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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일 안식일

일몰오후 1817

 

연구 범위 : 6:11~18, 6:1~6, 12:1~8, 고후 4:10, 5:17, 11:23~29

기 억 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본 갈라디아서 연구는 진지했다. 왜냐하면 서신 자체가 진지하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알고 그가 전파하는 진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들의 영감적인 열정을 가지고 서신을 기록하였다. 시대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과오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호소하였던 것처럼 바울도 자신의 시대에 동일한 일을 하였다. 비록 시대적인 상황은 다를지라도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도 쉽게 적용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23~24).

오류에 빠진 갈라디아의 양떼에게 보내는 바울 서신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춰져 있다. 그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부와 능력은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학습 목표

깨닫기 : 복음과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열정과 진심이 담겨 있는 서신의 맺음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느끼기 : 갈라디아 신자들의 영적 상태와 그들과 바울 그리고 거짓 신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깊은 염려에 공감한다.

행하기 : 우리의 생명과 사명의 핵심인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할례를 받으려고 했던 동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할례 받는 것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긴 다른 복음을 수용한 것이다.

육체 대신 십자가를 자랑하겠다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이 행한 일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정신이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나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할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는 일로 받은 고난의 흔적과 다른 복음을 따르는 교인들에 대한 마음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의 흔적이다. 할례는 율법의 종이라는 흔적이다.

그대가 예수의 사람임을, 이 시대의 남은 무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흔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외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내적인 것입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진정으로 거듭난 생활 방식이어야 한다. Lifestyle이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

 

결론 : 바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식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삶과 섬김의 이유인 십자가만을 고수하겠다고 다짐하며 강력한 호소로 갈라디아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첫째 날() 바울의 손으로

924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11).

 

1. 6:11~18에 있는 갈라디아서의 맺음말과 다른 바울 서신의 맺음말을 비교해 보라. 어떤 유사점 내지 차이점이 있는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과 비교해 보라.

[6:11~18]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6:21~23]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전16:21~24]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13:12,13]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6:23,24]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4:2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5:26~28]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3:17,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편지서와 같은 문안 형식이 없다. 아래 설명을 자세히 참고하라.

 

바울 서신의 맺음말은 획일적이지 않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특정 개인들에게 대한 안부 마지막 당부 서명 마치는 축도. 이런 전형적인 특징과 갈라디아서의 맺음말을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첫째, 다른 서신과 다르게 갈라디아서에는 개인적인 안부가 없다.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전통적인 감사와 찬양이 생략되었던 것처럼 이는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사이의 소원한 관계를 가리킨다. 바울은 예를 갖추되 형식적이었다. 둘째, 우리는 바울 서신에 대서자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6:22). 하지만 바울은 서신이 완성된 후에 종종 직접 붓을 들고 간단한 말로 서신을 끝마치곤 하였다(고전 16:21).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런 관례에서 벗어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상황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대서자의 붓을 받아들고 다른 경우보다 더 많은 말로 서신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서도록 다시 한 번 호소하지 않고서는 붓을 놓을 수 없었다.

6:11에서 바울은 큰 글씨로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글씨의 크기가 아니라 글씨의 흉한 모양을 말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핍박으로 인해 바울의 손이 불구가 되었거나 천막 제조 때문에 손이 굳어져서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를 그의 시각 장애 때문이라고 본다. 두 견해 모두 가능하지만, 바울이 큰 글씨로 기록한 이유는 오늘날 강조하고픈 말에 밑줄을 치거나 이탤릭체로 기록하는 것처럼 자신의 요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부가설명> 편지 끝에 이렇게 문안하는 것은 당시 편지 형식에 맞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문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쓰며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17) 다른 편지서에 이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곳이 없다. 그러나 앞뒤 문장에서 여전히 복음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갈라디아교회가 진리의 바른 깨달음에서 물러가지 않고 정로를 걷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전체를 친필로 썼는지 끝에 문안하는 내용을 친필로 썼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바울이 친필로 쓰되 큰 글씨로 썼다고 말한다. 바울이 글 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명만 스스로 했다는 점(고전16:21, 4:18, 살후3:17)을 생각하면 본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큰 글씨로 썼다는 것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고 바울이 시력이 약해서 크게 썼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교과 저자도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깨닫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진리이다.

 

교훈 :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직접 마무리하면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오류에서 돌아서도록 다시 한번 간곡히 호소하였다.

 

 

둘째 날() 육체를 자랑함

925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6:13).

