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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일 안식일

일몰오후 636

 

기억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연구 범위: 벧전 2:9~10, 14:2, 벧전 4:1~7, 벧후 1:16~21, 벧후 3:3~14, 2:34~35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대쟁투의 주제는 풍부하게 다뤄졌다. 그는 아마도 인간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기가 얼마나 쉬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투쟁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벧전 5:8)는다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싸움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본다. 그는 교회 안에서도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본다. 그 가운데는 한때 신자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어떤 사상에 대해서도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이들이 있다. 베드로는 진리를 비웃는 자들에게 강하고 엄중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저지른 실패의 경험 때문에 믿음을 매우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는 군중과 함께 비웃고 부인하며 그들 안에 숨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예수의 제자라는 비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이 주님의 높은 부르심과 선택에 맞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신앙생활에 수많은 반대가 따른다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느끼기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의주의뿐 아니라 박해와 유혹도 이겨낸다.

행하기 :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로 결심한다.

 

A.

하나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데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여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의미가 있다.

종말의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아름다운 품성과 모본적인 생활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재림을 영광중에 맞도록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의 확실함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조류가 아닌 천국의 가치들을 가지고 살려면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요?

가치관, 생활관이 천국적이 되어야 한다.

 

B.

종말이나 재림 사상을 거부하는 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진화론이다.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 운행된다는 주장이다.

재림에 대한 관점은 우리의 삶과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주님의 재림을 맞을 수 있도록 생활하게 한다.

재림을 소망하는 백성으로서 우리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재림을 사모하고 주님의 의를 바라보며 그 의를 믿음으로 더욱 굳게 잡아야 한다.

 

결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날() 36

어둠에서 빛으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1. 벧전 2:9~10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대쟁투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벧전2:9,10]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어두움과 빛의 대결이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려나온 사람들은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포를 해야 한다. 이것이 어두움의 세력과의 대쟁투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19:6)이 되며 하나님의 성민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7:6, 14:2)함을 받았다는 구약의 말씀에서 유래한다. 이런 보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제시되었다. 베드로는 출애굽 기간의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시대에 있었던 교회를 유사하게 보았다.

베드로의 말은 최종 결과라기보다는 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이 세상에 드리워 놓은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찬양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미 완전하거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다(3:12 참고). 오히려 우리의 죄와 부족에 대한 자각은 예수님을 따르며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의 의가 필요함을 깨닫는 데 매우 필수적인 부분이다.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사탄이 그대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사탄에게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추천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나 우리가 현재 그리고 항상 드릴 수 있는 간구는 예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우리의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기 의뢰심을 버림으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의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시대의 소망, 317).

우리가 어두운 데서 부름을 받아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갔는지(벧전 2:9)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고전 1:30)신 그리스도께 얼마나 의지하는지 보면 된다.

 

<부가설명> 사단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이다. 거기는 사망과 음부가 있다. 사단이 사망의 존재이고 사단에게 속한 것은 전부 사망이다.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나오는 데는 투쟁이 있다. 사망이 처리되어야 하고 다시 생명이 부여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처리하셨다.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셨다고 가르쳐준다.(2:14) 예수께서 이루신 이런 봉사의 결과로 사망의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생명과 빛의 나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기 전에는 우리도 모두 어두움의 자녀들이고 사망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을 행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도덕적 선을 행하도록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그것은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하도록 가장 강하게 막는 죄가 된다. 도덕은 죄의 세상의 윤리일 뿐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 전에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우선순위이다. 이렇게 생명을 얻으면 그 생명작용이 도덕적 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 빛을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여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고 하셨다. 착한 행실을 하여서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빛이 되어 그 빛을 비추는 것이 착한 행실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이 생명 작용이다. 사단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 우리는 대쟁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바르게 깨닫자.

 

교훈: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둘째날() 37

동료 압박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1. 벧전 4:1~7을 읽어 보라. 생활방식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벧전4:1~7]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그리스도인은 주위의 눈을 의식하여 그들의 생활방식에 동의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생활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상태를 직고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그들 주변의 타인들로부터 받은 압력에 따라 살아왔다고 말한다(벧전 4:3).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신자들은 대중과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한 악성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벧전 4:4). 그러면 사탄은 옛 친구들을 동원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를 낙담시키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이러한 공격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다. ‘이방인들은 언젠가 유일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자신들의 잘못을 고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벧전 4:5).

그의 요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에 충실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압력에 굴복하는가? 이는 동료 압박이라고 알려진 문제로 씨름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특히 어려운 문제이다.

