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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4:16

구도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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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리리, 삐리리, 삐리리.”

전화 벨 우는 소리에 얼른 거실로 나와 벽에 걸린 수화기를 들었다. 오후 3시가 약간 지난 시간이었는데, 방문을 갈 차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목사님이십니까?”

“아, 예?”

“저 Dr. Y입니다.”

“아, 예,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예,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전화를 했습니까? 지금 일할 시간인 것 같은데요.”

Dr. Y가 사는 곳과 내가 있는 곳은 두 시간 시간차가 있었다.

“아, 예, 지금은 일이 끝난 시간입니다. 지난 번 강론하신 것 중에 확인할 것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시간이 괜찮겠습니까?”

 

내가 Dr. Y를 만난 것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1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내가 T시에 교회 개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캘리포니아에 있는 A 교회에서 부흥 전도회 강사로 초청을 했었다. 그 집회에서 나는 예수님의 생애의 서론 부를 열심히 강론을 했고, 교회당을 가득 메운 회중들은 뜨거운 호응을 했었다.

그 맨 앞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강론을 경청하는 내외가 있었는데, 첫 날 집회가 끝나자 담임목사님이, 그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내외가 Dr. Y 부부라고 일러 주었다.

그 집회가 끝나고 나는 T시로 돌아와서 여전히 교회 개척에 골몰하고 있었고 Dr. Y에 대하여서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가 지난 번 강론한 것 중에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장거리 전화를 한 것이다.

 

“무슨 문제인데요?”

“목사님, ‘믿음은 자기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라고 하셨는데, 좀 더 분명한 설명을 들었으면 해서요.”

“아, 예, 잘도 기억하고 있네요.”

“믿음에 대한 아주 멋진 정의 같은데, 분명하게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그렇게 믿을 때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고 바르게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 진화론이 등장하고, 마치 사람이 짐승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나요. 성경의 기록을 믿을 때만 자기가 누군지 존재에 대하여 아주 합리적으로 바른 이해를 한다는 뜻입니다. Dr. Y가 잘 이해했을 것 같은데요.”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주 수요일 캘리포니아 P시와 수 천리 떨어진 T시 사이에서 전화 성경 공부를 이어갔다. Dr. Y는 아주 명민한 사람이라 하나를 깨우치면 여럿을 추리하여 깨닫곤 하였다. 그는 참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고자하는 열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진지한 구도자였다. 목사는 이런 구도자를 만나게 되면 엄청난 희열을 맛본다.

전화 성경공부를 시작한 지 한 여섯 달이 지난 후에 나는 캘리포니아 H지역에 개척 교회를 하자는 부탁을 받고 T시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개척교회의 일이 쉽지 않고 이것저것 손대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Dr. Y의 요청을 받아들여 매주 수요일에 그의 진료실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읽어가면서 한 절 한 절 설명하고 관주를 찾으며 그 의미를 천착하여 갔다. 그의 이해는 나의 설명보다 빨랐다. 허균의 홍길동전에 말하기를 길동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하였는데, Dr. Y가 성경을 깨우치는 것이 그랬다. 가끔은 나의 강론을 듣고 그가 깨달은 것을 말할 때 그 이해의 깊이가 나보다 깊은 것을 느끼곤 하였다.

Dr. Y는 성경 공부하는 날, 내가 먹을 점심까지 싸왔다. 거기서 나는 파파이아를 처음 먹어보았다. 그날 후로 나는 파파이아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먹어보는 과일인데다 잘 익은 파파이아를 마련했기 때문에 그 맛이 내게는 기가 막히는 맛이었다. 성경 공부하는 틈틈이 정담도 나누고 우의(友誼)도 깊이 쌓였다.

