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기별(질문, 대답, 설명)01/19/19

by 김명호 posted Jan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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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기별

 

119일 안식일

일몰오후 541

 

연구 범위 : 2:8~11, 2:12~17, 2:18~29, 3:1~6, 3:7~13, 3:14~22, 61:10

기억절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밧모 섬에서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서 일곱 편지를 그의 백성에게 보내셨다. 물론 그 기별들은 요한의 때에 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을 다루고 있지만, 예언적인 의미에서 각 시대의 교회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각 편지를 나란히 비교해보면 그것들이 동일한 여섯 단계의 구조를 따르고 있음이 나타난다. 각 편지는 예수님이 해당 교회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은 각 교회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단계에서 1장에 나타난 그분에 대한 모습의 일부를 인용하며 “~() 이가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한 묘사는 해당 교회의 구체적인 필요에 알맞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양한 문제와 상황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셨다. 그다음 예수님은 그 교회를 칭찬하시고, 그런 다음 어떻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권고하신다. 마지막으로 각 기별은 성령의 말씀을 들으라는 호소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끝난다. 지난주에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분석했던 것처럼 이번 주에는 남은 여섯 개의 기별을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목표

깨닫기 :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의 의미와 예언적인 적용을 이해한다.

느끼기 :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하시고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우정에 감사한다.

행하기 :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며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구한다.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는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까?

핍박시대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해가는 시대를 반영한다.

영적으로 가장 암울했던 두아디라 교회 시대의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세속적 상태를 회개하라고 하셨다.

사데 교회가 살았지만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안일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은 어떻게 작은 능력만으로도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요?

서로 사랑하며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충성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영적으로 절실한 필요를 채워야 할까요?

안약을 사서 바르고 금을 사고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기별을 통해서 각 시대의 교회에 필요한 격려와 위로와 책망 그리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배우고 우리와 밀접하게 동행하시려는 예수님의 호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날 113() 서머나와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기별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

 

서머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강제적인 황제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황제 숭배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가는 법적인 지위를 잃고 박해를 당하며 심지어 순교할 수도 있었다.

 

1. 2:8~11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이 교회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그 교회의 상황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서 뭐라고 경고하셨는가?

[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처음과 나중이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으로 나타내서 핍박받는 교회에 합당하게 나타내셨더. 교회는 극심한 핍박의 상황이었고 앞으로도 큰 핍박이 있을 것을 경고했다.

 

예언적으로 볼 때,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가 극심했던 후사도(後使徒) 시대의 교회에 적용된다. 2:10에 언급된 십 일은 기원후 303년부터 313년까지 10년 간 계속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 기간을 가리킨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313년에 기독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버가모는 수많은 이교 제사의 중심지였다. 그 가운데는 구세주라고 불리는 뱀 모양의 그리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한 제사도 포함되었다.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서 각지로부터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찾아왔다. 버가모는 서머나처럼 강제적인 황제숭배를 조장하는 데도 앞장섰다. 예수님이 버가모의 신자들에게 사탄의 권좌가 있는”(13) 도시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2. 2:12~15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이 교회에는 어떻게 자신을 비추셨는가? 그 교회의 영적인 상황에 대해 뭐라고 칭찬하셨는가?

[2:12~15]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들은 핍박 중에 순교자가 나오도록 믿음을 지켰다고 칭찬하셨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팎에서 유혹을 받았다. 물론 대부분은 믿음을 지켰지만, ‘니골라당이라고 불리는 일부는 박해를 면하기 위해 이교와의 타협을 옹호했다.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길에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꾀었던 발람처럼(31:16), 그들은 믿음을 양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이롭다고 여겼다.

