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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중에는 이 제목을 보고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대답을 서슴지 않고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이 나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사람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인이 아니면 구주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생애의 빛” 그룹에서 내가 쓴 책,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와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유인물을 “마지막 세대(34호, 혹 35호)”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여 많은 재림교인들 집에 우송한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도 왔다.

우선 내 책을 어떤 의미로 읽었든지 관심 있게 읽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나도 글을 쓰는 중에 읽는 사람이 충분히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쓰지 못한 점들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며, 이런 비판을 통하여 한 번쯤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가 비판하기 좋은 문장들을 골라서 하기 때문에 책 전체의 사상의 흐름을 바르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이 내 책을 구하여 읽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비판한 것과 책 전체의 내용을 잘 대조하면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이런 반응을 했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그들 기관을 표적으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책들이 그들이 주장에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주장이 정말 확고히 옳다면 이 책을 읽고 왜 흔들렸을까? 왜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했을까 참 안타까운 일이다. 피해의식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물을 정당하게 보는 눈을 어둡게 만드는데 말이다.

아무튼 보내준 유인물이어서 앞부분부터 조금 읽었다. 읽다가 미안하지만 더 읽을 가치를 발견하지 못해서 중단하고 책장을 그냥 넘기면서 대강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고 말았다. 참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 글을 쓴 분은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이 앞뒤가 모순되는 것을 스스로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쓴 것 같이 보였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쓰면 그것이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설명하자면, 마지막 세대 8쪽에 예언의 신을 인용하였는데 이렇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1증언 116)

이 말을 인용하기 바로 앞에는 이렇게 썼다. “죄에 대한 정의가 상태로(죽음) 세워지면 바로 원죄라는 오류로 연결된다.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가르침이다.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는 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었다.”(8쪽)

주의 깊이 읽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는가?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고 한다. 그러니 빛을 받지 않아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증언의 말씀이 그런 뜻인가? 정말 그런 뜻인가? 나중에 볼 것이다.

예언의 신의 증언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인용하였다. 그것은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와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만일 인용된 예언의 신의 글이 이 글을 쓴 분이 말하는 의미라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빛을 주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죄가 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주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또 만일 행17:30이 그와 같은 뜻이라면 하나님은 참 이해 못할 일을 하신 분이 된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도록 내어버려두면 그들은 허물이 없을 것이고 죄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요9:41도 그 글을 쓴 분이 주장하는 그런 뜻이라면 소경들은 죄가 없다. 모든 소경들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뜨기를 바랄 이유가 없다. 소경으로 있으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뜻일까? 또 야고보 4:17도 인용하였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도 이 글을 쓴 분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라면 선을 행할 줄 몰라서 행치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선을 행할 줄 알 필요가 없다. 그러면 선을 행하지 않아도 죄가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겔18:20도 인용하였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도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죄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인용한 것 같다.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담당해서 아비가 당할 벌을 대신 받을 이유가 없다. 역시 아비가 아들의 죄악을 담당해서 아들이 받을 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인용한 것은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반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담은 그의 후손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산 자가 태어날 수 없고 죽은 자가 태어난다. 이것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 이전의 상태이다. 죽은 자는 썩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죽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한다.(고전15:22)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4:18)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이런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엡2:3) 그래서 그들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은 옛 사람인 것이다.(엡4:22) 이 옛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들이 행하는 도덕적 의나 선도 썩어져가는 구습의 하나일 뿐이다. 죽은 자가 하는 행동은 썩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히6:1) 또 다른 행실이 있는가?

