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성령과 거룩한 삶(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2/11/17

by 김명호 posted Feb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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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일 안식일

일몰오후 67

 

연구범위 : 벧전 1:14~16, 6:3, 12:14, 고전 6:11, 딤전 1:8, 15:1~2

 

기억절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그분이 죄악을 혐오하신다는 사실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거룩함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예수님처럼 사랑 많고 순결한 사람이 되기 위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최우선 과제이다. 우리는 자신을 남보다 거룩하게 여기는 태도에 질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성화된 생애를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잊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거룩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거룩함이 없다면 사랑은 감상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엄격하고 가까이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이라는 이 두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의 바탕을 이룬다.

성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함이라는 목적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이름이 성령 곧 성결의 영”(1:4)이다. 성령의 이름은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며 죄인들을 그분의 거룩함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임을 상기시킨다.

 

핵심요지

깨닫기 : 거룩한 삶을 호소하는 성령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느끼기 : 거룩하고 경건한 생애를 살고자 소망한다.

행하기 :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대는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진다는 말에 얼마나 공감합니까?

100% 공감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분은 창조주시며 생명자체이시며 사랑이신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벧전 1:15)

도덕성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지만 존재와 생명에 있어서는 불가능gke.

우리의 삶이 성화되는 과정에서 율법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의 길이다. 생명 있는 자는 이 길을 걷게 되어 있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성품의 변화를 위해서 왜 경건의 습관이 필요합니까?

생명은 훈련을 통하여 강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를 수 있는 경건의 습관은 무엇일까요?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

 

결론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할 때 우리는 그 자체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신령한 조력자이신 성령이십니다.

 

 

첫째 날() 하나님의 거룩함

2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1. 벧전 1:14~1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이 왜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동기가 되는가? 그대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어떤 뜻인가?

[벧전1: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각이 동기가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생명과 존재가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생명자체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며 그분에게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채 그분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성경에서는 거룩함의 개념이 그 어떤 속성보다 그분의 이름과 더 자주 연관된다(89:18, 40:25, 51:5, 39:7, 4:8).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의 순결함과 도덕적 완전함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궁극의 선이시며 죄악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다른 모든 속성의 완성이다.

만약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데 완전하게 거룩하시지는 않다면 그분은 우리가 단지 두려워해야 할 권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신이시다.

그분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이고 그분의 자비는 거룩한 자비이며 그분의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고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가장 신적인 단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순수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후자는 그분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지만 전자는 그분을 무자비하고 혐오스러운 신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그분이 죄와 분리되어 있고 그분 자체가 선이시기에 전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신다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거룩함이란 도덕적인 특성뿐 아니라 관계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분리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내포한다.

6:3과 계 4:8에서 하나님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한분으로 묘사된다. 성경 기자들은 어떤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때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그 말을 반복하였다. 예수님도 중요한 진술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진실로 진실로”(5:24, 6:47 ) 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23:37) 또는 마르다야 마르다야”(10:41)처럼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오직 그분의 거룩함만이 잇달아 세 번 반복된다. 이는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진실로 거룩하다. 그분은 순결하며 선하시다.

 

<부가설명>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또 신자들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도덕성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일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내가 깨닫기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본질은 존재성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물과 구별이 되어 계신다. 생명자체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얻어야 생명이 있는 것들과 구별되는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이 창조하셨기 때문이 있고 생명 있는 피조물들은 그분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생활한다. 그러므로 존재성과 생명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시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은 구별되신다. 그래서 거룩하시다.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여호와이시고 생명자체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최고의 도덕성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받았으면 사랑이 생활이 된다. 또 당연히 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표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표가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도록 사랑하신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의 본질이다. 이 생명을 받았으면 이 죄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훈 : 거룩함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로서 그분이 순결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할 뿐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분임을 나타낸다.

 

 

둘째 날() 거룩함의 본질

2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령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64~65).

