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믿음에 이르는 길(질문, 대답, 부가설명)08/12/17

by 김명호 posted Aug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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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29

 

연구 범위 : 3:21~25, 18:5, 3:9~19, 고전 9:20, 3:1~2, 8:1~4

기 억 절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3:22).

 

전서구(편지를 보내기 위해 훈련시킨 비둘기)는 며칠 동안 수백 킬로미터를 날아 목표지점에 정확히 도달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전서구도 가끔은 방향을 잃고 영영 되돌아오지 못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듯이 방향을 잃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방향을 잃으면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심지어 순간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에 우리는 길을 잃거나 방향을 잃을 수 있으며 심지어 주님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 그분은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셨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는 율법도 포함된다. 많은 사람이 율법을 복음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둘을 상호모순으로 인식한다. 이는 잘못된 견해일 뿐 아니라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율법 없이 우리는 복음을 접할 수 없다. 율법 없이 복음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우리를 보호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지 이해한다.

느끼기 : 제사 제도와 하나님 나라의 바탕에 깃들어 있는 율법을 소중히 여긴다.

행하기 : 율법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심령에 율법을 새겨 주신 분께로 나아가며 율법의 가르침에 순종한다.

 

어떻게 율법이 초등교사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율법은 잘못을 지적하여 고리차고 가르치고 고칠 수 있는 분을 소개한다.

그대는 율법의 긍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율법은 구원받은 생명을 지키는 울타리역할을 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나지 전에는 정죄의 역할을 만난 후에는 삶의 바른 길을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의 품성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그렇게 되도록 이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해야 할 율법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삶이다.

 

결론 : 율법은 보호자와 훈육자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같이 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은 우리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십니다.

 

 

첫째 날() 율법과 약속

86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3:21).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가 율법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모세오경을 은근히 격하시킨다고 결론지을 것이 뻔했다. 그것을 알고 바울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질문을 끄집어낸다. “그대는 지금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바울은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그와 같은 결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과 율법을 모두 주셨다. 율법은 언약과 상충되지 않는다. 그 둘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각자 다른 역할과 기능을 맡고 있을 뿐이다.

 

1.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바울의 반대자들은 어떤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3:21, 18:5, 6:24을 비교해 보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사람을 죽은데서 살아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난 사람은 율법의 그들의 생활의 길이 된다.

 

이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리라고 믿었다. 그들의 관점은 아마도 레 18:5과 신 6:24과 같은 구약 말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친다. 율법은 언약 안에서 삶을 규제한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천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과 성령만이 소생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왕하 5:7, 9:6, 5:21, 4:17). 율법은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 소생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라는 뜻은 아니다.

율법이 생명을 주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3:22). 3:9~19에서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보여 주기 위해 구약의 말씀을 여러 절 인용하였다. 이 성경절은 대충 결합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죄 문제의 핵심 즉 이기적인 태도로 시작해서 죄의 만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의 총체성으로 주제를 옮겨 갔다.

바울의 요점은 죄의 광범위함과 율법의 한계 때문에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함만이 영생의 약속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종교개혁을 밀어붙인 위대한 진리가 있다.

 

<부가설명>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는 말은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한다.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율법으로 된다고 했을 때 의는 살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는 태초에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이것을 잃어버려서 그의 모든 후손이 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되었고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고 해도 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그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언약과 율법은 바로 이런 관계이다. 율법과 언약은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은 사람들의 실상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언약은 그런 상태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언약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하나님께서 이제 너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죄인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짐으로 이 불가능은 사라졌다. 죄 많은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아버지께 가납되게 해 주는 의를 그에게 나누어 주어 하나님의 은총을 죄인에게 회복시켜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믿음과 행함, 118). 6과에 나온 증언의 말씀이다. 바른 이해로 굳게 서자.

 

교훈 : 율법과 약속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능이 다르다. 약속은 영생의 소망을 주며, 율법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둘째 날() 율법 아래 매임

87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3:2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 내의 유대인 신자들이다. 그들은 율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갈 2:15 이후부터는 바울이 주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갈 3:23우리26절의 너희는 대조적인 것처럼 보인다.

3:23을 원어로 보면 믿음의 때까지그 믿음이 오기 전까지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율법의 위치를 대조하고 있기 때문에(3:24) “믿음이란 일반적인 신자들의 믿음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님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율법 아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22~23을 롬 6:14~15, 고전 9:20, 4:4~5, 21, 5:18과 비교해 보라.

