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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상실의 때

 

61일 안식일

일몰오후 747

 

연구 범위 : 5:22~24, 35~43, 벧전 5:6~7, 37:17~28, 16:13, 6:16, 고전 15:26

기억절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3:8).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순간, 그들은 첫 번째 상실, 곧 순진무구함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것의 상실은 이기심, 대립, 비난과 서로를 지배하려는 최상권을 향한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타락 직후에 벌거벗음을 가려줄 동물 가죽 옷을 받았을 때, 그들은 첫 번째 생명의 상실을 목격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접근이 금지됨으로써 그들은 또한 완벽한 거처를 잃었으며 몇 년 후에 가인의 손에 아벨까지 잃었다. 결국 그들 중 한 명이 먼저 배우자를 떠나보내야 했고, 생존한 배우자도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되었다. 이토록 많은 손실이 하나의 잘못된 결정의 결과로 이르러왔다.

우리는 그러한 상실의 실상과 아픔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상실이 가정을 강타할 때에 우리는 이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다. 가족 안에서 형성되는 유대감이 가장 친밀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닥치는 상실감의 충격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주에 우리는 다양한 상실의 시기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가정생활에서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운다.

느끼기 : 나에게 있는 문제 요소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필요성에 공감한다.

행하기 :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가정에 실질적인 도움과 위로를 준다.

 

우리 인생에서 한번 잃으면 되찾기 어려운 것들은 무엇일까요?

건강, 명예, 신앙, 생명. 등등. 생각해보자.

건강을 잃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때 그런 상황을 어떻게 영적으로 대처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확식하는 믿음으로 성경의 약속을 굳게 잡고 확고히 서야 한다.

왜 우리는 중독이나 유해한 습관에 빠지면 안 됩니까?(6:16)

습관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가족들은 어떤 문제들로 신뢰를 잃게 되며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영적인 과정은 무엇입니까?

과격한 언사, 폭행, 약속불이행, 등등. 회개와 용서와 화해와 기도로 주님께 부탁하는 것.

 

결론 : 가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허락하신 작은 천국이지만 죄로 말미암아 다양한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의 질병이나 사별을 포함하며, 때로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기질과 잘못된 습관에서 비롯된 신뢰의 상실과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위로와 용기 그리고 치유의 약속을 받습니다.

 

 

526() 건강의 상실

 

우리가 생명나무에서 멀어진 지 수천 년이 지났다. 우리는 특별히 육체적인 건강과 관련하여 그러한 점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어려서 외상에 의해 사망하지 않는 이상 우리 모두는 건강의 상실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런데 건강의 상실이 우리 자신뿐 아니라 가족 중 하나에게 타격을 가한다면 단순한 어려움 이상의 얼마나 큰 고통이 있겠는가? 병든 자녀를 둔 부모 중에 아이 대신 자신이 아프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선택권이 없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이 다루는 모든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5:22~24, 35~43, 15:22~28, 4:38~39, 4:46~54)

[5:22~24, 35~43]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15:22~28]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4:38,39]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46~54]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가족 중에 질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특히 자녀의 질병에 대한 것이 많다. 다른 가족이 예수님께 병 낫게 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일이 많았겠지만 이 기사들 속에서 가족의 일원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망뿐 아니라 만성 질환과 통증과 질병이 들어왔다. 만성 질환이나 불치병에 걸리면 우리는 충격, 분노, 절망에 휩싸여 이렇게 소리지르고 싶어진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의 분노와 아픔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서 그분께 따진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사망을 이기실 때까지 아픔과 고통의 비밀은 여러모로 풀리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진리를 얻을 수는 있다. 욥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동안 그는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경험하였다.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라고 말했다.

