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자녀 양육의 시기(질문, 대답, 설명) 05/25/19

by 김명호 posted May 17,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8과 자녀 양육의 시기

 

525일 안식일

일몰오후 742

 

연구 범위 : 18:11, 31:25, 11:28, 127, 22:6, 삼상 3:10~14, 3:13

기억절 :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127:3).

 

생명의 탄생은 흔하고 일반적인 일이지만 우리가 항상 그것의 경이로움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가인을 팔에 안고 하와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해보라. 그녀는 수개월 동안 불어나는 몸에서 변화를 겪었으며, 극심한 출산의 고통 이후에 그들을 빼닮은 가녀리고 작은 아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가임기가 지난 90세의 나이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라보는 사라의 경험은 또 어떠했을까?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분명히 웃었을 것이다. 아들을 달라고 오랜 세월 기도한 끝에 사무엘을 낳은 한나는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삼상 1:27)셨다고 말했다. 어린 소녀의 나이에 동정녀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껴안고 있는 마리아의 가슴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경이로 충만했다.

반면 부모 노릇이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특권과 책임은 아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자녀를 양육하는 시기를 탐색하며 그것이 가져오는 부담, 두려움, 만족과 기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자녀를 양육할 시기에 신자들이 느끼는 다양한 결핍과 필요를 깨닫고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영적인 접근 방법에 대해 배운다.

느끼기 : 부모로서 능력과 지혜의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신뢰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행하기 : 끝까지 자녀의 신앙과 구원을 기도하며 신앙 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는 어떤 기쁨과 고충이 있습니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과 교육시키는 대로 되지 않는 고충과 질병과 사고에 대한 고충도 있다.

신명기 6장을 참고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자녀를 양육해야 할까요?

성경말씀을 따르는 삶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어렸을 때의 신앙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22:6)

어릴 때 배운 것이 늙을 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반면 자녀가 없는 가정과 편부모 가정에는 어떤 배려와 관심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로 접근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자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인내로 그들을 이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결론 : 부모 노릇은 기쁨뿐 아니라 수많은 부담과 의무를 수반합니다. 자녀 교육에 필요한 요소는 다양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주의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519() 아이가 없는 부모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8:12).

 

1. 18:11, 30:1, 삼상 1:1~8, 1:7을 읽어보라.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들의 갈망에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삼상1:1~8]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1: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 불임(不姙)이 공통점이다.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는 일종의 축복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은 자녀를 낳는 복을 모두에게 주시지는 않는다. 소망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은 사라의 경우처럼 때로 매우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시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열렬히 탄원을 올려도 묵묵부답일 때가 있다. 친구들이 임신했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출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은 자신의 빈 둥지를 보고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이 무심코 자녀가 몇이나 되십니까?’라고 질문할 때마다 그들도 끼고 싶지만 자녀가 없어서 낄 수 없는 배타적인 모임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한다.

그 같은 경험을 겪어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시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56:8)라고 강조하였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103:13)신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이유 때문에 그냥 자녀를 갖지 않기로 결정한다. 사람들이 슬픔, 고통, 불행과 잠재적인 재난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더 많은 사람을 추가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이유는 이해가 된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낳기보다 입양을 선택했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 나온 아이를 양육함으로써 그 아이들이 입양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훨씬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아이를 갖는 문제에 관하여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쨌든 우리는 자녀 때문에 걱정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행복한 결말을 바라시는 그분의 소망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 동시에 어떤 이유든지 자녀가 없는 사람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자.

