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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예수님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

 

817일 안식일

일몰오후 723

 

연구 범위 : 1:46~55, 4:16~21, 7:18~23, 12:15~21, 21:12~16, 11:15~19, 53:3~6

 

기억절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4:18~19).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분은 평범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가르치고 헌신하는 생애를 통해 이를 보여주셨다. 그분이 취하신 여러 행동은 다른 이들의 삶에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측면의 메시아 사역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예언했고, 심지어 첫 설교로 기록된 예수님의 사명 진술(4)에서도 예언되었다. 더욱이 복음서의 기자들은 구약 선지자들의 언어를 빌려 그들이 진술하는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설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선지자들의 기록에서도 예수님의 생애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인식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부당한 재판절차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불공정함과 포악함을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였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불공정함이 어떤 것인지 아셨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 악의 참담함을 접하셨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은 그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삶과 사역에 반영하고 실천하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 십자가에서 불공정과 억압을 겪는 우리와 자신을 일치시키신 예수님의 사랑에 위로를 받는다.

행하기 :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아래가 바뀐 나라라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1:52~53 참고)

세상은 권력이 지배하지만 천국은 권력이 섬기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명 진술을 보았을 때 그분이 전하시는 천국 복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4:18~19 참고)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펼치신 회복 사역은 어떤 면에서 세상에 책망의 기별이 되었을까요?(12:18~21)

사탄의 일이 어떤 것인지 폭로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이 땅의 억눌린 자들과 자신을 어떻게 일치시키셨습니까?

이땅의 모든 사람들, 특히 억눌린 사람들은 실상으로 죄와 사망에 억눌린 것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죄 자체가 되셔서 이런 사람들과 동일한 자리에 두셨다.(고후5:21)

우리 교회가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려면 어떤 일들을 시작해야 할까요?

섬기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먼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밖으로.

 

결론 : 예수님의 메시아 사명은 선지자들의 사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시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셨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사역과 희생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세상을 책망하는 기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811() 마리아의 노래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1:47~48).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라. 마리아는 불과 며칠 전에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기별을 받았다. 그는 그녀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다. 그녀 역시 기적적으로 아이를 가졌다. 영적인 통찰력으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소식을 알아차렸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선하심을 송축한다.

 

1. 1:46~55을 읽어보라.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1:49)다는 찬양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에 주목하라. 그것은 마리아 본인에게 또는 더 보편적인 측면에서 어떤 의미였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이 개인적이면서도 또 보편적인 강조점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46~55]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 동정녀인 마리아 개인에게 구주를 임신하게 한 것이 큰 일이며 동시에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나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신 것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을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래는 시편 또는 구약 선지자들의 글에 삽입돼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대한 경이와 감사의 마음에 북받쳤다.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았다. 더욱이 그녀의 민족과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였다.

마리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은 능하시고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실 뿐 아니라 비천하고 가난하며 짓밟힌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자비로운 분으로 비춰진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박한 아기 탄생의 소식을 전하고 떠나자 그녀는 이렇게 노래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1:52~53).

지상 생애가 시작되면서부터 예수님은 한 통치자로 소개되었다(1:43). 그러나 그분은 다른 종류의 왕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여러 주석가들의 설명처럼 예수님이 수립하고 즉위하시게 될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위아래가 바뀐 나라가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가장 낮아지고, 가난하고 짓눌린 자들이 자유롭고, 부하게 되며, 높이 들릴 것이다.

 

<부가설명>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소외된 자들을 잘 보살피고 돕는 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성도가 할 봉사이기도 하다. 그런 환경 때문에 진리를 잘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2:5)고 하였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세상에 대하여 부자들이 있고 물질적으로 부하여도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이 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이었다.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들을 가난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동정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그래서 복음의 소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도는 이 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다 섬기는 거룩한 실력을 배양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난한 자였을 것이다. 그를 택하여 구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이런 찬미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성령께서 그 입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늘의 질서는 세상 질서와 전혀 다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늘 질서를 따라 일해야 하는 기관이다.

 

교훈 :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일으키고 구원하시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812() 예수님의 사명진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4:18).

 

원래 그날 읽기로 예정되어 있었는지 예수님이 두루마리에서 의도적으로 관련 성경절(61:1~2)을 찾으셨던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분의 첫 번째 공중 설교(4:16~21)의 본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는 말씀으로 마무리된 그날의 짧은 설교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출발점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치 마리아가 부른, 위 아래가 바뀐 나라의 노래에서 곡조를 따와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예수님의 일화를 재진술하면서 누가는 그분이 무엇을 하고 계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아가 30년 전에 부른 노래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었다. 가난하고 상처를 받으며 억눌린 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대상이자 수혜자였다.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서 인용한 이 말씀을 그분의 사명진술로 채택하셨다. 그분의 사역과 선교는 영적이면서 실제적이었다. 우리는 그 두 측면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자주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에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돌보는 것은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의 일부분이었다.

