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교회와 교육(질문, 대답, 설명) 11/28/20

by 김명호 posted Nov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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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교회와 교육

 

1128일 안식일

일몰오후 515

 

연구 범위 : 10:30~37, 5:14~16, 4:18~23, 29:13, 7:7, 살전 2:6~8

기억절 :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6~8).

 

신실한 자들이 회당, 가정, 교회 등에서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초기부터 성경은 성경 연구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삶에서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를 갈망하는 백성들을 보여준다. 또한 성경은 반복적으로 교회를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삶을 향한 그분의 뜻 안에서 성장하는 곳이라고 밝힌다.

때로 우리는 묻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질문들이 하나님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로 이끌기 위해 사용되었던 예를 자주 본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자신의 헌신을 검토할 수 있도록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와 추종자들과 더불어 이런 종류의 교육에 치중하셨다.

교회가 교육의 장소라면 진정한 대화와 질문이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는 각 사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 그리고 그분에 대한 지식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교회는 십자가의 가치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고 제자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공간이자 진리를 탐구하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임을 배운다.

느끼기 :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행하기 : 자비와 친절의 행위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한다.

 

교회는 무엇을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배우는 곳이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치십니까?(10:30~37 참고)

구원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선한 이웃이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교회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5:14~16)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 생명력이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축소판인 소그룹이 왜 그리스도인 교육과 성장을 위한 최적의 환경입니까?

밀착된 친교로 말씀을 깊이 인식하고 친교로 사랑을 실천하기 좋기 때문이 아닐까?

 

결론 : 교회는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며 주님이 그 안에서 계시하신 소중한 가치관들을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이를 경험할 뿐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그것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1122() 진정한 기독교 교육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

 

한 랍비가 교실 안에서 졸린 눈으로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군들, 사람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지 언제 알 수 있을까?” 학생들 몇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한 학생이 물었다. “랍비님, 그것은 랍비님이 무화과 나무와 올리브 나무의 차이점을 말씀하실 수 있을 때인가요?”

아니다.”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다. “랍비님, 그것은 랍비님이 양과 염소의 차이점을 말씀하실 수 있을 때인가요?”

여러 대답을 들은 후에 그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사람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보고 그 낯선 이가 형제 또는 자매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제아무리 날이 밝더라도 아직 밤인 것이야.”

 

1. 10:30~37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 교육에 무엇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선한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교훈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인 우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아직 모르는 교리들(몇 가지 예를 들자면 죽은 자들의 상태, 안식일, 1844년과 심판, 대쟁투 등)과 진리의 빛을 풍성히 누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진리들이 중요하더라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며 다른 이들을 열등하게 취급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문화와 사회의 편견을 허용한다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적어도 이러한 악습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분이 목숨을 바치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분은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한한 값을 치르셨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한다면 우리는 모든 인류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가치에 맞게 그들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들을 대우할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이런 가르침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아무 가치도 없다.

 

<부가설명> 동물들의 행위는 그 종류에 따라서 각각 다른 모양으로 드러난다. 개가 고양이처럼 행동할 수 없고, 곰이 사자처럼 행동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것을 동물들의 본능이라고 표현한다. 사람은 특이하다. 사람인데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부류가 있다. 아담 자손으로 모든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들이다(4:22). 그래서 사람들이 교육을 받지 않고 훈련을 받지 않으면 썩은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창조주께서 사람에게 양심을 주셔서 가책을 받기도 하지만 작정하고 가책을 뭉개고 자기 생각과 욕망의 감각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양심에 화인(火印)맞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지적한다(딤전4:2).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2:17). 이 구절은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 구절은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묻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내는 활동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이 구절은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본능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다.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야한다. 그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4:22~25). 이것이 성경 종교의 교육이 구속 사업이라는 뜻이다.

 

교훈 :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류를 그 희생의 가치를 통하여 바라보며 대우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1123() 빛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음

 

세상 어디를 보아도 빛이 어둠에 져서 함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우리의 경험에 비춰보면 어둠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는 곳은 가정이다. 질병과 씨름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별거와 이혼에 굴복하는 가정들을 보고, 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악한 일들이 벌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삶이 가져오는 참상을 깨닫는다.

그러나 도덕적인 파탄과 영적인 흑암 그리고 안팎에서 들리는 여러 잡음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4~16).

 

1. 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로 드러나게 된다.

