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신문에 실렸던 질문과 답 2012년 2.16-4.6 사이 (콜라겐, 나비넥타이, 짐승의 이름와 관하여)

by usjoy posted Nov 0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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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약을 먹는데 약 성분에 돼지 콜라겐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돼지고기는 교회에서 금하는 대표적인 음식인데, 이런 경우 전 돼지고기를 먹어서 계명을 어긴 게 되는 건가요?

질문자께서 약을 복용하고 있군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약을 먹는 것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에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식생활을 올바르게 하도록 지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식물과 연관해서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2;31, 레11:44,45,)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과 우리가 먹는 음식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요.
그런데 돼지고기와 기타 경에서 음식물로 합당하지 않다고 한 동물이나 새나 곤충이나 물고기나 파충류 등을 먹으면 몸의 정결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 아닌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정결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거주하시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는 음식물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포 하나하나가 다 정결하도록 몸을 유지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몸에 병이 들었을 때에는 문제가 다른 면이 아니겠습니까? 병이 든 몸은 정결한 몸이라고 할 수 없지요. 건강을 회복할 때 온전한 정결도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제약하는 사람들이 약에 콜라겐을 넣어야 약효가 나타난다면 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아마도 대단히 순화된 상태가 아닐는지요. 콜라겐은 돼지에게서 취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모든 동물의 뼈에 있는 단백질 성분이니까요. 돼지에서 추출한 것이라고 밝혀놓았다면 확실하겠지만요. 약은 또한 음식물은 아니지요. 그래서 음식물의 경우와 동일하게 생각해야 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약이면 아무것이라고 먹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네요.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이유로 화잇부인은 가능하면 매약을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말 특수한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고 권고했지요. 그러나 잠언에는 포도주가 목에 순하게 넘어가는 것을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잠23:31) 위의 두 말씀은 모순이지요. 그러나 경우가 전혀 다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합당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을 복용하시는 분이 양심에 강하게 거슬리거든 양심을 위하여 복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이런 설명을 듣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분별이 되어 괜찮다는 결정이 된다면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의 법도를 따라 먹고 마시고 생활하여서 내가 병들었노라는 상태에 이르지 않고 건강한 것입니다.(사33:24) 뉴스타트 생활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뉴스타트는 치료 방법이기 전에 일상생활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든 후에 치료방법으로 뉴스타트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일상생활 방법이고 그렇게 생활할 때 건강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기별입니다. 아무쪼록 질문자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 2. 16.(목) 1:2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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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증언 1권 252p에서 화잇 부인은 나비넥타이를 부착하는 것을 반대하신다고 하십니다. 
또 교회증언 4권 629p에선 나비넥타이는 마음을 혼란케 한다고 하신 걸 보았습니다. 
평소 나비넥타이를 즐겨 착용하는 저로선 충격적이었습니다. 
화인 부인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신건가요?

