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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지도력의 위기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531

 

연구 범위 : 이사야 6

 

기억절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6:1)..

 

다음은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공자(孔子)와 자공(子貢)의 대화이다.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충분한 식량, 충분한 무기, 백성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자공이 묻기를 부득이 그 셋 중에서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이 먼저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무기를 빼라.’고 하였다. 자공이 또 묻기를 부득이 나머지 두 개 중에서 또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뺄까요?’ 공자는 식량을 빼라.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백성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성은 참으로 강력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원한다. 어떤 군인이 복무 연장을 위해 서명을 하고 있을 때, 징병관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복무를 연장하려고 하나?” 그 군인이 대답했다. “저도 민간인으로 돌아가려고 해봤습니다만 거기는 아무도 지휘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남방 유다가 직면한 지도력의 위기와 그에 따른 안타까운 결과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지상의 지도자들이 흔들릴 때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왕이심을 인정한다.

느끼기 :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성과 무가치함을 느낀다.

행하기 : 어두운 세상에 기별을 전할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

 

웃시야에게 왜 갑자기 지도력의 위기가 찾아왔을까요?(대하 26:16)

번영하여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까?(6:1~4)

웃시야 왕이 죽던해에 아마도 기도하려 성전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지도자들에게 실망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까요?

우주를 실제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은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6:5~7)

자기의 허물을 기억하고 부르짖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해겨해주셨다.

현재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분이 찾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6:8)

이사야의 경험을 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결론 : 파멸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거룩한자손이 남을 것이라는 보증을 통해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소망이 없어 보일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13() 죽은 왕과 영원한 왕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6:1).

 

1. 6:1은 웃시야 왕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대하 26장을 읽어보라. 웃시야 왕의 죽음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대하26:1~23]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2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3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6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7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8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9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10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11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12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13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14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21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23 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왕이 죽음으로 나라의 지도자가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동시에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져서 월권을 행사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리고 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은 동시에 유다나라에 관한 상징도 되었다. 나라가 죄로 병든 상태였다.

 

우리는 다양한 관점으로 웃시야의 죽음을 볼 수 있다.

1. 웃시야의 통치는 길고 성공적이었으나,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대하 26:16)고 했다. 그는 아론의 자손이 아니었으므로 분향할 권한이 없었기에 제사장들이 이를 제지하자(18) 왕은 분노했다. 그가 책망을 거절하는 순간, 하나님은 즉시 그를 쳐서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으며,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21). 이사야가 부정한 인간 왕이 죽던 그 해에 정결하시고 불멸하시며 거룩하신 왕께서 그분의 성전에 계신 이상을 봤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2. 웃시야와 이사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웃시야는 교만하여 주제넘게도 거룩함에 손을 뻗쳤으나 부정함이 드러났고 거룩함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한편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에게 미쳤을 때에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도덕적인 성결을 갈망했으며, 마침내 성결함을 얻었다(6:5~7).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세리처럼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

3. 문둥병에 걸린 웃시야의 몸과 백성들의 도덕적인 상태는 매우 유사하여,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1:6)었다.

4. 기원전 740년경에 있었던 웃시야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대한 위기를 의미했다. 절대 권력자가 죽으면 권력의 과도기에 상당한 취약성이 드러난다.

더구나 바로 몇 년 전에 디글랏 빌레셀이 앗수르(Assyria)의 왕위에 올라 (기원전 745), 근동지역의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초강대국으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정벌 사업에 나섰다. 따라서 유다는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여전히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이사야에게 용기를 주셨다.

 

<부가설명> 웃시야는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통치 초기에 여호와를 그의 힘으로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펴는 정치를 했다. 그래서 태평했고 강성했고 잘 나가는 왕이 되었다. 그가 그렇게 힘을 얻자 점점 교만해졌다. 마치 루시퍼처럼 그는 제사장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에게 허락된 직무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제지할 때도 고집을 꺾지 않고 기어이 제사를 집행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게 되었다. 즉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가 드러난 것이 문둥병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나라가 태평하고 부흥하자 그것이 자기의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교만이 치솟을 것 같아.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형통할 때 더욱 의지하고 굴복하는 신앙의 경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굴복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왕의 이런 상태는 곧 나라의 상태로 전염이 되었고 이사야의 탄식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종기 투성이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재림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세계적으로 부흥하고 번창한 것 같은데, 참된 복음 기별은 점점 메말라가고 행위 주의와 행사 위주의 일이 판을 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말씀을 사자들은 인터넷을 훑는 것으로 진정한 연구를 뒤로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웃시야 때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교훈 : 웃시야는 성공적인 왕이었지만 심각한 흠과 부정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결하시며 완전하시다.

