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복음의 통일성(질문, 대답, 부가설명)07/15/17

by 김명호 posted Jul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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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일 안식일

일몰오후 753

 

연구 범위 : 2:1~14, 고전 1:10~13, 17:1~21, 8:31~36, 3:11

기 억 절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2).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은 분리와 불화가 교회를 해하기 위해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도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분리주의를 전염병처럼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진리를 버리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해야 할까? 종교개혁의 아버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보름스 의회에 회부되었을 때, 연합이라는 미명 아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신념을 철회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라.

만일 개혁자가 단 한 가지 점에서라도 타협하였더라면 사탄과 그의 부하들은 승리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교회를 해방하는 방편이 되었고 새롭고 더욱 좋은 하나의 기원(紀元)을 이루어 놓았다”(각 시대의 대쟁투, 166).

2:1~14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연합을 깨려는 일부 신자들의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사도 바울을 본다. 연합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연합을 얻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통일성 가운데서도 다양성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복음은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처럼 서로 다른 신자들이 연합할 수 있는 진정한 기초를 이해한다.

느끼기 : 복음의 빛 속에서 할례를 둘러싼 갈등과 염려의 수준을 인식한다.

행하기 : 믿음과 은혜의 기본 교리에 굳게 서기로 결심한다.

 

바울이 사도들 사이의 연합을 위해서 기울인 노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을 올바르게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구원에 인간의 노력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사상과 구원은 오직 예수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차이.

베드로와 바나바의 외식이 교회의 연합에 해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 원칙을 복음 아닌 것과 혼동하게 할 때 닥치는 위험이다. 신자들의 신분이 차별화된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의 이중적 태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바꾸어야 합니까?

복음의 원칙을 경우에 따라 무시하는 것이다. 진리에 굴복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연합을 위해 이번 교과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 원칙은 확고하게 전달 방법은 대상을 따라 다양하게.

 

결론 : 믿음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눈을 멀게 했던 유대인 전통을 따름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의미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첫째 날() 연합의 중요성

79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2:9).

 

1. 고전 1:10~13을 읽어 보라. 바울은 교회 내의 연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

[고전1:10~1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 대단히 중시했다. 예수께서 분열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느냐고 말한다. 한 이름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분열할 수 없다는 것을 서약한 것과 같다는 암시를 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반박한 후에 그에 대한 다른 비난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복음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의 가르침과 조화롭지 않다고 주장하였다(2:1~2). 그들의 말대로라면 바울은 일종의 배교자였다. 이런 비판에 대하여 바울은 그가 회심한 이후 적어도 14년 뒤에 이루어진 그의 예루살렘 방문을 회상한다. 고대의 여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바울이 육로를 통해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갔다면, 적어도 3주 동안 온갖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480를 여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여행을 감내했던 것은 사도들의 권고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권고 때문이었다.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사도들 앞에 설명했었다.

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바울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도들로부터 재검증을 받을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이미 14년 동안 전파해 온 복음이었다. 다른 사도들의 허가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지지와 격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의 기별에 대한 비난은 바울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사도들의 연합에 대한 공격이자, 교회에 대한 공격이었다. 사도들의 연합을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바울의 이방 선교와 예루살렘의 모교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방인 기독교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사이에 교류가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양분되었을 것이고, 이방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바울이 기울여 왔고 앞으로 기울이게 될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2), p. 111.

 

<부가설명>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분열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진행되면서 교회는 분열되었다. 이 많은 교파들 중에 오직 하나만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일 것이다. 다른 것은 가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은 분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들은 적그리스도라고 한다. 적그리스도는 한 개체가 아니다. 성경적 진리를 그대로 받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모두 적그리스도이다.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바르게 신앙하는 교회 바른 진리교리를 가진 교회만이 진짜 그리스도의 몸이다. 역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교회도 역사적 진행과 함께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까지 역사의 현장에 있을 것이다. 예언을 연구해서 교회가 그 역사적 시점에 있을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적 연대를 계시한 것이다. 그 연대가 이르렀을 때에는 그 연대에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성경의 진리를 따라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예언된 그 역사적 시점에서 깨달아 증거할 진리를 현대진리라고 한다. 2300주야가 지난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교회가 진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교회는 진리를 분열시키지 않고 바른 진리를 따라 신앙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바울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는 비난은 사도들과 교회들의 연합을 저해하는 행위였으나, 바울은 오히려 연합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둘째 날() 할례와 거짓 형제들

710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15:1).

 

1. 바울과 유대인 신자 사이에서 할례가 논쟁의 핵심으로 부상한 이유는 무엇인가?(17:1~22, 2:3~5, 5:2, 6, 15:1, 5 참고). 일부 신자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17:1~22] (아브라함과 할례로 언약의 표를 삼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성경을 읽어보기 바란다.)

