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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일 안식일

일몰오후 650

 

연구 범위 : 5:1~15, 고전 6:20, 8:1, 2:14~15, 8:4, 13:8

기 억 절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5:13).

 

2:4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수호의 중요성을 간략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토록 자주 말하고 있는 자유란 과연 무슨 뜻인가? 이 자유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

바울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두 가지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사역의 속성을 잊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째는 방종에 빠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자유를 남용할 경향이다. 이런 경향을 가진 자들은 자유를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긴다.

자유와 상반되는 것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종의 얽매임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를 굳건히 지키라고 호소하고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율법주의와 방종을 피하게 되는지 깨닫는다.

느끼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맛본다.

행하기 :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섬김에 뛰어든다.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

율법주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사상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생명의 작용이 율법을 이루는 삶이다.

진정한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자유는 죄와 상관없이 사는 것이고 방종은 죄를 즐기는 것이다.

그대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경험에 이를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자유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그럼으로써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는 율법을 성취합니다.

 

 

첫째 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음

9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동요하는 군대를 재집결시키는 지휘관의 명령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내주지 말라고 호령한다. 바울의 억양이 어찌나 강하고 비장한지 그의 음성이 종이 위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사실 이것은 정확히 바울이 의도하는 바였다. 앞 절과 뒤 절을 연결하는 논리성과는 달리 갈 5:1의 문법적인 의외성과 부정확성은 그 절을 마치 거대한 광고판처럼 보이게 하려는 바울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바울의 전체 논증을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갈라디아인들은 그것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었다.

 

1. 1:3~4, 2:16, 3:13을 읽어 보라. 어떤 비유들이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3,4]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값을 지불하고 사람을 노예에서 해방하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즉 예수님이 자기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건지시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할 때에 그는 또 다른 은유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언어는 노예 해방식에 사용되었던 문구와 유사하다. 노예들은 법적 권리가 없기 때문에 신이 그들의 자유를 사야 자유롭게 되었으며 법적으로는 신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 과정은 가상이다. 자유를 사기 위해 신전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노예 자신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201년부터 기원후 100년쯤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서 발견된 천여 개의 제문 가운데 하나에서 그와 같은 문구가 사용되었다. “‘자유를 주기 위해 아폴로 신은 암파사의 소시부스로부터 니캐아라는 이름의 여종을 샀다. 그 자유의 대가로 니캐아는 아폴로에게 충성하였다.’”-Ben Witherington III, Grace in Galatia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p. 340.

이런 문구는 바울의 언어와 기본적으로 유사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점이 있다. 바울의 은유는 가상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하지 않는다(고전 6:20, 7:23). 그 값은 우리가 치르기에는 너무 비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부가설명> 구원이나 구속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꼭 한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 자신이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지 설명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다고 전제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 분명한 대답을 못한다.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문명을 보라고 대든다. 사람들이 능력이 있다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아직 대답을 못한다. 과학이 발달하면 해결될 날이 올 것이라고 누그러진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구원은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살릴 수 있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살리기 전에는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께서 아담과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을 십자가에서 처리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딤후1:10) 이것을 믿을 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살아나겠는가? 예수께서 생명의 속전을 주신 이유이다. 아멘.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다시 죽어서 스스로 살아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라는 것은 죽어서 썩어져가다가 살아서 생명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얻은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시고 산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9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자유 안에 굳게 서라는 바울의 명령은 무턱대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왜 신자들은 자유 안에 굳게 할까?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미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의 결과인 셈이다.

권고에 앞서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방식은 바울 서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고전 6:20, 10:13~14, 2:6).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몇 차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6)라는 식으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그는 명령법을 사용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6:12)라고 권고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너 자신이 되라는 바울식의 화법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윤리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는가?(6:14, 18, 8:1, 4:3, 8, 5:1, 2:14~15)

[6:14,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4:3,8]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죄와 사망과 율법의 정죄와 사망의 세력 잡은 자에게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바울은 신약의 다른 저자들보다 자유라는 단어를 폭넓게 사용하였다. 자유 내지 그와 유사한 단어들이 다른 곳에서는 13번 등장하는 반면 바울 서신에서는 28번이나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또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이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 중심의 신앙에서 비롯된 속박과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으나 우리의 자유는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죄와 영멸과 마귀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의 특징은 율법의 속박,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요소의 속박, 죄와 육체와 마귀의 속박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노예를 얽매는 것들의 지배를 멸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 Timothy George, Galatians, p. 354.

