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2009.06.11 13:14

낙엽 같은 이야기

조회 수 416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小說

낙엽 같은 이야기

김 명 호

 

 

바람이 없어도

잎새가 지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얗게

서리 내린 마당에

빨갛도록 서러운 잎새들이

질서를 잃고 흩어져 있다.

 

쏟아져 깔려있는

핏빛 물이 든

시간의 낙엽을 밟고

종점으로 다가드는 세월

 

그래도

회한의 가슴은

메꾸어지지 않고

하늘은 자꾸만 높아지는데

 

깔려 쌓인 잎새들 거름되고

나무가지 새순 돋을

그 때

그 때가 오면

 

무너져 죽은 회한의 가슴에

부활의 새순도 돋으리

동면의 기다림으로

또 한 잎

지는

잎새.

 

낙엽이 지고 있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이 없어도 소리없이, 아무런 중량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R 장로는 교회에서 돌아 왔으나, 방안에 안정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식구들 모르게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서 낙엽 지는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서, 초점 잃은 눈으로 물끄러미 지는 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로님 때문에 교회에 올 사람이 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로라는 직책이 곧 신앙의 척도는 아니잖습니까? 교회 사정도 잘 모르는 새로 나오는 사람들을 데리고 왜 교회의 허물을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장로님 편을 만들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장로님, 사리 판단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장로님, 정말 장로님이 언동에 좀 더 신중하셨으면 교회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P 교인의 말, 부드럽게 말했지만 수 만개의 가시가 돋쳐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말의 가시가 아직도 귀와 마음에 박혀서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교회에 올 사람이 못 온다고? 교회가 누구 때문에 세워졌는데.)

그는 낙엽을 보면서 말의 낙엽을 줍고 있었다.

낙엽은 떨어져 거름이라도 되는데, 귓속으로 떨어져 들어간 말의 낙엽은 썩지를 않고, 귓속에서 마음으로 들어가면서 가시가 되어 아프게 찔러댄다고 P는 말했다. 정말 지금 R 장로는 말의 가시울타리 안에 갇혀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R 장로는, 이 가시가 되어 찔러대는 말을 털어 버리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는 낙엽과 겹쳐서 P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대고 있었다. 그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 그는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고 있는 교인이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자기가 할 일은 언제든지 부지런히 하고 있다. 교인들이 다 안다. 그래서 직책 없이 성실한 그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교인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힘을 가지고 교회에 스며들곤 한다. 어쩌면 P는 그런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를 집사로, 어떤 때는 정말 장로로 선출하기까지 했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거절했다. 그리고 직책없이 봉사하는 것이 자신에게 걸맞은 것은 물론 봉사에도 부담이 없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려서, 여태까지 교회 직책을 맡은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더욱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또한 이런 상황을 속으로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일 뿐 사람으로서는 그 속을 읽을 수가 없다. 만일 속으로 그렇다면 그는 너무 완벽한 연기자일 수밖에 없다. 존경과 신뢰를 한꺼번에 벌어들이는 완벽한 연기를 하고, 교인들은 그 연기에 박수를 보내며 속는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R 장로는, 이렇게 열심히 속으로 P를 폄하면서 떨어지는 낙엽을 세고 있었다.

(하필 그자가 그 식당에 있을 것이 뭣이람, 아니 어째 그렇게 조심성 없이 살펴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바보같이, 정말 P의 말대로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데).

그는 아까 교회에서 있었던 P와의 만남과 그에게서 들은 말을 계속 되씹으면서 자기의 지혜롭지 못한 처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R 장로는 자기의 처사를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교회 생활을 절대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할 상황에 직면했는데도, 자기의 올바르지 못한 처신이 P에게 발각되었다는 그 사실이 분하고 아쉽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P의 그 잘 믿는 척하는 태도가 오늘따라 더 아니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채 하는 그의 신앙 모습에 교인들이 멋지게 속고 있다고 강변(强辯)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신용이 있는가?