[2:3~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5:2,6]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5:1,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표징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표였다. 물론 할례는 아브라함의 남자 후손들에게 해당되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로 초청하신다. 할례는 사라의 여종에게서 자녀를 낳음으로 하나님을 도와 약속을 성취시키려던 아브라함의 시도 이후에 주어졌다(17).

할례는 언약의 의미에 적절한 표였다. 할례는 인간이 세운 최선의 계획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상기시켰다. 외적 할례는 내적 할례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했다(10:16, 30:6, 4:4, 2:29). 할례는 우리 자아에 대한 확신을 벗겨 내고 대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에 할례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우월성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150년 전에 어떤 과격한 애국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모든 유대인뿐 아니라, 그들의 사법적 권한 아래 있는 주변 민족에게까지 할례를 강요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할례를 구원받기 위한 일종의 통행증으로 여겼다. 이런 의식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고대 경구에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할례 자체를 반대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15:1)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순종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였다.

 

<부가설명> 바울이 단호히 투쟁한 것은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된다. 할례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단호히 반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증명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표였기 때문에 할례를 거절할 수 없는 조건으로 여겼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17:14)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할례를 말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할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들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집에 거주하는 모든 남자들은 다 하례를 받아야 했다. 돈으로 사 온 종이든지 그 집에서 난 종이든지 아브라함의 집에 거주하는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집에 거하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사실에 의하여 지금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3:29)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듯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계명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체질이 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킬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고 하셨다.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받은 증명이다. 오해하지도 말고 착각하지도 말고 바른 길로 신앙하자.

 

교훈 : 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셋째 날()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

711

 

1. 2:1~10을 읽어 보라. 바울은 거짓 형제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2:4)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8:31~36, 6:6~7, 8:2~3, 3:23~25, 4:7~8, 2:14~15). 우리는 이런 자유를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가?

[2:1~10]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8:31~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2,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4:7,8]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자유란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는 신약의 다른 저자보다 자유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고,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여러 차례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이다.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그리고 죄악의 욕망과 성향의 얽매임, 율법의 정죄 그리고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포괄한다(6, 8:1~2, 고전 15:55).

 

2. 사도들은 할례자들을 위해서 베드로에게 복음이 위탁된 것처럼 무할례자들을 위해서는 바울에게 복음이 위탁된 것을 보았다(2:7). 이는 교회 내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본질에 대하여 어떤 암시를 주는가?

[2: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대답은 아래 설명에 있다. 여기 옮겼다. “동일한 원리도 상이한 사회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는 달리 제시되어야 하며 다른 강도를 갖게 된다는 매우 중요한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이는 정확히 기독교 연합의 기초가 되는 하나 됨이며,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이다.”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바울을 불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음을 인정하였다. 두 경우 복음은 동일하였지만,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은 그 대상에 따라 달랐다. 이 성경절에는 동일한 원리도 상이한 사회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는 달리 제시되어야 하며 다른 강도를 갖게 된다는 매우 중요한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이는 정확히 기독교 연합의 기초가 되는 하나 됨이며,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이다.” -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Inc., 1993), p. 106.

 

<부가설명> 자유라는 말은 참 사람을 혼란하게 한다. 먼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첫째로 존재문제를 물어봐야 한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어떤 사람도 자기 자유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없다. 태어나는 일이 전혀 태어난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자유가 없다. 존재와 생명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확실히 그렇다. 존재한 다음에 자유에 대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 둘째 문제이다. 일단 존재는 자기 자유의지로 된 것이 아닌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할 진실이다. 태어나서 존재한 다음에는 자기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생활하는가? 정말 그런가? 결코 아니다.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 국가와 부모와 교사와 친구와 이웃과 환경이 있다. 국가를 자기가 선택할 수 없다. 부모도 자기가 선택할 수 없고 일단 교사도 그렇다. 결국 사람은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범주 안에서 처신하게 된다. 지극히 제한된 선택과 소위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학과 철학은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절대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말하여 사람을 기만하여 온 것이 아닌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사망에 대하여 자유하고 예수 없는 사람은 생명에 대하여 자유하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자유하고 예수 없는 사람은 의에 대하여 자유하다. 이 말은 사망이 되어 존재와 생명을 영원히 상실한다는 말이다. 진정한 생명이 있는 자들만이 삶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참 생명을 가졌는가?

 

교훈 :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로부터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성이 교회의 통일성을 해하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넷째 날() 안디옥에서의 대립(2:11~13)

712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2:1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문을 받은 뒤 얼마 후 베드로는 바울의 선교 전초기지이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위치한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이방인 신자들과 식사하였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신자들이 도착하자 그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1. 베드로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2:11~13과 행 10:28을 비교해 보라.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문화와 전통이 뿌리 깊게 배어 있는가?