아담의 후손 된 사람들이 아담이 받을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썩고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겔18:20)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증언을 뒷받침 하는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다른 증언을 보자. “부모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의 유산이 죄의 유산이다. 죄는 저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예수께서 끊어진 고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 첫 아담과 관련하여 사람은 그로부터 죄와 사망 선고를 받는다. (Parents have a more serious charge than they imagine.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Sin has separated them from God. Jesus gave His life that He might unite the broken links to God. As related to the first Adam, men receive from him nothing but guilt and the sentence of death.)”(9MR 236.1) (inheritance는 생물학적으로는 유전 형질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유전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위에서 이미 인용한 이 글을 쓴 분의 글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가르침이다.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는 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었다.”는 말과 바로 위의 예언의 신의 증언을 비교해보라. 예언의 신을 믿을 것인가? 사람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무튼 나의 책에 반론을 쓴 분이 “만일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 것이라면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 믿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악인들도 자동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10쪽에 썼다. 8쪽의 말과 10쪽의 이 말을 비교해보라.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인용하고, 10쪽에는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한다. 8족의 말에 의하면 이 글을 쓴 분이, 예수를 믿지 않고 빛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죄인이 아니라고 말 한 것이 아닌가? 죄인이 아니라면 의인이 아닌가. 그러면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는 뜻인가? 나에게는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 것처럼 보인다. 빛을 받지 않았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무엇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빛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죄 되는 일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죄 되는 일이 없는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이 글을 쓴 분은 계속하여 이렇게 썼다.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 때문에 자동으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이며,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이 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고 자기가 각각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10쪽)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데, 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빛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설령 빛을 받은 사람이 짓는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죄가 안 되는데 그대로 있으면 그냥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죄가 안 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른다고 했는데, 빛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죄를 짓는가?

결국 이 글을 쓴 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 의를 선택하고 행하여서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한 셈이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성행하는 다원주의적 사상을 무의식 속에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원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것 외의 종교들도 그들 나름으로 수행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가. 이것은 행4:12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런데 성경이 계시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고전15:22) 말은 무슨 뜻이며,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는데,(요5:25) 그 죽은 자들은 누구라는 말인가? 각각 죄를 지어서 죽은 자들을 뜻하는 말인가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인가? 아담 안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한 죽은 자들은 각각 죄를 지은 죄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일까?

이 글을 쓴 분은 사람의 의지로 죄를 선택하여 행해야 죄가 되고 그때 죄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가 읽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 읽고 더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다음은 그냥 책장을 넘기며 훑었을 뿐이다. 사람이 자기주장을 요지부동으로 세워놓고 그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주장을 읽을 때에 그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반대 주장을 하다가보면 이런 경우에 이르기 쉽다. 나 역시 이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다. 내가 잘못 깨달았으면 가르쳐주셔서 잘못 가지 않게 해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지구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쓰신 분의 주장대로 하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또 갓 태어난 아기들이나 아직 의식이 생겨나지 않은 어린 아기들은 적어도 그 기간 동안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성은 있지만 죄는 없고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성경의 기별이 이런 기별이며 예수의 복음이 이런 복음인가?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쓴 분은 로마 5:15, 19에 “많은”이라는 말을 썼다고 주장하여 “모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것은 예수가 순종했지만 그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처럼 아담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죄인이 안 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구주 예수가 필요 없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있는가?

그랬는데 이 글을 쓴 분은 또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심판받고 멸망을 받는다는 말인가? 빛을 받지 못한 사람도 여기에 포함되는가? 빛을 받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만 포함되는가? 또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가? 빛을 받은 사람이 하는가?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하는가?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도 십자가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또 어떤 상태의 사람인가?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중간 지대의 사람인가?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는가? 그런 사람은 죄를 택하기 전에는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하고 의를 택하기 전에는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하는가? 그들은 구원도 안 받고 멸망도 안 하는 사람인가?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가 아닌가. 왜 아담의 후손은 아무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는가? 의지로 죄를 선택하지 않고 죄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구주 예수 없이도 하늘나라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양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롬2:13,14을 인용하여 주장한다. 그들은 구주 예수 없이 자기 양심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그들이 양심으로 선한 행위를 했다 해도 구주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가? 만일 구주 예수가 그들의 구원이 되었다면 그들 역시 구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구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그들도 죄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예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확실히 구주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된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잇 선지자는 슥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받으신 상처에 적용시켰다.(사도행적 226) 그러면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고 묻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물을 것이 아닐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으나 구원받은 사람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고 대답하신다. 그것은 곧 너희가 나를 몰랐으나 여기에 온 것은 내가 이렇게 상처 입는 고난을 통하여서 오게 된 것이라고 대답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말은 구원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없이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며, 구주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의지적으로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다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마지막 세대”에 글을 쓴 분은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1950년대 전에 재림교회가 가르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것 같다. 죄의 본성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인가? 죄는 하나의 실재인가? 아니면 사람이 행할 때 생기는 것인가? 죄의 본성은 죄를 생산하는 근원이 아닌가? 이 글을 쓴 분은 모든 사람에게 죄의 본성은 있지만 그 본성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죄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성경은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24:13)고 하였다. 악이 나와서 악인이 되었는가? 악인이기 때문에 악이 나오는가? 성경은 악인이기 때문에 악이 나온다고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서 그때부터 죄가 나온다는 말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온다는 말인가? 성경은 사람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라고 단언한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들이 구주 예수 없이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진노를 당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독생자를 보내어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된 데서 구원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제쳐놓고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태어난다고 가르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10쪽)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담의 죄 때문에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 사망의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사망의 생명으로 태어나면 그가 스스로 영생의 생명을 취할 수 있겠는가? 사망이 된 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고 다만 썩을 뿐인데 말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바로 이런 사망이라는 죄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된 것이 아닌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롬5: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롬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의(히12:29) 영광에 다 소멸된다는 말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 소멸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된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셔서 그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처를 취하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인가. 오히려 어떤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양심으로 선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다는 주장이야 말로 그 극진한 사랑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필요 없게 만드는 주장이 아닌가. 이런 주장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크게 오해하게 하는 것이다.