 

<부가설명> 한국은 자녀 출산이 저조한 것 때문에 국가가 출산 장려를 하고 있다. 그래도 출사하려고 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한 것 같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양육비 문제, 사회적 분위기, 기타 등등.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창조주의 계획이다. 비록 죄가 많아도 생육해야 한다.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14:28)고 성경은 가르친다. 한국의 장래가 염려된다. 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데는 부모의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른다. 아이를 출산하고 새 새명이 탄생한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놀라움과 신비함이 있지만 또 그 아이를 양육하는 수고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사람 난 것이 기쁜 일이라고 하셨다.(16:21) 죄의 세상에 아담의 씨로 출생하는 아기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질 씨로 출생하게 된다.(고전15:22, 벧전1:23) 그래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라 성장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이 아기가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나게 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 한다. 부모가 대신 거듭나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에게 썩지 않는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벧전1:23) 심어줘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도록 양육하는 일에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부모는 이런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양육의 수고를 보람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교훈 : 자녀는 분명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고의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520() 편부모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31:25).

 

오늘날 세상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편부모 가정이다. 주로 편모 가정이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쉽게 편부모들을 혼외 관계에서 자녀를 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하갈은 어쩔 수 없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와 함께 가정을 떠나야 했다(16:3~4, 21:17). 엘리야는 사르밧이라는 마을에 가서 과부 홀어미를 돕도록 파송되었다(왕상 17:9). 예수님이 공중봉사를 시작할 즈음에 그분의 부친 요셉은 마리아를 과부와 편모로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예수의 탄생의 신비를 함께 알던 요셉과는 사별(死別)하였다. 이제 그녀에게는 자기의 소망과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녀는 매우 슬펐다”(시대의 소망, 145).

편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재정을 관리하고 다른 부모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거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다시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을는지도 의심스럽다.

 

1. 편부모를 포함한 우리는 다음의 성경절들에서 어떤 약속을 찾을 수 있는가?(31:25, 11:28, 29:11, 32:27, 3:5~6, 43:1~2)

[31:25]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하나님께서 위로와 평안과 소망을 주시고 항상 길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겠다는 약속들이다.

 

우리는 교회로서 편부모들을 도울 책임이 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1:27)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여기에 환난중에 있는 편부모도 돌보라고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도움이 꼭 경제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자녀를 잠시 맡아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한숨을 돌리고 다른 집안일 또는 휴식, 기도, 말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수 있다.

우리는 그 자녀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집수리를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편부모를 돕는 하나님의 손이 될 수 있다.

 

<부가설명> 이사야 541절은 교회를 홀로 사는 여자로 비유했다. 예수님은 교회의 남편이시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사업을 수행하시고 교회를 조직하게 하시고 승천하셔서 이 세상의 교회는 남편 되시는 예수님이 자기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는 홀로 사는 여자이다. 물론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돌보시고 역사적으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인도하실 것이지만 교회는 과부는 아니지만 남편을 훗날에 만날 날을 기다리는 홀로 사는 여자이다. 홀로 살면서 전도로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고 양육하는 엄마이다. 이런 교회가 현실적으로 혼자 살며 자녀를 양육하는 엄마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 교인들이 교회가 남편이 왕권을 받아가지도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혼자 사는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이 함께 없는 때를 정결함과 신실함으로 지내야 한다. 자칫하면 음행을 할 위험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란 이름을 가진 많은 조직들이 음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런 교회를 음녀라고 한 것이다. 재림성도들은 정결한 해를 옷 입은 여자로서 남편 예수님이 오실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견고하게 살아가야 한다.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편부모가 된 사람들을 교회의 처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정신으로 사랑과 봉사로 도우는 것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남편 예수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교훈 : 세상에는 원치 않게 편부모로 자녀를 양육하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521() 자녀 양육의 기쁨과 의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27:1).

 

시편 127편을 읽어보라. 이 짧은 시편의 기본적인 기별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원칙들을 배워야 하는가?

