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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일 안식일

일몰오후 715

 

기억절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0~21).

 

연구 범위 : 32:4, 28:1, 17, 15:1~5, 7:1~5, 5:23~24, 18:15~18.

 

기독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 자손과 아브라함 그리고 아담에게까지 이른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자신과 언약을 맺게 하시고 세상에 복을 주는 통로가 되게 하셨다. 거룩한 역사의 흐름 속에 그러한 언약 관계는 교회를 통해 지속되었다.

교회는 사도 또는 어떤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계획을 친히 선언하셨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분은 교회의 창시자이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교회라는 단어를 단지 세 번 언급하셨다(16:18, 18:17). 그렇다고 그분이 이 주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그분은 교회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가르치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교회의 기초교회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연합과 통일성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연합한 교회의 특성을 파악한다.

느끼기 : 세계적으로 연합된 영적 가족의 일원이 되는 특권을 경험한다.

행하기 :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시간, 열정, 재능, 재정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연합한다.

 

A.

17장에서 예수님이 교회의 연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합이 세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연합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확실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이다.

우리 교회가 연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가장 시급한 것은 말씀을 따라 목회자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먼저 굴복하는 것이다.

 

B.

교회의 연합을 깨는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 의견과 감정을 노출시키며 언동을 하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삶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된 교회가 다시 연합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먼저 각자가 주님 앞에 솔직히 굴복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아서 서로 살려주려는 정신으로 만나며 일하며 친교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 : 교회는 연합한 상태에서 신자들과 지역 사회를 가장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첫째날() 교회의 기초

8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16:18)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워질 이 반석(그리스어로 페트라’)은 누구인가? 어떤 주석가들은 베드로가 그 반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께서 베드로(페트로스)와 반석(페트라)이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사용하셨고 짐작건대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로는 그 의미가 더욱 분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이 아람어로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하셨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는 마태가 그리스어로 기록한 본문만 있는데 거기에는 페트로스()’페트라(반석)’를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페트라(반석)’가 그리스도를 일컫는다고 주장할 합당한 근거들이 있다. 예수님의 진술이 이어지는 해당 문맥은 베드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이전에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들면서 분명하게 그 반석을 자신 또는 자신의 가르침과 동일시하셨다(7:24~25).

 

1. 구약에서 반석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32:4, 28:1, 31:2~3, 42:9, 62:2, 17:10)

[32:4]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31:2~3]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62: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17:10] 이는 네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 이방의 가지도 이종하고.

 

: 이 구절들에서 반석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은유를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 즉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4:11)셨다고 확증하였고, ‘반석이란 단어를 교회의 기초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벧전 2:4~8). 그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산 돌과 비교하였지만, ‘반석(페트라)’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적용하였다. 성경에서는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반석으로 불리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페트라(반석)’란 단어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하며(9:33, 고전 10:4), 결정적으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고 선언한다. 결론적으로 사도교회는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이의가 없었다. 그 외에 모든 선지자와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는 교회의 영적 구조 속에서 첫 번째 층을 이루는 산 돌들이다(2:20).

 

<부가설명> 비유와 상징은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이 단순한 표현으로 그 상태를 다 이해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언어수단이다. 하나님의 상태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를 사용한다. , 반석, 목자 등등 이런 비유적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의 어떤 면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반석은 견고하며 든든하며 의지할만한 사실들을 인식시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은 견고하지도 않고 든든하지도 않고 의지할만하지도 않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2:22) 그러므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칭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나타난 반석의 의미와 결코 조화되지 않는다. 반석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결코 반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없다.

 

교훈 : 구약과 신약의 저자들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는 기초로 언급하신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둘째날() 연합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기도

818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목요일 밤이었다. 마지막 만찬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후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믿게 될 모든 자를 위해 기도하셨다. 비록 십자가 고난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분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긴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다. 그분이 우리 각자를 포함하여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용기가 난다.

 

1.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보라. 신자들에 관하여 예수님이 아버지께 올린 주된 기도의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특히 21~23절을 보라.