죄가 사망이 아니고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5장을 읽어보면 죄와 사망이 동격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17절에 보면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21절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 죄와 사망은 함께 왕 노릇한다. 동격이 아닌가?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고(17)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21) 내게는 죄와 사망이 동격으로 보이는데 잘못 본 것인가.

그 글을 쓴 분은 롬5:15,19의 “많은”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모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문장을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18절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이 말씀에 “많은”은 “모든”이라는 말이다. 물론 KJV에도 그렇고(all) 헬라 원어도 그렇다(파스). 15절과 19절에 “많은”이 18절의 “모든”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그 글을 쓴 분이 “모든”이 아니고 “많은”이라는 말을 강조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 죄인 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자기도 모르게 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결국 인간들 중에는 죄인인 존재도 있고 죄인이 아닌 존재도 있다는 논리를 주장한 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주가 필요한 사람도 있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논리가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예수님의 속죄가 제한된 속죄라는 칼뱅주의 자들의 주장과 같은 사상을 드러낸다. 칼뱅주의는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가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글을 쓴 분은 죄인 된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십자가의 속죄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쳐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에 대한 비유를 하셨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찔레와 포도나무 엉겅퀴와 무화과나무를 비교하셨다.(마7:16-19) 찔레나무가 찔레 열매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찔레나무니까 찔레가 열리고 포도나무니까 포도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찔레나무는 죄가 아니고 찔레 열매만 죄인가? 죄의 본성은 죄가 아니고 죄의 본성이 지은 열매만 죄라고 한다면 바로 찔레나무는 죄가 아니고 찔레 열매만 죄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연 그런가? 오히려 찔레나무가 문제 아닌가? 찔레를 맺지 않게 하려면 찔레나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찔레가 맺히겠는가. 그런데 찔레나무는 괜찮고 찔레 열매가 문제라는 말은 옳은 이야기인가.

나는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그 글을 쓴 분은 근본은 제쳐놓고 과정과 결과만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근본이 없으면 과정과 결과는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고 하셨다.(사61:3) 의의 나무가 된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글을 쓴 분은 마가복음의 자라나는 씨앗을 이야기하면서 성화가 진행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그러면 그 씨는 무슨 씨인가? 죄의 씨인가? 의의 씨인가? 좋은 씨인가 가라지인가? 죄의 씨가 자라면서 노력으로 의가 되고 진행하여 성화가 되는가? 의의 씨가 자라니까 의가 자라는 것인가? 성화문제도 죄를 의지의 행동으로 보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아마도 죄의 씨(죄의 본성)가 자라면서 노력해서 성화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라지가 노력하여 점점 좋은 곡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런가? 예수께서는 좋은 씨를 심으셨다.(마13:37) 그 좋은 씨가 자라는 것이다. 의 자체가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화 자체가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죄의 씨가 자라면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씨가 완전한 좋은 씨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 씨가 무엇인지는 제쳐놓고 자라는 것을 근본인 것처럼 생각하면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이 없으면 자라는 과정이 없다. 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고 예수 안에서 거듭날 때만 썩지 않을 씨로 나는 것이다.(벧전1:23) 아담의 후손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썩어질 씨로 태어난 것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 씨로 태어나는 것 밖에 다른 씨가 없다. 썩어질 씨로 태어나서 그대로 썩어질 씨가 자라는 대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든지, 예수를 믿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 곧 썩지 않을 씨로 다시 태어나서 거듭난 생명을 가지든지(벧전1:23) 둘 뿐이다. 그 중간 씨는 없다.