예루살렘 총회가 우상의 제물음행을 멀리”(15:29)하라고 가르쳤음에도 발람의 교훈은 그러한 결정을 무시하도록 신자들을 미혹했다. 예수님이 버가모 교회에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회개하라”(2:16)는 것뿐이었다. 버가모 교회는 기원후 약 313년에서 538년 사이에 존재했던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예언적으로 대변한다. 그 시기에 일부 신자들은 믿음을 지켰지만 교회의 영적인 쇠퇴와 배도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부가설명>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이고 버가모는 성채(城砦)라는 뜻인데 성채는 대체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높이 들린이라는 뜻도 있다. 서머나 곧 몰약은 두드릴수록 향이 짙은 특징을 가진다. 핍박시대의 교회를 표상하기에 합당한 이름이다. 버가모는 교회가 점점 세상과 타협하는 정신이 들어오던 시대이다. 니골라당을 용납했다는 말이 그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높임을 받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 위에 들려지기 시작하는 시대이니 버가모라는 이름이 합당하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편지서에 나오는 이름은 에베소, 라오디게아뿐이다. 그 외의 교회들은 편지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 이름이 사도행전에 나오지만 두아디라에 교회가 성립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성립되었기 때문에 계시록에 나타났을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교회 이름들이 각 시대의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곳 외에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교회들을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이름으로 있는 교회들의 실제적인 사정을 통하여 각 시대의 교회들의 상태를 가장 잘 표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에 이 일곱 교회가 그 시대에 있던 교회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훈 : 서머나 교회는 사도시대 이후 313년까지의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대변하고 버가모 교회는 538년까지 영적인 쇠퇴가 진행되었던 배도의 시대를 대변한다.

 

 

둘째 날 114()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기별

 

다른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두아디라는 정치와 문화적으로 알려진 특이점이 없었다. 게다가 그 교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로마 제국 내에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얻으려면 무역 조합(guild, 길드)에 가입해야 했다. 두아디라는 특별히 이러한 제도를 실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원들은 조합 축제에 동참할 뿐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를 포함하는 신전 의식에 참여해야 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조합에서 배제되었고 경제 제재를 당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철저하게 타협하든지 아니면 복음을 위해 철저하게 배제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1. 2:18~29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제시하셨는가?(10:6 참고) 예수님은 그 교회의 어떤 점들을 칭찬하셨으며 그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점들은 무엇이었는가?

[2:18~29]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다.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처음 것보다 많은 나중 행위를 칭찬하셨다. 이세벨 용납하여 그의 가르침을 교회에 용납한 것이 문제였다.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았다.

 

버가모 교회와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 역시 이교의 문화와 타협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을 배도로 이끌었던 아합 왕의 아내를 상기시킨다(왕상 16:31~33). 예수님은 그녀를 영적인 간부(奸婦)로 묘사하신다(2:20). 진리를 양보하고 부정한이교 사상과 행습을 도입하는 자들은 그녀와 함께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기원후 538년에서 1565년 사이의 교회 상황을 반영한다. 그 시기에 교회가 직면한 위험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전통이 성경을, 인간 사제와 성물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대체했으며, 행위가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타락시키는 감화력을 수용하지 않는 자들은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 수세기 동안 진실한 교회는 외딴 곳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12:6, 13~14). 그럼에도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행위와 봉사를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종교개혁과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시발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두아디라는 고난의 향기, 수고의 달콤한 향기, 이런 뜻이 있다고 한다. 이 시대는 종교 암흑기 시대의 교회이다. 이세벨이 등장하는 것으로 엘리야 시대, 곧 아합 시대의 바알 신이 온 나라에 강요되었던 때를 역사적 상징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를 538년 곧 교황권 확립이 된 시대부터 교황권이 일단 죽은 것 같이 된 1798년까지로 본다. 그 시대는 바로 1260년 기간이 된다. 이렇게 보면 사대교회 시대가 아주 짧아지기 때문에 설명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요즘은 대부분이 1517년 루터가 개혁의 불꽃을 든 때까지로 보는데 여기 1565년은 무엇을 뜻하는 연대인지 잘 모르겠다. 그때 어떤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말이 없다. 교과 저자가 지은 계시록 주석에도 이 연대가 없다. 본교회 주석은 1798년과 1517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대가 어떤게 구분 되든지 이 시대는 교회가 세속과 타협하고 교권이 형성되어서 세상을 교회가 지배하였는데, 세상의 빛이 되라고 지시한 교회가 세상을 통치하는 시대를 역사는 암흑시대라고 구분한다. 이것은 그 시대를 지배한 교회를 흑암의 세력의 왕인 사탄이 주관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두아디라 시대는 바로 이런 시대이다 그러나 그 끝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수고의 향기를 맛보게 된 것이다.

