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마세요

by 해바라기 posted Apr 0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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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마세요

인생길은 무겁다.
태어나서 살다보면 작은 일 큰일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된다.
또 기대하고 원하였던 일이 잘 안 되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좌절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가
없다. 겉으로 잘 포장하여 웃는 미소와 쾌활한 웃음소리에 묻혀서 그들이 진정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고뇌를 잘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약한 인간인지라 그것이 금방 얼굴
과 행동에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은 약하다.

세상과 성경의 인물 가운데 크게 된 사람치고, 크고 작은 어려움을 잘 견디지 않고
그대로 큰 인물이 된 사람은 없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인생의 도량의 폭이 넓어
지고 큰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주로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 요셉, 모세, 다윗의 경우를 보더라도 심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다. 최정상에 섰다가도 최저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방법일까?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인생의 세세한 부분까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 수 있다. 가장 안 좋게 보이는 자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은
큰 축복이다.

요셉의 경우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그가 팔려가나 신세로 어느 집의 종이 되었고, 또 불합리한 이유로 옥에 갇히는
사건이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형통한 사람이었다.

형통은 우리의 시각으로 일이 잘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다. 그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는 것이 주 포인트다. 감옥이고, 오지(奧地)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은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이 좀 어그러졌다고 누가 우리보고 '실패자'라고 할 수 있으랴?
실패한 자리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일어선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철저한 패배의식은 바로 마귀가 심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소망으로 인도하시는데 비하여 마귀는 계속 절망으로
이끌고 간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 잘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에
마귀는 "할 수 없다. 절망이다." 라고 속삭인다.

왜 성경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마귀의 속삭임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먹지 말라고 선언하셨는데, 마귀의 속삭임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지 말라. 마귀의 달콤한
속임수는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왕국의 백성이다.

솔로몬의 출생의 비밀은 애처롭다.
그는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다. 물론 그 둘 사이의 첫 아이는 
세상에살지 못했다. 잘못된 관계에서 부적절하게 태어난 솔로몬은 사실 비극의 주인공
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다윗의 많은 아들 
가운데 그 위(位)를 계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결국은 관계를 맺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지만, 그
어려운 가운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면, 다윗의 위(位)를 잇는
왕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우리가 고통가운데 있더라도,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고통은 아닐진대, 
어떤 방법으로 허락하신 고통이라도,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진정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큰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들어
쓰신다면.

토기인 우리는 '토기장이'인 하나님께 항변할 수 는 없는 일이다. 그 선하신 손에 우리의
삶이 들려질 때, 토기는 토기로서의 명분에 합당한 일을 감당하게 된다. 왜 나는 금을 
담는 그릇이 아닙니까? 왜 나는 식량을 담는 그릇이 아닙니까? 나는 포도주를 담고 
싶어요... 나는 쓰레기를 담는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해도, 그분의
높은 뜻을 우리는 모른다. 그저 토기는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려 그 용도로 모든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보람된 일다. (사45:9)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택하였을까?
예수 당시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왜 그들은 12사도가 되지 않았는가?
왜, 왜, 왜, ...

이러한 질문을 하다보면 끝도 없고, 답도 없다. 하나님께서만 아신다.
이 세상에 살다가 부딪히는 많은 문제에 우리는 답을 원하지만, 그 원하는 답을 이 세상
에서 꼭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

'왜' 로 시작되는 질문보다, '어떻게'로 시작되는 질문을 더 사랑하자...

어떻게 하면 이 순간 나는 하나님께 더욱 전적으로 매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건강한 질문엔 건강한 해결책이 나온다. 결국에는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고 예수를 뵈옵는
그날 우리는 진정 예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13:12)


실패란 그저 실을 감는 '패', 그것이 실패이다. 그 외엔 없다.
포기? 인생에 포기란 없다. 포기란 그저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이다.
배추 1포기, 2포기... 그 외에 다른 포기는 없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우리를 살리신다. (Live)
마귀는 사망이고 우리를 죽이는 악이다. (Evil)

영어의 live 와 evil 은 글짜순서를 거꾸로 읽으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우리의 말 '살자'와 '자살'이 순서의 차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포기란 없다. 실패도 없다.
그저 생명과 삶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