나는 내가 쓴 책에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을 쓴 일이 없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어 생명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하였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다. 그래서 양쪽 다 “모든 사람”이다. 예수를 믿을 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의인이 되도록 해 놓으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이냐고 물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그 글을 쓴 분은 자기가 쓰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2009년 2기 안식일 학교 교과 저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말이 아닌가. 그 잡지 표지에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라고 큰 글씨로 써 놓았다. 그는 왜 안교교과를 쓴 사람의 말을 따랐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다. 자기들과 신학사상이 같다는 재림교단의 여러 저명한 18명의 지도자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람의 권위를 의지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상관없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4:3)이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근원부터 미루어 살펴서(눅1:3) 성경이 계시하는 일관된 복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자 이제 처음에 인용한 예언의 신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정말 어떤 사람에게도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용해도 되는 것인가?

화잇부인이 이 글을 쓴 전체를 찾아 읽어보자. 무슨 말씀인지 분명하여질 것이다.

[나는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레 23:32)고 한 말씀이 그 말씀 그대로임을 보았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고 깨달으라. 그리하면,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 깊이 읽어 보라. 그대는 거기서 무엇이 저녁이며, 그것이 언제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천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껏 시작한 것처럼 안식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는지 물어 보았다. 나는 안식일의 최초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펴보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거나 불쾌히 여기신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어 왔으며,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물어 보았다. 천사는, “너희가 이해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안 되었다”라고 말했다. 천사는 다시 말했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절할 빛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이 저녁에 시작되었다는 것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들이, 안식일은 6시부터 시작된다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다고 마음에 생각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저녁이 6시를 의미한다고 추론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종들이 연합하고 일치되어야 할 것을 보았다.](1교증 116)

