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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이하 재림교회)는 성소 진리에 대하여 독특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교회는 다니엘 8:14에 있는 2,300주야에 대한 해석을, 예언적 1일을 역사적 1년으로 계산하는 원리에 의하여 2,300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하며, 그 시작을 다니엘 9:24절부터 27에 기록된 70 이레의 사건의 시작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70 이레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단9:25에 기록된 그 때인데, 그 때를 에스라 7:7에 기록된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조서가 내린 때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때가 기원전 457년이며 그때 시작하면 2,300년의 끝이 1844년이 된다. 이때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봉사를 시작하셨다고 이해한다. 지성소봉사는 성소정결봉사이며 이것은 곧 심판의 봉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1844년부터 예수께서 재림 전 심판을 주관하신다고 이해하고 믿는다. 그것은 지상성소의 지성소 봉사의 성격에 미루어 1년간 성소 봉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회개를 하여 모든 죄에서 완전히 정결하게 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조사심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일이 끝나면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재림교회의 이런 이해는 수다한 개신교 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들은 기산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또 1일 1년 원칙은 성경적 원칙이 아니며, 그 근거로 제시한 겔 4:6이나, 민 14:34은 예언적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라는 원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1일 1년 원칙으로 예언이 성취된 예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노아의 120년이 그렇고 이스라엘 포로 70년도 그렇다고 제시한다.

아닥사스다의 조서는 예루살렘 성읍 중건이나 성전 중건 명령이 아니고 유대인 포로 귀환조서라고 주장하며 그 조서에는 성전 중건 내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닥사스다의 조서가 내린 때를 2,300 주야의 기산점(起算點)으로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면서 재림교회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엘렌 화잇이 쓴 각 시대의 대쟁투의 내용 중에 아닥사스다의 조서 때 성전 중건하라고 했다는 말을 인용하여 지적하면서 그 주장이 틀렸다고 하며, 또 신계훈 목사의 글을 인용하여 예루살렘 중건이 성전 중건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 중건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면서 엘렌 화잇의 주장과 다르니 스스로 화잇을 거짓 선지자로 만들었다고 빈정거린다.

그들은 또 김상래 목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김 목사는 그 중건령이 성읍 중건령도 아니고 성전 중건령도 아니고 예루살렘을 중건하라고 했기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성전, 성읍, 자치권 등 정치적 종교적 회복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다 일리가 있으며 아주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냥 들으면 다 옳은 주장이고 재림교회의 주장이 틀린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재림교회의 해석이 틀린다는 것만 강조하고 주장하면서 70 이레나 2,300 주야에 대한 성경적 바른 해석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성경의 이런 말씀들은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당연하며 성경에 대한 겸손한 자세라고 말한다. 아무도 성경을 다 알 수 없는 것이며 계시나 예언에 대한 것은 더욱 알기 힘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배우는 자세라고 말하면서 70 이레나 2,300 주야에 대한 것은 그냥 두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 겸손한 자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은 배우고 깨달아 확신한 일에 거하도록 하라고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알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간절히 알려고 하면, 그것이 꼭 알아야 될 진리이면 성령께서 깨닫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이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하면 바른 이해일 것이다. 70 주일과 2,300 주야도 예외는 아니다. 재림교회의 해석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그 해석을 알 수 없으며 그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라고 주장하면 그 주장이 과연 바른 것인지 솔직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24:15). 이렇게 예수님은 친히 다니엘서를 읽으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이제 이런 주장들을 감안하면서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찾아보고자 한다.

 

1. 예언적 1일이 역사적 연대로 1년이라는 해석에 대하여

  예언적 1일을 역사자거 연대의 1년으로 해석하는 성경적 근거로 에스겔 4:6이나 민수기 14:34을 성제시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70 이레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따라가 보면 굳이 위의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아도 대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벧전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는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시와 때를 지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구약성경에 예수께서 고난 받으실 시와 때가 예언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에는 구주에 대한 예언이 아주 많다. 그분이 어떤 혈통으로 오실 것인지, 어떤 상태로 오실 것인지, 어디에 오실 것인지, 어떻게 고난당하실 것인지, 어디에 장사될 것인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시는지 등등. 그런데 고난 받을 시와 때에 대한 예언은 어디에 있는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찾아도 다니엘 9:24-27을 제쳐놓으면 찾을 곳이 없다.

그 말씀은 이렇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4-26).

