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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나에게 김명호 목사는 신신학자라고 말하더라고 전해줬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신신학이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도 신신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런데 어느새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신신학자로 불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 내가 신학자라고 스스로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다만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믿고 성경을 상고하는 신자일 뿐이다. 그런데 나를 신학자로 여겨주니 황감한 마음이다.

신신학이라는 말은 원래 재림교회의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사조와 관련되어 19세기 말에 사용된 용어이다. 이 용어는 19세기 마지막 20년 그러니까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자유주의적이며 또 복음주의적인 신학 운동을 지칭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사용된 신학용어이다. 1883년에 뭉거(Munges)라는 학자가 쓴 책, “The Freedom of Faith(신앙의 자유)”에서 이 말이 사용되었다. 그 책 제1장이 바로 The New Theology(신신학)이다.

이 신학의 배후에는 독일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가 있는 것 같다. 이분은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현대신학이라는 것은 곧 진보주의,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 철학에서, 칸트가 인간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결과 인간의 이성이 경험세계에 대해서만 확실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이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물자체의 영역은 단지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영역일 뿐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신학과 종교가 학문적인 토대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이 사변(철학, 형이상학)과 의지(윤리) 외에도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칸트의 이해를 극복한다. 그것이 [절대의존의 감정]인데 곧 무한하신 분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분석될 수 없거나 의지적으로 지향할 수 없어도 무한하신 분에 대한 근본적 체험을 느낄 수 있는 직관과 감정을 통해서 종교적 영역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사변과 의지보다 이 종교적 직관의 영역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이 현대 신학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는데, 이유는 철학과 윤리학과는 다른 종교의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해명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표현은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철저히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에 대한 사상이 성경 절대주의에서 일탈(逸脫)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 신신학의 요지는 인간 안에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 계속적인 창조, 성경의 축자영감의 부정과 미래의 형벌에 대한 물질적 관념에 대한 부정, 기독교 교육과 전도에 대한 강조, 현대과학의 결론의 수용 등이다.

말로만 보면 좋은 것이 많다. 인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라는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계속적인 창조라는 말은 창조 세계가 진화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들리고, 성경의 축자영감을 부정하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미래의 형벌이 물질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영적인 형벌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현대과학의 결론을 기독교가 수용한다면 성경과 충돌하는 사례가 많을 것인데 그것을 수용하면 창조 기사부터 충돌이 생길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신신학이 현대 신학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고, 결과로 과학적 합리주의나 자기감정 의존성이 신앙의 중심부에 자리 잡으면서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창세기 1-3장 또는 11장까지는 설화라고 주장하는 사상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닐까. 재림교회는 성경의 영감이 사상영감 또는 인격영감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축자영감 쪽이다. 신신학은 이것을 부정한다. 결과로 성경의 전적인 영감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것은 영감으로 볼 수 없다는 사상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것은 고등비평과 연합해서, 우리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엄청나게 파괴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에서 이런 결과를 명백히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신신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신학은 위에서 말한 신신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들은 소리로는 1950년대에 Questions on Doctrine(교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그 책의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줄여서 QOD라고 하는 이 책에서 편집자들이 예수님의 인성에 죄성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에 죄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신신학자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성이 있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은 재림교회가 초기부터 예수의 인성에 죄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믿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영감 받은 선지자인 엘렌 화잇이 그의 저서에서 400번이나 예수님의 인성이 죄의 인성(sinful nature) 또는 타락한 인성(fallen nature)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예언의 신을 믿지 않는 것이며 우리교회 정통 신조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재림교회 신신학자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복음주의 신학사상을 용납하고 있다고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 곧 예수의 인성에 죄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그들은 “마지막 세대(Final Generation)”라고 부르면서 재림교단의 재림신자들과 차별화하고 있다. 글쎄요? 이상하지 않는가?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의 인성에 죄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신신학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신신학인지 성경적인 신학인지는 성경에 물어봐야 할 것이다. 예언의 신의 증언보다 성경이 우선적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에 근거하여 예언의 신의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화잇 부인이 400번을 말했어도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400번 말한 것에 근거하여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엘렌 화잇 자신이 이 말들이 어떤 의미로 썼는지 설명해놓았다. “In taking upon Himself man's nature in its fallen condition, Christ did not in the least participate in its sin. He was subject to the infirmities and weaknesses by which man is encompassed,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Esaias the prophet, saying, Himself took our infirmities, and bare our sicknesses.’ He was touched with the feeling of our infirmities, and was in all points tempted like as we are. And yet He ‘knew no sin.’ He was the Lamb ‘without blemish and without spot.’ Could Satan in the least particular have tempted Christ to sin, he would have bruised the Saviour's head. As it was, he could only touch His heel. Had the head of Christ been touched, the hope of the human race would have perished. Divine wrath would have come upon Christ as it came upon Adam. ··· We should have no misgivings in regard to the perfect sinlessness of the human nature of Christ.”(The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31. <ST. 1898. 6.9>).

(타락한 상태의 인성을(man's nature in its fallen condition) 자신에게 취하셨으나 그리스도는 죄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연약함이나 취약함에 놓였으며,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러라.”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셨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렇지만 그분은 “죄를 모르셨다.” 그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셨다. 사단이 적어도 유별나게 그리스도를 죄 짓도록 시험했다면, 그는 구주의 머리를 상하고자 했을 것이다. 있었던 사실처럼(As it was) 그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단지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리스도의 머리를 건드렸더라면 인류의 희망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아담에게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임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완전히 죄 없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자세히 읽어보라. 예수님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그 자신이 취하셨는데(In taking upon Himself man's nature in its fallen condition), 그것은 연약하고 취약한(infirmities and weaknesses) 인성이다. 그러나 그 인성에는 완전히 죄성이 없었다(the perfect sinlessness of the human nature of Christ)라고 확고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의하여 화잇이 “죄 있는 인성(sinful nature), 타락한 인성(fallen nature)”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였는지 스스로 정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연약하여진 인간의 체질에 대한 말이지 결코 죄성에 대한 말로 쓴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더 분명하게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의 책 “죄, 예수, 그리고 구원” 제11장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인성”을 참고하기 바란다.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에 죄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들이 주장하는 그런 신신학을 하는 사람인가?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신학을 버리고 화잇 부인이 사용한 단어에 매여서 성경의 계시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화잇 부인이 그 사용한 단어를 어떤 뜻으로 썼는지 그의 글을 통하여 넉넉히 바르게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성경에 기록한 것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그것을 찾아내어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주장하기 때문에 신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나는 그런 신신학을 하는 신자인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기별은 신학자들만이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은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로 찾아낼 수 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에 의하여 성경을 겸손하게, 자기의 모든 고정관념과 선입관과 학문적 기득권을 버리고 말씀 앞에 겸손히 앉으면 하나님께서 깨닫기를 원하는 대로 말씀을 깨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려고 세상이 오신 것이다.(요16:13-15, 고전2:10-14)

그들이 그것을 신신학이라고 하든지, 그렇기 때문에 나를 신신학자라고 하든지, 또 다른 말로 부르든지 상관없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기별인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확인함으로 베레아 교인들의 신앙의 노선을 밟아가면서 진리를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예언의 신의 증언 중에도 오해하거나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기록된 진리를 스스로 혼란하게 하고 성경적으로 깨닫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비난이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는 분별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 성도들이 다 함께 소유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적이 아닌 주장을 성경적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겸손하게 성경의 기별로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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