책하는 마음이 생겨 아마도 더욱 우울해진 것 같다.

 

마침내 엘리야가 멈추어 섰을 때,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는 자신의 성급한 도피가 이스라엘에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의 연약한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아픈 경험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삶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마치 예수님을 보시는 것 같이 보시겠다고 약속하신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해야겠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소망이 어디 있겠는가?(참조,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은 우리를 자기혐오의 어두운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때론 오직 죽음만이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처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가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고 외쳤다.

좋은 소식은 위대한 치료자께서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우울한 감정과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신다.

비록 기도하는 그 당시에는 우리 구주의 얼굴이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보시고 계시는 현저한 증거는 볼 수 없을지라도 그가 그렇게 보시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우리는 그가 우리를 만지시는 것을 감각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손은 사랑과 긍휼로써 우리를 안찰하시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9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왕상 19:7)정도로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아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멈추어 설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래야 그분께서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인생 길에 위기를 맞아 마치 예수께서 나를 버리셨나 하는 사탄의 생각이 마음에 스밀 때 우리는 한 번 더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탄은 그런 경우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지배하여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가 잘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우리가 영생의 생명을 얻도록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실 정도로 일하셨다. 그분을 믿으므로 그분의 생명을 얻었을 때 그분이 그 생명으로 이루신 일을 내가 이룬 것으로 여기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핵심 사상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지 않으면, 즉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경험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도 그것은 죽은 자의 썩어져가는 구습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바울처럼 전에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해롭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참된 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성경의 권고대로 자기를 시험하고 확증하기 위하여(고후13:5) 멈추고 살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묵상>

다음 성경절들에서 어떤 소망과 위로를 발견할 수 있으십니까?(34:18, 5:1~3, 73:26, 53:4~6)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주님이 그의 백성들을 항상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다. 그 보증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교훈>

인생의 위기 가운데 나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치는 대신 힘을 빼고 멈추어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일하실 수 있다.

 

 

819() 쉼 그리고 그 이상의 것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먼 거리를 달려오면서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매우 지쳐 있으며, 엄청난 무게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음을 아셨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해 주실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실수를 잊어 주시고 엘리야에게 쉼을 주셨다. 마침내 그는 정말로 잠이 들 수 있었고 새 힘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이쯤 되면 이야기가 결론을 맺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쉼은 일회성 특별 이벤트가 아니다. 하나님의 쉼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분의 치유하심에 연결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생각과 파괴적인 습관으로부터 차츰차츰 벗어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치유의 과정을 급하게 진행하지 않으신다.

 

왕상 19:5~8을 읽어 보라. 엘리야는 어디로, 왜 가고 있었는가?

[왕상19:5~8]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서 모세의 경험을 원했을 것이다.

 

휴식을 취한 후에, 엘리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달리는 방향을 재정립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울한 감정을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달리고자 하는 충동을 이해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달리는 방향을 재정립해 주고자 하신다.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자기 파괴적인 대처 방식 대신에, 우리가 그분께로 달려오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그분께로 달려가기를 시작한 후에는, 우리에게 쉼을 주는 그분의 세미한 소리”(왕상 19:12)를 듣도록 가르쳐 주고자 하신다.

엘리야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날 힘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만남을 위한 힘을 주셨고, 또한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해 주셨다.

 

왕상 19:15, 16과 왕하 2:11을 읽어 보라. 엘리야를 위해 무엇이 준비되어 있었는가?

[왕상19:15,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하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 엘리야가 감당할뻔 한 사명을 엘리사와 다른 왕들에게 위탁하는 일을 해야 했고 그 임무를 수행한 후에 그는 죽지 않고 승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날들이 엘리야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다. 그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조절하는 것을 배우며 그분의 쉼을 받아들일 때, 선지자에게 참된 쉼이 찾아올 것이었다.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는 왕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엘리야의 후계자가 선택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될 엘리사에 관하여 이미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다시 한번 믿음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기를 요청할 것을 알고 계셨다(왕하 1:10).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게 될 것이 아니라, 불병거를 타고 하늘의 쉼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묵상>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우리가 절망적으로 느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가 할 일을 수행하도록 이끄신다.

 

<부가설명> 엘리야의 경험이나 요나 선지자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종들을 긍휼과 자비로 대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신자들일지라도 깨닫고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신다. 우리는 엘리야를 대하신 하나님의 모습, 요나를 대하신 모습에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실망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더 자아를 낮추고 말씀 앞에 겸손하고 온유해서 주시는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형벌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정직한 마음으로 사는 신자들을 격려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징계는 더 잘하라고 하시는 사랑의 훈육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3:12).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감사는 충성으로 나타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고 하나님께로 달려와서 그분 안에서 참된 쉼과 더 나은 미래를 경험하기 원하신다.

 

 

820()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지속적인 상황의 변화 가운데 우리의 경험 또한 변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을 통해 우리는 행복해지거나 우울해진다. 하지만 상황의 변화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심 없는 확신을 가지라고 부탁하신다”(엘렌 G. 화잇, In Heavenly Places, 120).

 

그대들에게 어떤 뚜렷한 느낌이 있든 없든 간에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조용한 기도를 올리고, 주님의 능력을 붙잡으라. 마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고 결코 실패함이 없으신 약속의 주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것처럼 즉각 전진하라. 비록 어떤 무거운 감정과 슬픔에 억압된 순간이라도 그대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운율(韻律)에 맞추어 노래하며 행진하라. 분명히 빛이 이르게 되고 기쁨을 맛보게 되며 안개와 구름이 깨끗이 거두어질 때가 올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암영(暗影)과 흑암의 압도적인 세력에서 벗어나 주님의 임재에 따르는 밝은 태양 광선을 쪼이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2, 242, 2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정신병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돕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전략에는 무엇이 있는가?

함께 기도하고 자주 찾아 친구가 되어주며 사랑을 베푸는 친교의 전략을 시행할 수 있지 않을까?

 

2.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놓기를 힘들어 한다. 시편에 기록된 말씀들을 읽어 보면서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솔직했는지를 살펴보라. 우리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감히 요나 같이 엘리야 같이 불평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시정을 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을 것이다.

3. 우리가 우울한 감정 속에 빠져 있을 때 기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함께 토의해 보라.

기도하기 가장 어려운 마음이나 환경일 그때 가장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4. 믿음은 단순히 감정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울하고, 낙심되고, 두렵고, 걱정에 휩싸일 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것임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그런 것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감성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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