 

1. 1:4, 5:25~27, 12:14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한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그분의 선물이자 그분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매일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거룩함은 우리가 매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이다(5:16, 22, 25). 한마디로 거룩함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 속한다는 뜻이며 진실한 순종과 충절로 그분의 자녀가 되어 살아감을 의미한다. 거룩함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기본적인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봉사를 위해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으로 거룩함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내적 자질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결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 두 측면은 동반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신자들은 그들을 특별한 목적으로 구별해 놓은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로 말미암아 성도라고 불린다. 거룩하게 되었다고 윤리적으로 완전하고 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전 1:2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죄가 없거나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신자들은 거룩함을 좇으라고 훈계를 받는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12:14).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으로 각 신자를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우리의 성장과 성화는 평생의 과정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의 흠 없는 형상으로 더욱 변화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진전을 이뤄야 한다.

 

<부가설명>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말했지만 거룩함이라는 도덕성을 포함하지만 본질은 도덕성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문제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거룩한 존재가 된다.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면 바울의 고백이 실현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바울의 고백이 실현되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 작용으로 내가 생활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준님의 생명으로 거룩하심을 이루게 된다. 그 생명은 거듭날 때 얻게 되는 것이다.

 

교훈 : 거룩함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 날() 성화를 일으키는 힘

2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

 

1. 고전 6:11, 3:5, 13:12은 성화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중생으로 거룩하여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처리하셨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중생의 생명을 얻을 때 거룩하여지고 그 생명이 거룩한 삶을 이루게 한다.

 

성화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11:6, 살후 2:13, 벧전 1:2).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고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일생 동안 성화와 성장을 일으키며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신다. 우리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고후 3:18)아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2. 5:16~17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삶 속에서 쟁투가 벌어진다. 우리 모두가 겪는 갈등은 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7:20). 사도 바울은 이러한 쟁투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막바지에 이렇게 선언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2. 12:1~2을 읽어 보라. 우리가 죄와 맞서 겨루어야 할 믿음의 투쟁은 무엇인가?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맞서도록 요청받고 있는 투쟁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12:2)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의 승리나 실패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시면 죄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며, 우리를 쉽게 사로잡는 모든 것들은 제거된다(12:1).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죄와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패배로 끝나기 쉽다. 왜냐하면 실패를 바라봄으로 낙담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용기를 얻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을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믿음이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를 거절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듭난 삶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다.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주관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된다.(8:2) 성령의 음성을 성경 안에서 듣고 육신의 소욕을 버리면 거룩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영접하자마자 그는 예수님의 삶을 사는 힘을 얻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의 세상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며 어두움의 권세가 주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날마다 공격을 받는다. 공격받아 상처를 입든지 쓰러지든지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넘어져도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삶이 투쟁의 삶이요 마침내 승리하는 삶이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그렇게 된다. 그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교훈 : 우리는 평생 죄와 투쟁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넷째 날() 거룩함의 표준은 하나님의 율법

28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7:12).

 

하나님은 그분의 율법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해답은 거룩함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

 

1. 7:12과 딤전 1:8을 읽어 보라. 바울은 어떤 속성을 들어 율법을 설명하는가? 율법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하는가?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딤전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속성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함과 의로움을 반사한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이 세 속성은 정확히 하나님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표준이다. 율법이 정하는 표준은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이 폐지되지 않으며 모든 부분이 성취되어야 함을 확증하셨다(5:17~19).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신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우리가 걸어 다니면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신는 신발과 같다. 예수님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24:12)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율법이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사랑은 약화된다.

 

2. 13:10, 22:37~40을 읽어 보라. 사랑이 왜 율법의 완성인가?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사랑은 율법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기준과 표준은 하나님의 율법이지만 거룩함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실함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양심적이고 충정 어린 율법의 준수자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다.

물론 사랑 없이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신실하다. 사랑은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한다.

