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그날을 저주함 (질문과 답변과 부가설명)10/29/2016

by 관리자 posted Oct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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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그날을 저주함
 

10월 29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37분

 

기억절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연구 범위 : 욥 3:1~10, 요 11:11~14, 욥 6:1~3, 욥 7:1~11, 약 4:14, 욥 7:17~21, 시 8:4~6

 

욥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며, 둘째 그 장면들이 우주적인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욥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자신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재앙 뒤에 재앙이, 비극 뒤에 비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자신을 덮쳤다는 것이다. 동방에서 가장 큰 자로 일컬어졌던 이 사람은 재 위에 앉아 애곡하며 슬퍼하는 자로 전락했다.

욥을 연구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욥의 상황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가 경험했던 혼돈, 분노, 슬픔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것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욥이 겪은 일을 우리도 겪어서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중에 비극과 고통이 가져오는 당혹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그분이 보시기에 옳게 행하려고 노력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욥기에서 볼 수 있는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탐색한다.

➋ 느끼기 : 극적인 언어와 비유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욥의 마음에 공감한다.

➌ 행하기 :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경이롭게 표현된 인간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수용한다.

 

A.

❷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탄했던 욥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고통의 극한에 이를 때에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이다.

❸ 우리가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할지라도 여전히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❹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할 수 있습니까?

※ 십자가는 인간의 사망을 처리하고 부활로 영생을 드러낸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B.

❷ 그대는 무덤에서 쉬기를 바랐던 욥의 심정을 얼마나 이해합니까?

※ 충분이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일 것이다.

❸ 사람이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래도 살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신 까닭이다.

❹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대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인생은 죽음의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데 예수님이 그 병을 치료하시는 유일한 의원이며 그분에게 생명의 줄을 연결하면 마침내 행복한 생명을 얻는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결론 : 욥기에서 고통과 죽음은 밀접하게 엮여있습니다. 죽음의 관념이 욥의 애가라 할 수 있는 장들을 관통하며 흐릅니다. 우리는 그의 고통을 통해서 죽음뿐 아니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죽음과 죄를 정복하셨는지에 대해 배웁니다.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더욱 잘 공감할 수 있게 합니다.

 

 

첫째 날(일) 10월 23일 그날이 없었더라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 3:1).

 

그대가 욥이라고 가정해 보라. 그대가 가꾸고 이룬 모든 것들, 하나님이 그대에게 주신 모든 복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영문을 알 수 없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선악 간의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몇 년 전에 버스가 전복되어 수많은 어린이들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때 어느 무신론자가 이것이 의미도 목적도 방향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비극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안 통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었던 욥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대답, 어떤 설명이 있었는가? 욥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극심한 슬픔과 그것에 따라붙는 온갖 질문들뿐이었다.

 

1. 욥 3:1~10을 읽어 보라. 욥은 처음에 자신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과 어떤 식으로 관련이 있는가?

[욥3:1~10]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답: 욥이 태어난 것을 비관했다. 그가 태어나면서 고통의 날을 맞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상태에 있다.

 

물론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행 17:28, 계 4:11).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현대 과학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실이다. 사실 과학자들은 ‘생명’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 더욱 의견이 엇갈린다.

절망의 순간에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자살과 같은 불행한 경우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욥의 경우처럼 시간적으로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고대 그리스인은 죽음 외에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삶이 너무 불행할 수 있으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에 찾아오는 불가피한 괴로움은 모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부가설명>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간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이 죄이다. 곧 죄의 병이다. 죽음은 창조주와 관계없이 들이닥친 불행이다. 창조주께서는 사람을 창조할 때 죽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영생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들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창조가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결 줄을 끊으면 창조주가 굳이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생명 줄을 끊는 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다. 그것을 먹으면 생명이신 말씀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11:3) 아담의 후손은 이 줄이 끊어진 상태로 세상에 출생한다. 성경은 그것을 썩어질 씨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벧전1:23) 그래서 썩어져가는 구습이 나타나는 것이다(엡4:22) 욥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지만 그는 도덕적 신앙으로 경외하고 있었다. 도덕적 신앙이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과 신상필벌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께 이렇게 한다고 대들었고 그 본보기가 욥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욥도 그런 정신이 있었던 것을 욥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나중에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행이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도덕론적 인과응보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가?