그날 군중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갈릴리 호숫가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빛과 어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근심해야 할 어둠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로마 지배하의 무장된 사회에서 살았다. 그 사회는 지금처럼 전화기나 컴퓨터, 인터넷은 없었지만 여러 면에서 지금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어떤 면에서 매우 잔인했다.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군중들은 사방에 있던 로마 군인들을 보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곧 그 고문자들에게 발각되어 벌거벗은 채로 로마인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빛으로 살라고 권면하셨다. 거기에는 자비롭게 행동하며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화평을 가져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나타낼 만한 결정과 선택을 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부가설명> 빛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하시는 교훈이다. 어둠은 사망을 상징한다. 사탄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이다(6:12).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2:14). 어둠과 사망은 죄가 들어온 세상에서는 동일한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라고 계시하였다.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은 사망의 세상에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으로 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의 빛으로 사셨다. 에수님은 영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이다(1:18, 3:6 비교). 그러므로 성경의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예수님의 구속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다. 그럼면 그 생명력의 활동으로 착한 행실이 나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본능이 되어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막연하게 빛이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요1:4에 의하여 그 빛이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빛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세상의 어둠에 맞서 자비와 친절의 행위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야 한다.

 

 

1124() 제자로 살아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4:18).

 

기독교 교육에 성공하기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분은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훈련시키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돌보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뛰어들 기회를 제공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로 대할 때 변하게 될 이 세상에 대한 그분의 비전을 보여주시며 날마다 그들을 고무시키셨다.

 

1. 4:18~23을 읽어보라.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기별은 무엇인가?

[4:18~23]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 예수님처럼 주님의 은혜를 전하고 고향에서도 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어디서든지 이 빛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삼 년 동안 제자들은 그들의 교사이신 예수님이 천국의 이상, 곧 나사렛 회당에서 반포하신 이상을 어떻게 실천하시는지를 보았다. 용서와 은혜와 사랑이 외로움과 헌신과 역경과 함께 동행했다. 거기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제자도는 누구나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루가 아니라 평생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에게 맡기신 구주의 명령()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 하늘의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 사업이 위탁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동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사업을 위하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이 신성한 맹세에 스스로 가담한 자들은 모두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겠다고 서약한 것이다”(시대의 소망, 822).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의 교제와 예배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제자도를 창안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 당시의 랍비들도 제자들을 모았지만 예수님은 남녀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랍비들이 가르치는 모든 계명보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암시하셨다. 랍비들은 그 같이 급진적인 부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든 사람을 존중할 뿐 아니라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교육은 생계를 위한 직업 교육뿐 아니라 우리의 영역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들을 행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봉사하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 의식과 목적 의식을 포함해야 한다.

 

<부가설명> 나사렛 회당에서 읽은 말씀은 이사야 611,2절의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명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이런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인식시킨 것이다. 그것은 은혜의 해를 전하는 것이다. 은혜의 해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기간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현재의 인생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죽어가는 존재이다. 호흡이 멈추기 전에 은혜의 기별을 들어야 한다. 생명의 기별이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해야 한다. 이 사명을 가진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재림성도는 말세에 이 생명 기별을 전해야 하는 천사들이다. 세 천사의 기별은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라는 기별이다. 그래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했다. 고향에서도 전하고 타향에서도 전하고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전해야 한다. 자신이 생명으로 살도록 계속적으로 생명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을 나누어주는 통로 역할 하는 것이 은혜의 해를 전하는 방법이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하자.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은 배우고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따르면서 그분이 사시는 법을 배우며 그대로 실천하라는 뜻이다.

 

교훈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제시하시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도 그러한 선교 의식을 배워야 한다.

 

 

1125() 진리를 탐구함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29:13).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중요한 것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가 있다. 누구든지 영원과 인생의 신비 그리고 경이롭고 신비한 세계의 구조를 골몰히 생각할 때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지 매일 이 신비의 작은 일부만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절대 신령한 호기심을 잃지 말라.”