이 말씀을 보면 다니엘의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과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을 위하여 70 이레의 기한을 정하였다. 여기 “정하였다”는 말이 “하타크”이다. “하타크”라는 말은 “떼어내었다”는 말이다. 70 이레는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서 특별히 어디에서 떼어낸 기간이다. 바로 이 기간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7 이레와 62 이레를 지난다고 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이다. 즉 70 이레 중에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를 기점으로 7 이레와 62 이레가 될 때 메시야가 일어날 것이다.

70 이레는 이레 곧 70이 7 번이라는 말이다. 490이다. 이레라는 말은 일곱 날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490일이다. 그 중에 메시야가 일어날 때까지는 7 이레 곧 49일과 62 이레 곧 434일이 며, 합하면 483일이 된다.

이것을 그냥 483일로 이해하고 계산하면, 성경 달력으로는 한 달이 30일이다. 이렇게 1년은 360일이며, 이렇게 할 때 483일은 1년 4개월 3일이다. 예루살렘 중건령을 다리오의 조서로 본다면 그것이 BC 520(519)년인데 그때부터 1년 4개월 3일이 지나도 여전히 다리오 통치의 BC 518년 어느 달에 해당된다. 여전히 다리오 통치기간이다. 그때 메시야가 왔는가?

그러므로 이 예언은 1일 1년 원칙을 적용하지 않으면 완전히 엉터리 예언이 된다. 만일 기름부음 받은 왕이 메시야 이신 예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다리오가 조서를 내린 BC 520(519)년 후 1년 4개월 3일이 되었을 때 유대에 어떤 왕이 기름부음 받아 즉위하였는가? 그런 일이 없다.

올바른 상식을 가졌다면 70 이레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단 9:24-26] 하나님이 네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해 490년간의 기간을 작정해 놓으셨으니 허물이 끝나고 죄가 종식되고 죄악이 용서될 것이며 영원한 의가 확립되고 환상과 예언이 성취되고 가장 거룩한 성전이 다시 봉헌될 것이다. 25 이제 너는 깨달아 알아라.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릴 때부터 하나님이 택한 왕이 오실 때까지 49년과 434년이 지날 것이며 그 49년 안에 예루살렘의 거리와 성벽이 재건될 것이나 그 때는 어려움을 당하는 때이다. 26 그리고 예루살렘이 재건된 때부터 434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택한 왕이 죽임을 당할 것이며 장차 한 강력한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그 성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종말이 홍수처럼 밀어닥칠 것이며 끝날까지 전쟁과 파괴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때는 침례 받으실 때이다.