하도 괴롭고 답답해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탄식하지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이런 탄식 자체도 할 수 없으니 이런 넋두리는 사실 합리적인 말이 아니다.

 

교훈 : 심한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욥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날(월) 10월 24일 무덤에서 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욥 3:17).

 

1. 욥 3:11~2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욥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애가를 어떻게 이어가는가? 그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욥3:11~26]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답: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것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죽으면 평안히 자면서 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애가는 인생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욥이 마주한 처절한 슬픔을 단지 상상할 뿐이다. 욥의 모든 소유가 파괴되었고 그는 건강마저 잃었다. 무엇보다 그는 모든 자녀를 잃었다. 자녀 하나를 잃은 고통도 상상하기 어려운데 열 명의 자녀 모두를 잃었다. 그가 죽기를 바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알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욥은 이 모든 것의 배후를 알지 못했다.

욥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주목하라.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 이후는 무엇이겠는가? 하늘에서의 행복한 삶인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누리는 기쁨인가? 천사들과 수금을 타는 즐거움인가? 여기에는 그런 종류의 신학이 없다. 대신 욥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 3:13).

 

2. 전 9:5과 요 11:11~14을 읽어 보라.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욥의 진술은 어떻게 일치하는가?

[전9: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요11:11~1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답: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죽은 것은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가르친다. 욥은 죽은 다음에는 평안히 자면서 쉬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에서 우리는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하여 아마도 가장 오래된 설명을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욥이 가장 바라는 것은 쉬는 것이었다. 갑자기 삶이 너무나 어렵고 버거우며 고통스러워졌다. 그래서 그는 무덤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죽음을 바라게 되었다. 재난이 닥치기 전에 그가 누리던 모든 기쁨을 잊어버릴 정도로 슬프고 마음이 아파서 그는 차라리 태어나기 전에 죽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가설명> 욥은 죽음 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죽음 후에 마치 의식이 있는 육체를 떠난 영혼이 활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나타나 여자에게 하나님이 금한 과실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 뱀, 곧 사단의 사상이다. 사단은 이 사상을 교회에 주입하는데 성공했다. 거의 모든 교단이 이것을 성경의 사상이라고 믿고 가르친다. 이것은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거짓말하는 자로 믿게 하는 사상이다. 사단은 정말로 대단히 성공했다. 성경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교회가 사단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과응보의 도덕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인줄 믿고 있다. 사단은 의의 천사 가면을 쓰고 교회 안에서 성경을 들고 활보하면 오류를 진리인양 퍼뜨리고 있고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욥은 이미 사후 문제를 바르게 알고 있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은 그것으로 인생의 완전한 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죽음은 잠자며 쉬는 것이 되었다. 이 잠의 쉼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부활의 아침이다. 그때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회복될 것이다. 악한 자들도 부활의 아침에 그들의 진정한 운명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의인들보다 1000년 후에 둘째 부활에 일어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존재 자체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후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알아야 한다. 사단은 이 속임수에 그의 모든 속임을 걸어놓고 있다.

 

교훈 : 욥은 슬픔의 기억과 이어지는 고난으로 인해 무덤에서 쉬기를 구했다. 이는 죽음 직후에 어떤 지적 사고, 감정, 활동도 없다는 성경의 개념과 동일하다.

 

 

셋째 날(화) 10월 25일 다른 사람의 고통

 

욥은 욥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첫째 애가를 마쳤다. 그다음 두 장에서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6장과 7장에서 욥은 다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욥은 다음의 성경절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가?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욥 6:2~3).

