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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일 안식일

일몰오후 756

 

연구 범위 : 벧후 3:1~2, 21:15~17, 벧후 3:3~13, 90:4, 24:43~51, 벧후 3:14~18

 

기 억 절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벧후 3:11).

 

오랜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거나 심지어 잠재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심판에 대해서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차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잘못을 행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비록 구식이기는 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논리와 근거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장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가능성이 때로는 바른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행악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주할 심판을 거침없이 경고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러한 심판이 오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종말, 심판,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벧후 3:10)는 때에 대해 명료하게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을 앞두고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1)고 묻는다.

 

학습 목표

 

깨닫기 : 다가올 심판이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처럼 확실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느끼기 :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 거룩하고 경건하며 흠 없이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진한다.

 

재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예언의 역사적 성취를 확인시키며 그 같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인 것을 인식하게 하면 어떨까?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우리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이다.

그냥 재림을 믿는 사람과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재림을 당장 맞을 것처럼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한다.

우리는 재림과 심판을 앞두고 어떤 모습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성경이 가르쳐주는 인격을 이루어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어야 한다.

 

결론 : 베드로는 간절히 심판과 죄의 도말 그리고 새 땅을 기다리는 자들의 태도와, 창조와 홍수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부인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태도를 대조합니다. 그는 분명히 일어날 일들에 비추어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신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첫째 날() 611일 권위의 계통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스러운 교훈들의 유형에 관해 경고하였다. 자유를 약속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약속되어 있는 자유와는 정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는 이들에 대해 베드로는 주의를 환기시켰다.

불행히도 교회에 불어닥친 거짓 교훈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올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경고에 들어가기 앞서서 베드로가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1~2).

 

1.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이 자신의 서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21:15~17 참고)

[벧후3: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명한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벧후 3:1~2을 보면 베드로는 이전에 거룩한 선지자들이 했던 영감의 말씀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시 한 번 그들로 하여금 구약 성경에 주목하게 한다. 그는 그들에게 확실한 예언”(벧후 1:19)이 있음을 기억나게 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있기를 원했다. 신약 성경의 어떤 요소도 구약 성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사상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약 성경의 증언은 신약 성경과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들의 유효성을 확립시켜 준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다. 베드로는 구약 성경의 거룩한 선지자들에서부터 주 되신 구주의 사도들 중 하나인 자신에게까지 이르는 분명한 권위의 계통을 확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가 그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았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

 

<부가설명> 신약성경에서 성경 기자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설명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사상과 일치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도 종종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고 반문한다. 기록하였으되라는 말도 한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을 그렇게 인용하셨다. 시험의 광야에서도 마귀에 그렇게 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증거하고 설명할 때 그 모든 권위는 오직 성경이다. 성경 외에 복음을 설명하는 다른 권위는 없다. 재림교회는 예언의 신의 증언이 있다. 그런데 이 증언을 쓴 엘렌 화잇은 무엇이든지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취하지 말라고 직접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를 탐지하는 놀라운 탐지기이다. 모든 진리는 그것으로부터 와야 한다. 성경은 모든 교리와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의 견해일지라도 성경과 비교해보지 않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신적 권위이다.” (EGW to Brethren, Aug. 5. 1888) 베드로는 이 사실을 간단한 말로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확인시킨다. 예수님은 계시를 친히 주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이신데도 세상에 오셨을 때 기록한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렇거든 오늘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하며 굴복하며 기록된 말씀 성경말씀을 의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성경종교의 권위요 신앙의 터전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의 명령을 항상 명심하고 신앙의 길을 바르게 걸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구약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의 권위는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아 신약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에게 이어졌다.

 

 

둘째 날() 612일 조롱하는 자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벧후 3:2) 하려고 노력한 후에 구체적인 경고의 기별로 들어간다. 아마도 이러한 교훈의 심각한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기록에 권위가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1. 벧후 3:3~4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회의론자들은 어떤 논리를 전개할 것인가?

[벧후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조상들이 죽은 후로 지금까지 만물이 처음 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재림 같은 것은 없고 항상 이렇게 지낼 것이라고 할 것이다.