내 집에서 Dr. Y의 오피스까지는 약 1시간이 걸렸다. 나는 개척교회의 일을 하는 재미에 더하여 Dr. Y와 성경 공부하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한 시간 거리는 유쾌한 거리였다. 귀청

하루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요란한 빗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좀처럼 비가 오지 않는 캘리포니아의 여름날인데 그날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비는 그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로 출발하자 쏟아지는 비는 자동차의 속도와 부딪히면서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내 낡은 자동차의 와이퍼는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보통으로 움직여서는 쏟아지는 빗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최대의 속도로 물을 밀어내는데도 시야는 금방 막히곤 하였는데, 낡은 자동차의 낡은 와이퍼가 그 고된 노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자동차 와이퍼는 정지했으니 차를 길 한 편에 몰아놓고 비가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추억도 있다. 그래도 그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성경공부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귀는 즐거움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는 함께 성경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으며, 성령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A 교회 집회를 마치고 돌아간 다음 주간에 그 교회 어떤 교우 집에서 교우들 만찬 초대가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에 지난주에 있었던 부흥전도 사경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한 장로님이 자기가 은혜 받은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Dr. Y가 듣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은 내가 강론한 것과 아주 다르게 이해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Dr. Y가 이해한 것을 말했단다. 그때 그 장로님이 자세히 듣고는 “맞아, Dr. Y가 바르게 이해했네요. 나도 그때는 그렇게 알아들었는데 한 일주일 지내고 나니까 내가 전에 생각하던 것과 혼동이 되어서 다른 소리를 한 것 같아요. 김 목사님 말씀이 워낙 새로운 관점이 되어서 옛날 생각과 얼른 바뀌지 않는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장로님은 참 겸손한 분이라는 생각이 다가왔다. Dr. Y는 아직도 초신자이다. 그가 이해한 것이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그 장로님은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당장 시인하는 용기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은 것이다.

Dr. Y는 그때 그 집회 기간에 배운 것 중에 가장 소중하게 마음에 담긴 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때부터 Dr. Y의 뇌리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길이 크게 트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또 한 가지 더 마음에 담긴 것은 인간이 일원론적 존재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사람은 일원론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중세의 반기독교 철학자들이 빈정거리며 했다는 말을 인용한 기억이 있다.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두 개의 모자를 벽에 걸어두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교회에 갈 때에는 종교적 모자를 쓰고 나가고, 다른 날은 세속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살이를 할 때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고 오직 교회에 갈 때에나 종교행사를 할 때에만 예수 믿는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강론하며 물었었다.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밥을 먹는 것은 영의 일입니까, 육의 일입니까?”

“그거야 육의 일이지요.” 교인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영의 일입니까, 육의 일입니까?”

“육의 일이지요.”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교회 가기 위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육의 일입니까, 영의 일입니까?”

“어, 그건 영의 일 같은데요.”

“다시 물어봅시다. 사슴이 시장에 가면 늑대가 됩니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사슴이야 어디 있어도 사슴이지요.”

“그러면 사슴이 시장에 가서는 사슴처럼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이쯤 물으면 교인들은 나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을 하게 된다. 대답하는 소리가 줄어든다. 그들이 무엇인가 인식에 오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한 사실을 조심스럽게 대답을 한다.

“사슴이 사슴처럼 행동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당연한 대답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같은 이치로 말을 이어간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은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영의 사람이 육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슴이 사슴 짓을 하는 것 말고 다른 짓을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질문이 여기에 이르면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장내는 조용하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대답해보시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밥을 먹는 것은 육의 일입니까, 영의 일입니까?”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그것도 영의 일인 것 같은데, 글쎄요?”