이 비유는 욥이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바다의 모든 모래를 저울의 한 쪽에 올려놓고, 자신의 슬픔과 재난을 저울의 다른 쪽에 올려놓는다면 자신의 고통이 더 무거울 것이라고 한다.

이는 욥의 고통이 그에게 얼마나 생생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은 포함하지 않은 그만의 고통이었다. 우리는 때로 ‘인간 고통의 총량’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듣곤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집단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고통을 겪는다. 욥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고통 그 이상은 아니었다. 우리는 좋은 의도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할 때 올 수 있는 자신의 고통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 아니라 언제나 오직 그들 자신의 고통이다.

우리는 인재(人災)이든지 아니든지 대규모 사망이 발생한 재난의 소식을 듣는다. 우리는 사상자의 수에 경악한다. 우리는 그 같은 거대한 고통을 상상하기 힘들다. 욥의 경우처럼 아담과 하와로부터 마지막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타락한 인류는 단지 자신의 고통만을 알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개인의 고통을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감시키도록 부름을 받았다(약 1:27, 마 25:34~40).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많은 고통이 존재할지라도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이상의 고통을 겪는 사람은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한 사람(예수님)은 예외이다. 제12과를 참고하라.)

 

<부가설명> 저자의 이 설명은 정말 정확한 말이다. 우리가 다른 이의 고통을 어떻게 알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욥14:22) 인간이 동정할 수 있지만 같은 고통을 느낌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경감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음식을 먹어 나의 배가 부르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잠을 자서 내가 잠을 잔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개인의 생리적인 것들은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상태들이다. 신체가 느끼는 고통이나 마음이 당하는 고통도 다를 것이 없다. 인류의 고통의 총량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인류는 각자가 자기 짐을 지고 산다. 어쩌면 인류 고통의 총량이 바로 개인의 고통의 총량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마음의 진정한 쉼이 있다.

 

교훈 :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고 무거웠을지라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의 수준은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양을 초과하지는 않는다.

 

 

넷째 날(수) 10월 26일 베틀의 북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다음의 대화를 상상해 보라. 두 사람이 모든 인류의 운명, 즉 죽음을 한탄하고 있다. 즉 그들이 사는 삶이 얼마나 멋있고, 어떤 것을 성취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죽으면 다 끝이다.

므두셀라가 친구에게 불평한다. “맞아, 우리는 뭐 팔, 구백 년밖에 못 살잖아. 그 다음은 끝이라구. 영원에 비하면 팔, 구백 년은 아무것도 아니지!”(창 5장 참고)

오늘날 우리는 수백 년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하기 힘들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아들 라멕을 낳았고, 그 후로 782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홍수 이전의 사람들도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탄식했을 것이다.

 

1. 욥 7:1~11을 읽어 보라. 욥의 불평은 무엇인가?(시 39:5, 11, 약 4:14 참고)

[욥7:1~1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시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답: 인생은 베틀의 북 같이 빨리 지나가면서 결국 죽어서 없어지는데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인생이 그림자 같고 안개 같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이 세상의 아담 후손의 실상이다. 하나님 앞에 없는 것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찾을 수 있는 쉼과 안도를 구하고 있는 욥을 본다. 그는 이제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탄식한다. 기본적으로 그가 하려는 말은 삶이 너무 힘들고 우리가 수고와 고통만 겪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종종 마주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우리는 삶이 너무 힘들고 비참하다고 하면서 그것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탄식한다.

어느 재림교인 여성이 절망감과 자살 충동으로 씨름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썼다. “최악의 사실은 내가 6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증명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재림신자였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때로 고통과 슬픔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때로 고통 중에는 지성과 이성도 간데없고 상처와 두려움만 있을 뿐 희망조차 볼 수 없다.

심지어 더 나은 것을 아는 욥도(욥 19:25 참고) 체념과 절망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욥 7:7). 죽음이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보였던 욥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인생이 너무나 짧다고 탄식하였다.

