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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하나님의 부르심

 

1019일 안식일

일몰오후 550

 

 연구 범위 : 7:10, 1:1~11, 9:24~27, 8, 8:28~29, 9, 3~4

 

 기억절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7:27).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각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시는가? 어떤 일에 대해 누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기준이 있는가? 그러한 기준을 바라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은 다른가? 대부분은 마지막 두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 우리를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준비시키실 때가 있는 반면 우리가 단지 겸손히 자원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해서 섬기게 하실 때도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특별한 과업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흥미롭게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황폐하게 된 것을 보수하라는 특별한 임무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에는 여러 과업이 동반된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전과 도시를 재건해야 했다. 동시에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헌신적인 관계로 돌아가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중요한 부르심이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뿐 아니라 특별한 과업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느끼기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있었던 열정과 자발적인 헌신의 정신을 본받는다.

행하기 :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선택한다.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 하고 싶을 때 그것은 그분의 부르심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특별한 과업으로 부르시는 선택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구원으로 부르심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사명의 선택은 부르시는 분의 전권에 속한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은 예언적으로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까?

다니엘서 8, 9장의 2300주야, 70이레 예언의 기산점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결실을 거두려면 우리는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까요?

부르심에 응하고 충성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사역이 성경 예언의 일부가 되려면 우리에게 어떤 열정과 헌신이 필요할까요?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열정과 헌신이 필요하다.

 

결론 :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이라는 까다로운 과업이었지만 그들의 사역과 헌신은 예언의 성취였을 뿐 아니라 더 큰 예언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과 사역도 예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10 13()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부르심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

 

우리는 에스라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원하여 가고자 했다. 그는 지도자였다. 그는 숙련된 학자이자 교사였다. 물론 다른 이유를 더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스라에게 왜 이러한 임무가 부여되었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하나의 성경절이 있다.

 

1. 7:10은 에스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에스라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구하고 그것을 행하기로 어떻게 결심했는가?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결심했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이다. 그 말은 준비되다’, ‘정하다’, ‘의지를 다지다’, ‘확고하게 세우다’, ‘안정되게 하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진술은 에스라가 자신의 마음을 확고하게 정했다또는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에스라는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본을 보이며 1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3년 동안 그는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곽이 완성된 후에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임을 소집했다. 에스라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2. 느헤미야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인가? 1:1~11을 읽어보라.

[1:1~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 느헤미야가 간절히 기도하고 자원하여 회복을 위해 가기를 원하였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업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열정이 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그 일을 자원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소망에 응답하셨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좋아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어려운 임무만을 부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리가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종종 하나님이 주신 소망일 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열정이 있기를 바라신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의 천부적인 자질과 상관없이 특별한 은사로 능력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타고난 자질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자질을 주님을 위하여 능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고전 12장을 읽으면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이에게는이럼 표현이 여러번 나온다. 어떤 이’ ‘다른 이는 그 은사를 받아 사용하기에 천부적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자질들이 있다. 그 자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에스라처럼,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헌신하면 그 자질을 극대화하여 주님의 사업에 능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다.

바울은 유대인의 학문에도 능하고, 헬라 학문에도 능했다. 또 로마 학문에도 소양이 있었다. 그는 외국어를 많이 구사할 수 있었다.(고전14:18)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가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을 때 그에게 있는 이런 자질들이 주님을 위하여 남김없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자질이 훌륭하게 느껴지든지 초라하게 느껴지든지, 즉 다섯 달란트이든지 한 달란트이든지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드리면 그것을 배가하도록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그런 본보기이다. 성막을 제작한 브사렐과 오홀리압도 그렇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 모든 것을 드리자. 주께서 가장 합당하게 사용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누구보다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일을 위해 자원하고 헌신하는 자들을 준비시키고 택하셔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신다.

 

 

10 14() 예언적인 시기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7:13).

 

우리는 1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스룹바벨(기원전 538)과 에스라(기원전 457)를 특별한 사역으로 부르셨는지에 대해 공부했다. 2과에서는 느헤미야의 부르심(기원전 444)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부르심이 하나님의 예지와 조화롭게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스룹바벨은 특별한 임무를 행하도록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

 

1. 에스라는 몇 년에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는가? 때는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반포했던 해였다. 그 해는 예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9:24~27을 읽어보라.

[9:24~27]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 그 해는 다니엘을 통하여 주신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된 바로 그 해이다. 그 해는 또한 다니엘서 8:142300주야가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9:25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 예언의 마지막 이레에 대해서는 27절에 언급되어 있다. 한 이레는 7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언적으로 7년과 같다(14:34, 4:5~6 참고). 그러므로 이 예언은 70이레 곧 490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70이레 예언의 기산점은 언제인가? 예언에 따르면 그것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조서가 반포된 때부터이다.

