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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15:11

늙은이들아

조회 수 6218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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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한사람도 빠짐없이 나이 한 살씩을 선물하신다. 어느 행성에도 없는 이 행사가 지구촌에서 매년 어김없이 행해진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선물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느 날 나는 내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운동화 끈 구멍이 네 개 있는 신을 신으면 뽀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엊그젠데 그 세월이 벌써 오래 전에 지나간 것이다. 두려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라는 낯선 녀석이 문득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괴물이 나의 사지를 잘라먹듯, 걸려 있는 달력을 내려놓을 때마다 인생이 퍽퍽 잘려나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도 아니다.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며 호쾌하게 웃던 웃음이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불꽃같이 타오르는 정열이 식어서도 아니다. 지난날을 말하려는 순간 그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나이를 더해간다는 것은 내 삶에 무엇을 하나씩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잃어간다는 것이다. 아파해야 하는 상처가 하나씩 더 늘어간다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보다 헤어져야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원하는 관계에서 소외되고 젊은이들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진다.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해서 걱정이 아니다. 주름살이 늘어나고 아픈 곳이 늘어나서 걱정이 아니다. 잃어버린 세월 때문에 걱정도 아니다. 살면서 진 그 많은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까, 그걸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남은 인생이 걱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그늘만 길어지는 게 아니다. 아쉬움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가보고 싶고, 보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을 다 못해 아쉬운 게 아니다. 기대에 못 미친 삶 때문도 아니다. 이제 막 느끼기 시작한 따뜻한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운 것이다.

   주름살보다 더 빨리 늘어가는 것은 서글픔이다. 슬슬 얼굴을 피하는 젊은이들 때문이 아니다. 노화된 육체 속에 구속된 젊음 때문도 아니다. 고요하게 잠들지 못한 노욕 때문도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지은 많은 죄들이 날 선 비수처럼 찌르는데도 그것들을 낱낱이 고백하는 참회록을 쓸 만큼 용기를 갖지 못한 게 슬픈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걱정, 또는 아쉬움이나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을 펼 수 있어서 좋고,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어서 좋고,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좋다. 그리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이 즐거워서 더욱 좋다. 말을 한다는 것은 들을 기회, 그 다른 하나를 잃는다는 말이 아닌가!

   삶을 자기의 향기를 만드는 작업으로 생각할 때 노인이란 자기의 향기가 완성된 사람이다. 이 말은 근사하게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아니다. 멋진 어른이 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륜이 무용지물이 된 이 시대에도 노인은 여전히 향기로울 수 있을까?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일까? 착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듯이 구원을 선물하는 신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하나님을 나의 삶에서 만났는가?’ 하는 인생의 진지한 고민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젊을 때는 향수(香水)와 같은 그 젊음만으로도 생기 있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가꾸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눈가의 주름을 본다. ‘어떻게 사람들이 눈가의 주름을 보지 않고 눈의 깊이를 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을 놓아 이웃을 부둥켜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귀를 밝혀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자만이 아름다운 노년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노인에게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기억을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욕심이야 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그래도 멋지게 늙고 싶은 욕심이 아직 남아 있다. 고급 음식점에 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 천천히 음식 하나하나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타이타닉호와 같은 커다란 유람선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연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바닷바람을 쏘이는 게 아니다.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스쿠터에 태우고 도시를 벗어나 머리카락을 날리며 전원을 질주하는 것도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케이블처럼 두루마리 휴지만한 미녀의 허리를 휘감아 보는 것도 아니다. 먼 산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앉아 사색하는 그림은 더구나 아니다.

   젊었을 때 다 흘리지 못한 땀을 흘리는 것, 여름 땡볕에서 호미를 잡고 땅을 파는 것도 좋다. 집 짓는 곳에 가서 벽돌을 날라도 좋다. 가파른 산을 오르며 위험에 직면해도 좋다. 마라톤 코스에서 땀범벅이 되어도 좋다. 혼을 다해 무엇엔가 몰입해도 좋다. 지금이라도 내 가슴을 벌렁벌렁 뛰게 할 수 있는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있다면 내 인생의 석양이 얼마나 멋있을까? 그러나 그보다 더 멋있는 것은 내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실험해보는 일이다. 그 실험에 자신을 던질 수 있다면 부끄러움 하나는 벗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부끄러움이다. 그 부끄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던지 멋지지 않을까?

   노년은 나이 값을 해야 된다는 요구를 받는 시기이다. 꿈도 희망도 없이 지낼 것이 아니라 꿈을 꾸어야한다. 노인이라도 동심을 지니면 젊은이라 말할 수 있듯이, 노인이라도 ‘다 꺼져가는 숯덩이에서 마지막 불똥이 꺼지듯이 사그라질 게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나무에 활활 불을 붙이고 갈 수는 없을까’를 꿈꾼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젊은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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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않는세계 2009.08.28 16:33
    "‘다 꺼져가는 숯덩이에서 마지막 불똥이 꺼지듯이 사그라질 게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나무에 활활 불을 붙이고 갈 수는 없을까’를 꿈꾼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젊은이가 아닐까?"  절대동감!!!

    글을 쓰시는 한 님은 영원한 청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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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라 2009.08.30 10:23
    몸이 낡아지는 것도 억울한데
    마음까지 늙어서야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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