[17:21~2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연합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교회의 생명은 연합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간청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17:11, 21~23). 그 같은 최후의 순간에 주님은 여러가지 중요하고 필요한 다른 일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신자들의 연합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셨다. 그분은 교회의 최대 위협은 경쟁과 분열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예수님의 소원은 통일성이 아니라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개인적인 연합이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역할이 다르고 서로에게 구별된 두 인격이시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본성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같은 이치로 우리 모두는 기질과 배경, 재능과 역할이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연합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그런 연합을 이루려면 우리는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속에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품성을 빚으시고, 우리는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연합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로 믿도록 격려하는 일종의 간증이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연합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우리에게 이런 증거를 전할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부가설명> 연합은 교회의 필수사항인데 쉽지 않다. 교회의 연합을 논할 때에는 성경에 계시된 교회론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 영감으로 말씀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이 몸의 지체들이고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연합은 교인들이 지체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람들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 그처럼 교회의 교인들은 모두 지체들이다. 교인 하나하나가 몸의 세포에 해당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포가 반란을 하면 암세포가 된다. 교인들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것을 확실이 깨달으면 지체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지체가 스스로 몸 자체로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건강한 지체가 건강한 몸을 만든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분쟁이 없다. 암 세포나 자가면역증이 생기면 지체끼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자가면역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인 각 사람은 자기의 지체성을 깨닫고 스스로 머리노릇하지 않고 몸통노릇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연합은 당연한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의 연합을 위해 기도하셨다. 교회의 연합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셋째날() 그리스도께서 구하는 연합의 요소

819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1.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던 연합의 기초는 무엇인가?(17:23,

15:1~5)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5:1~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된 것이 기초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14:20)에 있다는 표현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어야 할 친밀한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연합의 결실이 맺힌다.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그분의 사랑이라는 연합에 필수 불가결한 두 요소를 가져오신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에게는 그분의 말씀도 있을 것인데 사실 그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다(14:24, 17:8, 14). 예수님은 진리이시며(14:6), 아버지의 말씀 또한 진리이다(17:17).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은 곧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의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연합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진리에 동의해야 한다. 성경에 기초한 신념들을 고수하지 않고 연합을 이루려는 노력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던 완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17:26). 이러한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감흥이 아니라 살아있는 항구적인 행동 원칙이다.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려면 우리는 자아는 덜 사랑하고 예수님은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참되고 진실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진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하여 깊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하나를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물론 교리만 연합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러한 균형의 부족은 점차적으로 보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가 다른 극단 즉 연합을 위해서는 진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며 사랑 없는 진리는 결실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교회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연합을 드러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다는 말은 머리이신 예수님과 몸인 그의 교회에 지체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라고 했을 때 핵심은 생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뜻이다. 포도나무가지는 포도나무에서 생명과 영양을 받는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나가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과로 마르게 된다.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포도나무가지는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다른 용도를 쓸 데가 없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1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이고 그 생명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한 지체로서 연합된 상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교회가 연합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 안에 진정으로 예수의 생명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 없다.

 

 

넷째날() 연합의 큰 장애

820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1~2).

 

1. 예수님이 마 7:1~5에서 주신 말씀은 교회 안의 분열과 갈등을 피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동시에 자신을 잘 살피는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단점보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 훨씬 쉽게 보인다.

비판은 우월성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과 비교해야 한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19:16)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16:28)는 말씀은 진실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말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다음의 세 가지를 물어야 한다.

1. 내가 하려는 말은 사실인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20:16). 간혹 우리는 가정이나 추측에 불과한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를 더하여 다른 사람의 의도를 잘못 판단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2. 내가 하려는 말은 덕이 되는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유익한가? 바울은 우리에게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4:29) 것만 말하라고 권고한다. 사실이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3. 그것을 사랑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말하는 방법은 우리가 말하려는 내용만큼 중요하다(25:11 참고). 그것이 진실이고 덕을 세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것을 말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야고보는 혀를 큰 숲을 태울 수 있는 작은 불로 비유하였다(3:5~6). 소문을 들을 때 우리는 불에 장작을 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26:20)기 때문이다. 소문이 퍼지려면 전달자의 사슬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문을 듣지 말든지 아니면 그것을 들었어도 전달하지 않음으로 소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숙덕공론을 하여 낭패를 당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권능과 그분의 영광을 이야기”(하늘을 향하여, 306)하자.