[3:22,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6:14,15]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4:4,5,21]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율법의 권세 아래,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뜻인데, 율법이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죄의 권세로 사망으로 사람을 끌고가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 아래라는 구절을 12번 사용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율법의 권세 또는 형벌 아래에 있다는 의미(4:21). 바울의 반대자들은 순종을 통해 생명의 의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3:21~22).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율법에 순종할 수 없다. 나중에 바울은 율법 아래 있기를 바라는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5:2~4).

.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의미(6:14~15). 율법은 죄를 속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에 대한 위반은 결국 정죄를 초래한다. 모든 인류가 이 상황 가운데 있다. 율법은 모든 범법자를 사형 언도 아래 가두는 교도소장의 역할을 한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갈 3:23에서 매이다라는 말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율법 아래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다.

유사한 표현으로 보통 율법 아래로 번역되지만 문자적으로 율법 안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엔노모스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율법의 요구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고전 9:21).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즉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이다(3:11). 이 진리는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단지 율법이 영생을 주지 못함을 보여줄 뿐이다.

 

<부가설명> 이미 앞에 어디서 말했지만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법에 매여 있다. 자연법이든지 국가법이든지 도덕법이든지 다 매여 있다. 가장 완벽하게 매인 것은 자연법이고 사망의 법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벗어날 수 없을 때는 그 법에 빨리 순응한다. 아무도 이 율법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율법의 지배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존재와 생활과 환경이 보여준다. 사람이 이런 상태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성경이 계시한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깨닫게 하여 율법의 권세와 정죄에서 벗어나 생명과 자유를 얻으라고 가르쳐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때 가능하다. 언약은 예수 안에서 생명과 자유를 얻는다는 약속이고, 이 약속을 믿을 때 우리 각 사람에게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어느 시대든지 율법아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를 믿지 않으면 율법아래 있다. 예수께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가르치면서 죄에 대하여라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16:9)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있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율법의 정죄 아래 갇힐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신실함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날() 보호자로서의 율법

88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7:12).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다음의 2가지이다. 율법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을 폐하지 않는다(3:15~20), 율법은 약속과 상충되지 않는다(3:21~22).

그렇다면 율법의 실제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바울은 범법함으로 더해진 것이라고 했다(3:19). 그리고 이 개념을 확장하여 율법과 관련된 3개의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다. 매이다(23), 갇히다(23), 초등교사(24).

 

1. 기도하는 마음으로 갈 3:19~24을 자세히 읽어 보라.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3:19~24]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가르친다.

 

현대의 번역성경들은 갈 3:19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해설을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어는 그렇게 치우쳐 있지 않다. “매이다”(3:23)로 번역된 말의 문자적 의미는 지키다이다. 물론 그 말이 복종시키다’, ‘감시하다’(고후 11:32)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신약에서는 많은 경우 보호하다’, ‘지켜주다’(4:7, 벧전 1:5)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갇히다’(3:23)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은 마감하다’(20:18), ‘닫다’(14:3, 6:1, 13:19), ‘에워싸다’(5:6), ‘잡아 두다’(11:32)로 번역될 수 있다. 여러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맥에 따라 이 말은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2. 율법(도덕법과 의식법을 포함하여)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3:1~2, 7:12~24, 18:20~30).

[3:1,2]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7:12~24]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18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고 그들을 크게 요란케 하여 필경은 진멸하시고 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18:20~30]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가증한 풍속에서 보호를 받는 유익도 받았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인 의미로 말할 때도 있었지만(7:6, 2:19), 긍정적인 의미로 말할 때도 많았다(7:12, 14, 8:3~4, 13:8).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는 저주가 아니라 복이었다. 제사제도가 궁극적으로 죄를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해 주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으며, 율법은 고대의 타락한 이방의 감화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 주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어떤 누구도 사회와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서 그 사회에 생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그런 사회 규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는 그 타락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다.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 땅이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규범으로 그들을 그런 타락에서 보호해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호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그 타락을 따라간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도덕적 타락을 부추기는 죄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사람이 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거기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이 그들을 옭아매는 법이 된다. 죄의 법에 속박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준 율법은 이런 도덕적 죄의 법에 속박당하는 것을 지켜주는 법이기도 했다. 그것은 언약을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죄의 법에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옛날 가나안의 부도덕한 죄의 법에 속박당하고 있는 것 같다. 스카트폰, 인터넷 등이 다 가나안 풍속을 부추기고 있고 그것은 쾌락을 동반하기 때문에 쉽게 빠지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예수 생명으로 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죄의 법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따르게 된다. 그 생명의 법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울타리의 기능을 한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다시 사망의 세력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다.

 

교훈 :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에 대응하다 보면 율법이 부정적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성경은 많은 경우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넷째 날() 초등교사로서의 율법

89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3:24).

