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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심사원모가 어땠을까?

그가 예수를 팔아서 돈을 벌려고 한 것이 예수를 판 진짜 이유일까? 성경에 그런데 대한 아무런 언질이 없다. 요한은 그를 도둑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였다.(요12:6) 성경에 기록한대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가룟 유다 소설을 한 번 써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이 들어서 주제넘은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흔히 말하는 그런 소설은 아니고 상상의 날개를 펴서 가룟 유다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가룟 유다와 관련된 몇 기록을 보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룟이라는 마을은 팔레스타인 남부에 있는 마을이다. 즉 유다지방에 있는 마을이라는 말이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갈릴리 출신들이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을 삼등분 했을 때 북쪽에 있고 가운데가 사마리아 지방이고 그 남쪽이 유다지방이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다는 진짜 유다 지방 출신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려졌다고 기록한다.(행4:13) 옛 번역에는 불학무식한 자로 알았다고 번역했다. 제자들이 유대인이었으니까 성인식을 했을 것이고 성인식을 할 때에 율법 책을 읽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글자는 읽고 해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랍비학교나 어떤 교육 기관에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학문 없는 범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아 있었다.(요12:6)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계산에는 더 밝았을 것인데 가룟 유다가 맡았다는 것은 유다가 마태보다 더 셈이 밝고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말은 그가 지식인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소망의 설명을 빌리면 그는 서기관 출신이었다. 학문 없는 범인들로만 구성된 예수의 제자들 중에 서기관 출신이 한 사람 있다는 것은 그들의 위상을 좋게 인식시키는데 아주 좋았을 것이다.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의 12 사도 중에 들게 되었는지 정확한 경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즉,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 요한, 나다나엘, 빌립, 마태, 등과 같이 부르심의 확실한 기록이 없다. 물론 작은 야고보나 셀롯인 시몬, 도마, 다대오도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대의 소망에서는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예수님을 찾아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한 서기관이 가룟 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렇게 간청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신다는 대답이 된다. 그러나 이 대답의 진짜 의미는 그 요청을 하는 서기관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큰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반드시 회복시킬 메시야로 보았다. 그는 예수를 따라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옹립하고 그 공로를 얻을 계산을 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예수께 접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예수님을 모실 자리가 없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거기 참석한 장정만 5000명이었으니까 아마도 1만 명은 훨씬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흥분되었겠는가. 예수가 왕이 되면 민족의 식량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다. 그 이적의 떡을 먹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충동하여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도록 선동한 사람도 가룟 유다이다. 백성들을 선동하여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이보다 좋을 때가 언제 있겠는가. 무리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그런 움직임을 다 아시는 예수께서 신속히 무리를 해산시키셨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막6:45,46)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제자들을 재촉하사 먼저 보내셨다고 기록하였는데, “재촉하다”는 말은 “아낭카조”로서 “억지로 ·… 을 하게 하다”이다. 제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려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떠나게 하셨다는 의미가 있다. 요한이 기록한대로 무리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모의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기회를 놓진 것이 대단히 아깝게 생각되었지만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한다는 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를 마쳤을 때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났다. 가룟 유다 자신도 그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아주 굳게 한 것으로 짐작하였다. 5000명 먹이시는 이적으로 마음을 다 사로잡았던 그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본 가룟 유다는 민심을 예수께 돌이키고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도록 하는 다른 일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 수단으로는 예수님을 왕이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극한적 방법을 쓰지 않으면 결코 그를 왕으로 추대할 수 없을 것임을 깊이 느끼고, 극한적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독자 중에는, 보리떡 7개와 생선 두 마리로 장정만 4000명이 되는 군중을 먹였을 때 왜 가룟 유다가 자기 생각을 추진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은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이적은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이적이다. 그들은 데가볼리 지역 사람들로서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께 고침을 받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막5:19,20) 이렇게 예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그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 몰려 온 것이다.(마가7:31~8:10)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그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기회였지만 가룟 유다의 계획과 맞지 않는 환경이었다. 유대의 독립을 위하여 동원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제자들이 떠난 것을 보시고 12제자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정말 성경적 대답을 하였다. 그 고백을 듣고 예수께서는 너희 열둘을 내가 택하였지만 그중에 하나는 마귀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씀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가룟 유다 자신도 그것이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유는 가룟 유다의 생각과 계획은 전적으로 예수와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 자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전적으로 예수를 위한 것이고 민족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자기 개인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를 지목한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이 그런 지적을 했었어도 가룟 유다의 마음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스스로 생각하는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이나 마음의 계획이 전혀 가책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위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할 때 아주 장하고 갸륵한 것이었다. 그 생각이 이루어지는 날 예수님도 동료 제자들도 자기의 충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이 이르면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자기를 엄청 칭찬하고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왕이 되도록 추진한 자기를 우러러 보게 될 것이라고 마음으로 우쭐대었을 것이다.