[마3: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침례 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부었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침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성령께서 그 머리에 임하셨다.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부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때가 기름부음을 받은 때이다. 그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70 이레의 기산점은 오해할 여지없이 밝혀진다.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예수께서 AD 27년경에 침례를 받으셨다. 그렇다면 AD 27년에서 483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BC 457년이 된다. 어떤 사람이 계산을 하고는 456년이라고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원 연대에는 0년이 없기 때문에 457년이 맞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날 때까지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날 것이라는 연대 예언은 아주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다. 예언은 계속하여 말씀한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즉 62 이레 후에 메시야가 죽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62 이레 후 언제 끊어질 것인가? 그것은 단9:27에 답이 나와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그가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여기 이레는 70 이레 중에 남는 한 이레이다. 7 이레와 62 이레는 69 이레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70 이레 중 한 이레만 남는 것이다. 그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 한 이레의 절반은 3일 반이다. 그러니 나머지 한 이레인 7일의 절반되는 3일 반에 이르러 메시야가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다. 우리 번역에 “금지한다”고 한 말은 원어로 “샤-바트(動詞)”이다. 이것은 중지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쉬게 한다, 안식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식일은 “샤바-트(名詞)”라고 하지 않는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 드리는 일을 쉬게 한다는 말이다. 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제사와 예물이 표상하던 그 실상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속죄를 위하여 제사와 예물을 드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킨 것이다. 금지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쉬게 한다, 또는 그치게 한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3년 반 동안 공중 봉사를 하시고 3년 반이 되는 AD 31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 것이다. 3일 반이 3년 반으로 적용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7년 대환난을 일으키는데 이 남은 한 이레가 바로 그 7년 대환난 기간이라고 해석하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 한 이레를 7년으로 보는 것은 1일 1년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니엘서 9:25-27을 읽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 한 이레를 말세의 사건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27에 “그가 장차”라고 했을 때, “그”는 대명사로서 주어인데, 앞 절에 선행사(先行詞)로서 본 명사가 나와 있어야 문장 구조가 맞는다. 그런데 대명사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26절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라고 한 말씀 중에 “한 왕”을 “그”의 본 명사라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26절의 “한 왕”은 주어의 역할을 하는 단어가 아니고 “한 왕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백성”을 형용하는 형용사역할을 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27의 “그”의 선행사가 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백성”이 본명사가 되어야 하고 27절의 “그”는 백성을 뜻하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문장을 봐서 명백하다. 그렇다면 27절 “그”의 본 명사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26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27절에 주어로서의 “그”가 받을 수 있는 주어로서의 선행사가 될 수 있는 말은 26절의 주어인 “기름부음을 받은 자”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7절의 “그”는 곧 메시야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70 이레가 누구를 위하여 떼어 낸 기간인지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다니엘의 백성 곧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성이다. 70 이레 기간의 사건은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할 사건인 것이다. 이 기간은 연속적 기간일 수밖에 없다. 70 이레 중 69 이레는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한 이레는 69 이레 전체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지난 후 역사의 종말에 7년 대환난 기간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 드는 해석이다. 더구나 이 기간이 민족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떼어낸 기간인데, 이것을 역사의 종말에 7년 대환난 기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 기간이 민족적 이스라엘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주장은 서로 모순되며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70 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도 민족적 이스라엘과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는 그 시대에 69 이레가 적용되는 것과 같이 69 이레의 연속으로 적용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26절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는 말씀 중에 “그 성읍과 성소”는 예루살렘 성과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그”는 누구인가? 이것은 “예루살렘 성”이다. 다른 번역들이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장차 한 강력한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그 성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종말이 홍수처럼 밀어닥칠 것이며 끝 날까지 전쟁과 파괴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그 성읍과 그 성소를 훼파하되 반드시 홍수와 같이 마칠 것이요 또한 끝까지 전쟁이 있을지니 곧 멸망을 정한 것이라.”(구역) “그 성과 성소를 홍수로 엄몰함 같이 파괴하고 끝까지 전쟁하여 예정한대로 훼멸할지며”(奇一 James Scarth Gale 역).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또 27절은 26절의 내용을 반복하여 보완하고 확대하여 설명하는 말씀이다. 26절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끊어진 후에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예루살렘을 훼파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지는 정확한 때에 대하여 말이 없다. 그런데 그 “때” 곧 베드로전서 1:11에 말한 구주가 고난과 그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정확하게 지시한 것이 단 9:27 전반부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많은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한 이레 동안”은 70 이레 중에 69 이레가 지난 후 나머지 한 이레이다. 이것은 곧 메시야이신 구주가 친히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구원의 봉사를 할 것을 지적하는 예언이다. 즉 구주 예수께서 이 기간에 친히 오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굳게 언약을 정한 언약의 내용이다.

언약을 굳게 정한다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새로 언약을 맺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새로 언약을 맺을 때는 “카라드 베리트”를 쓰는데, 여기에는 “히게비르 베리트”를 썼다. 이 말은 이미 있는 언약을 새롭고 확실하게 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구원의 언약을, 그 언약을 이루실 당사자인 메시야 예수께서 오셔서 이 한 이레 곧 7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확실하게 이루실 것인데, 한 이레 곧 7년의 절반 동안은 주님이 친히 하시고 나머지 절반에는 사도들이 증거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권고 받는 기간을 알지 못하였다(눅19:41-44; 마23:37).

70 이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선민의 자격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내용이다.

[행4:23-28]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그의 사도들을 대적하는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동일한 대열에 열거하였다. 그 말씀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선민에서 이방인과 동일하게 되었을 때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선다. 이것은 26절의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 예언이 이스라엘 민족의 예루살렘 멸망과 역사의 종말에 이 세상의 멸망을 이중적으로 적용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멸망하였다.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서는 것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21:20; 마24:15 참고).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싼 것이 바로 다니엘의 이 예언의 1차적 성취이다. 역사의 종말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온 세상을 상대로 일어날 것이다. 정한 종말까지 황폐케 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에게 진노가 쏟아지는 것으로 역사가 종결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각설하고 이 70 이레 기간이 지나면 구원의 복음은 이방으로 전파될 것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을 것이다(창12:2,3; 갈3:14-16). 한 이레 동안 집중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그 약속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로 실현이 되었다. 먼저는 구주 예수님 자신이 그 사실을 전하였다. 3 년 반 동안 열심히 일하셨다. 그 기간은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 “권고 받는 날”(눅19:44)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약속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바로 예언된 그 “시, 때”에 받으실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3년 반 동안 제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면서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고 명하신대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기까지 12 제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방인에게 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함과 동시에 일어난 핍박으로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셨다.