 

1. 4:16~217:18~23을 비교해서 읽어보라.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그분의 사명을 전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불행을 없애시고 사람을 영원히 행복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그들에게 주신 사명 역시 그분의 사명과 일치했다. 그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10:7)고 선포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10:8)어야 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행해야 할 사역은 백성들을 예수님의 나라와 사역에 초대하고 그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반영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제자들 역시 지극히 작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했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사명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요일3:8) 사망, 질병, 가난. 고통, 소외 등등은 다 마귀가 해놓은 일들이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돕는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성경이 계시하고 권하는 이런 일을 행하는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의 모든 불행들은 다 마귀가 행한 일들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회복시킨 모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단순히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도덕적 자비를 베푼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은 곧 고통당하는 자들을 현실적 고통에서 구원하는 일도 되었다. 예수님의 봉사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목적을 수행하신 것이다. 나병환자 열 명 중에 한 명만 감사를 표했다. 다른 아홉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고통당하는 자들을 도우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도움 받는 사람들은 그것이 영생이 되든지 현실적 이익만 챙기든지 그들이 할 일이다. 예수님의 사명진술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봉사의 의미도 함께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훈 : 예수님이 반포한 메시아의 사명진술은 억눌린 자들을 일으키는 실질적인 사역을 포함하며 이는 제자들도 전해야 할 천국 복음이었다.

 

 

813() 예수님이 치유하심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12:20).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특히 치유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그분은 눈먼 자들을 고치시고 오랜 세월 병마에 사로잡혀 고통당했던 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셨다(5:24~34, 5:1~15 참고).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걷지 못하는 자들을 고치시고, ‘부정한나병 환자들을 말씀만이 아닌 손으로 만져 치료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마귀들과 맞서셨고 죽은 자들까지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들이 군중의 관심을 끌고 의심과 비난을 일삼던 수많은 자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간혹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물론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그 지시를 따라서 놀라운 소식을 속으로만 간직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분의 이적이 단지 구경거리 이상의 것임을 알리려고 노력하셨다. 당연히 그분의 최종 목표는 백성들이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한편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은 동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천 명을 먹이시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14:14). 예수님은 상처를 입은 자들의 고통을 느끼셨고 자신이 접촉하는 자들을 돕고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주셨다.

 

1. 12:15~21에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읽어보라. 이사야와 마태는 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단지 여러 명의 병자를 고치신 행위 그 이상이라고 여겼는가?

[12:15~21]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즉 영원한 치료를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이적은 동정과 공의의 행위였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백성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7:3 참고).

 

<부가설명> 예수님이 봉사하신 모든 봉사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월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했다.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삶과 행동 전체가 복음 선포였다. 이적이나 동정이나 사람들을 대하신 모든 모습은 행동으로 선포한 복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할 때 예수님이 하신 교훈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구현이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행사가 복음을 설명하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세심하게 연구하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복음의 내용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봉사의 복음적 뜻을 깨닫고 그와 같은 정신으로 세상에서 봉사하면 그들도 삶으로 복음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구걸하는 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단순한 동정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의 복음이 전달되도록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동정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를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랑과 진심으로 그런 봉사를 한다면 성령께서 그 봉사가 생명으로 이끄는 봉사가 되도록 일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충성하면 결과는 성령께서 책임지실 것이 아니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동정의 마음으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러한 이적이 구경거리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에 대한 질책이 되게 하셨다.

 

 

814()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21:13).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병든 자들과 어린이들을 보살피시고, 잃은 자들을 찾는 이야기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자상한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의 관습에 대해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 사뭇 놀라게 된다.

 

1. 21:12~16, 11:15~19, 19:45~48, 2:13~17을 읽어보라. 이와 비슷한 비유가 모든 복음서에 수록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1:12~16]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1:15~19]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19:45~48]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2:13~17]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책망하시고 예배를 본연의 위치에 두도록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거기에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이 포함되었다.

 

모든 복음서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일화는 극적인 요소, 행동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할 공간을 제물이 될 가축을 파는 곳으로 전락시킨 사실을 심히 우려하셨다. 희생 제사가 세상 죄를 대신할 그분의 대속을 대표해야 하는데 이 얼마나 심각한 모독이란 말인가!

