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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쉴 틈 없이 바쁜 세상에서 살아가기

(7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57)

 

연구 범위: 2:1~3, 45:1~5, 20:11, 삼하 7:12, 6:30~32, 4:1~17

기억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2).

 

째깍째깍.” 시간은 멈춤 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까지 두 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미숙 씨는 작은 아파트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에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었고 주방에는 설거짓거리가 가득했다. 막내딸 윤서는 고열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내일 안식일 아침에는 교회에서 시무 집사로 봉사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30분 일찍 교회로 출발해야 했다. ‘내일은 좀 평온한 하루를 보냈으면 좋을 텐데.’

같은 시간, 미숙 씨의 남편 영철 씨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교통 체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산대 앞의 줄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길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동네 모든 사람들이 장을 보러 나온 듯 보였다. ‘나에게는 쉼이 필요해. 이렇게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삶은 먹고 사는 일과 연관된, 수없이 바쁜 일과들로 가득 차 있다. 바쁜 일과를 소화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다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밀려드는 일정들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러한 분주한 삶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게 만든다.

이런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쉼을 찾을 수 있을까?

*학습 목표

- 깨닫기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쉼이 약속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행하기

분주한 삶 가운데서라도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참된 쉼을 경험한다.

 

2.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쉼을 위한 시간을 구별해 놓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2:1~3)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께 예배하면서 감사와 찬양으로 참된 쉼을 맛보게 하시려는 사랑이다.

3. 절망 가운데 있던 바룩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45:4, 5)

환난 중에서라고 생명을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이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기별이다,

4. 구약 성경에서 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교과에 기록된 것들을 찾아 복습하자(629() 공부)

5.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쉬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6:30, 31)

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4:1~7)

그가 생명 있는 자가 되기를 거절하고 사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

쉼은 단순히 안식일 계명에만 담겨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가르침이자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분주한 삶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분별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쉼을 통해 행복하고 균형진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627() 지치고 피곤한 인생

 

2:1~3을 읽어 보라. 아직 아무도 힘들지 않았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 휴식의 날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스트레스 가득한 삶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중요한 표시를 만들어 두셨다. 이날은 잠시 멈추어 서서 의도적으로 삶을 즐기는 시간이 될 것이었다. 이날은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되새기는 날이 될 것이었다. 또한, 이날은 잠시 멈추어 서서 선물로 주신 풀과 공기와 동물과 물을 즐기고, 무엇보다 이 모든 좋은 선물을 허락하신 창조주를 기억하는 날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첫 조상이 에덴에서부터 추방되었을 때 그 효력을 다한 일회성 초청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초청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태초부터 안식일의 쉼을 인류가 살아갈 시간 속에 넣어 두셨다. 일곱 번째 날마다 쉼을 통해 창조를 기념하기 위한 초청이 반복될 것이었다.

우리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수많은 첨단 기기들의 발명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이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보다 훨씬 덜 피곤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쉼은 부족하다. 일하고 있지 않은 때에도 무언가가 우리를 정신없이 만든다. 우리는 항상 뒤처져 있는 듯이 느끼고 얼마만큼의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다.

연구에 의하면 과거에 비해 우리가 잠을 덜 자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일하기 위해 카페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더 빠르고 더 좋은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지만 쉼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다음의 성경절들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6:31, 4:8, 23:12, 5:14, 11:28)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23: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5: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기력을 회복하고 생명력을 증진시키며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적인 쉼이 필요할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쉼을 취할 수 있는 밤과 안식일 같은 주기(週期)를 시간 속에 넣어 두셨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에는 시간을 내서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어진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포함된다.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이다!

 

<묵상>

시간의 청지기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자기의 영육간의 건강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들어있다.