바울은 모종의 만성 질환을 앓았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고, 아픔을 느끼고 있는 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게 한다(고후 1:3~5). ,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부가설명> 누가 질병을 선택하겠는가? 자기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질병이 찾아오니 원망이 생길 수 있다. 가벼운 질병도 있고 난치병도 있고 불치병도 있다. 오늘날 사람이 자기 의지로 선택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불행과 드물기는 하지만 행운도 있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건강의 상실이다. 가죽 일원이 건강을 잃으면 온 가정이 아프게 된다. 그것도 중병이면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은 지병이 낫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대답하셨다.(고후12:9) 우리가 택하지 않은 질병이 엄습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오히여 그것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어도 사는 생명이 있다.(11:25) 더욱 자기를 살피고 겸손하게 굴복하며 주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구하고 건강습관이 올바르지 못했다면 그것을 고쳐서 주신 건강기별을 따라 생활하도록 회개하고 굴보하는 믿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기도로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봉사를 했지만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에 신유의 이적을 베풀지 않았다.(딤전5:23) 또 에바브로디도가 가히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앓았으나 신유의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3:25~27) 흔히 말하는 신유의 은사는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으로 사용하게 하신데 목적이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성경이 권고하는 것이다.(5:16) 그것은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신앙생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사랑을 더욱 실감나게 나타낼 것이다.

 

교훈 : 죄는 우리의 삶에 건강의 상실을 초래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동정할 수 있게 우리를 준비시킨다.

 

 

527() 신뢰의 상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우리 모두는 우리를 믿는 사람의 신뢰를 저버리기도 하는 죄 많은 인물들이다. 물론 우리의 신뢰를 배신하는 자에게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신뢰의 상실도 견디기 어려운데 하물며 가족을 배신하거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할 때 이르러 오는 신뢰의 상실은 훨씬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관계 재건을 위해 노력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손실을 줄이고 달아나는 것이 손쉬워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이 배우자 같은 가족의 일원일 때는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결혼한 목적 중 하나는 신뢰가 깨질 때 그것을 재건할 방법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1. 신뢰의 관계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어떻게 신뢰와 관계가 둘 다 회복될 수 있는가?(벧전 5:6~7, 요일 4:18, 5:16, 6:14~15)

[벧전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겸손하게 주님의 손길에 맡기고 용서하는 정신을 구하며 사랑으로 자아를 낮추고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

 

깨진 신뢰를 재건한다는 것은 일종의 여정과 같다. 그대는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나아가야 한다. 그 여정은 받았던 상처가 무엇이고 상처를 준 사람이 누구이든 상처에 대한 진심어린 인정과 사실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불화의 원인이 간음이었다면 치유는 배신자가 사죄할 때에 시작된다. 치유 과정의 일환으로서 사죄는 배신자 쪽의 철저한 솔직함을 수반해야 한다. 어떤 것도 감춰서는 안 되며 만일 그럴 시에는 다시 일으킨 신뢰도 깨질 것이다. 다시 신뢰에 균열이 생기면 이전보다 회복이 더 어려워진다.

신뢰의 회복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상처가 심할수록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대가 두 걸음 전진했는데 세 걸음 후진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음을 받아들이라. 그러나 언젠가부터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에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탈출하고 있음을 느낄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가 깨진 관계를 재건한 후로 더 깊고 친밀하며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부가설명> 잘못하는 일에 일방적으로 100% 잘못하는 일을 아주 드물다. 외견상으로 한쪽이 100% 잘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잘한 것 같은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다. 고멜이 배반하고 떠났으나 호세아가 먼저 찾아가서 그를 용서하고 데리고 왔다. 용서와 화해는 이렇게 성립된다. 이런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닌가? 용서를 구하는 사람보다 용서할 사람이 먼저 용서할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부르실 때 먼저 희생으로 용서하실 것을 증명해 주셨다.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아무리 용서를 구하고 싶어도 용서할 사람이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는 태도를 보이면 감히 용서를 청하려 가는 일이 엄청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받을 사람은 자아를 죽이고 접근하고 용서할 사람도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죄를 받아들이고 피차 주님 앞에 함께 회개의 기도를 하고 화해하여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은 사탄의 궤계에 빠진 정신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고후2:10,11) 예수님의 정신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여 사랑의 관계 속에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교훈 : 가족 특히 배우자 간의 신뢰의 상실은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 신뢰의 회복을 위해서는 진정어린 사죄와 더불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528() 신뢰의 상실 2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가정 폭력은 신뢰가 깨지는 또 다른 이유이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사에 따르면 가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가정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폭력이란 언어, 신체, 감정, , 능동적 또는 수동적 방치를 포함한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의 일원 또는 복수가 또 다른 대상에게 저지르는 공격 행위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백성 중에 벌어진 가정 폭력의 일화들을 포함한다.