그런데, 소위 장로인 그의 말은 P 만큼 신용있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은 과격한 편이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릴 때 더욱 그랬다. 때때론 급하고 소리가 크고 거칠었으며,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 교회에 터줏대감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출석하는 교회가 창립될 때부터 그는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해 왔었다. 개척할 때이니 만큼 일할 사람도 없었다. 혼자 뛰다시피 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를 쥐고 휘두르려는 모습을 자주 나타내었다. 교인들이 그의 노력을 알기 때문에 그런 그의 태도를 별로 탓하지 않았으나, 이제 세월이 흘렀고, 그는 노인 층에 계수할 나이가 되면서, 그의 품위가 사람들 앞에 구겨진 모습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충고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휘두르는 언사와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질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점 고독해 지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개척 당시에는 자신의 주위에 모여 왔던 사람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자기의 하는 양을 구경하면서 머리를 흔들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것이 한참 되었다. 교인들이 자기를 기피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소외감에 사로잡히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목사들도 자기 뜻에 맞지 않아서 몇 사람 갈아치웠다. 어찌 장로 한 사람의 힘으로 목사를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랴만, 그가 마음먹고 하려고 하면 기어이 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가시로 찔렀고, 찔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자기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목을 굳게 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에 맞은 목사라고 불러들인 담임 목사가 결코 자기 편이 아닌 것을 보면서 일종의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면서 억제할 수 없는 배신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목사의 설교가 구역질 나는 신소리처럼 귓전을 맴돌고 지나가버리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고독과 허탈을 메우는 법을 생각하였다. 자기 편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자기의 모습을 다 알아버린 사람들이 자기 편이 될 리 없고 보니, 불가불 새로 오는 사람, 교회의 사정에 어두운 사람들을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성 교인들 가운데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자기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이 있고, 성질이 통하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기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수에 있어서 아주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는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조용히 집으로 초대하고 후대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다. 대접으로 그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그리고 교회의 허물을 그들에게 팔면서 자기 편을 만들려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도 그는 교인 된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또한 이 교회로 이사 와서 아직 교회의 사정에 어두운 O씨의 가족을 음식점으로 초청하고 다정하게 식사를 나누면서 조용 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럴 때의 R 장로의 이야기는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데서부터, 신앙 생활의 어려움과 신앙의 원칙 이야기로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내밀어 보는 그런 대화 방식이었다.

“먼저 다니시던 교회는 좋았지요, 교회 사정을 들어도 괜찮겠지요?” 이렇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었다.

“예, 저는 교회에 다닌지 오래지 않아서 잘 모르지요. 그러나 느낌으로는 좀 불편한 일들이 있나 보던데요.”

“그럴 수 있지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람의 모습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거든요.”

그는 자기 모습을 돌아보는 일에 너무 둔하여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정말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겠지요. 저는 성경의 진리가 하도 신기하게 이치에 맞아서,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이 너무 감사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교회의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하여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다 연약한 존재들이니까, 인간적으로 불편한 일들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진리를 깨달은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참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 교인들이 모두 O 형제와 같은 생각으로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믿는다면 얼마나 좋겠으며 교회가 발전하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지 못하거든요. 우리 교회도 시작할 때는 참 좋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쌓이고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순수하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R 장로는 이쯤에서, 자기 자신이 전혀 O 형제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이 교회에서 자신의 위치와, 교회 개척하는데 어떻게 재산과 노력을 투자했는지를 장황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또 구수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상대방이 자기가 너무 외롭다고 충분히 느끼도록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하는 일에 대하여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결코 부담을 느끼지 않을 화술로 풀어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이 교회 일을 도맡아서 너무 열심히 했기 대문이라고 결론을 맺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도 답답해서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안할 이야기까지 했군요. 미안합니다. 앞으로 교회의 큰 힘이 되어주기를 부탁합니다.”

O는 R 장로의 이야기를 시종 진지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R 장로에 대하여 동정하고 힘이 되어주어야겠다는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R 장로는 결코 상대방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 표정이 자신의 말에 의혹을 드러내는 것같이 보일 때는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자기의 이야기에 상대방이 빨려 들어오는 것을 볼 때는 그것을 최대한으로 자기의 감정을 이입(移入)하는데 이용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부각시켜 놓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끌려 오면 은근히 마음으로 미소지으며 자신의 수완을 만족해하는 습관까지 몸에 베고 있었다. 피해 의식과, 자의적(恣意的) 의와, 아집이 얽혀 있는 인격적 상태는 결코 자신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한다. R 장로의 현재의 모습이 그렇게 뭉쳐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은 이러한 인격이 형성되면 거기에 걸맞은 지혜와 방도가 솟아나는 일이다.