 

거짓 자유를 조장하는 자들과 재림에 대한 회의론을 펼치는 자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 집단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벧후 2:10) 행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도 자기의 정욕을 따라”(벧후 3:3) 행한다. (죄악에 대한 열정이 거짓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4)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곧 다시 오시리라는 그리스도인의 오랜 믿음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즉 베드로가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조롱자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었지만 세상은 이전에 있던 그대로 남아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꺼내들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불합리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심지어 경건한 에녹조차 의인과 악인이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고 이것이 그들의 종말인 것같이보여서 근심하였다(부조와 선지자, 85). 이러한 문제로 홍수 이전에 살았던 에녹조차 갈등했다면 수천 년 이후에 심지어 종말에 가까운 시기에 살고 있는 자들은 얼마나 더 갈등하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상을 선전한다. 하지만 그분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는 조롱하는 자들을 마주하고 있다.

 

<부가설명>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이중적인 사고(思考)가 필요한 것 같다. 역사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이야기하고 있다. 종말에 대한 것도 역사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4~7) 이 구절은 개인종말론의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역사만큼 살지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간의 모든 역사를 항상 현재로 보실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수명이 있는 동안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기록으로 과거 역사를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재림교인들이 마치 자기가 역사만큼 오래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으로 연구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각 사람은 오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생활로 주 안에 견고히 있어야 하고 성경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한다. 호흡이 끊어진 후에는 그에게 세월이 없다. 재림하시는 그 아침에 정말 깊은 잠 잘 자고 새롭게 아침을 맞을 뿐이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약속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림은 없으며 세상은 계속되리라는 조롱을 마주한 채 믿음과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한다.

 

 

셋째 날() 613일 천 년이 하루 같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1. 벧후 3:8~10에서 베드로는 조롱자들이 제기하는 논리에 어떻게 답하는가? 우리는 그의 어떤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가?

[벧후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하나님의 연대와 인간의 연대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오래 참으시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도록 기다리시는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베드로는 불변하는 세계의 속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반응한다. 그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이 창조 이후로부터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베드로가 권위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돌아가고 있음을 주목하라.) 세상에 큰 죄악의 시대가 있었고 하나님은 그때에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셨다(벧후 3:6). 진실로 홍수는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 영향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다(벧후 3:10).

베드로는 또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했던 시 90:4을 생각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간 개념과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판단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지체됨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인내하시기 때문에 은혜의 시간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벧후 3:9).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은혜의 시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내심을 빌미로 예수님께 대한 결심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주의 날이 밤의 도둑처럼 예기치 않은 때에 이를 것이다.

밤에 오는 도둑은 들키지 않고 살짝 다녀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처럼 이를 때에 모든 사람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의 말처럼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벧후 3:10)질 것이다. 베드로의 기별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했던 바울의 기별과 같다.

 

<부가설명> 재림교인들이 종말에 대하여 성경을 연구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때까지 생존한다면 큰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수명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다.(90:10)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에 비하면 그것이 얼마나 긴 것인가? 겨우 오래 살아야 100시쯤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역사의 종말에 그 현장이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호들갑을 떤다. 재림의 징조가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든지 천연계에 나타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재림의 징조가 눈에 보이든지 태평세월이 흘러가든지 각 신자는 오늘 예수 재림을 맞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만 주어져 있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주님 뜻대로 살면 그것이 재림을 맞을 준비상태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훈 : 인간의 관점에서 주의 날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전혀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넷째 날() 614일 그래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어느 청년이 그의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재림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이 꽤 멋진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수님과 그분의 재림에 대한 그의 짧은 설교가 끝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것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니?”

