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조회 수 673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4과 여호와의 눈 : 성경의 세계관

 

1024일 안식일

일몰오후 543

 

연구 범위 : 15:3, 12:7~10, 6:12, 20:5~6, 1:1~14, 12:29~31

기억절 :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15:3).

 

폴란드의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는 말하는 토끼와 다람쥐 등 상상의 동물들에 관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 한 편을 썼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이 진짜 세계와 혼동되는 만큼그것들도 진짜 동물들과 혼동된다고 썼다. 그 시는 이것을 생각하고 전율하라는 말로 끝난다.

전율하라는 말은 매우 혹독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완전히 그릇됐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학식이 많았던 사람들도 2천 년 동안이나 지구가 부동의 상태로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가장 똑똑하고 학식이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인류가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에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주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필터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러한 필터를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젊은 사람뿐 아니라 나이든 교인들에게 성경의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기독교 교육은 성경의 세계관에 기초해야 하며 창조론과 구원론이 그러한 세계관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의 심각성을 인식한다.

행하기 : 세상의 세계관 또는 인간의 소견에 따라 행하던 일들을 성경의 세계관 또는 말씀의 교훈에 따라 행한다.

 

창조론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과 진화론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다르게 볼까요?

진화론의 관점은 세상을 자연발생으로 목적이 없는 존재로 볼 것이고 창조론의 관점은 창조주가 목적으로 두고 창조하셨기 때문에 목적이 있는 존재로 볼 것이다.

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 수밖에 없을까요?(53:1)

어리석은 자가 된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된다(49:20).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이 무신론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소위 신앙으로 신앙을 부인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불신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창조론과 구원론이 기독교 세계관과 교육의 두 기초가 됩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교육하기 때문이다.

 

결론 :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반면 세상에는 물질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무신론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러한 사상들을 거부하며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높이며 율법이 제시하는 도덕적 표준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1018() “여호와의 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53:1).

 

옥스퍼드 대학의 한 교수는 우리와 세상 그리고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이론을 세웠다. 우리는 초고성능 컴퓨터를 가진 외계종족의 디지털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꽤 흥미로운 이론이지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실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의 포괄적인 해답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만이 합리적이다. 첫째는 우주와 우리를 포함한 그 안의 모든 것이 그냥 생겼다는 주장이다.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든 주체는 없다. 우주가 그냥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일 뿐이다. 세상에는 하나님도, 신들도, 어떤 신적인 존재도 없다. 실재는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순수하게 자연발생적이다. 2,500년 전에 어떤 이가 말했듯, 세상에는 원자들과 빈 공간만 있을 뿐이다.

둘째는 어떤 신적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런 주장이 아무 설명 없이 우주가 그냥 생겼다는 주장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사리에 맞다. 이 입장은 원자들과 빈 공간의 세계 곧 자연을 포괄하되 그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무신론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관보다 훨씬 폭넓고 깊으며 다각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오늘 교과에서 제기된 주장들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53:1, 15:3, 3:16, 45:21, 1:26~35)

[5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5: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26~35]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선과 악을 다 살피시는 분이시며,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분이시다. 독생자는 예언대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여 탄생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다.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단순한 하나님의 실존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존이다.

그분은 자연의 법칙을 사용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신이시되 그러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이 뜻할 때면 그런 법칙마저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다. 특히 이런 관점의 교육이 오늘날 시의적절한 이유는 과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계가 노골적으로, 그리고 무턱대고 무신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과학은 천연계 현상을 관찰하는데서 출발한다. 그 천연계가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천연계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법칙을 찾아내어 이런저런 법칙의 이름을 붙이고 힉술용어를 만든다. 그러나 현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살펴서 용어를 만든다. 과학자가 용어를 만들어서 천연계가 그 법칙대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자들은 스스로 진화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무생물도 진화해서 생물이 된다는 말인가? 파스퇴르는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과학도 이렇게 말하는데 최초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도 그런 억지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계시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이시다.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그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이 그분의 창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17:24).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안다(11:3). 성경은 아주 쉬운 논리로 이 사실을 설명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3:4). 얼마나 당연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인가! 집이 있으면 지은이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한다는 말인가? 천연계의 만물은 창조주가 계신다는 것을 증명한다(1:20). 아멘.