스데반의 순교한 때가 바로 70 이레가 끝나는 때이다. 유대인을 위한 특별히 떼어낸 그 기간이 끝났다는 말이다. 그때가 바로 AD 34년이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모습으로 스데반에게 보이셨다(행7:55,56).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막16:19). 그런데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 이것은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늘성소 봉사를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계시로 보여주신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사건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다(롬 11:13; 갈1:16, 2:9). 그가 바울 사도이다.

이런 조치가 다니엘서 9장의 70 이레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조치이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거룩한 성이라고 불렸던 예루살렘의 표상적 예언적 임무가 끝난 것이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복이 모든 민족에게 주어져야 한다. 곧 구주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어 그들도 영생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가 바로 70 주일이 끝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즉 하늘성소의 성소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70 이레의 끝은 예수께서 하늘성소에서 성소봉사를 시작하신 때를 계시한 것이다.

다니엘서 9장의 70 이레 예언은 한 점의 오차도 없이 때가 찼을 때 성취되었다.

70 이레 곧 490일이 490년으로 해석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이 예언이야말로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새번역은 이런 해석을 할 수 없도록 번역하였는데, 이런 식으로 번역된 또 다른 성경이 있는지 모르겠다. 새번역의 단9:26을 적으면 이렇다.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d)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e)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 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될 것이다.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d. 또는 명령. e. 또는 메시야.)”

이 번역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때로부터 메시야가 오기까지 7이레가 지난다고 하였다. 1일을 1년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이 번역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에도 맞지 않고, 침례를 받은 때에도 맞지 않는다. 이것을 번역한 분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예루살렘 중건령을 고레스의 조서나, 다리오의 조서가 내린 때에 시작된다고 하여도 이런 번역은 그 예언이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번역 밖에 안 된다. 분명한 오역이다. 이렇게 번역한 다른 예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 공동번역 등 아무 번역도 이렇게 번역하지 않았다. 개역성경과 같은 문리(文理)로 번역하였다.

아무튼 70 이레를 2,300 주야에서 떼어내었는데, 그것이 1일 1년 원칙에 의하여 해석될 때에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2,300 주야도 1일 1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2,300 주야는 2,300년인 것이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 의하여 겔4:6이나 민14:34의 말씀을 예언적 1일을 역사적 연대 1년으로 해석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한 때 두 때 반 때 곧 3년 반이 1,260일이며, 그것은 1,260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아무런 모순이 없다. 이런 연대 예언들은 다 상징적인 표현이지 사건 자체를 실제적 표현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의 연대나, 이스라엘 70년 포로의 연대는 전혀 상징적인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 자체를 현실적으로 말씀하면서 그 연대를 예언한 것이기 때문에, 사건을 상징적으로 말하면서 연대를 예언한 것과 동일한 해석을 적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일곱 때도 마찬가지이다. 느부갓네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다. 실제적인 것이다. 결코 혼동해서 안 된다. 상징적 예언 연대 해석의 1일 1년 원칙은 아주 성경적이며 합당한 것이다.

 

2. 2,300 주야의 기산점(起算點)에 대하여

이미 1일 1년 원칙을 설명한 위의 글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것은 아닥사스다 7년,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린 때인 BC 457년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아닥사스다의 조서 내린 때를 기산점으로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조서 내용과 관련하여 생각하려고 한다.

재림교회의 해석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아닥사스다 7년의 조서는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조서가 아니고 이스라엘 귀환령뿐이라고 주장한다.

에스라 7장에 기록된 조서의 내용을 보면 이런 주장이 아주 타당한 것같이 보인다(스7:12-26).

그런데 우리가 왕들의 조서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주의해야 할 사항은 성경에는 왕의 조서 내용이 완전하게 다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경 기자에게 영감으로 기록하도록 한 부분만 기록한 것이다. 위에 기록한 아닥사스다의 조서는 그 조서 전문(全文)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아닥사스다의 조서만이 아니다. 고레스의 조서나 다리오의 조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먼저 고레스의 조서부터 살펴보자. 고레스의 조서는 대하 36장에도 있고 에스라 1장에도 있는데 같은 내용이지만 에스라는 좀 더 자세하고 역대하는 초만을 기록하였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대하36: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스1:2-4]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이 조서에는 예루살렘 성읍을 중건하라는 말이 없다. 우리가 읽어보는 대로 성전을 중건하라는 말과 남아 있는 백성이 우거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은금과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며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라는 말 뿐이다.