[127:1~5]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 가정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계시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하고 싶다면 조리법을 따라야 한다. 그대가 모든 재료를 넣고 모든 과정을 따르면 대부분 기대하던 결과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 양육은 요리와 다르다. 세상에 똑같은 아이는 없다. 다른 아이에게 했던 대로 할지라도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 그들의 성(), 출생 순서, 그들의 기질 또는 수많은 원인이 문제일 수 있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들의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도록 이끌고 가르치려 한다(6:4~9, 78:5~7). 하나님이 부모들에게 주신 명령은 그저 그들을 감싸고돌지 말고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22:6)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절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냥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도 우리 자녀들이 작고 가녀린 갓난아기에서 독립적이고 성공적인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고 싶지만, 우리의 가장 막중한 책임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섬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명기 6장에 요약되어 있는 자녀들의 영성 발달 계획을 따라야 한다. 거기에는 네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먼저 우리 하나님 여호와”(6:4)를 아는 것이고,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6:5),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6:6),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들을 자녀에게 전하는 것이다(6:20~23).

신명기 6장은 계속해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는 가르치고 말하기원리이다(6:7). 가르치기는 형식적인 교육을, 말하기는 비형식적인 지시를 의미한다.

두 경우 모두 부모와 자식이라는 환경 속에서 성경의 진리가 전달된다. 형식적인 가르치기는 가족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과 함께 연구할 때 일어난다. 비형식적인 가르치기는 일상의 환경 속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며 오히려 더 중요하기도 하다. 매일의 사건들이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18:19). 둘째는 묶고 새기기원리이다(6:8~9). 영적인 진리는 우리의 행동()과 태도(머리)에 묶여 있어야 하고 개인적인 삶(문설주)과 공적인 삶(바깥 문)에 새겨져야 한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가정에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가설명> 자녀교육에 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음식 조리법처럼 획일 된 양육법이 없다. 비록 어린아이들이라도 개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딱 맞은 교육법은 양육하는 부모가 성경과 하나님께 물어서 배워야 한다. 한나처럼 간절히 기도하며 아무쪼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양육하도록 소원을 두고 간절히 아뢸 때 성령께서 지도하실 것이다. 그럴지라도 부모는 자주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녀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비록 아이라고 독립적인 개성이 있다. 부모가 하나님께 속한 것처럼 자녀도 하나님께 속했고 부모는 하나님이 위탁하신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원을 두고 간절히 아뢸 때 하나님께서 양육을 지도하시지 않겠는가? 아침저녁 가족예배로 예배하는 삶이 어릴 때 몸에 배도록 가족예배를 중히 여기고 자장가는 찬미가 중에서 구속을 깨닫게 하는 가사가 있는 곡조를 택하여 부르고 그렇게 하여 자라는 모든 과정에서 아이의 뇌리에 깊이 신앙을 심어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그렇게 가르치면 성경의 약속대로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교훈 : 우리는 형식적이든지 비형식적이든지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도록 가르치고 그들의 생각과 삶에 말씀이 새겨지게 해야 한다.

 

 

522() 제자로 양육하기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1:3).

 

1. 18:18~19과 삼상 3:10~14을 읽고 두 아버지를 대조해 보라. 그들의 양육 방식의 결과는 어땠는가?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삼상3:10~14]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으로 교육했고, 엘리는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중히 여기는 태도록 자녀들을 길렀다. 결과는 이삭은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는 제사장들이어서 망했다.

 

부모는 자녀들을 제자로 양육해서 그들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할 책임이 있다. 자녀들을 더 많이 체벌하는 것이 그들을 더 바르게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믿는 부모들이 있다(22:15, 23:13, 29:15). 이런 성경 본문은 자녀들을 학대함으로써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남용되어 왔으나 종종 자녀들을 부모와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길로 이끌었다.

성경은 부모에게 친절로 가정을 다스리고(6:4, 3:21) 의로움으로 자녀를 가르치라고 당부한다(78:5, 22:6, 38:19, 1:3).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부양하고(고후 12:14), 그들이 따를 수 있도록 훌륭한 모본을 보여주어야 한다(18:19, 13:8, 2:2). 우리는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고(딤전 3:4~5, 12) 우리의 자녀들을 훈육하되(29:15, 17),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야 한다(66:13, 103:13, 11:11).