예언의 신의 권고를 따라 바른 믿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질문자의 충정을 대하는 것 같아서 참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예언의 신의 권고를 읽을 때에 우리는 올바르게 읽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읽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언의 신의 권고의 핵심은 그것을 읽고 깨닫는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으며 일상생활이 바로 믿음의 삶 자체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믿음을 공언하면서도 생활이 전혀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교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소매 가게를 하는 교인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날 장사할 상품들을 진열하며 준비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설탕에 사카린을 적당량을 섞어라, 그리고 오늘 팔 우유에 물도 섞어놓아라.” 이렇게 일일이 양을 불리기 위하여 순수하지 않은 상품을 만들어놓게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일합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시키는 대로 다 했니?”
“예, 아버지 다 했는데요. 또 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됐다. 오늘은 그만하면 됐다. 자, 이제 아침예배 드리자.”
질문하신 분은 이 장사꾼의 아침예배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들의 신앙의 진상이 이와 같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언의 신이신 성령께서는 이런 신앙생활을 참을 수 없지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2~14)
예전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도 이런 신앙상태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엘렌 화잇 선지를 통하여 남은 자손으로 마지막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재림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 생활이 참 신앙이 되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읽을 때에 이런 성령의 마음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이게 되면 본의는 잊어버리고 문자주의가 되어 의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과와 다를 것이 없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 있고, 의미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하신 말씀 중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는 말씀은 누구든지 의미로 적용하지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오른 눈만 범죄하는 일도 없겠지만, 그렇게 했다고 문자대로 그 눈을 빼버리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지도자도 없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다 의미로 적용하는 표현들입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들이 참 많지요. 똑 같이 화잇부인의 글에도 이런 표현들이 많은 것입니다. 핵심은 재림신자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올바른 신앙사상과 그 사상과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자가 지적한 그 페이지들을 잘 읽어보시면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권고입니다. 나비 타이나 주름치마나 이런 것들이 화잇부인이 살고 있던 그 시대에 사치와 낭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치와 낭비는 재림신자들의 의상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비타이를 하는 것이 사치도 아니고 낭비도 아니라면 그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고린도서에는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고전11:5,6) 그러나 수녀들 말고 오늘날 개신교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을 하지 않지요. 이것도 당시 풍습과 관련된 권고이거든요. 당시 고린도에서 여자가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은 창녀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주석가들은 이렇게 설명하지요. “본 절에서 바울의 권면은 당시 기존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범주 안에서 공예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기존 관습에서 여자가 머리를 짧게 깎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신 21:12).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 여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잇부인의 권고들, 즉 성령께서 화잇선지를 통하여 주신 권고들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인지, 의미를 적용해야 하는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여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화잇부인의 글들을 인용하여 빚어지는 많은 그릇된 관행들이 시정되지 않을까요? 
  논어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거든요. 참고가 될까하여 적어봅니다. 논어 11편인 선진(先進)편에 공자의 제자 자로가 선생님께 묻습니다. “배운 것은 즉시 실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즉시 실행한다는 말이냐.” 자로가 나간 후에 염유가 들어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배운 것은 즉시 실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그렇다. 듣는 즉시 행해야 한다.” 염유가 나간 후에, 공자와 함께 있어 두 사람의 묻는 것과 선생이 대답하는 것을 다 들은 공서화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자로가, 배운 것은 즉시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부형이 계신데 어찌 즉시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냐 라고 대답하시고, 염유가 같은 질문 하니 즉시 실행해야 한다고 대답하시니 저는 의심스러워서 감히 여쭈어봅니다.” 공자가 대답합니다. “염유는 소극적이고 물러가는 성격이니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한 말이고, 자로는 너무 적극적이기 때문에 조금 늦추어준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자의 이 문장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모순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똑 같습니다. 올바르게 생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자만 주장하면 이 경우 공자는 이상한 선생이 되고 맙니다. 
화잇부인을 통하여 주신 성령의 권고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권고를 들어야 하는 상대에 따라서 똑 같은 것을 모순되게 느끼도록 말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들을 모아놓으면 모순되고 충돌되지요. 많은 경우 이런 것을 모아서 화잇부인의 권고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권고의 의미를 바르게 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대답이 무척 길어졌지요.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 2. 16.(목) 12:3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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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창조하시니”(창 1:21)란 구절을 KJV 성경에서 찾아보면 “And God Created Great Whales”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개신교에 다니는 제 친구는 이 구절을 근거로 고래는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주장합니다. “고래”만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시점이 다른 생물들의 이름이 지어지기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고래라고 나와 있지 않은 영어성경도 많은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닌가요?

질문하신 분, 친구와 성경 내용으로 토론하였다니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렇게 해서 성경 지식을 넓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질문 내용은 질문한 분의 말대로 터무니없는 주장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생각할 것이 있거든요.
먼저 창세기는 모세가 기원전 1500년경에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이 지어준 한참 후이거든요. 그러니까 모세가 기록할 때 아담이 지어준 그 이름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KJV에 고래라고 번역을 했는데, 만약 번역한대로 하나님께서 “고래”를 만들었다고 기록했어도 그렇게 기록한 것은 창조 후 2500년 이상이 지난 후에 모세가 기록할 때 이미 아담에 의하여 지어진 그 이름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었나요. 이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KJV에 고래라고 번역한 그 말의 히브리말은 “탄닌”인데, 이 단어는 거대한 바다의 생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번역할 때에 악어, 또는 용, 괴물 등등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탄닌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어떤 한 종류의 생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큰 바다 생물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KJV 번역자들은 큰 고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성경 큰 물고기도 잘 번역한 것은 아니고,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큰 바다 짐승들 또는 큰 바다 생물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하고 확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확실하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경은 기록할 그 당시에 알고 있는 말로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창조 때의 사건을 기록할 때 모세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 이미 지어진 이름들을 사용해서 기록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영감을 주셔서 인도하시지요. 그럴지라도 기록하는 사람이 전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영감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요. 
이해하는 대답이 되었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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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모두 영생하며 자녀를 낳았을 텐데요. 사람이 죽지 않고 인구가 늘어가기만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는 만원을 이루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구의 수용력도 한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지구를 준비하셨을까요?

흥미 있는 질문이네요.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성경에 그 대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창세기 1:26~28을 읽어보지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지요. “충만”이 키워드입니다. 이 충만이 얼마나 되는 수인지 우리가 모르지만 땅에 사람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상태인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를 창조주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이 땅에 충만하게 되면 사람들은 생산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 충만한 수만큼 이 땅에서 영원히 행복과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4~36) 구원받은 사람들, 곧 의인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는 일도 없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도 없습니다. 즉 결혼하는 일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서 부활한 사람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땅에 충만한 수가 구원받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집에 거할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가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땅에 충만한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충만한 숫자가 영생하면서 천사와 동등한 상태로 하나님과 함께 영광중에 지내는 것이지요. 다른 천체를 또 창조해야할 필요가 없지요. 
창조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 그 수효를 계획하시고 수효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사40:26) 그리고 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계획을 하신 그 모든 것이 지구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창조하셨을 때 끝이 난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지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하는 것만 남은 것이지요. 재창조는 낡은 지구를 처음 창조했을 때처럼 새롭게 수리하는 것입니다. 이미 처음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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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얼마 전 친구를 따라 일반 개신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외경에 대해 언급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이후 성경 66권이 어떻게 선정됐는지 그 과정 및 배경을 알고 싶어 졌습니다. 더불어 외경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가르쳐주세요.