여기 말하는 빛이 무엇을 뜻하는가? 복음 전체의 빛을 뜻하는가? 구원의 빛을 뜻하는가? 안식일 시작하는 시간에 대한 것인가? 안식일 시작 시간에 대한 것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안식일 시작이 오후 6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저녁부터 저녁까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구자들에게 이 빛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6시부터 안식일 시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안식일을 지킨 그것은 죄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일요일을 안식일인 줄 알고 지킨 사람들이 아직 참 안식일의 빛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죄가 안 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상황을 잘 모르겠으나 복음의 빛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것을 보편화하여 어떤 경우에도 빛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예언의 신의 증언을 왜곡하는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미 말한 대로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산 사람들은 다 빛이 주어지지 않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그렇다면 구주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는 주장밖에 안 된다. 그들은 구주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이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예언의 신을 오해하게 하는 사용이다. 엘렌 화잇의 선지자성을 의심하게 하는 사용이다. 전체를 다 읽어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의지를 행하여 죄를 짓고 안 짓는 그런 주장에 사용할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아기들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주장을 고집한다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아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의 본성만 받은 자로 태어났을 뿐 죽은 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한 것 같이 모든 사람이 각기 범죄해야 죄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각기 범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롬5:12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동사 직설 과거형을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이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여기 모든 사람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이미 죽은 과거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지구상에 살았고,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서 살아갈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앞으로 태어날 사람도 가리킨다면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과거에 죄를 지었다고 기록할 수 있는가? 같은 말은 로마3:23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같은 “모든 사람”이고 같은 과거형 동사 직설법 “죄를 범하였으매”이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에서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갓 태어난 아이는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담의 후손 누구든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든지 밖에 버려져서 말라지고 불에 태워진다.(요15:6) 그것은 어린아이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의와 선을 행하였거나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글을 쓴 분은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을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11쪽)라고 썼다. 초기문집 275쪽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타락 속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오직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시는 반면에 그들의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 때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 안의 말씀은 ....을 찍고 인용하지 않았음.]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주인들은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죄인들은 종국에 다 불로 소멸되어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이 사망의 실상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였다.(고전15:26) 계시록은 사망이 불 못에 던져진다고 계시하였다.(계20:14) 그래서 사망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여 사망에 머물고 있는 모든 악인들과 악한 천사들도 다 불 못에서 없어진다. 창조되지 않은 것(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을 분명히 판단할 수 없는 사람과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데 악을 택한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다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다. 이 글을 쓴 분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고통을 면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은 것(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마치 죄가 없어서 벌을 받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죄의 형벌에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고통이 없어도 죽어서 없어지게 되는 (존재하지 않은 것)것이 형벌이다. 그것을 영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마25:46) 영벌이 영원토록 고통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 글을 쓴 분도 잘 알 것이다. 영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다.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 상실하거나 고통 없이 상실하거나 다 존재를 상실한다. 그것이 영벌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형벌의 고통에 대해서도 주인의 뜻을 모르고 행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적게 맞고 알고도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은 자는 많이 맞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 진상을 알 수 있다.(눅12:47,48) 모르고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아도 맞는다. 빛이 주어지지 않아서 몰라서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아도 맞는다는 말씀이 아닌가. 다만 적게 맞을 뿐이다. 적게 맞으면 고통이 적고 많이 맞으면 고통이 크다. 그러나 결국은 다 불 못에서 타서 재가 되어 창조되지 않은 것과(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 그것이 최초에 아담에게 선고된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내용이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어서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창조되기 전의 상태, 곧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선악의 판단을 분명하게 못하는 사람이나 할 줄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이나 결과는 창조되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그는 죄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이다. 그분이 나의 의이고 거룩함이고 생명이고 나의 전부이다.(고전1:30) 그렇지 않은가? 자기의 의지로 의를 선택하여 행하므로 의인이 된 사람들은 구원하심이 예수님에게 전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행한 의지의 노력에도 일부가 있다고 주장해야 맞은 것이 아닌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 노력은 거듭난 생명의 생태(生態)라는 것을 그 글을 쓴 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죄와 싸운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자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거듭난 생명은 죄를 용납하는 생명이 아니다. 죄를 거부하고 죄와 싸우는 생명이다. 그래서 싸운다. 사람이 거듭나면 새 생명으로 행하게 된다. 새 생명에는 새 생명의 의식이 생긴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에 있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롬8:6)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했으며,(롬8:9)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것이다.(요3:6)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계시한다.(고후5:17)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을 죄성이 있는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사상이 성경에 있는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새 생명을 얻는다.(요3:5, 롬6:4)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에서,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 생명으로 옮긴 그 생명이다. 생명으로 옮길 때 반쯤 썩고 있는 상태로 옮길 것인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날 때 반쯤 썩고 있는 상태로 살아났을까. 그렇지 않고 온전히 건강한 상태로 살아났을 것이 확실하지 않는가. 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람도 완전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새 마음을 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이 새 마음은 새 생명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할 수 있는 마음이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마음이다. 그래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고 계시하셨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는 7절 말씀은 뒤집어보면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뿐 아니라 할 수 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이 글을 쓴 분은 성경의 이런 약속보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성경에 적용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일상 신앙생활에서 날마다 죄의 유혹을 받으며 그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고심참담하게 노력해도 자꾸 죄에 유혹에 이끌리는 경험을 하며, 이런 인간의 연약한 것을 단호히 물리치려는 끈질기고 힘을 다한 노력이 죄를 이기고 의를 이루며 성화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 경험을 성경의 약속보다 앞 세워 성경을 설명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23:7)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데, 그 새 마음에서 죄의 삶이 나온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요4:14) 이 샘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난다. 이 샘물에서 죄가 솟아나올 것인가? 성경은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약3:11)라고 묻는다. 거듭나서 새 생명을 가지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가진 사람의 그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이 같이 솟아나오겠는가. 성경의 이 말씀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계시하는 말씀이 아닌가. 야고보는 계속 말한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3:12)