 

교훈 : 이 우주의 실재에 대한 생각 중, 그것이 그냥 생겼다는 무신론적인 세계관보다 신적인 존재가 그것을 창조했다는 세계관이 훨씬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1019() 라이프니츠의 질문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12:7~9).

 

독일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코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왜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일 것이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라이프니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1:1, 1:1~4, 20:8~11, 14:6~7, 12:7~10)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4:6,7]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12:7~10]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기정사실이다. 1:1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논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출발점에서부터 하나님의 존재(3:13~14 참고)와 창조주로서의 그분, 그리고 성경과 그 안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당연시한다.

창조의 교리는 모든 기독교 교육의 토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믿는 모든 것은 세상이 6일 동안 창조되었다는 교리에 기초한다. 성경은 속죄, 율법, 십자가, 부활 또는 재림에 관한 진술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술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밖의 다른 교훈들이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실재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세계관은 창조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강조점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교육이 과학의 이름으로 감행되는 무차별적인 공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 즉 생명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서서히, 우연히, 돌연히 진화되었다는 사상은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해왔다.

진화론보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상반되는 사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진화론이 어느 정도 창조론과 조화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유신론적인 진화론)이 무신론적인 진화론보다 더 심각하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 전체를 놀림감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정말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나의 지론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 속에 출생했고 생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있는 중에 자기가 찾는 것이 없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있는 것 속에 출생해서 있는 것 속에 생존하는 사람들이 라이프니츠의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철학자라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도 하지 않고 태어사서 살아있으니 그냥 사는 것이다. 그러나다 다 죽으니 죽는가보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없는 생각으로 살지만 일주일이 7일이 된 제도 안에서 산다. 일주일이 7일이 된 것은 창세기 1장과 십계명의 넷째 계명의 설명을 떠나서는 당위성이나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을 믿고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음으로 아는 사람들은 일주일이 7일인 것이 창조주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제정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이 제7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배하는 분명한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사실을 감사하고 감격하면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는 것이다. 일주일을 7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의식하든지 않든지 창조주가 엿새 동안 창조하신 사실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훈 :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과 교육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창조론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1020() 성경의 세계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아무도 세계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무신론자는 공중의 무지개를 그저 자연현상으로 볼 뿐이다. 그에게 그것은 인간이 부여하기로 결심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반대로 성경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눈은 그것을 물과 빛의 작용이 빚어낸 자연현상일 뿐 아니라 세상을 다시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재확증으로 본다(9:13~16).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의 징표로써 아름다운 무지개를 구름 속에 이렇게 두심으로 나타내신, 그릇 행하는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겸손과 동정은 얼마나 큰가! 후대의 자손들이 하늘에 걸쳐 있는 영광스러운 아치(arch)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 그들의 부모들이 홍수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다시는 세상을 물로써 멸망시키시지 않겠다는 보증으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둥근 무지개를 만드셔서 구름 속에 두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였다”(부조와 선지자, 10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성경은 여전히 신앙의 토대를 제공하는 책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관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 필터를 통해서 자칫 매우 위압적이고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 세상을 조망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의 일부를 이루며 살고 있는, 때로는 그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하며 갈피를 못 잡는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은 우리에게 관점의 틀을 제공한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어떤 진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가?(6:12, 13:7, 5:8, 8:28, 9:5, 20:5~6)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력과 빛의 세력이 투쟁하는 전장(戰場)이며, 예수님의 구속사업으로 사망은 멸절되고 생명이 영원한 승리를 얻을 것을 믿는 것이 세계관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고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신 진리이며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그것과 모순되는 모든 가르침은 거부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교과에서 세계관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 역사관이라고 해도 된다. 줄여서 사관(史觀)이라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공자가 쓴 역사 기록을 생각하고 바르게 쓴 역사를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춘추는 중국의 춘추시대 역사를 진솔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한 역사책이다. 직필(直筆) 한 것이다. 그 후로 동양에서는 역사 사건을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성경의 사관은 모세 오경의 계시 사상이 표준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오경사관이라고 한다. 나아가서 성경 사관이다. 이것은 대쟁투 사관이다. 선악간의 대쟁투이다. 이것은 도덕적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확하게는 생명과 사망의 사이의 대쟁투이다. 생명과 사망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결과는 빤하다. 생명이 이긴다. 세상은 어둠의 권세가 세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빛의 아들들이 고난을 겪지만 결과는 어둠의 세력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온지 생명과 빛만이 우주에 충만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성경 사관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게 눈이 열려야 한다. 이것이 여호와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예언들이 바로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관을 가정에서 온 가족들이 깨닫고 자녀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합리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교훈 : 성경은 그것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며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관점의 틀을 제공한다.