서기관 출신인 가룟 유다는 구약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으뜸 되는 나라를 만들고 온 세상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할 것이며 이 지긋지긋한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로마를 지배하고 그들로 무릎을 꿇게 하면,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일이며 그 예언을 이루게 하는 일등 공신이 될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예수 일행의 돈궤를 맡아 있으면서 암암리에 그 돈으로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사용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도적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 그 향유를 붓는 일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아마도 가룟 유다는 예수가 기어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극단적 조처를 속히 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예수가 죽는 길을 택하기 전에 그 많고 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가 이스라엘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정말 충성으로 섬기는데.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모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열국의 으뜸 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5000 명을 먹였을 때 군중들이 하던 말들이 귀에 쟁쟁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그 선지자라는 말은 모세가 신명기 18:15에 예언한 그 선지자이다. 바로 메시야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였다. 그래야 예수가 왕이 되는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군중들이 많이 모였을 때, 바로 그때에 군중들이 믿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야 하였다. 군중들이 그것을 보고 한 마음으로 따를 수 있게 해야 하였다. 그러자면 명절이 아주 적절한 때였다. 당국자들은 명절을 피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알고 그를 깊이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명절에 예수를 채포하면 민란이 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민중이 많이 있을 때 극적인 사건을 벌이면 효과 만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도 자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대단히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었다. 서기관이 된 것은 백성들을 하나님 섬기는 일에 올바르게 이끄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인도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그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성경의 문자에 자기 사상을 얽어매지 않았다. 문자가 아니라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기록된 문자에 가두어놓는 일이야말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대로, 사두개인들은 그들대로 다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성경의 문자에 묶어놓고 있었다. 가룟 유다가 보기에 그것은 얼마나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 자기 권위로 옛 사람들이 해석한 성경의 해석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권세 있게 가르치는 것을 들었을 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였던가. 비록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예수 같은 능력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로 성경의 계시를 주신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을 가룟 유다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깊이 담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매진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바탕 위에 자기가 생각하고 행하려는 모든 일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행사에 대하여 한 번쯤 재고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는 일에 강력하게 매진해야 하였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 가룟 유다는 적이 놀랐다. 예수의 능력이면 그쯤은 알 것이라고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자기 마음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선생님, 이제 두고 보십시오. 선생님의 혜안으로 나의 생각을 모르실리는 없을 것이고요. 이것이 다 선생님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일이 끝나고 선생님이 왕으로 등극하신 후에 그때 칭찬을 받겠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내 마음을 모른 척 하시니까 나도 모른 척 하고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밤입니다. 오늘 밤에 그 콧대 높은 제사장들이나 건방지고 교만한 로마의 관원들과 군인들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민중의 호응 속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왕으로 등극하십시오, 사례는 그때 하셔도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렇게 속말을 하면서 예수께서 한 조각 떡을 찍어 주는 것을 받고는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나가서 감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한 조각 떡을 하세롯(유월절에 누룩 없는 떡을 찍어먹는 소스의 일종)에 찍어서 자기에게 주지 않았는가. 