 

1. 6:12~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교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낯을 드러내려고 하는 자들인 것을 밝혔다. 그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갈라디아교인들을 율법을 행하도록 했다는 말로 자기들의 공적으로 높이고자 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그의 반대자들의 계획과 동기를 앞서 넌지시 언급했지만(1:7, 4:17 참고), 6:12~13에 와서야 처음으로 반대자들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육체로 자랑하고 싶은 자들이라고 묘사하였다. 원어상 자랑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좋은 얼굴이다. ‘얼굴이라는 말은 배우의 가면과 동일한 말이며 배우의 역할이라는 은유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 백성들이 마치 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배우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명예와 수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화에서는 순응이 필수적이어서 갈라디아 신자들의 눈에는 오류를 가르치는 자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명예를 높여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동기 가운데 핍박을 모면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핍박에는 육체적 학대를 포함한 극단적인 형태도 있었지만, 괴롭힘과 배척의 가벼운 형태도 있었다. 바울과 유대의 다른 열성분자들은 한때 전자의 핍박을 가한 적이 있었다(1:1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후자의 핍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영역에서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공적인 제재를 가할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 신자들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원했다. 할례를 받고 토라를 지키라고 가르쳤던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은 지역의 유대인들과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회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방인 교회를 점점 의심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신자들과의 연대도 강화시킬 수 있었다(21:20~21).

물론 어떤 면에서 그들의 행동이 유대인들에게 더욱 효과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었든지 그의 뜻은 분명하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딤후 3:12)는다.

 

<부가설명> 유대 율법주의 신자들은 교과 저자의 설명대로 유대교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방인인 갈라디아교인들을 율법을 지키도록 이끈 것을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자랑거리로 제시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또 갈라디아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빌려서 자기 낯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민낯이 아닐까? 우리는 철저히 복음을 깨닫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과 존재와 참된 생활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바울처럼 날마다 자아가 죽고 예수님만 사는 그런 신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육체로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빌립보 3:4~6에 열거하였다. 당시로 정말 자랑할 만한 바울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도 바울처럼 육체적인 것을 모두 해롭게 여겨 버리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믿음으로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갈라디아 신자들은 유대인과 예루살렘 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핍박을 모면하고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라는 거짓 가르침을 따랐다.

 

 

셋째 날() 십자가를 자랑함(6:14)

926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할례를 고집하도록 조장한 동기를 밝힌 후에 비록 요약된 형태이지만 바울은 마지막으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의 복음의 기별을 제시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두 가지 핵심 사항을 기초로 하고 있다. 첫째는 십자가이며(14),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15). 오늘은 첫째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세기를 사는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당시 어떤 충격을 일으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6:14).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키는 익숙하고 소중한 상징이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에 십자가는 경멸의 대상이었지 절대 자랑할 것이 못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을 처벌하는 방식 가운데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고대 세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십자가형을 그려놓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2세기 초 것으로 보이는 한 낙서조각에는 당나귀 머리를 한 남자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손을 들어 경배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알렉산더가 그의 신을 경배하다.’ 요점은 간단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습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담대히 선언하였다.

 

1. 십자가는 바울과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6:14, 6:1~6, 12:1~8, 3:8)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6:1~6]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을 때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이 바울에 대하여 죽었다. 이 말은 세상적인 것과 단절이 되었다는 뜻이다.

 

십자가는 신자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십자가는 자아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세계관까지 재평가하도록 요구한다. 세상 곧 이 악한 세대와 그것이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요일 2:16).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한때 세상을 위해 살았던 우리의 옛 생애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바울의 비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단절은 마치 서로에 대하여 죽은 것과 같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처하여 살지만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사고방식, 생활방식 등등이 성경적이고 하늘적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태어난 새로운 인종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명이 있는 동안 세상에서 생활해야 한다. 세상의 제도 하에서 세상의 물질을 사용하며 세상 사람들과 섞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것을 사용하고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도 삶의 목적과 방향은 하늘적이어야 한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아서 세상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주목한다. 주목할 때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과 단절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다.

 

교훈 : 당시에 십자가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면서 자신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넷째 날() 새 창조

927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6:15).

 

그리스도인 신앙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에 바울은 복음의 또 다른 근본 요소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였다.

한 기 동안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할례를 복음에 대한 역행으로 간주했다. 물론 그 행위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몇 번 할례를 강하게 반대하기는 했지만(5:2~4) 그렇다고 갈라디아인들이 할례보다 무할례가 하나님에게 더 큰 기쁨이 된다고 결론내리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요점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에 대한 금지나 용납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 율법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할례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단 진정한 종교는 외적 행위가 아닌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는 사람도 속은 썩어 있을 수 있다(23:27).