 

<부가설명> 죽은 자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들에게는 다만 썩어서 없어지는 것만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죽었으니 활동할 수도 없다. 죽은 행실(6:1)은 썩는 것이다. 사망과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인생은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 인생이다.(4:22) 완전히 썩으면 없어진다. 날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다.(8:13) 그것은 우리는 죽음이라고 한다. 죽음은 죽은 행실조차 끝나는 때이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몸이 썩어 없어진다. 지금은 숨 쉬고 활동하고 문명과 문화도 창달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대단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이나 인류 전체의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직 생명이시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에게 생명을 받을 때만 진정한 생명을 얻고 죽음과는 상관없는 영생의 생명으로 자유를 누린다. 영생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예수께서 주신 자유는 영생의 생명이다. 사망을 폐하시고 썩지 않는 참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받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면 참 자유가 있다. 우리는 자유자인가?

 

교훈 : 자유는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죄와 멸망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셋째 날() 위험한 율법주의의 결과(5:2~12)

95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5:2).

 

바울이 갈 5:2~12을 시작하는 방식을 보면 그가 할 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보라”(개정). “나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쉬운성경). 그는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의 단호한 표현은 신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뿐 아니라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일깨우기도 했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의 결정에 위험한 결과가 따르리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기 원했다.

 

1. 5:2~12을 읽어 보라. 할례에 관하여 바울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5:2~1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한마디로 하면 할례를 받으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구원과 상관없다는 뜻이다.

 

첫째,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의 결과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전체를 지키도록 짐을 지운다. 2~3절에서 바울의 언어는 재미있는 언어유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며(오펠레세이),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행할 의무를 지게 될 것이다(오페일레테스). 율법에 따라 살고 싶은 자는 원하는 조항을 고를 수 없다. 다 지키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것이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결정은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방법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시인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에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할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Galatian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68), p.133.

셋째, 할례는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그는 이것을 두고 결승점을 향해 달리던 주자가 의도적으로 방해를 받는 것에 비유한다. ‘막다’(7)라고 번역된 말은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길을 끊거나 다리를 파괴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할 때 사용되었던 군사용어이다(재림교회 성경주석 11, 565).

마지막으로 할례는 십자가의 공격을 제거한다. 할례는 그대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인간의 교만을 암시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기별은 그런 인간의 교만을 공격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존되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할례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칼이 미끄러져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5:12) 바란다고 말하였다. 심한 말 같지만 이는 바울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었는지를 방증하고 있다.

 

<부가설명> 월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것 같은데, 사람이 자기 노력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든지 구원받는데 어떤 보탬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은 자가 자기를 살리는 데 자기의 노력을 보태야 한다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땅의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완전히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복음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을 모르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만 알고 있으면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상에서 떠나지 못하게 되고, 또 인간의 선행이 구원받는데 아무런 역할이 없고 오직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다 내가 행한 것으로 여겨주신다고 하면 예수만 믿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사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바르게 깨닫는데 어렵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를 걷는 믿음의 길이 어렵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구원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제 예수 안에서 살아났으니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이기 때문에 생활하게 된다. 그 생활 상태가 바로 예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한 생명이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생활의 길이다. 아멘.

 

교훈 : 할례를 받기로 결정한 자들은 위험한 영적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넷째 날() 방종이 아닌 자유(5:13)

96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5:13는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여기까지 바울은 전적으로 신학적인 기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후로부터는 그리스도인 태도의 문제로 전환한다.

 

1.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남용하는 길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는가?(5:13)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예수 안에서 얻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으면 안 된다. 사실은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없다.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자유와 은혜에 대한 그의 강조가 어떤 잠재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3:8, 6:1~2). 하지만 문제는 바울의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방종에 있었다. 백성과 도시와 나라의 타락과 도덕적인 붕괴는 절제의 결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이 널려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성향은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육체적 방종을 피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를 바랐다. 사랑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자들은 자아와 육체에 대하여 죽어야만 이 일이 가능함을 알고 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섬기려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단순히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종노릇하는 새로운 형태의 섬김과 책임감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이며, 권력과 지위에 대한 동경이 아닌 상호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 공동체를 구축할 가능성이다.” - Sam K. Williams, Galatians (Nashville, Tenn.: Abingdon Press, 1997), p. 145.