 

<부가설명> 우리가 안식일에 관하여 말할 때 자주 듣는 것은 우리의 쉼이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안식일의 쉼을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런 말이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태초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오늘 같은 수고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 부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다음에 아담에게 처음으로 종신토록 수고하여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 않았으면 수고가 없었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수고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닥친 상태이다. 그전에는 수고 없이 즐거움만 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낙원이 아닌가? 낙원을 즐거움의 장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고를 쉬는 것과 관련한 표현으로 안식일의 안식을 설명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맞을까? 창조주일에 제정하신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되었다. ‘샤바트그치다라는 뜻이다. 하시는 일을 다 끝냈다는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주께서 하신 일을 피조물들이 기억하고 경배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실이다. 내 몸이 쉬고 마음이 쉬는 것이 중심이 아니다.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기억하고 경배하며 그분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영원토록하는 표징이다. 쉼은 덩달아 주신 은혜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심신이 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안식일을 제대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교훈>

인간이 살아가게 될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넣어 두신 쉼의 주기(週期)를 통하여 육체적, 영적 회복을 경험하며 사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628() 텅 빈 채로 달리는 삶

 

과로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리거나 탈진 상태에 이르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감정적으로 공허한상태에서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수면 부족이 더해지면 우리는 큰 좌절과 낙담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기 전 그 도시에 찾아온 마지막 격동의 시간 동안 자주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45:1~5을 읽어 보라. 바룩의 정서적 건강 상태가 어떠했을지 간단히 진단하고 기록해 보라.

[45:1~5]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예레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봉사하면서 국가적인 재난이 닥치는 시점에서 큰 좌절과 절망을 느끼면서 탄식하고 평안하지 못했다. 그래서 슬퍼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맞춘 듯이 준비하여 보내 주신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바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에서 직접 주시는 말씀을 받았다(45:2). 성경은 대략 주전 605~604년 사이, “유다의 여호야김 넷째 해에 이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45:3은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나 목적을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인지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을 볼 때, 바룩의 울부짖음이 결코 피상적이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낙담하고 감정적으로 지쳐 있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너무나 많은 나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제 곧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었다.

 

바룩의 아픔과 고통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45:4, 5을 읽어 보라.

[45:4,5]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의 고통은 바룩의 고통보다 더 크다. 그런데 네가 스스로 큰일을 경영하려느냐?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러나 너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룩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느끼셨던 절망과 좌절이 바룩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음을 기억하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어 올린 예루살렘 성을 곧 무너뜨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심으셨으나(5:1~7) 그것을 뿌리째 뽑아 포로로 보내실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바룩을 위하여 터널 끝에 빛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파멸과 포로 생활과 상실 가운데서도 바룩의 생명을 지키실 것이었다.

 

<묵상>

바룩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까요?

 

: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큰일을 경영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온 땅에 내리게 될 하나님의 보응과 징벌 가운데서 바룩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며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하나님을 거절한 죄 때문에 결국 멸망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지 아니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결국 다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부가설명> 사망의 세상에는 진정한 쉼이 없다. 환자는 그 자체가 괴롬이다. 환자는 질병이 낫기까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산다는 것이 고통이다. 이 사망의 세상에 죽는 날까지 수명을 누리는 모든 세월이 고통의 연속이다. 질병이 치유되고 생명력이 회복되어야 쉼이 온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예외없이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불치병 환자들이다. 사망의 세상에서 사망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와 살아간다는 것이 수고일 수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종신토록 수고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3:17). 이런 진실을 전제로 하고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몸이 쉰다는 뜻이 아니다. 사망의 질병을 치료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아담 안에서 받은 사망질병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완치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성령님으로 인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쉼이 있고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수고와 고통의 삶에서 해방될 수 있고 참된 쉼이 있다. 이 쉼을 얻는 삶의 표징이 제7일안식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럴 때 사람의 삶은 꽉찬 생명력으로 빛나게 된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그냥 허무한 그림자일 뿐이다(39:5,6).

 

<교훈>

이스라엘에 곧 닥치게 될 국가의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 낙담하고 있던 바룩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건지시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629() 구약에서 발견하는 쉼의 정의

 

우리는 모두 쉼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반에 걸쳐 이 주제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활동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 쉼이라는 리듬도 함께 주셨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쉼을 나타내는 몇 가지 용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2:2, 3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쉬신 것을 일을 멈추다, 쉬다, 휴가를 쓰다라는 뜻을 가진 샤바트(shabbat)라는 동사로 기록하는데 이것은 안식일’(Sabbath)이라는 명사의 동사형이다. 같은 동사가 출 5:5에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누군가를 쉬게 하다라고 번역된다.