그러나 에스라서를 자세히 읽으면 고레스의 조서 내용이 1장에 기록된 내용보다 더 많은 말이 있는 것을 조금 발견할 수 있다.

[스3: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수운하게 하였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고레스의 조서에는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가져다 쓰라는 내용이 있었음을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 1장에 기록된 조서에는 이 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레스의 조서에 이 내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귀환한 사람들 홀로 전을 건축하도록 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스6:3-5]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전의 고는 육십 규빗으로, 광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전 금, 은 기명을 돌려 보내어 예루살렘 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안 각기 본처에 둘지니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1장에 기록되지 않은 조서 내용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새로 짓는 성전의 규모와 경비 조달 문제까지 밝혀놓았다.

이뿐 아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읍을 중건하라고 명령하도록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고레스의 조서에 예루살렘 성읍 중건 내용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당연히 그 내용을 조서에 포함 시켰을 것이다.

[사44:26-28]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27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는데, 고레스를 이 예언대로 이끌어 바벨론을 정복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성전 중건하라고 조서를 내리도록 감동하셨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아닥사스다의 조서에 대하여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미 말한 대로 에스라 7:12-26에 기록된 조서 내용에는 성전 재건에 대한 말이 없다. 에스라의 설명하는 말 중에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스7:27)라고 기록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미루어 생각하면 아닥사스다의 조서 내용 중에 성전에 관한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성전에 대한 말이 전혀 없다면 에스라가 감히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아닥사스다의 조서에 성전 재건에 대한 말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말씀이 에스라 8장에 기록되어 있다.

[스8:36]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관원과 강 서편 총독들에게 부치매 저희가 백성과 하나님의 전을 도왔느니라.

여기 있는 왕의 조서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이다. 이 조서를 강 서편 총독들이 읽고 그 총독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전을 도왔다고 기록하였다. 조서 내용에 하나님의 전을 도우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 짓는 것을 완강히 반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스4:1-16).

그런데 강 서편 총독들이 하나님의 전을 도왔다. 어떻게 도왔을까? 성전을 건축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이 성전 짓는 일에 절대로 가담하지 못하게 하였다(스4:1-3).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강 서편 총독들이 성전을 도왔다는 것은 귀환한 사람들이 성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른 이해이다. 왕의 조서를 보고 그렇게 하였으니 조서에 분명히 성전 재건을 도우라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과 성전을 도운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새번역이나 기타 현대 번역 성경들이 그렇게 번역하였다. 그것은 확실한 이해를 위하여 합당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들은 왕의 칙령을 왕의 대신들과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냈다. 명령을 받은 관리들은,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도왔다.](새번역)

[황제의 칙서를 받은 유프라테스 서부지방 지방장관들과 총독들은 백성을 도와 하느님의 성전 짓는 일을 거들었다.](공동번역)

[그런 다음 그들이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의 총독과 관리들에게 황제의 명령이 적힌 편지를 전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 적극 협조하였다.](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왕의 명령을 왕의 신하들과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그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 짓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쉬운 성경)

[그들은 또 왕이 대신들과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명령을 받은 관리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우리말 성경)

이런 사실에 의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에 내린 조서에 성전 재건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렌 화잇이 아닥사스다의 조서에 성전 중건령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옳은 것이다. 에스라 6:14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스6:14,15).