다른 제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좀 알아차리라고 하신 신호가 아니겠는가. 그는 생각하니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아닌 척 하면서도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인정하고 동조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세롯에 떡 한 조각을 찍어서 주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주인이 함께 먹는 사람들 중에서 총애하는 사람에게 하는 사랑의 표시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이 묻는 말에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대답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요13:26), 그렇게 주었지만 제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 무리 중에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가룟 유다를 많이 사랑한다는 표시를 한 줄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요13:27~29)고 요한이 기록한 것이다. 이런 풍속에 의하여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떡 한 조각을 찍어 준 사실을 자기가 하는 일을 속히 이루도록 하라는 권고와 격려로 들었을 것이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을 때 가룟 유다는 아마도 짜릿하도록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자기의 계획과 하는 일을 그렇게 속으로 인정하고 있는 줄을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5000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한 후에 설교한 내용을 듣고 예수의 생각을 자기가 오해했다고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그 설교의 의미가 예수님이 꼭 죽겠다는 의미가 아닌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을 것인데, 자기가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만찬 자리에서 자기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신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가룟 유다의 마음을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요13:2)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 스스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그 엄청난 일이 불법을 행하는 것인 줄(마7:21~23)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지금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만찬을 마치고 늘 기도하는 곳 겟세마네 동산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기분 좋게 겟세마네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겟세마네에 왔을 때 그는 예수께 입을 맞추었다. 그를 따라온 군사들이 예수를 잘 모를 뿐 아니라 또 밤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잘 분간하기도 힘 드는 시간이었다. 비록 횃불을 들었지만 말이다. 군사들에게 무기와 몽둥이를 들고 가자고 제안한 것도 가룟 유다였을 것이다. 예수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가 비록 많을지라도 맨손으로 예수를 잡을 수 없다고 설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무기와 몽둥이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갈수록 예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드러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로 신이 나 있었다. 그런데 입 맞추는 인사를 하자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악의로 자기를 파는 사람에게 친구라고 할 리가 없고, 자기를 친구라고 불렀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철저히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하여 자세히 알면서 속으로 후원하고 있는 줄을 몰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 계획을 인정하는 줄 진즉 알았다면 자세한 의논을 하고 예수님의 그 탁월한 지혜를 구했으면 좋았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을 때에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그 군사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는 “내로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전면으로 나서셨다. 그러자 무기와 몽둥이를 들고 예수를 잡으려고 온 그들이 마치 강풍에 갈대 쓰러지듯이 예수 앞에 엎드러지는 것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은 진즉 안 일이지만 이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단순히 “내로라”는 말씀에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다니. 이제 일은 벌어진 것이다. 예수와 그들이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 당국과 유대 정치 당국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힘으로 제압하려 할 것이고, 예수는 더욱 큰 능력으로 그들을 이렇게 굴복 시킬 것이며, 로마가 모든 군대를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예수 한 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옛날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18만 5천명을 한 천사가 하룻밤 새에 다 죽이지 않았는가.(대하32:21) 그런데 예수님이야말로 그보다도 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인데 로마 나라가 다 달려와도 예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것이었다.