 

 

1021() 구속주를 경배하라

 

우리 신앙에 중대한 창조론은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그렇다. 그것은 종종 구원론과 결부되며 심지어 뗄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솔직히 말해서 타락하여 죄와 사망으로 가득한 세상에 창조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서 살려고 버둥거리며 고생하다가 죽는다. 그렇게 우리는 길가에 버려진 동물의 사체와 다를 것이 없는 결말을 맞이한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그래서 우리의 세계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원론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중심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의미이다.

 

1. 1:1~14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으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이루셨는가?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어 은혜와 진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

 

첫째 천사의 기별을 보라.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14:6~7). 여기서 영원한 복음이 창조주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의 형벌을 당하신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분께 경배를 드리라는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하나님이 그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어떻게 달리 반응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은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의 중심과 전면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에는 재림도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 초림만으로는 수많은 복이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구원의 계획이라는 한 사건을 구성하는 두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부가설명>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종교는 창시자의 교훈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종교는 예수님의 교훈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예수님이 죽고 존재하지 않으면 그의 교훈은 의미가 없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는데, 그가 부활하지 못했고 생명인 것을 증명하지 못했으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의 종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과 부활이 다 존재와 생명의 하나님, 자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래서 성경의 종교는 오직 예수님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의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주장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땅에는 죽은 자가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12:27)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죽은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살려주시는데 그것을 끝까지 거절하면 생명이 없는 자이다. 예수님만 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아멘.

 

교훈 : 구원론은 창조론과 더불어 성경의 세계관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예수님께 경배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1022() 하나님의 율법

 

한때 프랑스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폐지옹호론자들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미셸 푸코를 찾아가 그들을 위해 사설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는 단지 사형제도의 폐지뿐 아니라 모든 교도소의 폐쇄와 수감자들의 석방마저 지지했다.

왜냐하면 미셸 푸코에게 모든 도덕 체계는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입시킨 개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도덕적 규범들은 실제로 아무런 정당성이 없었다.

그의 주장이 매우 극단적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다지 새롭지 않은 문제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을 본다. 모세도 수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동일한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12:8; 17:6, 12:15 참고).

