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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0:36

은총은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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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은 개인적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르고 있을 때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하나님께서 산 위에 어린양을 준비해주실 것을 믿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아브라함은 산에 올라가자마자 ‘아들아 양을 찾아보자’ 하고는 온 산을 뒤졌어야 한다. 그리고 양이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근처에 양이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신속하게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창 22:9-10)고 했다.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셨다고 믿었을까? 히브리서 기자가 대답한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양이 아니라 양을 통해 일어날 사건이었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터이지만 아브라함은 어떤 사건이 분명히 일어날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서슴치 않고 아들의 심장을 행해 칼을 들었다. 창세기는 그 믿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창 22:5 새번역)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NIV)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고 혼자 돌아오는 게 아니라 아들과 함께 돌아올 것을 믿었다. 영혼불멸 사상이 만연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시에 생소한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보고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인간이 죽으면 유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사상이 만연하던 시대에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시험문제에서 힌트가 주어졌다.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은 혹시 문제에 힌트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문제를 잘 읽어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 문제에서 문제의 답을 알아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사 41:8)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창 22:2)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삭이 독자임을 상기시키신 것은 시험 문제에 숨겨두신 힌트였다. 독자란 그 아들을 대체할 어떤 다른 아들이 없는 유일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독자라는 말은 ‘후사를 위해 또 다른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을 일축한다. 유일자를 대체할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유일자 이삭을 소유한 자에게 부활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유일자를 가진 자에게는 부활만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15:4)가 되는 유일한 방편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자 무지개가 나타났다. 언약의 무지개였다. 왜 하나님께서 무지개로 언약을 삼으셨을까? 언약의 증표라면 변치 않는 태양이나 우람한 바위가 더 적당하지 않을까? 무지개는 해가 각도만 달리해도 곧 사라지는 것이다.

빛이 비칠 때 모든 물방울들이 분산되어 스펙트럼 전체 빛깔을 만들지만 관찰자는 한 물방울에서 한 가지 빛깔 밖에 볼 수 없다. 한 물방울에서 나온 보라색 빛이 눈에 들어왔다면 같은 물방울에서 나온 다른 색깔을 보기 위해선 다른 위치로 옮겨야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지개를 구경할 때, 하나의 무지개를 여러 사람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무지개를 보게 된다.

하늘의 무지개가 천 명의 사람에게는 천의 무지개가 되고 만 명의 사람에게 만개의 무지개가 되듯이, 반사와 굴절을 겪으며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집체적(集體的)인 하나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다. 개인 하나하나의 사정(私情)에 관심하시며, 하나하나의 고통에 함께 하시며, 하나하나의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많은 무리 중에서도 나 하나를 알아보시고 다수에서도 나 하나만 존재하는 듯이 방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 유일자이다. 인간 각자가 하나님에게 유일자라면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유일자를 구원하는 방식은 오직 부활뿐이다. 부활은 나 스스로 무덤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셔야 하는 은총의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은총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신(행 2;24) 이 은총의 사건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버렸다. 만일 인간의 구원이 밖에서 이르러오는 은총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스스로 개발하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감사할 것도 기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은총은 우리 안에서 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하여 은총을 받는 자는 떨며 일어서는 것이다.

은총이 개인적이라는 말은 은총을 받는 자는 많지 않다는 말이다.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 다수가 진리인 세상에서 소수에 남아 있는 일은 핍박 받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뒤집어 말하면 소수에 남아 있는 자체가 은총이다. 모든 종교가 모여 ‘우리 다같이’를 노래할 때 은총을 받은 자들은, 숙종의 은총을 입은 무수리 최 씨가 모진 신형을 감내하듯이, 모진 핍박을 감내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총을 입은 최 씨에게 태어난 영조가 왕통을 잇듯이 은총을 입은 자는 결국 영광의 주를 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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