문제는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였는데 왜 아닥사스다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인 다리오 6년 아달월 3일에 전(殿) 필역을 했다고 기록하였는가 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다리오 6년 성전을 필역했을 때는 BC 515년이다. 아닥사스다의 조서는 BC 457년이다. 거의 60년 후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에스라 6:14에 하나님의 “명령”과 세 왕의 “조서”는 히브리어로 “타암”인데 같은 말이다. 둘 다 단수이다. 세 왕이 내린 조서이기 때문에 “조서들”이라고 해야 맞은데, 단수인 조서라고만 썼다. 이것은 그 조서들이 누구에 의하여 내렸든지 그 근원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다리오의 조서로 다리오 6년 아달월 3일에 성전을 필역하였고, 또 아닥사스다의 조서로 아닥사스다 왕 때 성전 재건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성경구절은 이상한 것이 되며, 성경 기록이 오류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라고 기록한 것이다.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서도 전을 건축하여 필역한 일이 있다는 말이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받들어 귀환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아닥사스다의 조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 재건한 것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전 재건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비록 다리오 6년에 준공한 사실을 말할 때도 아닥사스다의 조서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것은 아닥사스다의 조서에 의하여서도 성전을 재건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8:36에 왕의 조서를 따라 강 서편 총독들이 성전 짓는 일을 도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성전을 재건한 것은 이때의 일이고, 다리오 6년 아달월 3일에 필역한 것은 다리오의 조서를 따라 지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런데 다리오 때에 중건한 그 성전을 귀환한 사람들이 잘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퇴락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성전은 또 한 번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서 재건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의 기록에 의하면 아닥사스다 20년에 예루살렘 성이 퇴락하였다. 그렇다면 짐작하건데 그때도 성전이 퇴락했을 것이다. 아마 느헤미야가 성을 재건할 때 성전을 또 보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느헤미야 때에 레위 사람들이 다 자기 살길 찾아 가고 성전 봉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이런 추측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느13:10-13).

사실 유다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에도 성전 보수 작업은 여러 번 했다. 그렇거든 포로에서 귀환하여 새로 삶을 개척하는 그런 환경에서 성전 문제를 잘 돌보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리오 6년에 중건한 성전이 거의 6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귀환한 백성들이 잘 건사하지 않았으면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퇴락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에스라 8:36에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도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엘렌 화잇이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재건하였다고 말한 것은 성경과 전혀 모순 되지 않는다. 또 신계훈 목사와 김상래 목사가 성읍 중건과 종교와 정치의 자치권 회복까지 포함되었다고 말한 것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런 사실들에 의하여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린 아닥사스다 7년을 70 이레와 2,300 주야의 기산점으로 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다.

 

3. 하늘성소 봉사에 대하여

  하늘성소 봉사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성경적이며 합당한 것인가?

먼저 하늘에 성소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성경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히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 말씀한 성소는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다. 이 장막에 예수님 자신의 피로 성소에 들어가셨다. 성소에 들어가시는데, 단번에 속죄를 이루시고 들어가셨다. 속죄를 이루고 나면 성소봉사가 필요한 것인가?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성소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중보를 하신다. 중보는 한편만 위한 분이 아니다.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갈3:20). 예수님은 이미 이루신 속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중보하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일을 하신다. 이미 속죄를 다 이루신 것으로 구원사업이 끝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예수께서 중보하시는 이유는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고 하셨다.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서 중보 봉사를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중보의 성질이 어떤 것인가?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4-27). 곧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든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중보가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속죄를 다 이루셨을지라도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하다. 십자가 후 시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여 자기에게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성소에서 이들을 위하여 중보 봉사를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들이 어떻게 속죄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이지만 그 속죄한 사실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늘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중보 사업을 하시는 것이다. 폐일언하고 하늘에 성소가 있다고 성경이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모세에게 짓게 한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성경은 말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세상에 짓게 한 성소는 하늘성소의 모형이다. 성소의 구조와 기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성소봉사도 역시 하늘성소 봉사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섬기는 것은”이라고 한 것이다. 섬긴다는 말은 봉사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형들이며 그들의 봉사는 일들도 또한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하늘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것의 모형이다.