행여 듣는 사람이 자기의 말을 비판적으로 듣거나, 진지하게 수긍하는 빛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 점을 찍어 그를 자기를 반대하는 편으로 치부해 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O와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 그 자리 뒤편에 P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비지니스 일로 손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칸막이가 있어서 R 장로는 P를 보지 못하였다. 만약 P를 봤다면 그날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하였다. 어쩌면 R 장로가 P를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P는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다른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스미듯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른 눈을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식히면서 아주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그는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미니 녹음기의 녹음키를 눌러놓고 있었다. R 장로가 어떤 사람들을 찾아 자기 편을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으나, 그는 그렇게까지 사람이 비열해졌으리라고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럴 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고 심각한 생각에 침잠(沈潛)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나타나면 당황하게 될 R 장로를 생각하면서 지루한 인내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식당을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라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P의 지론이었다. 그는 깨달은 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R 장로로 하여 야기된 많은 문제에 그는 윤활유 노릇을 해 왔다. 그는 어떤 사람의 편이 되기를 항상 거부해 왔다. 그는 바른 것을 바르다고 주장하는 편일 뿐이었다. 이편 저편에서 오해를 사는 일도 여러번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게 불편부당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그러한 삶의 모습이 교인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R 장로는 그런 P가 항상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P의 태도를, 꾸미는 태도가 아닌가 하고 항상 그런 눈으로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멋진 연기에 교인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처지를 위로하곤 하였다.

그랬는데, 오늘 안식일 예배 후에 P가 R 장로를 조용히 찾은 것이다.

 

“장로님, 제가 드릴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R 장로는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로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교회 회의 실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에 P는 조용히 말을 시작하였다.

“장로님, 어떤 목사님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갔답니다. 그런데 어떤 날, 그만 식인종들에게 잡히고 말았답니다. 그는 결박되어 추장 앞에 끌려가서 꿇어 앉혀졌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가 얼굴을 들고 추장을 보았을 때에는 경악과 함께 일말의 반가움이 가슴에 밀려 왔답니다. 왜냐하면, 그 추장은 미국에서 함께 대학에서 공부한 동창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선교사는 추장을 쳐다보면서, ‘여보게 자넨가! 그런데, 자네가 미국에 유학까지 와서 고등교육을 받고도 아직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식인을 한단 말인가?’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동창생 추장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이 ‘아니 많이 변했네. 전에는 그냥 사람을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기도하고 먹는다네. 그만큼 변했으면 많이 변한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답니다.”

“아니 P 선생 뚱딴지같이 그런 추장 이야기는 왜 하시오? 지금 방문도 가야하고 바쁜데?”

그러자 P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녹음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재생키를 눌렀다.

녹음기에서 R 장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굴욕과 분노와 실망으로 이그러졌다. 목이 꺾이고 있었다.

P는 무섭도록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R 장로는 견디지 못하고 녹음기를 껐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로 P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침묵을 깨고 R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이야기요? 어쩌자고 흥신소 행세를 하시오?”

“장로님, 저는 흥신소 행세를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엊그제지요, 제가 그 식당에서 비지니스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것을 장로님이 몰랐을 뿐이지요. 장로님은 바로 제가 앉은 칸막이 뒤편에 자리잡고 O 형제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이 하늘 녹음기에 녹음된다는 예언의 신의 말씀도 기억하셔야지요. 제가 녹음을 한 것은 장로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만 장로님께 이것을 들려드리면서, 자신이 한 말을 객관적으로 들어보는 기회를 드리고자 한 것뿐입니다.”

“.........................”

“하신 말씀을 직접 들어보시니 어떻습니까?”

“........................”

“저는 장로님이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님이 아시다싶이 저는 언제나 바른편에 서기를 노력해 왔습니다. 장로님에 대한 여러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제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변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변호할 재료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장로님의 하는 일을 보았으니까요. 장로님, 이것은 장로님의 자화상입니다. 기도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은, 기도할 줄 모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인 고기 잔치를 자주 벌이지요. 화잇 부인은 사람을 헐뜯는 것은 인육잔치와 같다고 했습니다. 어찌 우리는 기도하면서 미워하고, 기도하면서 거짓말하고, 기도하면서 시기하고 기도하면서 당을 만들고, 기도하면서 전혀 예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까? 장로님이 이 교회에서 하신 일을 누가 모릅니까? 꼭 장로님을 높이 쳐들고, 장로님이 원하는 대로만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의 교훈을 실천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어야 하지요.”