가룟 유다가 마음 조리며 계획하고 추진한 자기의 계획이 바로 목전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고 하지 않는가. 그는 혼자 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가룟 유다의 마음은 갑자기, 정말 갑자기 급전직하로 바뀌는 장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 앞에 그렇게 힘없이 엎드려졌던 군사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묻고 있었다.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18:7,8) 그리고 순순히 결박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베드로가 분하여 칼을 들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떨어뜨렸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그리고 말고의 귀를 만져서 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

가룟 유다는 지금까지 스스로 생각한 각본이 여기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각본대로라면 예수께서 그 군사들이 넘어졌을 때 그냥 능력으로 그들을 짓누르고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즉위하셔야 하였다. 그러면 군중들이 호응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가룟 유다는 긴가민가하여 잡혀가는 예수 일행을 따라가면서 상황이 역전되기를 기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예수님이 대제사장들 앞에서 능력을 나타내셔서 그들부터 제압하고 로마 관리들을 제압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은 가룟 유다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예수는 산헤드린 회의에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정죄를 당한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심문에 합리적인 변호를 전혀 하지 않았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묵묵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질과 관련된 질문에는 아주 똑똑하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3,64) 예수님의 이 대답에 공회 의원들은 분노하였다. 사람이 감히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다니! 참으로 참람하구나. 그들은 그렇게 단정하고 의논하였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마26:65,66)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네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말씀이나, 떡 한 조각을 찍어 자기에게 준 것이 자기가 진행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모두 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자기의 계획이 아무리 성경적이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었다. 성경말씀 전체가 계시한 뜻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진행했던 일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구주와 함께 다니던 친구노릇을 하던 자가,(시55:12,13) 한 밥상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자가 구주를 팔 것이라는(시41:9) 그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가룟 유다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가룟 유다가 알아들을 만큼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너무나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확신이 바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닌데, 자기 확신을 성경말씀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도 아닌데, 가룟 유다는 그렇게 확신하였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놀랐다. 가룟 유다는 다른 의미로 놀랐을 것이다. 저마다 예수께 물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우리말 성경은 “주여 내니이까?”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은 “주여 나는 아니지요?”이다, 모두 묻는데 가룟 유다가 가만히 있으면 의심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도 한 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당연히 가룟 유다는 아니라는 대답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답은 가룟 유다가 자기의 계획에 대하여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진짜로 예수를 파는 제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제자에게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자기는 예수를 파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옹립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 자기를 가리키는 말씀인 줄 알았다면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것인지. 예수께서 한 조각 떡을 찍어 자기에게 준 것이 그를 그렇게 사랑하니까 지금이라도 그 계획을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사랑의 행위였음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자기의 종말에 대한 경고인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 받을 때까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그가 떡 조각을 받고 네 할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 발 앞에 꿇고 자기가 추진해온 계획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는지를 고백하였다면 또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끝에 이르렀다. 그렇게 정성들이고 심사숙고하여 추진했던 것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다니. 내가 추진한 모든 계획은 예수님을 정죄 받아 사형에 처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닌데.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고 한 것인데,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었고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마27:1~4)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그렇게 끌려가서 정죄될 것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예수를 정말 죽는데 내어주려고 판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예수 판 돈을 도로 갖다 주면서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말하였다. 가룟 유다는 그냥 예수께서 그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사건을 만들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예수께서 죽는데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그 큰 능력을 행사하고 마침내 당국과 충돌할 것이며, 예수의 능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왕으로 등극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계획이 빗나간 것을 보고 그 돈을 도로 갖다 주고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탄식하였지만 모든 것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때 와서야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한 설교가 새삼 기억되었다. 예수께서 기록된 대로 가신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자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 그분이 기록된 대로 가시는 메시야라는 사실이 가슴 저미게 압박해 왔다. 그는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간 것이다. 돌이킬 수 없었다. 돌아설 수 있는 지점을 멀리 지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게 성경을 이해하는 현대적 서기관이라고 자처했는데,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르는 예수를 선생으로 택했을 때 같은 서기관들이 얼마나 빈정거렸는가. 그때 그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대꾸하지 않았는가. “야, 자네들 고리타분하게 문자에 매여서 그렇게 옥죄는 사고방식에서 좀 벗어날 수 없겠나. 예수를 좀 봐. 그 사람이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능력을 봐. 누가 이 시대에 그런 능력을 행사하는가? 선지자가 없이 지낸 세월이 400년도 넘었어. 그런데 침례를 주던 요한이 메시야인가 했지만 아니야. 그는 헤롯의 허물을 책망하다가 헤롯에게 죽었어. 그런데 그 요한이 예수를 잘 증거했잖아. 나는 그를 찾아가서 그의 제자가 될 거야. 그래서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젖어서 진보적인 사상을 배우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진한 교훈이 되도록 할 거야.” 호기 있게 말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정말 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나지 않은 것처럼 자기를 처리해야 하였다. 그는 목을 맬 끈을 찾아 이 세상이나 영원한 세상에서 자기를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 마지막 순서를 위하여 풀죽은 모습으로 훗날 아겔다마, 곧 피 밭이라고 하는 그 밭을 향하여 힘든 걸음을 옮겼다.

아 나지 않았으면 좋은 뻔한 사람.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칭호인가. 가룟 유다, 대대에 메시야를 판 배반의 제자라는 악명을 남긴 채 그는 목을 매고 생을 마감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못했을 것이니, 그는 구원 사업에 공로자가 아니겠는가라고 정말 그를 위하여 기분 좋은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해석한 한 사람의 서글픈 말로는 아직도 파도소리처럼 울리는 경종으로 가슴에 밀려오고 있다.

 

2010. 6. 17.(목) 8:3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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