 

초등교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이다고고스(paidagogos)’이다. 어떤 성경은 이 말을 훈육자’, ‘가정교사’, ‘후견인이라고 번역하였다. 로마 사회에서 파이다고고스는 일종의 노예로서 주인의 아들을 6~7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을 지고 양육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목욕, 음식, 의복 등 아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고,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가 하면, 학교생활과 과제를 확인할 책임도 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도덕적 덕목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뿐 아니라 소년이 스스로 덕목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물론 어떤 파이다고고스는 주인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받을 만큼 친절했겠지만, 고대 문학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엄격한 훈육자였다. 그들은 호된 야단과 꾸중뿐 아니라 매질과 채찍질을 해서라도 순종을 가르쳐야 했다. 바울이 율법을 초등교사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역할에 대한 그의 이해를 더욱 명확하게 하였다. 율법은 죄를 가리키고 지시를 주기 위해 더해졌다. 이런 역할의 특성상 율법은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꾸짖고 죄인으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면도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신다. 왜냐하면 율법이 가져온 정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것들이 함께 일하도록 설계하셨다.

이 성경절(3:24) 가운데 성령께서는 사도를 통하여 특별히 도덕적인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1, 234).

 

<부가설명> 여기에는 부가설명이 굳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 의식율법(의문儀文의 율법)은 구주의 필요와 구주의 오심을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둘이 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필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언약을 받아들일 구원받고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생명은 십계명을 마음으로부터 당연하게 생활하게 된다. 마치 사회규범이 자연스러운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십계명을 생활에 실행할 때 어떻게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에 기록된 여러 율법 조문들이다. 조문에 있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은 율법조문이 의무가 되지만 생명이 당연히 나타내는 생명작용으로 그 조문들이 지켜지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생활규범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탈선할 때 책망하고 훈육하는 일을 한다. 얼마나 좋은 것인가!

 

교훈 : 율법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까지 우리를 엄격하게 가르치는 초등교사와 같다.

 

 

다섯째 날() 율법과 신자(3:25)

810

 

많은 이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3:25)다는 바울의 설명을 율법의 퇴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긍정적인 이해와 조화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8:3). 우리는 신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은혜 아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6:14~15). 잘못 때문에 정죄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섬긴다. 참된 복음의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말하는 이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죄이며, 죄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8:24).

 

1. 8:1~3을 읽어 보라.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런 놀라운 진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어떤 식으로 감화를 주는가?

[8:1~3]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성령의 역사로 생명을 받은 사람은 율법이 생활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를 죄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율법의 관계는 이제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살전 4:1). 바울은 이런 삶을 성령 안에서 행함이라고 표현했다(5:18). 이는 도덕적인 율법을 더 이상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니다. 율법이 죄를 정의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의 품성을 반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규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다. 그분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신 분이다. 그분은 율법을 우리의 심령에 기록하시는 분이며(8:10), 우리 안에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이다(8:4). 말하자면 이전에는 없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율법에 순종할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부가설명>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은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을 이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8:9) 이런 사람에게는 율법 조문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 그 조문이 없어도 그 조문이 생활되기 때문이다. 십계명 조문을 하나씩 들여다봐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아직 영이 된 사람이 아니다. 영이 된 사람은 그 조문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살아도 그 조문이 생활되는 사람이다. 말을 바꾸면 진정으로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된 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간단히 요약하여 적으면 십계명 조문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요 복음의 실상이다.

 

교훈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의 심령에 율법을 기록해 주시며 우리가 율법을 따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11

 

<가려 뽑은 기별 1>, 233쪽을 읽어 보라.

 

성소에 관련된 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재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성소 봉사의 근본 목적은 하늘 왕국의 율법인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든 인간의 심령 가운데 넣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물 교훈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셨고 죽어가는 희생 제물이 되셨으며 인간이 지은 죄를 친히 담당하셨고 무죄하신 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 233).

십계명은 금지의 측면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지 규정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가려 뽑은 기별 1, 2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 수 있을까하는 문제로 씨름합니다. 성경에 어떤 약속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더욱 유리한 입장에 서야 이런 약속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왜 우리는 구원의 완전한 소망이 우리가 얻는 승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까?

죄를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생명의 성령이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하신다.

 

우리는 종종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봅니다. 물론 그들은 죄를 반대합니다. 이는 그들의 주장이 진정으로 율법의 폐지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힌트: 어떤 계명에 대하여 말할 때 그런 주장들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한다.

 

요약: 율법은 죄인의 필요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졌다. 일종의 관리자로서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보호장치이다. 그러나 엄격한 훈육자처럼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정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며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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