P는 말을 끊고 R 장로를 부드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장로님, 장로님이 예수 믿은 세월이 얼마나 오랩니까? 장로로 봉사한 세월만도 웬만한 사람 예수 믿은 세월만큼 되었습니다. 그런 연륜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불합리한 그리스도인 모습이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이 저질러 온, 죄송합니다. 저질렀다고 말해서요, 일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후에 사라질는지 저도 모르고, 아마 장로님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낙엽은 져서 거름이나 되지요. 말의 낙엽은 귓속으로 떨어져 마음에 박히면 가시가 되어 오랫동안 심령을 찔러댑니다. 어쩌면 지금 저의 말도 가시가 되어 장로님의 마음으로 떨어져 들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에서 잘 썩으면 좋은 영양이 될 수도 있겠지요. 장로님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깊이 생각하셔서 이 교회가 정말 장로님의 자아가 부정된 헌신적인 봉사로 하여 화목하고 든든하고 부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

“장로님 때문에 교회에 올 사람이 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교인들이 가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천국 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신자가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장로라는 직책이 곧 신앙의 척도는 아니잖습니까? 교회 사정도 잘 모르는 새로 나오는 사람들을 데리고 왜 교회의 허물을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장로님 편을 만들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마도 어떤 사람은 그랬기 때문에 장로님을 나쁘게 볼지도 모르지요, 또 그랬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장로님, 사리 판단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교회에서 대접을 받으면 또 얼마나 받겠습니까? 명에와 지위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세상에서 경쟁하는 편이 훨씬 떳떳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인간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로님, 정말 장로님이 이런 것들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시면서 언동에 좀 더 신중하셨으면 교회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R 장로는 시종 말이 없었다. 그는 돌연히 벌떡 일어나서 P를 보지도 않고 쫓기듯이 나가버렸다. 그는 느부갓네살의 풀무 불이 생각날 지경이었다. P는 말의 가시로 자기를 찔러대는 것이 아니라, 말의 풀무불로 자기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앉아서 그 혀의 불에 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 앞에 다른 할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순간에 자기의 모든 생활 태도가 잘못됐다고 회개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조성되지도 않았다. 그는 그 자리를 도망 나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마치 지옥 불에 앉아 있는 심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이 이런 것일 가를 처음으로 생각나게 했었던 것이다.

 

바람이 없어도 낙엽이 지고 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착각으로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찬 날씨 때문만은 아닌 한기가 몸에 오싹 소름을 끼치고 있었다. 조용히 후들거리는 다리의 미동을 느끼면서, 분노도 설음도 아닌 물기가 가슴으로 치솟고 있는 것을 억누르면서, 그는 낙엽이 수북히 내려앉은 나무아래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 나무를 부여잡고 왈칵 치솟는 울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하늘 녹음기에 기록된 무수한 자신의 그릇된 말들이 정말 풀무 불처럼, 날카로운 가시처럼 자기를 태우며 저미고 있었다. 표현 못할 두려움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전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었어. 나는 예수 이름으로 나를 위해 일했을 뿐이야. 나는 사회의 낙제생 축에 끼일 사람이었어. 그래서 교회로 들어와서 사회에서 행세해보지 못한 것을 교회에서, 그 양같이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세하려고 했을 뿐이야. 나는 예수 이름을, 나를 위하여 가장 교묘하게 이용한 사람에 불과해. 정말 P가 거기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야. 나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의 섭리야. 죽어야지, 오늘이라도 죽어야지. 정말 P가 고맙고 예수님이 고마우신 분이야).

그는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이 되는 얼굴로 독백하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이들과 부인의 찬미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인이 얼마나 자주 자기의 그 못난 언동에 대하여 충고를 했었나? 그는 찬미 소리 때문에 더욱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새로운 각오로 일어서고 있었다.

낙엽이 지고 있다. 바람이 없어도 낙엽이 지는 것은 질 때가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야 겨우 R 장로가 자기를 보는 바른 눈이 열릴 때가 되었는가?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거실로 들어섰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P 교우의 집 다이얼을 돌렸다. 찬미 소리는 집 안에서 더욱 크게 울리고 전화 벨 울리는 소리가 마치 아침을 깨우는 종소리 같이 뻗어나고 있었다.

“여보세요” P의 그 부드러운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그의 귓속으로 떨어졌다.

“P 선생, 나요, 나, R 장로요,” 그리고 다음 말은 터지는 R 장로의 울음이 삼켜버리고 놀란 식구들의 찬미 소리도 울음 속으로 흡수되고, 어두워지는 거실 안에 긴 오열만이 감돌고 있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뻔 한 사람 file 김명호 2010.06.18 5247
5 초겨울의 애가 김명호 2010.04.19 3758
4 T시의 한국인 교인들 1 김명호 2009.08.16 4520
3 구도의 섭리 1 김명호 2009.07.23 4272
» 낙엽 같은 이야기 김명호 2009.06.11 4168
1 비가(悲歌) 2 김명호 2009.06.02 4048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Copyright© 2011 www.3amsda.org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