“그렇습니다. 사슴은 어디에 있어도 사슴이요, 무슨 짓을 해도 사슴 짓을 합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에 있어도 영의 사람이요 무슨 일을 해도 영의 일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 똑 같은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평일에는 육의 일이 되고 안식일에 교회 갈 때 운전하는 것은 영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식의 혼란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자는 영의 모자 하나뿐입니다. 평일에는 세속 모자를 쓰고, 종교행사를 할 때는 종교 모자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일원론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뿐입니다. 진정으로 영의 사람이 된 사람은 육의 일을 하지 않게 된 사람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육의 일을 하면, 그것을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Dr. Y는 이 강론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 그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 말씀을 전달한 사람으로서 나는 짜릿한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경말씀을 강론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강론한 의도대로 깨닫는 것을 알 때 기쁨이 충만해진다. Dr. Y와 성경공부를 할 때에 그는 이런 즐거움을 나에게 더해주었다. 어찌 그 시간이 기다려지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Dr. Y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가르치는 성경 교리를 받아들여 그 교회교인이 된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참 흥미 있는 경험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가 깊이 있게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원래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하나님 이야기, 신앙생활 이야기를 들으면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약한 사람들의 자기 최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 사는 재미를 마음껏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내과 전문의였다. 그런데 내과의를 해보니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는 다시 알러지 전문의 수련을 하고 알러지 전문의가 된 것이다. 그가 P시에 클리닉을 열고 알러지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그 근방에 차차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몇 년 지내면서 그는 그 근방에서 엄청 유명해지고 그를 찾는 알러지 환자들은 날로 늘어나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감당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당장 최고급 벤츠를 두 대나 샀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시와 인근에 있는 유명하다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별식 요리 사냥을 하였다. 그는 알러지 전문의이면서 그 자신은 알러지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돈이 마음 놓고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매달 모여드니 신앙이 없는 그에게는 지상의 행복이 몰려오는 것 같았던 것이다. 온 가족과 함께 그런 행복을 만끽하고 지내는 어느 날, 문득 이 행복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여 왔다. 전혀 예상해보지 않았던 두려움이었다.

한 번 두려운 마음이 들자 어느 순간에 그 행복을 갑자기 잃을 것 같은 강박관념이 그의 뇌리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두려움을 내어 쫓아야 하였다. 그는 이런 마음을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 했다. 모친은 그를 위하여 부적을 만들어왔다. 그것을 양복 안쪽에 붙이고 있으면 안전하다는 모친의 말이었다.

20세기 최고 학부를 공부한 전문의사가 옷에 부적을 붙이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에 안정이 오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낼 수 없었다. 이성과 감성의 모순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부적을 붙이고 다니는 여러 날이 지났는데,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행복을 빼앗아갈 것 같은 불안이 영 가시지를 않는 것이다. 그때 문득 클리닉 약장 꼭대기에 얹어놓고 잊어버린 성경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어떤 목사님 환자가 다녀가면서 놓고 간 성경이었다. 그 목사님은 “Dr. Y, 틈이 나면 한 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하나님 신앙하는 일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보세요.”라고 말하였었다. 그는 그 성경을 그냥 약장 꼭대기에 던져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부적을 옷에 달고 다니는 것을 생각하니까, 그것보다는 성경을 넣고 다니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성경을 주머니 넣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울 것이니까 읽고 내용을 기억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먼지 앉은 성경을 끄집어 내리고 읽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보다는 위대한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불가불 교회에 나가서 그 의미를 배워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 끝에 가까이 있는 장로교회에 출석하기로 하였다. 거기에 성경을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적까지 행하는 유능한 장로님이 한 분 있었다. Dr. Y는 성경도 성경이려니와 그 장로님이 행하는 이적에 마음이 더 끌렸다. 그래서 그 장로님과 급속히 가까워졌었다. 그에게서 성경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이적에 대한 것들을 듣고 보면서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몇 달을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성을 쌓으려하고 있는 중에 어느 날 두드러기가 난 환자가 찾아온 것이다. Dr. Y는 진찰을 마친 다음에 물었다.

“우유를 잡수셨습니까?”

“예.”

“이 두드러기는 우유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우유는 알러지성 음식입니다. 해로운 식품이지요. 앞으로는 안 잡숫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그것참, 우리교회에서는 벌써 백 년 전부터 가르치는 것인데, 내가 그 가르침대로 잘 못해서 이렇게 됐네.”

환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예? 교회에서 그런 것도 가르칩니까?”

“예, 우리교회는 그렇습니다.”

환자는 별로 놀랄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교회에서 우유에 대하여 좋고 나쁜 것을 가르친다. 그것도 백 년 전부터. 우유가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최근인데.)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환자를 주목하면서 물었다.

“무슨 교회인데 그렇게 오래 전부터 그런 것을 가르쳤습니까?”