 

1. 새 창조란 어떤 의미인가?(6:15, 고후 5:17). 이 의미를 그대는 어떻게 경험해 보았는가?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그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성령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어 크티시스(ktisis)’지으심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말은 개별적인 피조물(4:13)을 의미할 수도 있고 창조 질서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8:22). 어느 경우든 이 말은 창조주의 행위를 암시한다. 그것이 바울의 의도이다. ‘새로운 창조물은 할례나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과정을 거듭남으로 설명하셨다(3:5~8).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취하여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묘사된 구원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은유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고후 5:17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 바울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하늘에서의 법적인 지위가 변화될 뿐 아니라 현재의 삶까지 변화된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회심의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 내며 날마다 죽고 살아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이끈다.” - Timothy George, Galatians, p. 438.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됨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급진적인 변화가 의롭게 됨이 무엇인지 명백히 보여 준다.

 

<부가설명>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말이다. 창조는 사람에게 분담시킨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홀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에 들어간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나면 영이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3:6) 육이 영으로 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난 사람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이렇게 된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주가 새로 창조한 것인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창조주께서 창조하시는 것이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45:8)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적일 수가 없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하게 창조된 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훈 :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적인 행위의 결과이며 우리는 이런 변화를 통해 진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다섯째 날() 맺음말(6:16~18)

928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6:16).

 

1.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규례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갈라디아 6:14,15의 내용을 중심으로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새로운 피조몰이 된 것을 뜻한다.

 

규례로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 석공이나 목수가 치수를 재는 데 사용하는 곧은 막대기를 의미했으나 서서히 사람이 어떤 것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규칙 또는 기준을 뜻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신약 성경의 정경성에 대하여 논할 때, 신약 27권이 교회의 믿음과 행위를 규정짓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맞지 않는 가르침은 수용되지 않는다.

 

2. 바울의 몸에 간직되어 있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인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도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6:14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6:17, 고후 4:10, 11:23~29)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11:23~29]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 일차적으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받은 핍박으로 당한 상처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또 갈라디아교회 같이 다른 복음에 휘둘리는 교회에 대한 염려로 마음에 받은 상처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둘 다가 흔적이다. 그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를 몸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갈라디아교회가 바울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지 말기를 바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흔적이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스티그마타(stigmata)’로서 영어 단어 스티그마(stigma: 오명)’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바울은 아마도 하나의 신분 표시로서 주인의 휘장으로 종들에게 낙인을 찍어 두었던 풍습 또는 비밀 종교에서 신자가 헌신의 표시로서 자신에게 낙인을 찍었던 풍습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뜻이든 바울은 핍박과 곤경 때문에 그의 몸에 남은 상처들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후 4:10, 11:24~27). 바울의 반대자들은 유대교에 대한 굴복의 상징으로서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누구의 종이 되었는지를 지시해 주는 표를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충성의 대상이 없었다. 바울이 자신의 주인에게 봉사하면서 원수에게 받은 상처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을 가장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 것이었다”(재림교회 성경주석 11, 580).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에 있는 고난의 흔적으로 보여주셨다. 도마는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신 흔적을 영원토록 몸에 간직하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몸에는 핍박과 고난의 상처가 많았을 것이다. 외부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된다. 흉터는 있겠지만 아프지는 않게 된다. 그러나 내적 상처는 그 상처를 준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고 회복되지 않으면 계속 고통을 준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에게 그런 상처를 입혔다. 어쩌면 우리가 진리를 올바르게 따르지 않으므로 예수님께 상처를 주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교부가 꿈을 꾸었는데 그가 어딘가에 있는데 누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에게 가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려도 못 박는 손을 멈추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지 알아보려고 얼굴을 보고 그는 너무도 놀랐다. 바로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너무 놀라서 꿈을 깨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떤가?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훈 : 바울의 반대자들은 유대교에 대한 굴복의 의미로 할례를 고집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의 상징으로서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29

 

갈보리의 십자가는 모든 땅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 도전하여 종내에는 그것들을 완전히 추방할 것이다. 십자가 안에 모든 감화가 집중되어 있고 거기에서 모든 감화가 흘러 나간다. 그것은 매력의 큰 중심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희생 제물을 드리신 목적은 인간을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인간의 품성을 완전히 변화시킴으로 정복자 이상의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제물을 바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감응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러한 감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여러 세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이 시대를 위한 진리가 현대 진리로 나타났다.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중개인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이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수단이다(원고 56, 1899)”(화잇주석, 6:1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환경, 인종차별, 낙태 등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세상에 처하여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의 사상으로 생활해야 한다. 모든 것을 예수님의 사상을 표준으로 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새롭게 지음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고방식이 성경적이 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8:5)

 

그대는 이번 기에 배운 것을 기초로 율법, 율법의 행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옛 언약과 새 언약,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 등에 관한 바울의 사상을 어떻게 요약하겠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 되어서 새 생명으로 이룬 인격으로 새 생명의 작용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약: 진정한 종교는 외적 행위가 아닌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의 생애는 믿음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점점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게 될 것이다. 심령이 그리스도께 굴복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축복이 이르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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