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계시하는 사랑의 본질

by 김명호 posted Jun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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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실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사람에게는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부연(敷衍)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원수는 무엇일까? 루시퍼가 하나님의 원수였을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고 자기가 하나님으로서 군림하여 경배 받으려고 한 자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당연히 원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루시퍼를 사랑하셨는가?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왜 그것을 먹었는지 물으셨다. 아담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대답했을 때 하나님은 여자에게 그 이유를 물으셨다. 여자는 뱀이 꾀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뱀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공평한 처사가 아니잖은가.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뱀은 사단이요 마귀이다.(계12:9) 하나님은 루시퍼가 사단이 되려고 했을 때 이미 그에게 다 물으시고 권고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권고를 무시하고 더 완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지위를 버리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유1:6).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존재하게 하려고 권고하셨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권고를 떠났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더 하실 일이 없도록 그를 사랑하신 것이며 그 조처를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끝까지 거절했을 때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

루시퍼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다. 그래서 루시퍼는 사망이 되었고 사망의 권세가 되었다.(히2:14)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은 다 사망이 된다.

아담도 이 사망과 관계를 맺으므로 사망이 되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이다. 루시퍼에게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사람에게도 당연히 사랑을 나타내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구주를 보내셔서 아담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제 마귀가 된 루시퍼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멀리 넘어갔기 때문에 그가 끼치는 사망의 영향과 사망 자체를 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망을 멸해야 한다. 사망을 멸하고 생명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말씀하셨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요일3:8) 이 말씀은 사망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이다. 최후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고전15:26) 이 말은 사망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남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망에 처한 세상에 생명으로 오셔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십자가에서 사망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신 것이다.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감성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고통이 될 것이다. 물론 감성까지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더 좋다.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는 이미 원수가 친구로 변한 후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의 제일 기능은 살려주려는 정신과 태도이다. 감정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가 자기감정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용납하지 않을 때 그를 미워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기심이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상대와 자기를 함께 속이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으로 애정이 가지 않을지라도 상대를 살려주려는 정신과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핵심은 원수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말씀에는 서로 돕고 인정을 나누라는 것도 포함되었다. 서로 사랑할 때는 이런 것이 포함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살려주려는 정신과 태도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이 아닌 것을 칭찬하고 장려하고 도우는 대도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망으로 가는 것을 칭찬하고 장려하고 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막3:4)

어떤 사람이 생명이 아닌 것을 주장하며 그럴듯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할 때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말하고 질책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 것을 장려하고 동조하며 너그러운 것 같은 생각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사랑과 관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을 동조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가는 그 길을 학문으로 왜곡하고 분명히 기록된 말씀과 다른 사상을 마치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호도하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관용도 아니다. 사망으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계시하는 사랑의 진수를 바르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자. 참으로 사랑하자. 그것은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정신과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