 

1. 이러한 부분을 읽을 때 그대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성경에 실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7:17~28 -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판 일화

삼하 13:1~22 -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일화

왕하 16:3, 17:17, 21:6 -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한 일화

 

: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2:3)이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으로 보이다. 진정한 거듭남으로 이런 모습이 개선될 수 있다.

 

가학적인 행위는 힘을 행사하여 상대를 지배하려는 사람의 의식적인 선택이다. 음주, 스트레스,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분노를 해소해야 할 필요성, 또는 피해자의 어떤 행동 등 그 무엇도 폭력에 대한 설명이나 변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피해자는 학대자의 학대를 야기했다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학대는 사랑에 대한 곡해와 오용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13:10)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치료는 학대자들의 행동에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단 장본인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할 경우에만 그렇다.

그분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학대를 멈추고, 그들의 태도와 행위에 대해 회개하며,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보상하게 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다른 이들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아가페 사랑의 특성을 품도록 능히 차고 넘치는 도움을 주실 수 있다(비교 엡 3:20).

 

<부가설명> 사도요한의 별명은 보아너게이다. 뜻은 우레의 아들이다. 얼마나 끔직한 별명인가?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모하며 본을 따르기를 갈망했고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 세상의 인간관계는 대부분이 이해관계이다. 자신에게 이로우면 사귀고 이롭지 않으면 멀리한다. 마음을 주고 사귀던 사람이 이해관계로 배신할 때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신뢰가 지속되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거나 아니거나 간에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보아너게가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이다. 요즘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시대이다. 바울을 딤후 3장에서 말세가 그런 세대라고 이미 예언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딤후3:3,4) 이런 시대에 문화 속에서 재림성도들은 관용을 나타내고(4:5)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잘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생각과 언어로 학대를 연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하도 꼴사나우니까 생각으로 학대를 연습하는 때가 많게 된다. 예수님께 맡기는 것을 계속 훈련할 필요가 있다.

 

교훈 : 많은 가정이 폭력의 문제로 신뢰의 상실을 경험한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전문적인 치료뿐 아니라 영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529() 자유의 상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6:16).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중독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과학자들은 뇌의 어느 부위에 소원과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식별하기도 하지만 중독의 원인은 아직 규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중독의 위치를 찾는 것과 그런 중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중독은 중독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까다로운 문제이다. 가족 중 누군가 벗어나지 못할 어떤 힘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들 모두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약물, , 담배, 도박, 음란물, 섹스 심지어 음식 등을 습관적으로 오용 또는 남용할 때 중독은 더욱 심화된다. 그것이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물론 자신은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고 하지만 중독된 무엇인가에 노예가 된 이상 그대는 실제로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중독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9).

 

1. 사람들을 중독으로 이끌어가는 것들은 무엇인가?(16:13, 6:16, 1:13~15, 요일 2:16)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욕망(慾望), 욕심(慾心)이다.

 

죄와 중독이 꼭 같은 것만은 아니다. 죄는 지을지라도 그것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중독으로 발전한다. 중독으로 발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죄를 멈추는 것이 훨씬 낫다.