그런데 포도나무가 된 사람이 찔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말이 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포도나무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성화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근본은 나무이고 과정과 결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과 성화에 대한 것도 그 근본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제쳐놓고 과정과 결과만을 가지고 근본인 것 같이 주장하는 것은 나무는 어떻든지 열매를 선하게 맺으면 된다는 논리가 아닌가. 본성적으로 찔레나무가 노력하면 포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본성으로 죄의 성질을 가졌는데”, 이 말을 “본성적으로 찔레나무인데”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보는 것은 잘못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 죄의 본성이 노력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면 의인이다. 이것은 찔레나무가 노력하여 포도를 열면 포도나무다 라는 논리가 아닌가. 찔레나무가 노력한다고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찔레나무가 포도나무로 재창조되기 전에는 결코 포도를 맺을 수 없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다.(요15:5) 포도나무의 가지도 포도나무이지 찔레가 아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포도나무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가 찔레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인가? 본성은 그 본성에서 결과를 낸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실 때 그 죄의 본성에서 건지시는 것이 아닌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이제 예수 안에서 “본질상 신의 성질”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베드로는 그렇게 계시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여기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된 말은 KJV에 “the divine nature”라고 번역하였다. “신성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의 본질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여기 “성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퓌시스”인데 신약성경에 14번 사용되었다. 엡2:3의 “본질상”이라는 말도 바로 퓌시스이다. 우리는 아담의 씨로 태어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면 신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약속이 아닌가. 그 신의 본질에서 죄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인가.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세상과 사단의 세력이 공격하는 그 공격에 상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마귀의 불화살에 맞아서 음욕을 품게 되면 그 죄는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19쪽) 나는 화살에 맞아서 죄를 지은 것이 정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 일이 없다. 그것은 죄이다. 그러나 죄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픈 고통을 느끼고 속히 길르앗의 의사이신 예수께 나아가서 고침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만일 상처를 입은 줄도 모르고 상처를 입었는데 그것이 전혀 아프지 않다면 그는 감각 없는 자이며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이다.(엡4:18) 아프면 치료받으러 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회개라고 나는 말하였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도 또 사망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설명이 성경적으로 잘못 되었는가. 그런데 나의 현실 생활이 이렇게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이런 계시를 그렇지 않은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진정으로 죄와 싸우고 있다면 그는 거듭난 생명의 생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것이 근본이고 죄와 싸우는 것은 과정이다. 근본을 떠나서는 과정이 없다. 거듭난 생명에서는 죄가 나올 수 없다. 죄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 속에서 죄가 계속 나온다면 그는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악은 악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삼상24:13) 사단은 끊임없이 거듭난 성도들을 공격한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불화살을 쏜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죄와 싸우는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우는 사람은 죄의 세상이라는 환경에 처하여 있고, 과거에 경험한 죄의 경험들이 지체 안에 있다. 그래서 마귀가 쏘는 화살을 지체 안에 있는 죄를 경험한 경험의 법이 쉽게 연합한다. 그래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르앗의 의사로 소개되었고,(렘8:22) 그의 손길로 우리를 씻어주시는 분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13:8) 그래서 그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였으며(계7: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계22:14) 이 말은 KJV에는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행한 의로운 일이나 선한 일이 그것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선이나 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예수의 보혈로 씻겨서 하나님 앞에 가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는 아무리 의로워도 그것은 더러운 옷과 같기 때문이다.(사64:6)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는 현명한 독자들은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나는 논쟁을 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나의 책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그 비판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을 조명해봤을 뿐이다. 앞에 말한 대로 다 읽지도 않았다. 다 읽을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시작 부분에 잘못된 것을 보면 다른 것은 읽어보지 않아도 잘못되게 시작한 그 논리를 전개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글을 쓴 분의 주장대로 첫 단추를 잘못 끼었기 때문에 모든 단추가 잘못 끼어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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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들의 일생 중에 구주가 필요 없는 기간이 있는가? 김명호 2009.09.07 7368
11 영원한 생명과 도덕성 1 김명호 2009.08.24 7302
10 사람이 측량 못하는 일을 위하여 김명호 2009.07.29 7750
9 기도의 핵심 사상 김명호 2009.07.23 7463
8 지록위마(指鹿爲馬) 김명호 2009.06.22 7656
7 성경이 계시하는 사랑의 본질 김명호 2009.06.21 7973
6 믿음- 바라는 것들의 실상 김명호 2009.06.14 7833
5 잘못된 출발(나는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김명호 2009.06.09 8428
4 2,300 주야와 하늘 성소 봉사에 대하여 김명호 2009.06.08 10644
3 나의 채식 이야기 1 김명호 2009.05.11 10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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