우리는 신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현대 과학은 거의 모든 단계의 존재 안에 내재하는 엄청난 복잡성을 보여준다. 단지 물리적인 사물에서 그렇다면 영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진리와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29:13, 7:7, 17:26~27, 25:5, 16:13, 17:17)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7:26,27]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16: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노력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치고 그러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허락이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의문, 두려움, 희망, 기쁨을 가지고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과 진리를 찾는다. 성경은 이런 우리와 너무도 비슷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여기서 솔로몬이 말하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히브리어 올람영원으로 번역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으로 번역한다. 이것을 전 3:11에 비춰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과거와 미래 곧 영원에 대한 의식을 넣어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인류는 일반적으로 삶과 존재에 대한 큰 질문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성경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왜 세상에는 불행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것들이 바로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진리의 탐구자들이 제기했던 질문들이다. 이런 탐구자들에게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자 책임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이런 해답들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교육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가설명> 질문은 알고싶은 것을 아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질문하신다. 욥기에는 38장에서 41장까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한 것이 80회가 넘는다. 욥이 전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게서는 아담에게 질문하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도 질문해야 한다.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기 위하여 내가 믿는 진리를 확인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인들은 질문이 거의 없다. 그냥 듣기만 한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알고싶어서 질문하고 얻은 대답은 잊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알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하고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아 얻도록 해야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자 도마는 의심쟁이라는 말을 들었고 장성해서도 많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도마는 의심쟁이가 아니라 확인 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께 궁금한 것을 물었고 예수님을 대답하셨다. 나는 도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가 질문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그 황금 같은 진리를 말씀할 기회를 가졌을까? 도마가 물었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대답을 들었고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의 부활한 신체를 확인해주셨다. 질문이 있어야 하고 대답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기독교 교육은 그 해답을 성경을 통해 제시해야 한다.

 

 

1126() 우리의 삶을 나눔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

 

1. 살전 2:6~8을 읽어보라. 여기서 바울은 학교와 교회에서 반영해야 할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살전2:6~8]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는 것과 같은 태도와 목숨까지라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의 정신으로 교육하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는 지역 사회가 붕괴되어 교회가 전에 없이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은 마 18:20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신약의 비전은 주로 신자들의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공동체가 소그룹으로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만찬을 거행하고 서로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며 배우는 곳은 바로 신자들의 가정이었다.

또한 이러한 예배 모임은 첫째 교회 학교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신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소개받고 성경을 배우는 곳이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12:2)으라는 말씀처럼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 교회가 이러한 교육 사업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초기의 신자들은 복음이 가장 잘 구현되는 곳이 공동체 안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크게 노래하고 더 뜨겁게 기도하며 서로를 더 돌보며 동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들을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 느끼게 된다. 또한 서로의 고민과 상처에 대해 들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치유를 느끼며 그분의 은혜와 치유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새로워짐을 경험한다.

살전 2:6~8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며, 주의 부활이고, 재림의 약속이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진실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전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과제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바울은 함께 삶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서 복음의 기별을 가장 잘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성경에 나오는 은혜의 기별을 예증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부가설명> 저자가 살전2:6~8을 해설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며, 주의 부활이고, 재림의 약속이다.”라고 썼는데, 실제로 구절 안에 이런 내용은 없다. 살후 2:6~8에도 없다. 그러나 저자가 복음을 확대해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구절이든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기별을 추출할 수 있다. 아무튼, 성경교육에는 이 내용이 빠지면 구속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 학교와 교회와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한다면 이 기초 위에서 실시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 전부이다. 신앙교육을 할 때는 오늘 대답에서 기록한 내용, 곧 살전2:6~8의 내용을 깊이 생각하고 학생과 교우와 가족들에게 그런 정신과 태도로 임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교육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 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서 당신의 생명력으로 일하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구속이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교육하는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도록 무릎을 꿇고 간구해야 할 것이며 전적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도록 자신을 맡겨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의식이 교육자의 의식이 되도록 자아를 굴복하는 경험을 항상 해야 하지 않을까?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경지에 이르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교훈 : 소그룹은 복음이 가장 잘 실현되고 학습되는 곳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타낼 수 있다.

 

 

1127()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된다는 희망을 꺾으셨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거짓 교육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를 회복하시고 무리에게 그분의 나라와 자신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들려주시고자 힘쓰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오류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긴 세상의 불행을 보셨지만 그 비참한 실상을 그들 앞에 생생하게 묘사하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어떤 것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공격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들어갈 조건들을 말씀하시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들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당신을 따르던 무리에게 중요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도 그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시대의 소망, 29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출생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가 그를 침대로 인도했을 때 창문 너머로 눈길을 끄는 장면을 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한 가로등지기가 가로등마다 다니며 불을 켜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보모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좀 보세요! 그가 어둠 속에 구멍을 내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대가 지역사회에 빛과 사랑을 가져가도록 어떤 역할을 맡기셨습니까?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동료 신자들과 함께 앉아 무슨 일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의논해 보십시오.

각 자가 대답해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관련되지 않겠는가?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역자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살면서 함께 웃고 우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육신의 본질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을 돌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교회의 젊은 세대가 이런 일에 함께할 수 있을까요?

살전2:6~8의 원칙이 실행된다면 성령께서 그 일을 하도록 이끄시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주어진 아름다운 진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그것들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교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행하는 믿음을 보이고 예수님의 사신 모습이 보일 때 주위에 빛이 비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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