유대 백성의 회복과 관련하여 반포된 조서는 총 3개가 있었다. 고레스, 다리오 그리고 아닥사스다가 모두 그들을 복권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의 조서만이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조서만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송축으로 이어졌다(7:27~28).

7:7~26에 언급되어 있듯이 우리는 70이레 예언이 아닥사스다 1세 제7년인 기원전 457년부터 시작된다고 계산한다. 게다가 그해는 단 8:14에서 말하는 2,300주야 예언의 기산점이기도 하다.

즉 이 조서는 두 예언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70이레의 예언은 기원후 34년에 마친다. 그해, 초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고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마지막 이레의 중간에 해당하는 기원후 31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데 두 가지로 일하시는 것 같다. 하나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하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게 하시고 고난과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어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진정으로 믿으면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사업의 역사적 진행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어떻게 일할 것이며 성도들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예언한 것이다. 나라들의 역사를 예언한 것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개인데 대한 것과 어떤 국가에 대한 것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대체적으로 그 예언대로 되지 않도록 경고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고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요나를 보내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한 것인데,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건은 말씀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 사건과 관련된 예언 성취의 한 장면이다. 70이레나 2300주야 같은 예언은 구원사업의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벧전1:11~13) 이런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 구주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예언 사건이기도 하다. 이것은 성경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증명으로 제시되었다.(13:19, 14:29)

 

교훈 : 아닥사스다 제7년에 반포된 예루살렘 중건령은 단 9:24~27에 나오는 70이레 예언뿐 아니라 단 8:14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의 기산점이 된다.

 

 

10 15() 70이레와 2,300주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9:24).

 

9:24에서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라고 했을 때 정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70이레로 끊었다(하타크)’는 뜻이다. 이 말은 이곳 외에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유대 문학에서는 발견된다. 그 의미는 어떤 긴 물건으로부터 끊어냄을 의미한다. 다니엘서 8장에 2,300주야 예언이 나오지만 그 기산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보면 다음 장(9)에서 490년을 정했다또는 끊어냈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앞장에서 말한 2,300주야 예언에서 끊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끊어낼 수 있을 만한 긴 예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1. 다니엘서 8장을 읽어보라. 환상 가운데 해석이 제공되지 않는 부분은 어디인가?(특별히 단 8:14, 26, 27을 보라)

[8:14,26,27]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26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 2300주야에 대한 해석은 가브리엘 천사가 해주지 않았다.

 

9:24~27에 나오는 70이레 예언과 단 8:14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근거는 다양하다. 둘 다 기간에 관한 예언이다. 환상깨닫다라는 특정 용어들이 두 예언을 연결시킨다(8:26~27, 9:23 참고). 두 예언을 모두 가브리엘이 해석해 주었다(8:16, 9:21 참고). 다니엘서 8장의 환상 중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 단 8:14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이다. 다니엘 8장은 그 환상과 그것의 부분적인 해석을 포함한다. 반면 9장은 8장이 설명하지 않은 부분, 곧 다니엘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8:27 참고), 즉 단 8:14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에 대한 해석만을 다룬다.

에스라서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의 빠진 조각들을 채운다. 즉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사역과 관련된 예언적인 시기가 언제 시작하는지 알려준다.

 

<부가설명> 재림교회가 2300주야의 시작이 아닥사스다 7년인 기원전 457년이라고 해석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렇게 해석한 학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설명이 윌리암 밀러에 의해서 처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을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선지자들이 말했다고 분명히 계시한다.(벧전1:11~13)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이 고난 받는 때와 시를 예언한 것은 단9:24~17이 유일하다. 특히 기름부음 받는 때와 그분이 끊어지는 때, 곧 예수님의 침례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때는 오직 단9:25,26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침례 받으시는 때로부터 거슬러 계산하면 단925절 예루살렘 중건 령이 내릴 때가 기원전 457년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다. 예수님 기름부음을 받는 때 곧 침례 받으신 때가 기원27년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69이레, 483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457년에 딱 떨어진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런 일이 있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여 다니엘서의 예언이 역사적으로 바로 그때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성경의 예언은 너무나 확실하다. 아멘.

 

교훈 :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서 받은 조서는 단 8장의 2,300주야와 단 9장의 70이레의 예언적인 기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0 16() 하나님의 선택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1. 어떤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그러한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성경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11,7)

 

2. 8:28~29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어떤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우리를 택하시는가?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고 선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부르신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하셨다.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지 아니면 정죄를 당할지를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거나 그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선택의 목적은 우리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반사할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롬 8:30에 약속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하나님이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진술한다. 즉 우리는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3. 로마서 9장을 읽어보라. 어떤 종류의 선택 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기에 설명되어 있는가?