 

교훈 : 두아디라 교회는 538년부터 1565년까지 영적으로 매우 타락하고 암울했던 시대를 반영한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믿음 외에 다른 짐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셋째 날 115()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사데는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지만 로마 제국 시대에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그 도시는 현재의 상황보다는 단지 과거의 역사 때문에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사데는 가파른 언덕 위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시민들이 안전을 낙관했기 때문에 성벽 수비는 철저하지 않았다.

 

1. 3:1~6을 마 24:42~44, 살전 5:1~8과 함께 읽어보라.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데 교회 신자들에게 행하라고 촉구하신 세 가지는 무엇인가?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 도시의 역사에 어떻게 부합했는가?

[3:1~6]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살전5:1~8]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사데는 높은 언덕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래서 성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적었다. 결국 그것 때문에 함락되었다.

 

소수의 사데 교인들은 신실했지만 대부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다. 물론 그 교회가 버가모나 두아디라처럼 어떤 공공연한 죄 또는 배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대신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예언적으로 볼 때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약 1565년부터 1740년까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영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그 시대에 교회는 메마른 형식주의와 영적인 안일함에 빠져 쇠퇴하였다. 거센 이성주의의 조류와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은혜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 희미해지면서 교조적이고 건조한 철학적인 논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시기의 교회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다.

사데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기별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항상 과거의 믿음을 자랑하는 신자들이 있다. 불행히도 그들은 현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경험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앙은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진정한 헌신이 결여되어 있는 그저 명목상의 신앙일 뿐이다.

 

<부가설명> 사대라는 말은 즐거움의 찬송남은 것또는 새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개신교회의 상태를 잘 나타내는 이름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교회가 온전한 행위를 잊어버렸다. 살았다는 이름만 있는 교회였지 살았으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신앙행위가 없었다. 그래서 살았다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된 것이다. 생명이 있으면 생활이 있다. 생활은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신앙행위는 새 생명의 행동이다. 새 생명의 행동이 없으면 새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이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복음을 오해한 것이다. 그 믿음은 사람을 새 생명을 주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오늘도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사대 교회의 상태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게 주는 성령의 경고기별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이 기별을 듣고 새 생명을 얻어서 새 생명의 신앙행위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흰옷 입은 무리에 속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시대는 1517년부터 1755년 큰 지진이 난 때, 곧 여섯째 인을 뗄 때까지로 보는 것이 요즘 견해이다. 전에는 1798년부터 1833년으로 봤다. 1260년 기간이 끝날 때부터 재림운동이 시작할 때까지로 본 것이다. 그러나 교과는 1565~1740년이라고 했는데 역시 어떤 역사적 사건이 획을 그었는지 설명이 없다. 교과 저자의 계시록 주석에는 그냥 16,17세기 교회 상태라고만 했다. 두아디라도 6세기부터 16세기에 해당된다고만 했다.

 

교훈 : 사데 교회는 차가운 교리적인 논쟁이 진실한 영성을 대체했던 1565년부터 1740년까지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시대를 반영한다.

 

 

넷째 날 116()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

 

예수님이 여섯 번째 기별을 보내신 곳은 형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였다. 그 도시는 제국의 교역로 위에 위치했고 넓고 비옥한 평원으로 가는 진입로 또는 관문 역할을 했다. 고고학에 따르면 빌라델비아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강과 치료의 중심지였다. 빈도가 잦은 지진 때문에 시민들은 도시 외곽으로 이동하여 소박한 움막에서 지냈다.

