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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7 07:23

전도서를 보는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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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이란 독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 강해를 수필로 쓰고자 시도할 때 작가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빼고도 수필이 가능할까? 수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독자는 작가를 만난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를 쓸 때는 독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그런 제한을 두고도 수필이 가능할까?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주제를 재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를 수필로 쓰고자할 때 작가는 상상력을 자제해야 한다. 그러고도 수필이라 할 수 있을까? 수필이란 한 여름 정자 밑에서 쉬어가는 기분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미 주어진 결론을 어떻게든 독자에게 설득하려든다. 이런 글에서 과연 독자들이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러한 수필의 결격 사유 때문에 수필이 될 수 없다면 이 글들은 수필이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수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능한 것은 성경 이야기는 부자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웃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수를 찾아내고 찬양하는 소리에서 고통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일이 성경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것은 성경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갈망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징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채찍에서 용서를 맛볼 수 있다. 그 느낌과 맛을 정직하게만 살려낸다면 이 글들은 충분히 수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글을 만들기에 가장 어려운 책은 전도서다.

   전도서를 강해나 주석이 아닌 수필로 만드는 일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진작 예상한 바였다. 논리 전환에 대한 암시 없이 논조가 바뀌고, 모호한 말로 내용의 전환을 시도하는 화법을 가지런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해 아래서 눈을 돌려 해 위의 하나님을 보는가 하면 다시 허무가를 부르는 반복화법에서 작자의 진심을 알아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헛되도다’로 시작하는 전도서의 영탄법은 단순한 영탄법이 아니라 역설법이다. 솔로몬의 허무가는 허무주의적 허무가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결코 허무하게 인생을 마쳐서는 안 된다는 역설법적 허무가이다. 전도서는 ‘이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헛되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존귀한 존재라는 말이다.

   솔로몬은 인간이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그 백성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수사법(修辭法)을 동원한다. 수사법을 생각지 않고 전도서 8장을 읽으면 2절로부터 5절까지는 임금에게 복종하라는 말이요 그 다음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에 대한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글로서도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왜 말하는지 그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

   문 구조에 따른 수사법에 역순법이 있다. 역순법이 사용된 문장은 그 순서를 돌려놓아야 이해가 된다. 전도서 8장은 그 순서를 돌려놓을 때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행”(전 8:3)하는 왕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강해나 주석은 앞과 뒤가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사람은....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전 4:8)에 이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절)라고 했을 때 주석가는 8절에서 “재산 축적만을 목적으로 수고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말이다”(톰슨주석)고 주석하고 9절에서는 “동료와의 교제 속에서 합심할 때 복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톰슨주석)고 주해하면 된다. 두 절의 상관관계를 밝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성경 저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말씀들을 한 줄로 엮어내야 한다. 그 말씀들을 엮어내기 위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왜 전도자는 “무익한 노고”를 말한 뒤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두 사람”은 5장 허두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다.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여 둘이 된다면 헛되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의 두 사람이 5장의 하나님과 연결 고리임을 알아내는 일은 상상력에 의한 것도 아니요 체험에 의한 것도 아니다. 성경 저자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따낸 열매이다. 성경의 저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열망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전 1:5-6)를 읽으면서 순환적 시간의 세계에 머물러있는 솔로몬을 그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직선적 시간의 세계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전도서가 성경에 있어야 될 이유는 없다. 솔로몬이 직선적 시간의 세계로 옮겨가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전도서를 차분히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서의 원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전 12:11) 그러한 믿음에 확고하기만 하다면 “해 아래” 머물던 솔로몬이 홀연히 빛을 바라보는 시간에 가졌던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듣게 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11:7) 빛을 초월한 또 다른 빛에 의해 솔로몬은 요동치고 있다. 인간이 눈을 들어 빛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만 한다면 순환적 시간의 세계에서 직선적 시간의 세계로 옮겨가는 길은 더 이상 미로가 아니다.

   전도서를 보는 두 눈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 두 눈만 똑바로 뜨고 있다면 전도서의 허무가는 인간의 정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세상의 허무가가 아니라 허무한 세상에 뜻을 두고 있는 자들을 찌르는 ‘채찍’(전 12:11)임을 알게 된다. 전도서는 저자의 눈이 해 아래서 두루 헤맬 때가 아니라 직선으로 뻗어가는 빛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뒤에 쓴 글임을 꼭 붙들어야 한다. 순환적 시간의 세계에서 직선적 시간의 세계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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