물론 죄와 중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최후의 해결책은 새 마음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바울도 로마 신자들에게 죄와 중독의 본성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고(6:8~13)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부가설명> 아담이 선각과를 먹자 그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떠났다.(4:1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육체의 생명을(17:11) 허락하셨다. 육체의 생명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생명이다. 이 생명은 사망의 생명이다. 욕심, 욕망은 이기심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은 육체의 생명의 본질이다. 사람이 이기심에 사로잡히면 이기심의 노예가 된다. 이기심은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킨다. 쾌락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쾌락을 즐기려는 욕망은 쾌락을 자극하는 것들을 탐하게 된다. 그것이 도박, 마약, , 담배, 여자 등등을 탐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 노예가 된다.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교회에 다녀도 육체의 생명으로만 살게 되고 그것은 장소만 바꾸어서 사망의 생명의 본질을 나타낸다.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이유 중에 많은 경우가 그렇다. 이 육체의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겨야 한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8:13) 말씀이 바로 이것을 뜻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6,17)

 

교훈 : 반복적인 죄의 습관은 흔히 중독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박탈이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하나님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530() 생명의 상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우리는 인간으로서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는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목격하며 그것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1. 고전 15:26을 읽어보라. 죽음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묘사된 이유는 무엇인가?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사망은 실제로 원수이고, 또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폭군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죽음이 얼마나 큰 원수인지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죽은 사람들에게 좋은 점도 있다. 그들이 주 안에서 눈을 감았다면 잠시 후에 그들이 불멸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잠자는 것이며 한순간의 침묵과 어두움에 불과한 것이다.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으며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시대의 소망, 787).

죽음 이후에 오는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 특별히 남아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다. 그러한 추모는 상실에 대한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에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적인 고통이다.

추모의 과정이 모든 이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몇 단계가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우선 충격과 부정이다. 심지어 죽음을 예상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충격은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압도되는 것을 방지하는 정서적인 작용이다. 그것은 두세 달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그대는 또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계속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에 잠기는 시기를 보낼 수도 있다. 대화도 종종 그들에 대한 주제로 전환된다. 이런 시기는 육 개월에서 일 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

절망과 우울의 단계는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추모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그대는 분노, 죄책감, 회한, 슬픔, 염려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추모의 목적은 모든 슬픔이나 상실의 기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회복이라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대는 일상적인 활동에 새로운 관심을 갖고 날마다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영생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그들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육체의 생명을 허락하시고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유예하셔서 수명을 주셨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 되었다. 수명을 누리는 동안 생육하여 가족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여 생명을 잃으면 가족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예수님 안에서 죽어도 사는 하나님의 생명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다. 그들은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서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한 사람들은 첫째 부활 곧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서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은 그냥 전혀 의식 없이 쉬는 때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첫째 부활에 눈을 떴을 때는 예수님을 볼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식구들도 반갑게 만날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상실하는 것도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상실을 뜻한다.

 

교훈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은 여러 단계의 추모의 과정을 걸쳐서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더욱 위로를 받는다.

 

 

531()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많은 사람이 중독의 결과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돈과 직장과 건강 그리고 자유를 잃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와 중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8:36). 예수님은 또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28:20, 43:2). 따라서 우리는 홀로 이 전쟁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삼상 17:47) 그분이 승리를 약속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벧전 1:3~9). 그대는 오늘부터라도 어떤 중독의 문제라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떠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도 원하고 하나님도 주기를 원하시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대가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며,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단지 그대가 포기하지 않고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이상 그분도 그대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전혀 잘못은 아니다. 주께서 전문 의료인을 사용하셔서 그대의 건강 문제를 도우실 수 있는 것처럼 전문 상담가를 사용하셔서 중독의 문제를 도우실 수도 있다.

역경과 시련이 둘러쌀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하여 구원하기에 능하시고 건져낼 힘이 있으신 주님께 확신을 가지고 도움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구해야 한다. 기도는 의무이자 필요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찬미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든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더 자주 감사의 뜻을 표현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감사하는 정신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깊이 명상하고 회고해야 하며 비록 슬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2, 2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관계의 상실 또는 깨진 관계를 치유할 때 용서가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6:12~15, 18:21~22). “사랑은원한을 품지 않습니다”(고전 13:5, 쉬운성경).

[6:12~1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화해를 이루고 사랑을 나타낸다. 동시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사실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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