 

<부가설명> 인생은 모순이다. 욥은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인생이 짧다고 탄식하는 것은 고통을 풀어주어서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참 신기한 모순이 아닌가? 고통이 연속되면 짧은 인생을 감사해야 할 것인데 고통 중에도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른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이것을 솔로몬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고 표현했다. 사람은 살고 싶어 한다. 고통이 있어도 살고 싶어 한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정말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고통이고 고생이라고 하면서도 사는 것을 원한다. 그만큼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한 것이다. 창조 하실 때 영생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악과를 먹고 사망이 되어버린 상태에서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람의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구원의 기별이 심기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사망에 속해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길이 있다. 이것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영접하게 된다. 모순의 마음이 바로 소망의 마음이다.

 

교훈 :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의 또 다른 고충은 생명의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안타까움에 있다.

 

 

다섯째 날(목) 10월 27일 마 에노쉬?(사람이 무엇인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욥의 입장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러시는 것인가?’ ‘왜 그분은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가?’ 욥은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자기 주변에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뿐 그 이유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처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1. 욥 7:17~21을 읽어 보라. 욥이 여기서 표현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가? 그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 질문들이 너무도 공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욥7:17~21]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답: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진다고 불평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평안을 주시지 않는 이우가 무엇인가? 라고 불평한다.

 

어떤 학자들은 욥이 시 8:4~6을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 144:3~4도 참고하라.) 하지만 욥기는 시편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욥의 애가를 보고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 에노쉬(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자신을 상대하시는지 의아해했다. 하나님은 크시고 그의 세계는 광대하다. 그런 분이 왜 욥을 상대하시는 것인가? 왜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상관하시는 것인가?

 

<부가설명> 사람 사이에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현세에서는 사람 사이에 사람은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사랑의 대상, 친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망이 된 사람에게 어떻게 하든지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고 하신다. 사실 인생은 삶 자체가 피투성이다.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망이 된 인간의 썩어져가는 구습(엡4:22)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이것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 스스로 들어간 상태이다. 그래서 인생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창조하시고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신 것이 본심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살게 하기 위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뇌리에 깊게 간직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인생의 사망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로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셨다. 지금 피투성이라도 예수 안에서 행복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치료를 받아 영생할 수 있다. 얼마나 큰 사랑이고 은혜인가!

 

교훈 : 세상의 창조주께서 왜 작은 인생들을 상대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여섯째 날(금) 10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유사(有史) 이래 가장 찬란한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맞아 기독교 복음은 점점 설득력을 잃는 형이상학적 체계가 되었고, 개인의 삶을 세우기에 안전하지 못한 토대가 되었으며, 심리학적으로도 불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즉 무한하고 영원한 신은 갑자기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 살다가 불명예스럽게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됐다. 2천 년 전, 지구 어느 외딴 지역의 한 미개한 나라에서 살았던 한 짧은 인생은 이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비인격적인 우주 속의 수십억 개의 별들 중 한 행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밝혀졌다. 그같이 특별하지 않은 사건에 영원한 또는 압도적이고 우주적인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은 더 이상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강력한 신념이 되지 못한다. 우주 전체가 그 광대함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절박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마치 우주가 무슨 관심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신앙적 진술에 대해 공식적이고, 경험적이며, 과학적인 확증을 필요로 하는 현대 사회의 집요한 요구하에서 기독교의 정수는 말라버렸다.”—Richard Tarnas, Passion of the Western Mind (New York: Ballantine Books, 1991), p. 305. 이런 사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저자가 간과하는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인용문을 통해서 과학과 이성이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의 사랑을 아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주장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진리 즉 계시된 진리의 필요성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는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대의 대답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답과 어떻게 다를까요?

※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나 죄로 사망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을 알고 사람의 진정한 상태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대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➋ 왜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미련을 갖는다고 생각합니까?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➌ 십자가가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토의해 봅시다.

※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고 하는지를 가장 큰 웅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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