일곱째 날 안식일에 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넷째 계명에서는 누아흐(nuakh)라는 동사를 사용한다(20:11, 5:14). 이 동사는 욥 3:13에서 쉬다라고 번역되고 있으며, 10:36에서는 언약궤를 나타내는 데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머무르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왕하 2:15에서는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거한다라고 번역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동사는 평온하다, 조용하다라는 뜻을 가진 샤카트(shaqat)이다. 이 동사는 수 11:23에서 여호수아의 초기 정복 전쟁 이후, 땅에 전쟁이 그쳤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종종 평화로운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라가(raga)라는 동사 또한 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명기에서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주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노예 생활 중에 평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8:65). 같은 동사가 렘 50:34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쉼 없는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두 성경절은 눕다, 자다라는 뜻을 가진 샤카브(shakab)라는 동사를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왕좌에 오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신다(삼하 7:12).

앞서 살펴본 쉼을 나타내는 몇 가지 히브리어 동사를 통해 쉼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단순히 한두 단어에 국한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쉼을 얻는다. 쉼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개념은 단순히 안식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31:16과 삼하 7:12을 읽어 보라. 어떤 종류의 쉼이 언급되고 있는가?

[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 여기서는 죽음의 잠이 들어 누워 쉬는 것을 뜻한다.

 

 

<묵상>

성경이 이야기하는 쉼의 범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참된 쉼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월요일 부가설명에서 설명한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받은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참된 쉼이 없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은 생명력이 그래도 활력있게 나타나는 상태를 기본으로 하여 전하는 기별이다. 성경은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28~31). 이 사상을 기초로하여 주시는 기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피곤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존재와 삶이 즐거움으로 넘치기 때문에 쉴 수밖에 없는 피로감이 전혀 없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얻는 쉼이다. 이것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만 이르러 온다(14:13).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안에서 자아가 종신해야 한다. 그러면 쉼이 온다. 왜냐하면 수고는 종신토록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쉼 사상은 구원과 직결된 계시이다.

 

<교훈>

쉼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안식일에만 담겨 있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630() 신약에서의 쉼

 

신약에서 자주 발견되는 쉼을 나타내는 동사는 쉬다, 긴장을 풀다, 재충전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라는 단어이다. 이 동사는 쉼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말씀인 마 11:28에서 사용되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단어는 육체적인 쉼을 가리킬 수 있다(26:45).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진 것을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고전 16:18).

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또 다른 동사는 헤쉬카조(hesychazo)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쉬시는 동안 제자들 또한 안식일을 맞아 쉬었던 것을 묘사하고 있다(23:56). 그러나 이 동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삶을 사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살전 4:11), 누군가가 어떤 의견에 반대하지 않으므로 침묵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11:18).

 

4:4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 쉬신 것을 묘사할 때 쉬다, 안식하다, 멈추다라는 뜻을 가진 카타파우오(katapauo)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흥미롭게도 신약에서 이 동사는 히브리서 4장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6:30~32을 읽어 보라. 할 일이 여전히 많이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잠깐 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마가복음 6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생각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라.

[6:30~32]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전도 여행에거 막 돌아와서 결과에 관하여 흥분한 마음으로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열정을 나타내려는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6:31)라는 말씀은 초청이나 제안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육체적 그리고 정서적으로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것에 관심이 많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둘씩 짝지어 보내셨던 긴 선교여행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6:7). 6:30은 그들이 흥분된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충만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성공의 이야기와 실패의 이야기들을 예수님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멈추게 하시고 먼저 그들을 쉬라고 부르셨다. 마가는 추가적인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6:31).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주변의 상황에 의해 압도되고 너무 분주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건강과 정서적 행복을 위해 규칙적인 쉼을 계획해야 함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

 

<묵상>

6:31의 명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중요한 교훈은 무엇이었을까요?