그의 질문에 환자는 별일도 아니라는 태도로 수월하게 대답하여 넘겼다.

“예, 그런 교회가 있어요.”

그러나 Dr. Y는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 그때쯤 그는 음식과 알러지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때였다. 그러니까 환자의 그런 말은 그에게 무척 자극이 되는 말이었다. 그것도 어떤 의학자가 아니라 교회에서 백년이나 전에 가르쳤다니, 그런 교회가 있다는 말인가.

“그게 어떤 교횝니까? 좀 알면 안 됩니까?”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짐하듯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알고 싶어요?”

“예, 꼭 알고 싶습니다.”

그 환자는 Dr. Y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하였다.

“꼭 그러시다면 한 사람을 소개 할 테니까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그는 Dr. J를 만나보라고 하였다.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전화로 연락하겠다고 말하였다. Dr. Y는 그날이 속이 오기를 기대하고 약간 들뜬 마음이 되었다.

드디어 전화로 통지를 받은 그 약속의 날이 왔다. 그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약속한 장소에 갔다. 그것은 어느 한국 음식점이었다. 약속한 장소에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어떤 신사가 다가오면서 Dr. Y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그 사람을 보니 세련미가 없어 보였다. 내심 조금 실망하면서 그의 안내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K 목사입니다. 지금 목회를 하지는 않고 한방 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한의사입니다.”

그는 Dr. J가 아니었다. 그의 자기소개를 듣자 적이 실망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K 목사는 Dr. J의 사정을 말하면서 그의 정중한 사과를 전했다. 그가 갑자기 생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단히 죄송하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자기를 대신 보내어 사죄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했다면서, Dr. Y께서 양해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Dr. J가 지은 책을 한 권을 선물로 보냈으니 지금 이 사정을 양해하는 마음으로 받아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바른 식생활의 기적을 설파한 책이었다.

식사를 나누면서 Dr. Y는 궁금한 것을 또 물어보았다.

“목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그런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참 희한한 이름의 교회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두드러기 환자가 끼친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예, 그렇군요. 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것 없어요. 같애요.”

Dr. Y의 느낌으로는, 말은 다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얼굴 표정은 아주 다르다고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다시 보채듯이 물었다.

“목사님, 그러지 마시고 무엇이 다른지 분명히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K 목사는 Dr. Y의 얼굴을 정시하면서 물었다.

“Dr. Y, 정말 그렇게 알고 싶어요?”

“그럼요. 정말이지요.”

“그러시면, 여기서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식으로 차근차근 성경을 공부해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히 구별됩니다. 제가 말로 설명해서 쉽게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러지요. 시간을 내어서 공부하지요.”

그가 너무 쉽게 대답을 하자 오히려 K 목사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주 바쁘실 텐데, 그렇게 시간을 내어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바빠도 성경 공부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럼 언제 공부하면 되겠습니까?”

“Dr. Y가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월요일 저녁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의논을 해보겠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과 의논을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얼마 후에 K 목사에게서 월요일 저녁에 그 집으로 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Dr. Y의 구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 월요일 저녁에 K 목사와 H 목사가 함께 왔다. H 목사가 A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아직도 Dr. Y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두 목사님 중에 한 분은 Dr. Y가 성경 공부를 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는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가는 가르침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개월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배워봤지만, 오직 성경만으로 성경을 풀어나가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대체적으로 신학적 견해와 전통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설명했는데, H 목사는 오직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짝이 되는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 대조하면서 성경을 풀이하였다. 성경이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며, 성경이 참으로 희한한 책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공부를 하고 그들은 떠났다. Dr. Y는 막 그들이 떠난 빈 방에 혼자 앉아 몇 시간 열심히 강의한 H 목사의 얼굴과, 그 시간 동안 어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 내외가 공부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수고한 K 목사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야릇한 감흥에 젖어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흥, 안식교 목사가 성경을 가르치니까 당연히 안식교의 가르침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밖에. 내가 성경을 바르게 알려면 안식교 목사에게만 배워서 될 일이 아니다. 다른 교파의 목사들에게도 성경을 배우고 서로 비교하여 어느 것이 정말 성경적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즉시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는 즉시 그가 다니고 있는 장로교의 그 이적을 행하는 장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K 장로님이시지요? 접니다. Dr. Y입니다.”