 

1. 3:7~9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이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네가 작은 능력을가졌다고 하신 예수님의 진술은 그 교회의 형편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3:7~9]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 거룩하고 진실하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났다. ‘작은 능력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소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열정이 있고 성령의 능력이 충만했던 것이 포함된다.

 

이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예언적으로 1740년에서 1844년까지 대영제국과 미국에서 1차와 2차 대각성이 일어났던 개신교 대부흥기를 반영한다.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빛에 따라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3:8).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순결한 삶을 강조했다. “열린 문은 분명히 하늘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내 하나님 성전”(3:12, 4:1~2 비교)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닫히고 있는 문과 열리고 있는 문은 1844년에 시작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변화를 가리킨다.

 

2. 3:10~13을 읽어보라. 남은 시간은 짧고 예수님이 오실 날은 가까웠다는 징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딤후 2:19) 만약 어떤 이름이 그 사람의 성품을 대변한다면, 34:6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3:10~13]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예수께서 속히 오신다고 하셨고 앞 구절에 열린 문을 두셨다는 것이 징조가 된다.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 사람을 확실히 아신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이름에 포함된 성품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성품으로 꼴 지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교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 1844년까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기별이 세계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그분의 약속은 그분의 성품이 그 백성들의 삶에 나타날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율법이 기록됨으로 그 큰 사건을 위해 준비되리라는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기별만큼 중요하다(1:6, 10:16~17 참고).

 

<부가설명> 빌라델비아는 형제우애라는 뜻이다. 아마도 당시 필라델비아 교회가 성도들 간의 신앙적 사랑이 깊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시대는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진 개신교가 사대교회 시대 후반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상태에 있다가 각성하고 신앙부흥이 이루어진 시대를 표상하기에 합당한 시대이다. 이 시대를 1740년부터로 구분했는데, 이것은 요한 웨슬레 부흥운동을 기점으로 연대 구분을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교회 주석은 이 시대를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부터 1844년까지로 분류한다. 또는 1833년부터 1844년까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확정된 연대로 분류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있는 교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확실하다. 교과저자는 그냥 18,19세기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그의 저서에서 말했다.

교과의 연대는 맥스웰 요한계시록의 구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발견했다. 이번 교과의 7교회를 역사적 시대로 구분한 연대는 맥스웰의 구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맥스웰은 특별한 설명 없이 그렇게 구분한 것처럼 보인다. 설명을 자세히 했다면 좋았을 것인데. 좀 막연한 것 같다. 그래서 본교회 주석의 구분을 소개한 것이다. 일곱교회 중에 책망이 없는 두 교회, 곧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이다. 현재 우리교회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라오디게아 현상을 미리 아신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교회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개 교회가 반드시 라오디게아 현상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는 서머나 빌라델비아 현상으로 일깨어 준비된 성도로 신앙생활을 하자.

 

교훈 : 빌라델비아 교회는 1740년부터 1844년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영적인 대각성과 재림운동을 일으킨 개신교회의 대부흥기를 반영한다.

 

 

다섯째 날 1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교회는 주요 교역로 위에 위치한 부요한 도시 라오디게아에 있었다. 그 도시에서는 양모 제조업, 다량의 금을 보유한 은행들, 안약을 제조하는 학교가 유명했다. 라오디게아의 풍요는 시민들로 하여금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했다. 기원후 60년경 지진이 그 도시를 파괴했을 때도 시민들은 복구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의 원조 제안을 사양했다. 그러나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수로를 통해 히에라폴리스에서 솟는 온천에서부터 용수(用水)를 공급받았다. 수원지(水源池)가 라오디게아로부터 멀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물이 미지근해졌다.