안타깝게도 성경은 잘못된 자녀 양육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삭과 리브가는 그들의 아들 에서와 야곱을 각각 편애했다(25:28). 그리고 나중에 야곱도 요셉을 편애했다(37:3). 엘리는 종교 지도자임에도 자녀를 바로잡는 데 실패했다(삼상 3:10~14). 엘리에 의해 양육을 받은 사무엘은 상당히 결함이 많은 아버지가 되었다(삼상 8:1~6). 다윗 왕은 간음을 저지르고, 살인을 지시함으로써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본을 따르게 가르쳤다. 므낫세 왕은 아하스 왕처럼 자기 자녀들을 마귀에게 제물로 바쳤다(왕하 16:2~4, 21:1~9).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성경에서 훌륭한 자녀 양육의 모본을 찾을 수 있다. 모르드개는 하닷사 곧 에스더 여왕의 훌륭한 양부였다(2:7). 욥은 자녀를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했다(1:4~5). 좋든 나쁘든 이 모든 모본을 통해 우리는 자녀 양육에 대한 교훈들을 수집할 수 있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참된 성경적 복음 진리를 깨닫도록 교육하고 사랑과 자비와 동시에 위엄과 공의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그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잘못을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꾸지람하고 체벌을 가하는 것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체벌을 가하려면 거지 부모의 감정이 실려서는 안 된다. 자기 화풀이를 자녀들에게 하는지 참으로 자녀들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한 훈육인지 자녀들은 당장 눈치 챈다. 어리다고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모가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직하게 대해야 한다. 부모가 잘 한다고 했는데 잘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경우에는 자녀에게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부모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고 자녀가 더욱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 권위는 합리적이지 않을 때 세워지지 않는다.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고 할 때 오히려 권위를 잃게 된다. 본이 되는 언행과 태도로 사랑과 공평으로 자녀를 대할 때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세운다. 아무쪼록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지혜로 올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자녀들로 양육하도록 기도로 성령의 지도를 구하자.

 

교훈 : 부모의 책임 중 하나는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하지 말고 사랑과 친절과 의로움과 훌륭한 모본으로 해야 한다.

 

 

523() 그대의 방탕한 자녀를 위한 싸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1. 그대는 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것은 보증이나 약속인가, 아니면 가능성인가?

 

: 부모는 자녀에게 바른 길이 무엇인지 그 길을 어떻게 걷는지 교육시킬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면 뇌리에 새겨진 교훈이 그를 지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를 제시하는 교훈이다. 가능성에 무게가 있는 것 같다.

 

때로 그대는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다. 시간을 들여 자녀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대로 살며, 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며, 그들과 함께 선교 활동에도 참여한다. 그렇게 자녀들을 신앙 가운데서 양육하지만 그들은 끝내 그 길을 떠난다. 그러면 마음이 몹시 아프고 그들의 구원에 대해 한시도 염려를 놓지 못한다. 그것이 꼭 부모 탓은 아니다. 자녀도 자신들만의 생각이 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어떤 이들은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을 마치 올바른 양육이 항상 자녀의 구원으로 귀결되리라는 약속이나 보장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에게 원리를 제시할 뿐 무조건적인 약속을 항상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에서 배워야 할 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교훈은 평생 동안 기억에 남으리라는 보증이다. 모든 아이가 부모의 신앙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나이에 이른다. 자녀에게 조심스럽게 경건의 훈련을 제공한 부모들은 그들이 자녀에게 가르친 교훈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이 곁길로 빠질지라도 마음속에 심긴 씨앗들이 계속 그들 가운데 머물러서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는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설 때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열렬한 기도로 그대의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라. 누군가 그대의 고통을 안다면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부모이셨지만 그의 자녀들은 얼마나 많이 그분께 등을 돌렸던가!