 

 

14()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6:1~4)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6:1~3).

 

1. 6:1~4을 읽어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6:1~4]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여호와의 보좌를 계시로 보여주시며 보좌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계시하셨다.

 

앗수르 군대가 출정 길에 오르면서 국제 정세가 혼돈에 빠졌을 때 왕이 죽었다. 이사야의 눈에는 누가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암울한 시대였으리라. 바로 그때, 이사야는 이상 속에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계신 휘황찬란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빛나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로 인해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가득했다. 이는 분명히 선지자에게 굉장히 놀랄 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이제 누가 세상을 통치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았다.

 

2. 이상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6:1 참고) 다른 경우와 다르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는 무엇인가?(25:8, 40:34~38 참고)

 

: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 웃시야 왕이 죽었으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에스겔 1장과 단 7:9~10과 계시록 4~5장에서, 에스겔과 다니엘과 요한은 추방 또는 유배 중에 이상을 보았다. 다니엘과 에스겔은 고국이 패망하여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고, 요한은 적의에 찬 정치적 세력에 의해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그들도 이사야처럼 비록 세상이 산산조각난다고 해도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신다는 확신과 그것에 기초한 특별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이상을 봄으로써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견뎌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사야의 이상 속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초월적인 거룩함은 그가 전하는 기별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백성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그들이 회개하여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믿음으로 그분께 순종하면 그분은 그들에게 거룩함을 주신다.

 

<부가설명> 웃시야 왕은 통치의 상당한 기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공적으로 지도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앗수르가 정복의 길에 오를 때 그는 교만해졌고 하나님을 떠나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나라는 앗수르의 공격 앞에 풍전등화가 된 상태였다. 젊은 선지자 이사야는 아마도 대단히 염려했을 것이다. 그럴 때 성전에서 이 계시를 보게 되었다. 웃시야는 죽었지만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동시에 이사야에게 유대인의 허물을 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기별을 전하게 하신다. 유대인은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 했다.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방법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의 계명을 따르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상태에 있다. 성전 제단의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셔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증거 하는 선지자가 되도록 준비시키셨다. 유대인은 이사야의 기별을 듣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했다. 사람의 계명을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일은 버려야 했다. 나라를 구하기 전에 국민이 바른 삶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원한 나라도 같다. 그 나라에 가기 전에 성도 각 사람이 다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수평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에 빠져있지만 수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거룩함과 완전한 조화 속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

 

 

15() 새로운 인격체 (6:5~7)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는 대제사장뿐이었다. 그것도 오직 속죄일에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보호를 받으며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었다(16:2, 12~13). 그런데 이사야는 대제사장도 아니었고, 타오르는 향불도 없었으나 하나님을 뵈었다. 성전은 연기로 가득했다(6:4). 이는 속죄일에 구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연상시켰다(16:2). 그분의 위엄에 압도되어 이제 죽었구나’(33:20, 6:22~23과 비교)라고 생각하던 이사야는 자신과 자기 백성의 죄를 인식하고 절규했다(6:5). 이는 속죄일에 하던 대제사장의 고백(16:21)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1.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스랍은 왜 단에서 핀 숯을 사용했는가?(6:6~7)