좋은 관심을 가졌네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아시겠지요. 정경은 “캐논”이라고 하는데요, 또는 정전(正典)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kanōn에서 유래한 말인데, 라틴어로 ‘카논’이 되었고, 뜻은 ‘표준·척도·모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6:16에서 사용하였는데 우리말로는 “규례”라고 번역되었네요. 여기서는 ‘인간행위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썼으며 초기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행동의 모범’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답니다.
구약성경이 39권으로 확정된 것은 AD 90년 유대의 작은 마을 얌니아 회의에서입니다. 얌니아는 랍비학교가 있는 마을이었지요. 당시까지도 구약성경 확정문제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구약성경에 에스더서나 아가서들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여호와라는 이름이 전혀 없거든요.(우리말로 번역된 아가서 8:6에 여호와의 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원어는 ‘샤르헤베트’인데 그냥 맹렬한 불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이것이 정경이 되느냐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얌니아에서 랍비 총회를 개최했답니다. 많은 토의를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구약 39권이라고 하는 것만이 정경이라고 결정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으로는 24권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 오경(토라) 둘째 선지서(네비임) 셋째가 성문서(케투빔)입니다. 오경은 모세 오경이니 우리성경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선지서(선지자, 네비임은 선지자들이라는 뜻)는 전기 선지서와 후기 선지서로 나누었는데, 전기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입니다. 사무엘 열왕기는 우리식 이름이고 원래는 왕국기 1, 왕국기 2입니다. 그래서 전기 선지서가 4권이 됩니다. 후기 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선지서입니다. 그래서 4권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로 나누고, 한권을 묶은 12소선지서를 열 둘로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문서는 시편, 욥기, 잠언, 아가, 룻기, 에스더,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이렇게 11권입니다. 그래서 모두 24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를 둘로 나누고, 역대기를 상하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39권이 되었지만 내용은 전혀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이 24권은 에스라에 의하여 편집되었다고 하는군요.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말씀들입니다. 외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 헬라어로 기록된 문서들입니다. 얌니아 총회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만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기록된 것도 내용이 훌륭하니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정경이 있는 곳에 부록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훗날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것도 함께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제롬)도 이것을 번역해서 함께 묶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것은 다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지 정경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39권만을 정경으로 강조하고 이 책에 없는 것을 교회가 교리로 주장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강조하게 되었을 때 천주교에서는 39권만으로는 그런 공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540년대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에서 읽어서 유익한 책을 정경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경이라고 하는 것을 천주교에서는 다 정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39권을 제1정경 외경을 제2정경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천주교의 주장을 슬그머니 인정하는 셈이지요. 그 외경들은 토비트, 유딧, 마카비상, 마카비하, 에스드라서, 지혜서, 집회서, 7권이고, 그 외에 에스더에 보태진 부분,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에스드라2서 등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외경을 총 14권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에스도서에 보탠 부분은 에스더서에 속해 있고,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는 아마 예레미야서에 붙여놓았고, 아사랴의 기도와 세 청년의 노래와 수산나, 벨과 뱀은 다니엘서 12장 후에 13장 14장 이렇게 붙혀놓았고, 므낫세의 기도는 열왕기하에 붙여놓은 것 같아요. 이것들은 다 70인역에서 그렇게 한 것 같네요. 70인역은 BC 2세기에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데 이때 원래 헬라어로 기록된 외경들을 함께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경논쟁이 가열된 것이지요. 그래서 얌니아에서 총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얌니아 총회를 산헤드린이 주장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실을 저는 잘 모릅니다. 90년경에도 산헤드린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는데요. 대답이 길어진 것 같네요.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구약 39권은 이때 얌니아에서 확정되었고, 신약 27권은 기원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기독교 총회에서 확정되었답니다. 
성경을 기록하는데 영감을 주시고 인도하신 성령께서 성경을 66권으로 모으는데도 간여했을 것을 확실하지요.(사34:16 참고) 그러니까 이 66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의 말씀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외에도 외경이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약외경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66권 정경과 천주교에서 제2정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외경이라 하고 그 외의 것들은 외경이기보다는 위경(僞經)이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외경이나 위경이나 그것들은 좋은 도덕적 신앙생활적 교훈을 위하여 기록한 것들의 모음집이고 위경들은 인간들의 상상과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 4. 6. 10:00am. 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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