그같이 저돌적인 행동은 구약 선지자들의 전통과 일치한다. 이 기사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 또는 각 복음서 기자들이 이사야, 예레미야 또는 시편을 인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암시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했기 때문에(21:11 참고) 그분이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시자 그분께로 나아와 고침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분이 만져주시면 병이 나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속에서 소망이 자라났다.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그들의 권력과 사회 질서의 안정에 위협적인 선지자로 인식하고, 물러나서 과거에 그들의 선조들이 선지자들을 모살했던 것처럼 그분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19:47~48 참고).

 

<부가설명> 창조주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거주하시려고 하셨다. 즉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산 성전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망의 존재가 되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마귀의 전이 되어버렸다. 거기에는 이기심이라는 우상이 자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적인 일을 이기심의 이익을 채우는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책망하셨는데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성전 청소 사건이 4복음서에 다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공중봉사를 시작할 때에 있었던 것이고 공관복음의 것은 공중봉사를 끝마칠 때 있었던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인간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전으로 회복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고 하셨는데 공관복음에서는 강도의 소굴을 만든다.’고 하셨다. 점점 더 악화되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주님의 생명력을 전하는 도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진정한 예배와 공의의 회복을 호소했던 선지자들의 사명이 그분에게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815()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53:5).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호소를 보고 들으시며 억눌린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의 가장 비참하고 믿기 어려운 몰인정과 억압, 불공정을 경험하고 견디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자비와 선함을 나타내었건만 그분은 백성들의 증오와 시기와 불의의 결과로 죽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시고, 체포되어 재판, 고문, 희롱, 십자가형과 죽음을 당하시는 과정에서 주님은 잔악한 고초를 겪으시고 폭압적인 힘에 녹초가 되셨다. 무죄하고 순결하며 선하셨기에 이 모든 것이 그분에게 더 극심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7~8).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아름답게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겪으신 고통의 잔인성과 부당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53:3~6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 일어날 일 곧 무죄한 자가 겪는 죄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말씀에 따르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겪으신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53:3~6]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죄인들이 무죄하신 주님을 학대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당할 것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악함과 불공정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임을 아셨다. 무죄한 사람을 처형하는 것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다니! 하나님이 깨지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와 그분 자신을 그렇게 동일시하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동정과 자비와 진실함에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4:15).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인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복음을 우리가 어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므로 사망을 정복하셨다. 예수께서 겪으신 모든 학대와 고통은 죄의 일상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죄는 의를 견디지 못한다. 의를 없애므로 죄가 행세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의 자체이시다. 죄가 그분을 이렇게 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죄는 그 본질이 사망이다. 의의 본질은 생명이다. 선악간의 대쟁투는 도덕적 선악의 대쟁투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 간의 투쟁이다.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는 자는 루시퍼인데 그가 창조주를 거절하고 떠날 때 그는 존재와 생명을 반납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간 것이다. 그가 창조주 여호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서는 창조주를 없애야 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분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자, 사망이 된 루시퍼는 그분을 사망에 가두려고 발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고 루시퍼는 영원한 사망의 정죄로 그것이 집행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2:14, 고전15:26 참고) 창조주이시며 생명자체이신 말씀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자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창조주를 없애려고 온갖 모욕과 학대와 증오를 나타내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지도자들을 충동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2:14)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된 사건이다. 그분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자기를 두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겠는가?

 

교훈 :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심한 불공정을 경험하시고 억압당하는 약자와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셨다.

 

 

816()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구호봉사>, 117~124 ‘주님의 발자취를 따름’, <치료봉사>, 29~50 ‘봉사의 날들’, <시대의 소망>, 723~740 ‘빌라도의 법정에서를 읽어보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벌하시리라는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 그분은 무한히 자비하시니 죄인에게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스스로 안심하는 자들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한다.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 것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모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죄인과 같이 되셨다. 그분은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외면을 당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의 심장은 터지고 그분의 생명은 부서졌다. 이 모든 희생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큰 희생으로써 마련된 속죄에 동참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그 책임을 지고 죄의 형벌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539~5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부당함, 불공정함에 대해 말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하신데 죄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까?

불공정은 죄의 성질 중에 하나이다. 사람이 죄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불고정이 만연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죄 자체가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이 죽게 되었다. 그가 부활하시므로 사망을 폐하여졌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이 드러났다.(딤후1:9,10)

 

예수님은 그분이 가리키는 나라를 위한 정치적인 개혁을 결코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에는 짓밟히고 억눌린 자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폭력과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억눌린 자들을 도우려는 세력과 협력할 필요는 있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문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치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치적 권력을 잡으려는 숨은 야망이 약동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야망에 동참할 수 없다.

 

요약 :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 선지자들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급기야 가장 심각한 부당함을 경험하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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