베드로의 권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그들의 견해와 요구, 기대에 맞추기보다는 우리와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며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벧전 4:8~9).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 목록에 넣어야 할 추가 의무 사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자 우리의 주변사람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는 어쩌면 베드로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제안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을 사랑과 친절로 대하기보다 이방인들을 기쁘게 하는데 더 마음을 기울이기 쉽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들의 관심사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악한 감화를 받기보다 반대로 그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교도에게 선한 감화를 주기보다 그들에게 악한 감화를 받았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일원으로 살기 때문에 보편화된 생활문화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혐오하고 왕따를 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적으로 철저할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당하는 대쟁투의 한 국면이다. 그들과 타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100%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전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99.99%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0.01%가 세상에 속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성도는 중립이 없다. 100% 성경적이 되면 이 세상에서 불편한 일이 많다. 그래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그 일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항상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신을 차리고 세상과 동화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

 

교훈: 우리는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동료 압박에 굴복하여 세상의 기대에 맞추어 살기보다 사랑과 친절로 주변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주어야 한다.

 

 

셋째날() 38

더 확실한 예언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벧후 1:19).

 

1. 벧후 1:16~21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예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벧후1:16~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예언은 어두운데 비치는 등불이고 표적보다 더 확실한 것이며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 많은 것을 목격하였다. 그 중에 산 위에서 변형되신 예수님과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확실성을 열거한다(벧후 1:18~19). 그 두 가지는 베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예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아마도 제자로서 그의 실패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얼마나 자주 자신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어떤 취급을 받을 것인지 예언하셨는가? 그럼에도 그분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일들이 발생했을 때에 얼마나 많은 경우에 베드로는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는가? 아마도 가장 고통스러운 실패의 순간은 예수님으로부터 그가 그분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일 것이다.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 일이 벌어졌을 때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해야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방법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으리라. 그는 신자들에게 세상에서 썩어질 것에 갇혀 있는 자들과는 달리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따름으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도록 주의를 상기시킨다(벧후 1:4). 신자들이 썩어질 것에서 진정으로 탈출했음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그는 기독교인 생활을 정의하는 품성의 특성들을 열거한다. 믿음, ,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벧후1:5~8). 각각의 특성은 다른 특성을 세워주고 마치 케이크 속의 성분들처럼 함께 완전한 결합체를 형성한다. 바울은 이런 특성들을 열매들이라고 하지 않고 열매라고 하였다(5:22~23).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가치들을 삶의 일부로 삼으면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한다(벧후 1:10). 우리는 베드로가 이미 믿음이 수립된 신자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절대로 특정 목록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로 가는 표를 보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그 시대의 행동과 승리하는 삶의 태도를 대조하고 신자들에게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에 그들의 힘을 쏟으라고 요구한다.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표현하는 말을 듣는다. 하나는 이적을 따르는 무리이고 하나는 예언을 따르는 무리이다. 열 두 제자들은 일단 이적을 따르는 무리에 속했다. 예수께서 그렇게 여러 번 십자가에 대한 예언을 했지만 그들은 그 말을 귀넘어들었다. 예수님의 권능에 눈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나 아미마데 요셉은 예언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살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숨은 제자였지만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께 다 성취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봤을 때 숨은 데서 나와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위한 일을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이 필요한 바로 그 때에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 예언을 확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런 자기의 경험을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인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예언에 유의 하고 예언을 잘 따르라고 강권하였다. 예언의 지도를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딤전1:18,19)

 

교훈: 우리의 생각보다 예수님의 예언이 더욱 확실하다. 우리는 약속을 믿고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넷째날() 39

조롱하는 자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1. 벧후 3:3~7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과거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벧후3:3~7]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 노아 홍수를 예로 들어 그 당시 사람들이 노아의 예언적 경고를 무시하다가 멸망하였다. 성경의 예언을 잘 깨달아서 역사적 사건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고 심판 때에 구원의 자리에 있도록 권고한다. 사단이 우리 속에 역사하여 노아 때 사람 같은 불신에 빠지게 하려고 노력하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빛과 어둠, 예수님의 제자들과 악한 선동자들 사이의 전쟁이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마귀는 먹잇감을 찾아 우는 사자처럼 포효하고(벧전 5:8) 그 뒤로 조롱하는 자들의 후렴이 메아리친다. 이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로 신자들의 믿음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한다(벧후 3:3~4). 베드로는 그들의 동기가 탐욕스런 생활 방식을 고수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한다(벧후 3:3, 18 참고). 그들은 만물이 항상 존재했던 방식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을 매우 불안하게 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다시오리라고 말씀하셨다(14:1~3). 그러나 그들은 끝내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벧후 3:4). 이는 에덴에서부터 비롯된 메아리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뱀을 통하여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고 말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음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음성으로 곳곳에서 메아리친다. 이런 거짓을 상쇄시키는 하나의 사실은 베드로가 그것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상을 조롱하는 소리를 우리가 들을 때마다 그들 스스로 또 다른 예언의 성취가 되고 있는 셈이다.

대홍수로 지구가 파괴되었다는 역사의 증언에도 조롱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선택에 상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물을 일으켜 지구를 홍수에 잠기게 하신 동일한 하나님이 큰 심판날에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불을 일으켜 그것을 사르리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원한다(벧후 3:5~7). 천연계가 항상 있던 그대로 계속 존재하리라는 그들의 생각은 그릇된 희망에 불과하다.