하늘에 성소가 있으며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니, 지상 성소를 통하여 그 봉사하는 절차도 보여주신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성소봉사는 매일의 봉사와 1년 1차씩 하는 봉사가 있다. 매일의 봉사는 번제단 봉사와 떡 상, 등대, 분향단의 봉사가 있다. 1년 1차씩만 하는 봉사는 속죄일에 대제사장 홀로 수행하는 봉사이다. 속죄일 봉사는 매일의 봉사의 종결이 된다. 속죄일 봉사가 끝나면 다음날부터 매일의 봉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일단 속죄일 봉사는 1년 내내 있었던 매일의 봉사를 결론짓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레16;16),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16:30). 속죄일에 속죄 행사로 이스라엘은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된다. 이 날에 정결하게 하는 일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1년 동안 매일의 봉사를 계속했어도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일이 확인되지 않으며 결국 정결하게 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속죄일 봉사 곧 1년 1차씩 하는 봉사를 성소정결 봉사라고 하는 것이다. 1년 단위로 볼 때 이 봉사는 1년 동안 하는 성소 봉사의 종결이 되는 것이다. 성소봉사를 종결하는 지성소 봉사는 1년을 결산하는 봉사이며 그 1년을 살피는 봉사이다. 그래서 그것은 심판과 신원의 봉사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1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빠짐없이 속죄를 경험했는지 살펴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이 됨과 동시에 그들이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인가. 이때 1년 동안 주어진 기간에 진정한 속죄를 경험하지 않은 백성은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그래서 조사심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사하여 형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정결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봉사이기 때문에 혹시 정결하게 되지 못한 사람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심판의 성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정결의 아름다움은 잊어버리고 끊어짐의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정결 봉사에 대한 부정적 측면만 보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일 뿐이다. 원래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그런데 다니엘 8:14은 2,300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미 살펴본 대로 2,300 주야는 2,300년이다. BC 457년부터 2,300년 후에 성소가 정결하여진다고 하였다. 그때가 AD 1844년이 된다. 이때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파괴되고도 일천 수 백 년이 지난 후이다. 그러므로 이 성소정결이 지상에 있는 성소정결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늘성소에서 행해지는 정결사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상성소의 속죄일 봉사가 심판의 성격이 있는 것처럼 하늘성소 봉사의 정결봉사도 심판의 성격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1년 동안 진정한 속죄의 경험을 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에게도 그것을 살펴서 정결을 확인하여 온 우주의 정결을 선언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조사심판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조사하여 형벌을 집행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게 적용하여 정결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여 모든 죄에서 정결하여졌다고 선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성소는 하늘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인데, 이 성소에서 매일의 봉사와 1년 1차씩하는 봉사가 있는 것은 하늘성소 봉사에서도 매일의 봉사가 표상하는 실상이 있을 것이며, 1년 1차씩 하는 봉사의 실상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지상 성소봉사가 하늘성소 봉사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순교한 때부터 예수께서 하늘성소 봉사를 시작하셔서 2,300 주야가 끝나는 1844년까지 성소적 봉사를 하시고 2,300 주야가 끝나면서 하늘성소의 지성소적 봉사를 시작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단8:14의 바른 이해가 확실한데 무엇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만일 이런 해석이 틀렸다고 하면 지상성소와 그 봉사가 하늘성소와 그 봉사의 모형이라고 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인가. 하늘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인 지상성소와 그 봉사가 매일의 봉사 곧 성소봉사와 1년 1차씩 하는 봉사 곧 지성소 봉사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원형인 하늘성소와 그 봉사에는 매일의 봉사에 해당하는 성소봉사의 원형적 봉사와 1년 1차씩 하는 봉사에 해당하는 지성소봉사의 원형적 봉사가 없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지상성소와 그 섬김(봉사)이 하늘성소와 그 섬김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것을 인정한다면 하늘성소 봉사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상성소 봉사가 매일의 봉사 부분과 1년 1차씩 하는 봉사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말이다.

지상성소는 1년을 주기(週期)로 하여 매일의 봉사를 매일 수행하며 그 매일의 봉사 수행의 결과를 속죄일 봉사로 종결하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하늘성소 봉사도 2,300 주야 끝에 속죄일 봉사 곧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여 그것이 끝나게 될 때 하늘성소 봉사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지상성소 봉사가 속죄일 봉사로 1년 주기로 하는 성소봉사가 일단락되고 이스라엘이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된 것처럼 예수께서 하늘지성소 봉사를 끝내는 날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1,12)고 선언하시므로 온 우주가 사단의 반역으로 시작된 죄와 그 영향에서 완전히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하늘지성소 봉사를 마치시는 날 이 일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4. 70 이레의 시작과 2,300 주야의 시작이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이제 70 이레가 2,300 주야의 일부인지 2,300 주야와 상관없는 독립적인 기간인지를 성경에서 상고해보자. 지금까지는 70 이래가 2,300 주야가 시작하는 때로부터 490년간이라고 단정하고 논의하였다. 이런 논의가 성경적으로 타당한 여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다니엘서 8장에는 여러 가지 이상이 한 꾸러미로 주어졌다. 그것은 수양과 숫염소와 숫염소에게서 작게 나와서 심히 커진 뿔이 영화로운 땅과 성소를 헐고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제사를 훼손하고 진리를 땅에 던지며 2,300 주야를 지내는 일이 그것이다.

이 이상들 중에 짐승들에 대한 이상은 천사가 해석해 주었으나 주야에 대한 것은 여러 날 후의 일이라고 말하고 해석해 주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지 못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났으며, 그것을 깨닫는 자가 없었다고 말한다(단8:27).