그러나 우리가 의롭지도, 거룩하지도 않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알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론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표준이 될 도덕법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견으로는 못하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신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6:5, 12:29~31, 14:12)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예수 믿음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으로 삼고자 한다면 지난주에 보았듯이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 역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인데 그런 죄가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속량을 받겠는가?(3:20)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는 복음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육은 엘렌 G. 화잇이 안식일을 포함하여 율법의 불변성”(각 시대의 대쟁투, 63)이라고 부른 것을 강조해야 한다. 만약 교육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생에서 최대한 회복시키도록 돕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모본에 비춰봤을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도덕법으로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의로운 것인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21세기는 포스트 모던이즘 시대라서 표준을 싫어하는 풍조가 사상을 지배하는 때라고 한다.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정신은 인간의 실상을 외면하는 정신이다. 인간은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썩어져가는 구습이다(4:22).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다 썩어질 씨로난 자들이다(벧전1:23). 썩어질 씨로 났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사상과 행위는 썩어져가는 구습일 뿐이다. 죽은 자에게 나오는 행실은 몽땅 썩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무슨 도덕적 표준이 나오겠는가? 교육이나 종교나 모든 것이 이 썩는 냄새를 희석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방부제와 방취제를 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것이 절대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 생명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악이 된다. 사탄이 노리는 최고등 술법이다. 우리는 속지 않아야 한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이다. 그분에게서 생명을 얻을 때 비로소 도덕적 삶이 우러나오게 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요 빛의 열매이다. 거듭나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인데,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다(1:4). 그래서 빛의 열매가 맺히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 사랑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이치를 가르치는데 도덕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 인간 노력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 거룩하여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자기의 행위를 구주로 삼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사람은 결탄코 참 생명을 얻지 못한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지 않도록 도덕적 표준이 되는 율법을 주셨으며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023()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참교육의 목적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95).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확고한 기독교 세계관이 재림교회 교육에 필수적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주목했듯이 교육은 그 자체로 꼭 선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과 모순되는 고등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육 체계가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는 학생들이 성경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세계관과 대조적인 입장에서 교육, 과학, 역사, 윤리, 문화 등 모든 일반 학문들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되풀이할 가치가 있어 말하자면, 세상에 중립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없다. 삶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은 각자가 가진 세계관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일 뿐이다. 그 세계관이 설득과 체계를 갖췄든 못 갖췄든 상관이 없다. 따라서 성경의 세계관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육의 근본을 이루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교육 제도가 매우 파괴적이었던 역사적인 사례는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그때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례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그런 파괴적인 영향으로부터 우리 교육계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화론이 보편화 될 때이다. 학생들은 자연발생을 배웠다. 이것은 인성을 파괴하고 무신론을 조장하며 사람을 축생으로 만들 뿐이다. 성경 사상을 자기 사상으로 해야 한다. 예수를 믿고 거듭마서 그분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번 주 교과는 하나님의 존재, 창조, 성경,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율법과 같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요소 중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밖에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또 포함되어야 할까요?

거듭남에 관한 교육을 바르게 해야 한다.

엘렌 G. 화잇의 진술을 다시 보십시오. “참교육의 목적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은 재림교회의 교육이 세상의 관점과 달라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예수님의 영생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될 때 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다(2:20).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제4과 여호와의 눈 : 성경의 세계관(질문, 대답, 설명)10/24/20 김명호 2020.10.16 6737
962 제3과 교사로서의 율법(질문, 대답, 설명) 10/17/20 김명호 2020.10.08 6594
961 제2과 가정(질문, 대답, 설명) 10/10/20 김명호 2020.10.01 6220
960 제1과 에덴동산에서의 교육(질문, 대답, 설명) 10/03/20 김명호 2020.09.25 6755
959 제13과 믿음의 전진(질문, 대답, 설명) 09/26/20 김명호 2020.09.18 6510
958 제12과 전할 가치가 있는 기별(질문, 대답, 설명) 09/19/20 김명호 2020.09.10 6443
957 제11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라(질문, 대답, 설명)09/12/20 김명호 2020.09.03 6843
956 제10과 흥겹게 동참하는 방법(질문, 대답, 설명) 09/05/20 김명호 2020.08.28 6383
955 제9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태도를 기르라(질문, 대답, 설명)08/29/20 김명호 2020.08.21 7397
954 제8과 예수님처럼 봉사하라(질문, 대답, 설명) 08/22/20 김명호 2020.08.14 6997
953 제7과 말씀을 전하라(질문, 대답, 설명) 08/15/20 김명호 2020.08.07 6762
952 제6과 무한한 가능성(질문, 대답, 설명)08/08/20 김명호 2020.07.31 7028
951 제5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증언(질문, 대답, 설명) 08/01/20 김명호 2020.07.24 7276
950 제4과 타인을 위한 기도의 능력(질문. 대답. 설명) 07/25/20 김명호 2020.07.17 8090
949 제3과 예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라(질문, 대답, 설명)07/18/20 김명호 2020.07.10 7180
948 제2과 성공적인 증언 : 개인 간증의 힘(질문, 대답, 설명) 07/11/20 김명호 2020.07.03 6590
947 제1과 전도의 이유 (질문, 대답, 설명) 07/04/20 김명호 2020.06.26 7450
946 제13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 (질문, 대답, 설명)06/27/20 김명호 2020.06.19 7240
945 제12과 난해 구절을 다루는 법(질문, 대답, 설명) 06/20/20 김명호 2020.06.12 7458
944 제11과 성경과 예언(질문, 대답, 설명) 06/13/10 김명호 2020.06.05 6762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58 Next
/ 58
Copyright© 2011 www.3amsda.org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