 

1. 벧후 3:11~13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그래서 그것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24:43~51 참고)

[벧후3:11~1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24:43~51]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심판 때에 잘했다는 판결을 받도록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이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드러낸다. 그 교리는 재림교 신앙의 근본 바탕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과 그것이 약속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마 24:43~51의 비유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될 위험성은 없는가? 우리는 그 비유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런 구체적인 종류의 악을 행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유는 우리가 우리의 표준 특히 다른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표준을 낮추기 쉽고 재림 신앙의 열정은 줄어드는 반면 세상과 더 친숙해지기 쉽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도표와 시간 계산을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큰 위험에 직면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정하는 자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생각 속에서 재림의 약속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오래 기다릴수록 재림은 더욱 가까워진다. 반면 우리가 오래 기다릴수록 우리는 그분의 재림이 우리의 매일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처럼 멀게 생각하기 쉽다. 베드로의 말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리가 심판을 맞게 될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벧후 3:11).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지 그분의 재림은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 시기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24:50)이다. 이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1:7)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2300주야 해석으로 빚어진 때에 대한 기대가 재림교회 안에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자주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한다. 우리가 할 것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나타내주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예언해 주신 연대에 대한 것은 나타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재림하실 시간에 대한 것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오시든지 그분의 재림을 영광중에 맞을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우리 개인은 매일이 종말 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밤에 자다가 호흡이 끊어지는 일도 있지 않는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를 매일 생각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 길을 살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만큼 사는 개인은 아무도 없다.

 

교훈 : 막연한 재림의 소망은 현실의 삶에 아무 영향을 못 미친다. 우리는 재림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다섯째 날() 615일 마지막 호소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베드로는 처음부터 서신에 여러 번 등장했던 하나의 주제로 서신을 마친다. 즉 거룩한 삶을 살고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벧후 3:17)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1. 벧후 3:14~18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벧후3:14~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호소하며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도록 경고한다. 바울의 글을 읽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며 삶을 정욕에 맡기려는 경향을 경고한 것 같다. 바울의 글을 잘못 읽은 것이다. 자기 정욕을 따라 읽은 것이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벧후 3:15)의 글에 대한 호소로 서신을 마치고 있다니 매우 흥미롭다. 바울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야 하며 시간을 거룩한 삶의 향상을 위해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썼다(2:4, 12:18, 2:12 참고).

베드로가 바울의 글을 언급하는 방식은 바울의 기록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높게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오늘날 신약 성경에 있는 바울의 기록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베드로의 언급은 바울의 서신이 중요하게 간주되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바울의 글이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오해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리스어 그라파는 문자적으로 글들이라는 뜻이지만 이 문맥 속에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처럼 거룩한 글들을 의미한다. 이는 바울의 글에 구약 성경과 같은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매우 초기의 증거이다.

자유를 약속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이전의 경고를 고려해 보면 사람들이 바울의 글을 이용해서 자유와 은혜를 악한 행위에 대한 핑계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3:21~22),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죄를 지을 면허를 준적은 없다(6:1~14 참고).

바울 스스로도 믿음으로 얻는 의의 교훈에 관하여 이런 종류의 오류를 다루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바울의 글을 왜곡하는 자들은 스스로 멸망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벧후 3:16).

 

<부가설명>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55:8,9) 그런데 인간의 학문과 지식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되겠는가?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40:8)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앞세우면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47:10)고 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에는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 오직 성령의 지도를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구하여야 한다.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진리를 왜곡한다.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예수 재림은 몇 년도에 있다는 주장이나 다 무법한 자의 미혹하는 주장들이다. 말씀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의 전체의 사상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권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고 해서 은혜를 핑계로 죄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곡해하는 자는 스스로를 멸망시킨다.

 

 

여섯째 날() 6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재림이 너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을 아시고 몇 가지의 비유를 드셔서 우리가 이런 때에 깨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에 대해 경고하셨다. 24:45~51에 나오는 두 종의 비유를 보라. 그들은 둘 다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귀환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한 명은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준비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주인이 지체하고 있으니 악한 일을 저지를 기회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12:37). 주의 오심을 바라는 자들은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게 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이것은 주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큰 죄에서 그들을 일깨워 준다.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있다”(시대의 소망, 63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개인 종말과 역사적 종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개인적으로 허락한 날들을 매일 재림을 맞을 자세로 살아야 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문화나 전통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장하는 신념과 가르침 또는 행습은 무엇입니까?

재림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월요일 교과에 죄악에 대한 열정이 거짓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것이 우연이 아닐까요? 둘 사이에는 어떤 다양한 연관성이 있습니까?

그것은 다 이기심을 따르는 같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간과 움직임의 속도에 따라 시간은 달라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한날을 주님 뜻대로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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