 

<부가설명> 저자의 위의 설명은 성경 예언과 세상 현실 상태에 대한 좋은 관찰이다. 세상은 성경의 예언을 우습게 여긴다.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정확무오 한 말씀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교회에서도 이것을 정확무오 한 말씀으로 믿지 않는 시대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바로 베드로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를 확인하는 사조이다. 참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성경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잘 알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구속 사업에 대한 예언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재림하신다. 진정으로 믿은 모든 사람들은 부활한다. 신천신지는 반드시 창조된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일는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사망이 된 우리는 아무도 역사만큼 오래 살지 못한다. 자기에게 허락된 수명만큼만 산다. 그리고 잠든다. 재림의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예언이 눈앞에 성취되는 감격을 누릴 것이다.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눈을 뜰 때 그들이 잃어버린 존재들임을 확인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때이다.

 

교훈: 세상이 처음에 있던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하며 재림 사상을 조롱하는 자들은 에덴에서 인류를 기만했던 사탄의 음성을 반사하는 메아리이다.

 

 

다섯째날() 310

그날을 재촉함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우리가 재림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은 하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구약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든지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재림이든지 성경에서 끝은 언제나 가깝다.

 

1. 벧후 3:8~14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에게 제시된 장기적인 소망은 무엇인가? (2:34~35, 44 참고)

[벧후3:8~14]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고대의 예언에 따르면 하나님이 악이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고 인내하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언 속에서 하나님은 죄와 불행을 끝내고 지구를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한 그분의 전략을 간추리신다.

만물의 끝을 보는 관점은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벧후3:12).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세계에 개입하신다는 개념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조롱하는 무리와 연합하기 쉬울 것이다. 반면 우리가 이것을 혐오스러운 타락과 우리 주변에서 횡행하는 인권의 남용을 없애기 위한 자비로운 하나님의 최종적인 개입으로 본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벧후 3:13)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다시 우리의 삶의 태도와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그의 우려를 표명한다. 그는 우리에게 힘써 점도 없고 흠도 없”(벧후 3:14)는 상태로 나타나라고 권면한다. 만약 그가 이 성경절로 말을 마쳤다면 우리는 그가 행위 종교를 선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동일한 신자들에게 보낸 말씀을 확증하면서 다음의 구절로 이런 오해의 소지를 제거하였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15).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표이다. 성경은 욥을 그렇게 묘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런 모습으로 아버지께 드리실 것이다(고전1:8, 1:22, 살전 3:13, 5:23). 정말 점이 없을 수 있는가? 희생 제물이 그랬고(12:5, 1:3 참고), 예수님이 그러셨다(9:14, 벧전 1:19).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께 교회를 그런 모습으로 드리신다(5:27).

 

<부가설명>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고 그때에 이 세상에 겪을 천재지변을 예언한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그러므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0~12,14)고 권고한다. 우리는 오늘이라 하는 매일을 사는 사람들이다.(3:13) 이것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오늘만 산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죽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다. 부활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각 개인에게는 언제나 내일에 해당된다. 얼마나 가까운가.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에게는 내일 재림하시는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지적하고 깨우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권고를 깨닫고 오늘 바른 믿음으로 살아서 내일 아침에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도록 하자.

 

교훈: 재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우리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날에 주 안에서 흠 없이 나타나기를 소망해야 한다.

 

 

여섯째날() 311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베드로는 조롱하는 자들이 이렇게 말하리라고 경고했다.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동일한 정서가 홍수 이전에도 있었다. “자연계에 특별한 변화가 없이 시간이 흘러가자 때때로 공포로 떨었던 자들이 안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듯이 자연계는 자연계를 만드신 하나님 위에 있으며, 자연 법칙은 매우 확고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것들을 변경시키실 수 없다고 추론하였다. 노아의 기별이 옳다면, 자연은 그 궤도에서 이탈한 것이 될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노아의 기별을 일종의 기만 곧 일대망상(一大妄想)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들은 경고를 받기 전과 똑같이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그들의 멸시를 나타냈다.그들은 노아가 말한 것에 조금이라도 참된 것이 있다면 세상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 즉 현명한 이들, 사려 깊은 이들, 위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부조와 선지자, 97). 오늘날에도 위인들이 비슷한 것을 말한다. ‘자연 법칙은 고정되어 있고 만물은 이전처럼 존재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진화론이 가르치는 것이다. ‘생명은 적어도 원리를 가지고 설명될 수 있는 자연 과정을 통해 발생했다. 그것은 자연 법칙의 작용을 통해 생긴 것이다. 과학은 언젠가 그것을 신의 도움 없이 완벽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나 위인들은 틀렸다. 바울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고전 3:19)이라고 기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아의 시대나 베드로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다르지 않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예언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언은 예수님이 초림하시는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러한 예언은 재림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제공합니까? 예언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재림의 약속과 소망을 알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문자대로 이루어졌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탄생하셨고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생애 하셨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승천하셨고 기록된 대로 성령은 바로 오순절 그날에 강림하셨다. 기록된 대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의 지도를 받아 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한다. 예언의 지도를 받지 않는 믿음은 파선한다.(딤전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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