 

<부가설명> 이곳에서 율법은 아마도 십계명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교과 부가설명에 쓴 기억이 있는데, 성경에 계명이라는 말고 율법이라는 말은 아주 많다. 율법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 276회가 있고 계명이라는 말은 128회나 된다. 그러나 십계명이라는 말은 세 번 뿐이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없다. 구약성경에 세 번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 세 번 기록된 곳이 출애굽기 34:28과 신명기 4:1310:4절이다. 이 세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십계명이 아니라 열 말씀들이라고 되어 있다. 구절 전체를 읽어보면 이것을 언약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열 말씀들인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두 돌비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말씀이다. 모세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한 것을 신약성경은 생명의 도’(7:36~38)라고 분명히 기록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십계명은 생명의 길이다. ‘생명의 도라고 번역한 것을 개정성경에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번역했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라고 번역한 말이 로기곤이니까 말씀이라는 뜻이 맞다. ()자가 길 도자이도 하고 말씀도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길인 것은 확실하다. 이 말은 예수님의 생명, 참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이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과 저자는 율법이 거룩함의 표준이라고 강조했는데, 나는 예수님이 거룩함의 표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님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이다. 그 안에 있으면 당연히 생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걷게 하신다. 아멘.

 

교훈 :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신실함과 거룩함의 표준이다.

 

 

다섯째 날() 거룩함을 따름

29

 

너희는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

 

1. 15:1~2, 4:22~24, 딤후 2:21을 읽어 보라.

[15:1,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 하나님의 집에 거하려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을 재창조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누리는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유익한 도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품이 된다는 말이 진리임을 알고 있다. 덧붙이자면 성품은 운명이 된다.

우리가 하늘까지 가지고 갈 것은 성품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습관과 성품을 형성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성화가 아니다. 습관 형성은 성령이 우리를 거룩함 속에서 이끄시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습관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인내, 사랑, 신실함, 친절, 선함, 온유, 절제와 같은 성경적인 덕목과 관련하여 형성되는 습관은 더욱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고 그것을 마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는다(1:6).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온갖 일을 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는 시간을 잊기도 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없으리만큼 바쁘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너무 바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지식과 성공은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기술과 훌륭한 프로그램을 당연히 여기고 그리스도와 떨어진 채 성령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행동주의는 거룩함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분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7:22~23).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과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도록 이끌림을 받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지 자기주도적인 행위를 하고 있을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에는 힘도 능력도 평화도 지속되는 축복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가장 큰 필요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서 새 힘을 얻는 경건의 시간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역에 눈에 띄는 확실성과 설득력이 생길 것이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말씀이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여 그 생명이 생활에 작용해야 한다. 이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밖으로 신자들을 끌어내지 않으신다. 기록된 말씀 안에서 신자들이 생명으로 생활하도록 하신다. 그분이 생명의 성령이시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책임자이시다. 이렇게 자아를 성령께 맡기면 거룩함을 따르는 삶이 된다. 따르는 삶이기보다는 삶 자체가 거룩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상태이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재창조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생활을 하는 것이다. 도덕적 노력으로 선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이 하는 노력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옛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것과 새 사람이 선하게 사는 나타난 모습을 보고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별하신다. 내가 선한 일을 하는가? 그러면 그것이 옛 사람인체로 도덕적 수양으로 이루는 것인지, 새 사람이 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교훈 : 성령은 거룩한 성품에 이르는 습관 형성을 도우신다. 그러나 기도가 없는 자기주도적인 사역은 거룩함이 아니며 거기에는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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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교훈>, 95~102 “누룩과 같으니라를 읽어 보라.

 

우리의 본성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나 하나님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거룩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거룩함을 파악할 수나 있겠는가?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 인간이 겪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구별된 독특한 분으로 그분을 정의한다. 그러나 여기에 매우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우리가 그분과 언약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는 이런 의미도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히브리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8:8, 10).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는 거룩함과 언약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은 채 거룩해질 수 없으며 성령께서 친히 그분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할 때에만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12:10)하셨으니 얼마나 신령한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우리는 그 특권을 그분의 율법에 대해 진심 어린 순종으로 표현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생각할 때에 그대는 무엇을 또 생각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어떤 사실을 드러내셨습니까?

이미 부가설명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분의 존재성과 생명성이 피조물인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그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얻을 때 거룩한 본성이 되고 그것이 생활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한 승리가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묻는 자들에게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자아가 말씀에 굴복하면 성령께서 그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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