다니엘 8장에서 “이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1절 처음에 나온 “이상”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하존”과 “마르에”이다. 우리말로 “이상”이라고 번역된 말이 11 번 있는데, 그 중에 1절에 처음 나온 “이상”은 “라”이고 나머지 10 번 중에 일곱 번이 “하존”이고 세 번이 “마르에”이다.

하존과 마르에는 크게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지만 다니엘 8장과 같은 경우에 이 말은 상당히 구별된 상태로 쓰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서 하존은 이상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을 볼 수 있고, 마르에는 하존 중에 한 부분을 가리킬 때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8장에 나오는 짐승, 뿔, 주야 등의 이상 전체를 뜻할 때는 하존을 썼고, 그 중에서 해석되지 않는 부분 곧 주야에 대한 것을 가리킬 때는 마르에를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마르에는 16절 26절 앞에 나온 것과 27절에 쓰였다. 16절은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이 지시에 의하여 가브리엘은 짐승들에 대한 이상을 해석해 준다. 26절 앞에 있는 이상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여기서 보는 대로 마르에는 주야에 대한 것이다. 27절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깨닫는 사람이 없는 이상은 마르에이다. 바로 주야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이것은 해석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8장에 하존 중에 해석되지 않은 마르에는 주야에 대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 마르에가 9장에서 해석된다.

[단9:21-24]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22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에서 21절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라고 하였을 때 “이상”은 “하존”이다. 그런데 23절에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고 했을 때 “이상”은 “마르에”이다. 그러니까 8장의 하존 중에 본 가브리엘이 와서 8장에서 해석하지 않았던 마르에 곧 주야에 대한 것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70 이레를 “정하였나니(하타크)”라고 한다. 하타크는 “떼 내었다”는 뜻인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러니 어디서 떼어 내었겠는가? 이전 “하존” 중에 깨닫지 못한 마르에 곧 주야의 “마르에”에서 떼어낸 것이다. “마르에”라는 용어가 그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또 이 기간에서 떼어내지 않고는 이런 기간을 떼어낼 데도 없다. 그러므로 70 이레는 바로 8장의 2,300 주야에서 떼어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8장에서는 2,300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하였지만 그 2,300 주야의 시작이 언제인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소가 정결하여질 2,300 주야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9장에 와서 그 “마르에”를 해석하여 주면서 70 이레를 떼어내는데 그 시작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70 이레의 시작이 2,300 주야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과연 예언대로 예수님은 2,300 주야 끝이 되는 AD 1844년에 성소정결 봉사 곧 하늘성소의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2,300 주야에 대한 예언은 예수께서 하늘성소의 성소봉사와 지성소봉사가 시작할 때를 지적하여 예언한 것인데, 그것은 곧 십자가의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과 이어진 봉사인 것이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떼어낸 기간인 70 이레 기간에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그 70 이레의 마지막 한 주일의 중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므로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며 나머지 3년 반 동안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그것을 거절하여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인 AD 34년에 유대인을 위한 기간인 70 이레가 끝나고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하여 하늘성소의 성소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며, 그렇게 1810년이 지나고 2,300 주야가 끝나는 1844년에 예수께서는 구원 속죄 봉사의 종결을 위하여 하늘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2,300 주야는 예수께서 하늘성소의 성소봉사와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시는 역사적 연대를 가르쳐주는 계시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성경적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이런 분명한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해석함으로 예언된 역사의 종말의 때를 분명히 깨달아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도록 세상을 일깨우는 것이 성경적인가. 물을 필요도 없는 물음일 뿐이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신지도 160년이 지났다. 언제 그 모든 봉사가 끝날는지 우리는 모른다. 성경은 2,300 주야가 끝난 다음에는 예언된 연대가 없다고 말한다.

[계10:5,6]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여기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번역된 말은 “남은 때가 없으리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이다. 구역에는 그렇게 번역하였다. 예언된 연대가 더 이상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재림을 맞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대로 곧 오실 것이다. 이렇게 지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도 회개하여 속죄 봉사를 받을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런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것을 재림이 없을 것처럼 여겨서 마음대로 생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우리는 항상 재림이 금방 있을 것처럼 긴박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말세지 말인 때가 아닌가. 우리는 이런 긴박한 말세지 말에 살고 있다. 주 안에 거하는 삶으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주님 오실 때 영광중에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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