그대는 방황하는 자녀들을 사랑과 기도로 돕고 그들이 고뇌할 때 그들 편에 설 준비를 해야 한다. 도움과 기도의 요청을 너무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자신을 비난하지도 말며 다른 가족들을 등한시한 채 방황하는 자녀에만 관심을 기울이지도 말라. 방탕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가정에 분란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자녀들을 위해 분명한 경계를 설정하라. 기억하라. 하나님은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대의 자녀를 사랑하신다.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그대의 자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작품임을 받아들이라.

 

<부가설명> 세상에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려면 쉬운 것이 있겠는가마는 자녀를 훌륭한 인격자로 양육하는 것은 그 중에도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녀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먼저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교육이라는 말을 잘 쓰지만 사실 자녀교육은 부모교육이라는 것을 부모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바르게 교육되지 않았는데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전에 골초가 된 사람이 신앙하게 되고 담배를 끊은 이야기를 들었다. 골초가 된 이유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담뱃대 대통에 가루담배를 쟁여 넣고 손자에게 부엌 불에서 담뱃불을 붙여오라고 한데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담뱃대를 가지고 나가서 부엌에 남아 있는 불에 대통을 대고 물부리를 빨아서 불을 붙이기를 매번 하다가 결국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담배 피우도록 교육했다는 인식이라도 있었을까? 교육은 이처럼 되는 것이다. 교과 저자가 말하듯이 비형식교육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인식이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녀들이 있거나 없거나 보거나 보지 않거나 그리스도인 부모는 그리스도인다운 생각, , 감정, 태도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비형식교육 곧 간접적인 교육으로 아이들에게 본을 보게 하는 것이다. 형식교육은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비형식교육인 간접교육은 곧 부모의 신앙생활 모습이 자녀들에게 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독실한 부모가 자녀들이 자기처럼 신앙하게 하려고 강압적인 신앙교육을 시키려 한다면 90%는 실패하지 않을까? 정말 기도하며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로 신앙생활 하는 비형식교육이 우리의 가정에 넘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 부모가 최선을 다해 자녀를 신앙 안에서 양육할지라도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부모는 기도하면서 자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524()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대는 그대의 어린 자녀들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기도할 시간을 내라. 하나님과 그대의 자녀들이 교제하는 이 시간은 조금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대의 방문객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게 행하여야 할 사업을 주셨습니다. 내게는 잡담할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현세와 영원을 위하여 행하여야 할 사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대의 첫째 의무는 그대의 자녀들에 대한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266~267).

부모들이여, 자녀들이 어린 아기로 그대의 팔에 안겨 있을 때 훈련의 첫 교육을 시작하라. 그들의 의지를 그대들의 의지에 굴복시키도록 가르치라. 이 일은 일관성 있는 태도와 단호함을 보임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부모는 그들 자신의 심령을 완전히 다스려야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하게 자녀의 의지를 제어하되 마침내 부모의 원대로 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적당한 때에 이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최초의 분노의 표현이 제어되지 않고, 자녀들은 완고하게 자라난다. 그래서 완고한 마음은 자녀들의 성장과 함께 커지고, 그들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한층 더 강화된다”(교회증언 1, 21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굴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어느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난 뒤 몇 년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아이들이 태어난 지 몇 년 만에 제가 깨달은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의지의 실재이고, 둘째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실상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진리를 자녀들로부터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성장과정에서 부모가 교육하는 대로 자녀들이 성장해주지 않는 모습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깨닫는 것도 은사가 아닐까? 진작 깨닫고 하나님께 부탁했어야 할 것이다.

 

자녀들의 의지를 다듬기에 적합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의 뜻에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다듬을 수 있을까요?

태아교육부터 중요하다. 부모가 진정으로 주님께 굴복하고 거듭난 삶을 이룰 때 가장 빠르게 그 일을 이루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자녀들의 의지를 맞추기 전에 부모가 먼저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