[2: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이방인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교훈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사회의 문화에 깊이 젖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유대인 행세를 한 것이다. 그렇게 문화의 뿌리는 인간 의식 깊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와 유대인 신자들이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오류를 범한다. 만약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의 음식법을 포기했다면, 분명 교회 내 심각한 논란이 일어나서 그 사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문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며 나눈 친교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보았고, 가능한 한 이방인과의 사회적 접촉을 회피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런 문제로 갈등했던 베드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상을 통해 실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 장교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10:28)셨다고 증거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베드로는 동족을 의식한 나머지 이전 관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그리스어로 휘포크리시스(외식, 위선)’라고 불렀다(2:13).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말했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 생활환경, 성장환경, 그 국가와 민족이 가진 모든 풍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것이 비록 도덕적으로 좋지 않아도 그 환경에 산는 사람들에게는 의식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무의식적 의식이라고 표현한다. 자동차가 우측통행하는 나라에서 살던 사람이 자동차가 좌측통행하는 나라에 가면 한참 동안 교통에 혼란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운전하다가 충돌사고를 당한다. 그만큼 그 상회의 문화와 풍습은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예외 없이 그렇다. 베드로가 그런 풍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지역에서 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인이 오니 아무렇지도 않게 유대인의 풍습을 나타내었다. 자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생활에서 종종 겪는다. 우리는 진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 상태에서 풍습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고넬뇨 집에서 경험했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 사실을 잘 설파했던 베드로였지만 안디옥에서 뿌리 깊은 풍속의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바울을 예의 바르게 이 문제를 지적해서 신자 전제가 유익을 얻도록 했다. 주의 사업의 유익인지, 자기 개인을 드러내려는 것인지 이런 경우 정직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교훈 :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이방인 신자와 교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신자들의 눈을 의식해 외식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다섯째 날() 바울의 염려(2:14)

713

 

안디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울과 베드로, 교회의 두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양상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그의 행위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했다.

 

1. 바울이 베드로와 공개적으로 대립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2:11~14)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신자가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때에 바울의 용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방문객들과 식사하기로 한 결정에 있지 않았다. 옛날에 그 정도의 손님 대접은 당연한 관습이었다. 문제는 복음의 진리에 있었지, 친교나 식습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의 행위는 사실상 전체 복음의 기별을 양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2. 3:28과 골 3:11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바울의 강력한 대응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 모든 사람은 예수 안에서 평등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는 평등할 수 없다는 인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상은 단호히 철폐되어야 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이방인들이 할례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위가 이런 합의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공개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곳에서 이제는 회중이 분리되었으니 앞으로 교회가 나눠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울의 입장에서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 신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2등급 신자를 면치 못하리라는 암시였으며, 그들이 완전한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2:14). ‘유대인답게 살다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유대교화 된다라는 의미이다. 회당에 출입하는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요 바울의 반대자들을 유대교화된 자들(Judaizers)’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부가설명> 위선이라는 표현은 쉽지만 상태는 쉽게 분별되는 것이 아니다. 얼만 전 신문에 아랍 에미리트 신혼부부 이야기가 실렸다. 그들은 꽤 오래 사귀었고 마침내 결혼했다. 첫 밤을 보내고 아침에 세명대에서 세수한 신부를 본 신랑은 기겁을 했다. 어제 결혼한 그 신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서 다시 바라보니 그 신부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아니었다. 화장을 씻어낸 맨 얼굴은 화장하고 있던 그 얼굴과 너무 달랐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날 신랑은 법원에 신부를 사기로 고소했다. 여기까지가 보도 내용이다. 우리 외모는 화장으로 변장했다가 씻으면 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내면은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적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눈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것이 문화 영향이고 이것을 완전히 벗는 것은 평생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진리를 믿는 것보다는 교단을 믿고 있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진리가 몸에 밴 인격이 되어야 하는데 문화와 환경이 방해한다. 그래도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여 진리가 옳다면 그대로 생활하는 굴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계시를 통하여 고넬료를 만났고 맨 먼저 유대인으로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안디옥에서 유대인 신자들이 왔을 때 습관에 늪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진리에 굴복하도록 성령의 은총을 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교회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위 때문에 다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열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14

 

<복음교역자>, 117~119 “바울의 분별성을 읽어 보라.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도 큰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인간 대리자에게 부여된 책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명령하고 통제하는 그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가 만약 주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지성과 감정을 왜곡시키는 일에 그는 틀림없이 더욱더 큰 해독을 끼친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확고한 원칙 위에서 행동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파괴적인 감화를 정면으로 가로막아야만 하였다.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요, 그 교훈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경고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그들이 성실의 길에서 실수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게 하려 함이다”(화잇 주석, 2:11~1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대립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교회는 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거부하는 자들을 징계해야 합니까?

복음 진리의 확고한 원칙을 부정하거나 따르지 않을 때.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변치 말아야 할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변해도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는 변치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전달 방법과 적용은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재림교회 내에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록된 말씀의 원칙을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기도로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요약: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일부 유대인 신자들의 주장은 초기 교회의 연합을 위협하였다. 비록 사도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지만, 이런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 연합을 유지하며,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설 수 있도록 사도들은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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