[6: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제단의 숯불은 사람의 불로 피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불로 피운 불인데, 숯은 아주 검다. 불은 그 숯을 달구어서 붉게 만든다. 사망의 검은 색을 생명의 붉은 색으로 바꾼 상징적 정결을 이사야에게 적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랍은 핀 숯이 선지자의 입술에 닿았으므로 그의 죄악이 사하여졌다고 설명했다(7). 그 죄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 죄를 그릇된 언사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입술은 말뿐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불은 부정함을 태워버리는 정결의 수단이다(31:23 참고). 그런데 스랍은 하나님이 친히 불을 붙이셔서 영원히 타오르게 한 제단(6:12)의 특별하고 거룩한 불에서 숯을 꺼내 사용했다. 그리하여 이사야를 정결하게 할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성전 제사를 드릴 때, 단에서 숯을 취하는 주된 이유는 향에 불을 피우기 위함이다(16:12~13 참고). 그러나 이사야 6장에서는 스랍이 숯으로 향을 피우는 대신에 그것을 이사야의 입술에 댔다. 거룩한 불이 향불을 피워 하나님의 집에 향내를 가득히 채웠듯이 그 숯불은 선지자에게 불을 붙여 거룩한 기별의 향을 퍼뜨리게 할 것이었다. 6:8 이후에 하나님이 이사야를 그분의 백성에게로 보내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부가설명> 이사야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씨로 태어나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도를 전하게 하려고 하신다. 그는 생명의 기별을 입에 담아야 했다. 그렇기 위하여 그가 사망의 상태가 불에 타서 없어져야 하고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했다. 그 생명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사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스스로 주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으면 정결한 말씀을 증거 할 수 없다. 웃시야 왕은 잘나가다가 번영의 시절에 교만해졌다. 솔로몬은 그렇다가 회개했지만 웃시야는 회개할 기회도 없이 죽은 것 같다. 왕의 그런 상태는 나라의 상태에 반영되었고 앗수르는 정복의 전쟁을 시작하여 머지 않아 유다를 공격할 것으로 보였다. 사실 얼마 후에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는 이사야는 하나님의 숯불로 정결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아니 정결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경험을 해야 했다. 하나님은 스랍을 시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그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입술이 되게 하고 말의 실수가 없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3:2) 원칙을 실현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새 생명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갰는가.

 

교훈 :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백성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의 입술과 삶의 정결함과 거룩함이다.

 

 

16() 왕의 위임장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6:8).

 

정결하게 된 직후에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변인이 되겠다고 응답했다. 신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사야는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로 부름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사야서는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시작부터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1:4~10, 1~3장 참고). 그는 이미 6장 이전에도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했을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사역이 이미 시작된 후에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접촉으로 그의 사역이 고무되었음을 보여준다(34장의 모세와 왕상 19장의 엘리야와 비교).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선지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던 경우와 달리 이사야 6장에서 선지자는 특별한 사명에 자원한다. 이사야 1~5장은 선지자가 처음 부름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고, 그 후에 하나님은 성전에서 그를 격려하시며 그분을 대변하는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재확인시켜 주셨다.

 

1. 하나님은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용기를 북돋우셨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격려의 장소가 된 예가 어디에 또 있는가?(73:17, 4:14~16, 10:19~23, 5).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0:19~23]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5:1~14]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 이상의 구절들은 아삽과 바울과 사도요한과 그리고 우리도 성소에서 격려와 용기를 북돋움 받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씀들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진동하는 곳일 뿐 아니라, 우리같이 연약하고 누추한 사람들이 찾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일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안심할 수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5:6). 이것은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다. 그러한 묘사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으나 계속해서 십자가의 사건을 짊어지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분은 자신의 제단에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여전히 들리고 계신다(12:32 참고).

 

<부가설명> 우리는 성소를 바라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11:3,4). 세상에서 의의 터가 무너질 때 하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께 나가라고 하는 말씀이다. 거기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넉넉히 공급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있다. 생명강이 거기서 흘러나온다(47:1~). 우리는 성소의 복음적 구조와 기능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한 그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보증하신다. 성소 봉사는 본질적인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죄들,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사로잡아 죄 아래 끌고 가는 그런 사소한 죄들까지 다 사유하시는 피 뿌림의 봉사를 하시고 그런 봉사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오는 자들에게 언제나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7:23~25, 벧전1:2, 8:33,34).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한 계시도 그런 과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고 아삽고, 바울과 사도요한에게 보인 계시들도 그런 것을 나타낸다. 우리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언제나 나아가 무릎을 꿇자. 아멘.