[9:21~24]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부르심은 그릇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다. 곧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고 멸망 받는데 대한 말씀이 아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특정한 과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논의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도록 택함을 받았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9:13)는 구절은 하나님이 그 둘 중에 한 사람만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로 크게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문맥을 보면 야곱은 선택을 받았지만 에서는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야곱은 무엇을 위해 선택을 받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선택 또는 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신다. 둘째, 하나님은 특별한 과업을 위해 각기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부가설명>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구원할 것인지 구원하지 않을 것인지를 예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 지구를 구원하기로 한 것과 지구의 사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한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한 것이 예정이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도 예정이 된다. 이런 예정 외에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예정한 것은 없다. 이런 하나님의 예정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각자의 선택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원사업에 사용할 일꾼들을 선택하시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일을 시키실 하나님의 전권이다. 이것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가? 자기의 일을 시키기 위하여 일꾼을 찾는데 일 시킬 사람에게 전권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전권이 없다는 말인가? 에서는 이런 일꾼으로 선택받지 못했고 야곱은 이런 일꾼으로 선택 받은 것이다. 이런 선택을 구원에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준비되면 일꾼으로 선택되는 영광도 누릴 것이다. 또 일꾼으로 선택된다고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일꾼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종이었지만(45:1) 그가 구원받은 증거는 없다. 우리는 기도하며 성경을 올바르게 잘 읽어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 그러나 특정한 과업을 위해서는 일부의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신다.

 

 

10 17() 우리의 책임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부르심을 수용할지 거부할지에 대해서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과 같다. 그분이 우리를 어떤 위치에 두고자 하시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처럼 되도록 부르시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그분을 위해 특정한 일을 수행하기를 바라신다. 특정 과업으로의 부르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세우신 계획의 일부이다.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행함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현실을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낸다.

사울은 왕이라는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바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영접하리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의지는 여전히 결정적인 요소이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1. 출애굽기 3~4장을 읽어보라. 누군가 어떤 과업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는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모세가 자꾸 거절하다가 마침내 받아들이고 애굽으로 떠나서 그 일을 수행했다.

 

우리는 묻지 않고 나아갔던 에스라나 느헤미야처럼 반응할 수도 있고, 거부와 변명으로 일관했던 모세처럼 반응할 수도 있다. 결국 모세도 나아갔지만 부르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고, 별 볼 일 없으며, 중요한 지위도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바로가 그의 말을 얼마나 듣겠는가?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서 결국 그 일이 물거품이 될까봐 염려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변명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 그는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끝내 그는 대놓고 하나님께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흠이 많은 모세가 얼마나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는지를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출생한다. 그가 출생하여 누구누구의 자녀가 되는 것이 선택이라면 부모의 선택이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가 부모를 버리고 가출할 수도 있고 착실한 자녀로 부모의 양육을 받을 수도 있다. 대부분 어릴 때는 부모 밑에서 양육을 받는다. 양육기간에 반항할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다. 인간부모는 완전하지 않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 자신이 고칠 수도 없고 죽으면 살릴 수도 없다. 인간의 한계이다. 그렇다고 자녀가 스스로 병들지 않을 수도 없고 스스로 치료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이 죄의 세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세상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도 사람이 선택하기 전에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을 부모가 막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이 구원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억지로 받는 구원은 행복과 즐거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을 때 누리는 행복이 구원에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하셨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도록 다 해 놓으셨다. 그것을 가지든지 거절하든지는 사람에게 맡기셨다. 구원받는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오늘 신자들은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효도하는 아들처럼 충성하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어떤 과업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구원을 위한 부르심과 마찬가지로 거부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는 삶에는 큰 결실이 따라온다.

 

 

10 18()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0이레의 예언과 역사적인 성취에 관해서 <선지자와 왕>, 697~699를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강림,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 그의 죽음 그리고 이방에 대한 복음의 전파 등에 관한 때가 명백히 지적되어 있었다. 이런 예언을 이해하고 예수의 사명에서 그 예언들의 성취를 인식하는 것은 유대 백성들의 특권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예언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들의 때에 관하여 다니엘에게 주어진 예언을 언급하시면서 그는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24:15)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는 모든 선지자의 글자기에 관한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24:27). 구주께서는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벧전 1:11)셨다”(시대의 소망, 23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그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실 수도 있다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대가 하고 싶은 일뿐 아니라 일반적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그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그대가 따라야 하는 원칙들은 무엇입니까?

은사는 천부적 자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주님 사업에 헌신 봉사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할 일, 곧 선택의 원칙이다.

 

요나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바울이 보였던 반응과 요나의 반응을 비교해보십시오(9:1~20 참고). 그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했다. 그러나 결국 부르심에 순응하게 되었다.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충성했다.

 

유다의 생애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의 슬픈 종말을 보여 준다. 만일 유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 전에 죽었더라면 그는 열두 제자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자 매우 그리워할 만한 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71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부름을 받았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에게 얼마나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가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선택의 자유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유다는 자기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려고 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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