“아이고, Dr. Y가 어쩐 일입니까? 꽤 늦은 시간인데.”

“예, 장로님, 혹시 제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영광이지요. 언제 공부하실 것인데요?”

“화요일 저녁이면 어떻겠습니까?”

“매주 화요일 말입니까?”

“예.”

“좋습니다. 내일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시면 저는 좋습니다.”

그는 다시 다른데 또 전화를 했다. 그분은 감리교 목사인 친구의 부친이었다.

“C 목사님이시지요?”

“예, 누구시지요?”

“예, Dr. Y입니다. 아드님 친구 말입니다.”

“오, 이군이구나. 이군이 어쩐 일로 내게 전화를 했어?”

“예, 아버님, 제가 요즘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데요, 아버님이 제게 성경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 하고 전화 올렸습니다.”

“이군, 그 참 잘 생각했네. 이군이 원한다면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이군이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봐야겠네. 그래 언제부터 공부할 것인데?”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어떻겠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이군이 성경공부를 한다는데 내가 사양할 이유가 없지. 그럼 이번 수요일부터 시작해도 되겠는가?”

“예, 그래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월요일은 안식일교회 목사에게, 화요일은 장로교 장로에게, 수요일은 감리교 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안식교 목사에게서 배우는 같은 주제를 배워야 서로 비교하여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를 배우도록 요청하였다. 세 사람에게서 같은 문제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연속으로 같은 성경을 가지고 공부한 것이다. 그는 성경을 공부하는 저녁이면 가르치는 사람이 떠난 다음에 배운 것을 자세히 복습하였다. 수요일 저녁은 새벽 2시가 넘도록 월요일 배운 것과 화요일 배운 것과 그리고 수요일에 배운 것을 자세히 비교 검토하였다. 그렇게 공부하기를 수개월 계속하고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이 바로 성경적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성경 공부하던 것을 다 중지하였다. 그리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교회, 백 년 전부터 우유를 먹는 것이 해롭다고 가르친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그해 12월에는 H 목사에게 침례를 받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A 교회의 교인으로 입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3월에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구도자였다. 그에게 행복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가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하여 신앙을 택한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도의 섭리를 신기하게 이끌어 가신 것이다.

그날 우유를 먹고 두드러기가 난 안식교인 환자를 그에게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그가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세상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은 곳에 영원한 행복을 소망하는 실마리가 있음을 하나님은 간과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매주 수요일 나는 그와 성경으로 만났다. 창세기의 내용을 다 나누고, 출애굽기의 내용을 나누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을 꽉 채운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클리닉을 닫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시한 방법대로 건강을 찾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어디서 그런 일을 할 것인데요?”

나는 자못 놀라서 물었다.

“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거기 다녀온 다음에 더 기도하고 거취를 결정할까 합니다.”

“아니, 이 잘 되는 클리닉을 닫고?”

“생활이야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고 믿고요, 내가 엘렌 화잇이 쓴 절제라는 책과 치료봉사라는 책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이라는 책을 읽을 때에 현대 의학이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그냥 매여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고 따르며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의사가 해야 할 바른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대로 해야지요.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결의는 아주 단호해 보였으며 그에게 구도의 섭리로 진리의 길을 제시하신 하나님이 또 그가 갈 길을 섭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 성경공부를 마치고 자동차를 타고 집을 향하여 달리면서 그의 놀라운 결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가 처음 가진 그 마음으로 그 간절한 구도의 정신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캘리포니아의 짙푸르게 맑은 하늘과 드밝은 햇빛이 나의 시야를 밝게 비치고 있었다. Dr. Y가 결심하고 선택한 그 길에도 이렇게 맑은 하늘과 밝은 햇빛이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 ?
    purm 2010.12.12 09:24
    이박사 얘기군요

    그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찾아온 것은 좋은 일이니

    필명으로 안해도 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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