 

교훈 :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고 사역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근거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17() 섬뜩한 호소 (6:9~13)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10).

 

1.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명을 위임하시면서 왜 이처럼 기이한 기별을 백성에게 전하게 하셨는가?(6:9~10)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 이것은 유다 백성들의 일반적인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신 것이다. 그들의 사상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로 표현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왜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지를 설명하셨다(13:13~15).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가 잘못되었거나 불필요한 기별을 들었다고 오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에(벧후 3:9), 이사야를 유다 백성에게 보내셨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을 파멸에서 건져내어 영원히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분의 호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어떤 이들은 더욱 거세게 반항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계속 호소하신다. 반면 저항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강퍅하게 된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된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야말로 결정적인 변수이다.

비록 사람들이 그 기별을 거절한다 할지라도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심지어는 예수님과 같은 기별자의 역할은 계속 호소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2:5)고 하셨다. 하나님과 그분의 종들의 역할은, 비록 그 백성이 파멸과 포로로 끝난다 할지라도(6:11~13) 그들에게 공평한 선택의 기회를 줌으로써 적절한 경고를 듣게 하는 것이다(3:16~21 비교).

4:21에서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로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구절도 아홉 번이나 나온다(, 8:15, 32, 9:34). 바로는 분명히 자유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강퍅하게 될 수 없었다. 만일 바로가 하나님이 주신 경고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면, 그의 마음은 강퍅해지지 않고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이런 반어(反語)적 표현들이 상당히 많다. 교과에 있는 대로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것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이나, 바울이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후12:13)는 등의 구절들이 그렇다. 그처럼 이사야서의 이 구절도 반어적으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말을 하는 것 같이 상대의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신다. 신명기 31:16~21절도 이스라엘의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는 읽는 사람이 충분히 알게 기록하게 하셨지만 어떤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말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본질적인 사실에 의하여 그런 말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기도하며 성령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33). 니느웨가 40일 후에 말할 것이라고 요나를 시켜 말씀하신 그 말씀도 반어적이다. 니느웨를 구원하시겠다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경우이다.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표현한 반어적 표현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호소하신다. 누군가 마음이 완악해졌다면 그것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거부한 결과이다.

 

 

18()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불법적인 행위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 매우 성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 충실한 적은 무리들은 용기를 잃고 낙담과 절망에 빠지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고 반역적인 민족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운명을 당할 것처럼 보였다.

이 같은 상태에 놓여 있던 웃시야의 통치 마지막 해에 이사야가 유다에게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그가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완고한 저항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펼치는 사역의 대상이었던 백성들의 완고함과 불신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과업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절망 중에 그의 사업을 포기하고 유다로 하여금 여전히 우상숭배를 계속하도록 버려 둘 것인가? 니느웨의 신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할 것인가?”(선지자와 왕, 306~30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회의론자나 무신론자가 그대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예언을 자세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다니엘서 2장이 특별히 좋다. 그리고 창세기 3장의 사건도 합리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면 왜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까? 이사야 1:19~20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는 좋은 일만 생기고, 그분을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나쁜 일만 생긴다는 뜻입니까?(1~2, 37, 73편 참고).

고전15:22의 진리를 이해하면 답이 있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려고 무한히 애를 쓰신다. 사람이 되어 대신 죽기까지 하시면서 사람들이 살아나기를 기대하신다. 그 사랑의 노력을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노력을 멈추신다. 그러면 그들 본래의 운명 본질상 진노의 상태에 노출되어버린다. 그것이 나쁜 일의 진상이다. 이 문제는 정말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간절히 호소하신다(16:6).

 

이사야 6장이 여러 면에서 속죄일과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날 하나님께서 충실한 자들의 죄는 씻으시고 불충실한 자들은 내쫓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생명의 나라로 받아들이고 생명을 끝까지 거절한 사람들은 사망의 날에 두신다. 속죄일의 심판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요약 : 이사야는 인간적인 지도력의 연약성이 여실히 드러났던 불안정한 시기에 온 우주의 통치자로부터 위대한 비전을 받았습니다. 부정함에 찌든 이사야는 자비로 말미암아 정결함과 능력을 부여받고 적의가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신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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