기독교와 현대 번역에 익숙한 우리는 갈 5:13의 언어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하는 놀라운 능력을 간과하기 쉽다. 원어는 이런 종류의 섬김은 인간의 사랑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인간의 사랑은 너무도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앞에 쓰인 정관사는 그 사랑이 신적인 사랑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오직 성령을 통하여 받는다(5:5). 정말 놀랍게도 섬김이라고 번역하는 그리스어는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자율적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서로에게 종노릇하기 위한 것이다.

 

<부가설명>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된다.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종은 종노릇하는 것이 지겹고 서럽고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그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즐겁게 하는 것은 엔트테인먼트(entertainment) 이지 고역이 아니다. 오락을 즐기면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인간이 생각하는 동정과 인정을 베푸는 것과 감성적 느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도 포함되겠지만 근본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살려주려는 정신으로 대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을 때 교인 서로가 진리와 복음으로 참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섬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우리는 성경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많이 들었다. 그것은 신적인 사랑이라서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많이 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사랑이 바로 아가페이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아가페 해야 한다. 그 아가페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여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이 생명을 더욱 풍성하도록 섬기는 것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된 자유는 절대 방종이 아니라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섬김을 위한 것이다.

 

 

다섯째 날() 온 율법을 이룸(5:13~15)

97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5:14).

 

1.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5:3)를 부정적으로 해석한 측면과 온 율법() 이룸”(5:14)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한 측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10:5, 3:10, 12, 5:3을 롬 8:4, 13:8, 5:14과 비교해 보라.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3:10,1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 율법을 행하여 의롭게 되고 구원받으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속에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는 삶이 된다.

 

많은 이가 율법의 이행에 대한 바울의 대조적인 설명을 모순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정의하는 다른 두 개의 방식이 존재함을 구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구절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준수를 긍정적으로 언급할 때는 그것을 절대 율법의 행위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 말은 오직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자들의 그릇된 노력을 언급할 때만 따로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은 사람들은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에게 율법을 이루라고 말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단순히 율법을 행하는 외적 순종을 훨씬 초월하여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런 순종의 기원은 예수님이다(5:17 참고). 순종은 율법의 포기도, 사랑을 위한 율법의 축소도 아니다. 순종은 신자들이 모든 율법의 참된 의도와 의미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울은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가?(19:18, 12:31, 33, 19:19, 13:9, 2:8) 19:18을 율법의 강령으로 언급한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다. 예수님보다 한 세대 전의 랍비였던 힐렐은 그대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그것이 온 율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7:12). 그분의 관점은 매우 긍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율법과 사랑이 상반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사랑 없는 율법은 차갑고 공허하며, 율법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다.

 

<부가설명> 율법문제는 율법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것과 구원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좀 다른 것이다. 율법 자체는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다.(7:12) 그렇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인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도 없고 설혹 도덕적으로 지켰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면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 청년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했다. 그때 예수님은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율법을 스스로 잘 지켰다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때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은(고전15:22) 예수 안에서 살아난다. 살아난 사람은 사는 방법대로 살아야 그 살아난 생명이 유지된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 생명이 가르쳐준 살아가는 방법대로 살아야 영원한 날이 이를 때까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의롭고 선하고 거룩한 율법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 얻은 생명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된다.(10:10) 그렇게 생활되어지는 것이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고 그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려는 생활스타일인 것이다. 정말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작용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요일3:14)

 

교훈 : 성경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은 반대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찬성한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8

 

순수한 믿음은 항상 사랑으로 역사한다. 그대가 갈보리를 쳐다볼 때 그것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그대를 달래거나 마음을 가라앉혀서 잠자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예수의 믿음 즉 역겨운 이기심으로부터 그대의 영혼이 순결해지도록 행동하는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여야 하고, 조심스럽게 선을 지속해야 한다. 참된 증인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고 하신다. 우리의 부지런한 활동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믿음이 우리의 활동을 고무시킨다는 말 역시 사실이다(원고 16, 1890)”(화잇 주석,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단순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쉽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자신의 대답으로부터 율법의 성취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법조문을 범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봉사가 따르는 생명작용이며 상대를 살려주려는 정신이 드러나는 삶이다.

 

사람들이 죄의 방종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남용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덫에 빠지게 됩니까?(요일 3:8 참고)

자유가 죄에 대한 자유인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방종으로 오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덫에 빠지는데 결국은 믿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요약: 자유는 복음을 정의하기 위해 바울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말 속에는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통해 율법주의나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섬기지 않고 생명을 바쳐 이웃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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