 

<부가설명> 비난하는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비판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비판은 필요하다. 그것은 상대방을 살리려는 사랑의 정신으로 하는 비판이다. 어쩌면 사랑의 충고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정당한 비판을 들을 때 비판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아 자기 교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비난하는 정신으로 비판하는 것은 비판하는 사람이나 비판받는 사람 둘 다 상한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다. 우리는 말로 사람들을 잘 죽인다. 그래서 말이 칼보다 무섭다. 칼에 상한 상처는 혹시 흉터가 남아도 다 나으면 아프지 않다. 그러나 말에 상한 상처는 정말 잘 낫지 않는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덕을 세우는 말을 하도록 영감으로 기록하게 한 것은 말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사람을 살리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다섯째날() 연합의 회복

821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1. 왜 예물을 드리기 전에 피해를 입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필요한가?(5:23~24)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인간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단에 드리는 제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얻기 위한 동물 제사를 언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화해를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런 태도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2. 누군가 우리에게 해를 끼칠 때 우리가 밟아야 하는 세 단계의 과정은 무엇인가?(18:15~18)

[18:15~18]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1. 당사자끼리 대면하여 문제를 풀도록 하라. 2. 듣지 않거든 증인들을 세우고 함께 권고하라. 3.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의 도움을 청하라.

이 모든 과정에서 상대를 진정으로 살려주려는 정신을 나타내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말하되 그를 정죄하지 말고 대신 그의 잘못을 보여주면서 회개하도록 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9:17 참고). 우리는 온유와 부드러운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회개하며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잘못을 공개함으로 그를 수치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의 회복은 더욱 어렵게 된다.

회개와 화해로 인도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개인적인 대화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한두 명의 증인을 대동하는 것이다(19:15). 그에게 회개하도록 권유하려면 이 증인들은 그 사건과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해자가 그들의 권유조차 거절할지 라도 그들은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다.

만약 앞의 두 단계의 노력이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징계가 아닌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최종적인 호소를 위해 그것을 교회에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모든 과정의 목적은 구원이어야 한다(6:1).

 

<부가설명> 사람이 고치기 어려운 허물은 자기의 천성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우이다. 가해자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표현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상대방을 상하게 한 사람은 자기 천성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한 언동으로 상대방이 상처를 입었을 때에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는 아무런 다른 감정이 없이 자기 천성으로 그런 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또 자기 천성 때문에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상처를 준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허참, 그 사람 이상하네. 나는 아무런 다른 마음 없이 그냥 말했는데 그걸 가지고 상처를 입는다니. 이해를 못할 사람이네. 이상하구먼.”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그 천성을 반성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런 경우 그래요? 나는 예사롭게 말했는데, 상처를 입는 사람이 있군요. 내가 가서 사과하리다. 그리고 내가 예사롭게 하는 언동을 좀 더 조심해야 하겠군요. 나는 전혀 그런 의식을 하지 못하니까요. 아마 내 성질이 그런 모양인데 정말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오면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자기 천성을 그처럼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건강하게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 전에 사람과 화해해야 하고,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섯째날()

822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5>, 236~248 “그리스도인의 연합”, <교회증언 8>, 239~243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를 읽어 보라.

 

연합은 힘이요, 분쟁은 허약이다. 현대 진리를 믿는 자들이 연합할 때, 그들은 현저한 영향을 발휘한다. 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가 오늘날처럼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 원한과 분열을 일으킴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무효로 만들기 위하여 결정적인 노력을 한 적은 없었다”(교회증언 5, 236).

 

우리는 모든 사람을 특별히 좋게 생각하되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나쁜 소문을 성급히 신임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흔히 질투나 오해의 결과로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과장이나 사실의 부분적 표현에서 나올 수도 있다”(교회증언 5, 5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교리는 다르지만 그대와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수용적이며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반대로 신학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자신들과 시각이 다른 자들에게 대하여 가혹하고 비판적이며 증오심을 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다 고칠 것을 고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그리스도인 성질로 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증거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연합이 중요할 뿐 아니라 그러한 연합을 잘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비신자들이 신자들의 연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신자들이 각각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한 지체가 되는 것이 연합을 잘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비신자들은 교회를 정말 사랑이 있는 유기체로 인식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회개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렇더라도 마음으로 용서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징계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사랑은 상대방을 살려주려는 정신이다. 징계가 징계 받는 사람을 허물에서 벗어나서 참된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려는 것이라면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종교통합운동)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였던 연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동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과 관련된 명확한 문제들 외에도 그 운동에서 어떤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까?

그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로 연합하려는 것이다.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연합이 아니면 진리가 오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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