 

1. 3:14~17을 호 12:8과 함께 읽어보라. 그 도시의 자기만족의 정신은 어떻게 라오디게아의 신자들에게까지 스며들었는가?

[3:14~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2: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 신자들도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신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설이나 배도와 같은 어떤 심각한 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는 영적인 무기력에 이르게 하는 안일함에 있었다. 마치 그들은 차고 시원하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냥 미지근해진 물과 같았다. 그들은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영적으로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눈이 멀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겪을 영적인 상황을 상징하며 계시록의 종말 부분과 분명한 연관성을 나타낸다. 16:15에서 부모와 같은 어조로 주신 예수님의 경고에 나타난 그 같은 연관성은 영적으로 헐벗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필요한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의를 상기시킨다(3:18 참고). 의복을 지키며 벌거벗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는 아마겟돈이라는 영적인 전쟁을 언급하는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언뜻 예수님이 경고를 발하시는 시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더 이상 그러한 의복을 받을 가망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면 모든 사람에게 은혜의 시기가 이미 끝날 것이다.

 

<부가설명> 라오디게아는 심판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 곧 의로운 백성이라는 뜻이다. 라오디게아는 백성이라는 라오스의롭다디케가 합해서 된 말인데, ‘디케는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무죄라고 선언한 그런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즉 심판으로 무죄서고를 받은 상태인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유일한 교회이다. 그런데도 이름은 심판으로 무죄 선고를 받은 백성이라는 뜻이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 시대는 세 천사의 기별이 전파되는 시대인데 이 기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고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에 전파되는 기별이다. 그래서 심판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받아 그 기별로 의롭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교회가 진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이름이 그것을 나타낸다.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자칭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하지만, 라오디게아 현상에 빠져 있는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현상과 라오디게아의 참 상태는 서로 다르다. 라오디게아가 되는 과정에 있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현상에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가 참으로 회개하고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이, 창조주 되시는 분의 권고를 그대로 받아 실현하면 진짜 라오디게아 교회가 된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현상에 있는가? 라오디게아가 된 상태인가? 자문하면서 참된 증인의 권고를 잘 받아들이도록 하자.

 

교훈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마지막 교회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한다. 그들은 자만심을 버리고 진실한 회개와 각성으로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여섯째 날 118()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도행적>, 578~592 ‘계시를 읽어보라.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그 교회들이 겪고 있던 영적인 쇠퇴를 보여준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었지만 여전히 신실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대체로 신실했다.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는 점점 신앙을 양보해서 마침내 대다수의 신자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순수한 믿음에서 완전히 배도하기에 이르렀다. 사데 교회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교회에 포함된 신자들의 대부분은 복음과 일치하지 않았다. 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신실한 소수의 신자들에 의해 대변되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무기력과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대해서는 칭찬할 것이 없었다.

각 기별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면을 수용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셨다. 물론 교회 안에 뚜렷한 영적 쇠퇴가 있겠지만 약속에 의하면 그와 비례하는 성장도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이 첫 번째 기별을 보내신 에베소 교회는 단 한 가지 약속만을 받았다. 그런데 영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따를수록 각 교회는 이전 교회보다 더 많은 약속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가지 약속이지만 예수님과 보좌에 함께 앉는 가장 큰 약속을 받았다(3:2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영적인 쇠퇴가 증가할수록 다음 교회가 이전보다 더 큰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5:20)을 어떻게 반영합니까?

예수께서는 교회가 연약하여질 때에 더 큰 은혜로 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죄에 거하는 것은 결코 그럴 수 없다.(6:1,2)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산업과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번영하는 도시에서 이교 신앙의 분위기 때문에 압박을 느끼면서도 복음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세상 속에 거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오늘날 특히 대도시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될까요?

현대의 재림성도들은 어디에 거하든지 진리에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헌신하고 굴복해야 할 것이다. 환경이 좋기 때문에 신앙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스스로 굴복하지 않으면 어떤 곳에 있어도 똑 같은 현상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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