 

: 쉼으로 심신이 안정되고 차분하게 자신들의 활동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들뜬 상태가 아닌 평정심으로 일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부가설명> 우리에게는 쉼이 없다. 이미 말한 대로 환자는 병이 다 낫기 전에 참된 쉼이 있을 수없다. 7일 안식일은 처음 제정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감사와 경배로 창조주께 예배하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출애굽한 후에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을 때는 창조와 구원의 기념으로 주신 사실을 명기하셨다(20:8~11, 5:12~15). 창조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의 세상으로 구원받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제7일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의 기념일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토요일에 교회당에 모여 예배행사를 하라는 뜻만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와 생명을 창조주이신 여호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와 경배로 충성하는 믿음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이 생명력으로 하라는 뜻이다. 주님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이다. 이런 쉼이 7일 내내 충만하게 되도록 복을 주시기 기도하면 살도록 하자.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적, 정서적 평안함을 위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쉼을 얻으라고 명령하신다.

 

 

71() 피하며 유리하는 자

 

4:1~12을 읽어 보라. 무엇이 가인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자”(4:12)로 만들었는가?

[4:1~12]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땅에 아울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그래서 땅이 그에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4:4, 5).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가인은 약속된 희생과 희생 제물의 필요성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불평과 불신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의 봉헌물(奉獻物)에는 죄에 대한 참회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 그대로 따르는 것은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며 자기 구원을, 약속된 구세주의 속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륜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은 연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고 느꼈다. 그는 자기 의존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나오려고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2).

가인이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인의 죄 된 행동들과 불순종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일이다. 하나님 안에서 쉼을 찾지 않은 가인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참된 쉼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받으셨다”(4:4)라고 번역된 단어는 응시하다, 유심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집중하여 유심히 바라보시는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땅의 소산으로 드려진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은 변덕스러운 신이 임의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기 위해 나오는 사람의 성품과 태도와 동기를 세밀하게 살피시고 판단하시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조사 심판의 좋은 예시가 된다.

 

4:13~17을 읽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가인의 반응을 설명해 보라.

[4:13~17]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 죄벌이 중하다고 대답하고 사람이 자기를 만나면 죽일 것이라고 반응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도망치려 할 때, 우리 삶에서 진정한 쉼은 사라진다. 거룩한 은혜로 채워져야 할 자리를 다른 사물들, 인간적인 관계들 그리고 분주한 삶으로 채우기 위해 애쓰게 된다. 가인은 자신의 왕조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 모두 엄청난 의지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위대한 업적들이지만, 만약 그것들이 하나님 없는 왕조이며 반역적인 도시라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묵상>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못하신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소속되어서 악한 자의 정신을 따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3:12). 가인이 아우를 죽인 이유를 악한 자에게 속하여라고 계시하였다. 그는 자신을 사탄에게 소속시킨 것이다. 사탄에게 속했다는 것은 그는 사망의 존재로 머물러 있기로 했다는 뜻이다.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2:14). 그래서 처음부터 살인한 자(8:44)의 속성대로 살인하였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기 때문에 악한 자가 아니다. 그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우를 죽인 것이다. 아담이 사망의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는 산 자가 아니었다. 아담의 씨로 출생한 가인이나 아벨은 다 사망의 존재들이요 악한 자에게 속했다. 그러나 창세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13:8, 구역)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양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려서 자기가 구주의 속죄를 믿는 것을 고백하면 그는 구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다. 그때 그는 생명이 있는 자로 여김을 받는다. 그는 산 자의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다. 아벨은 그렇게 하나님께 산 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인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어서 악한 자에게 속한 자로 남았다. 사망이 드리는 제물은 세상에서 볼 때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하나님께는 없는 것일 뿐이다. 받을 수가 없는 죽은 자가 드리는 제물은 드리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없는 자가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산 자이신 하나님께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호소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거절하고 대신에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말았다. 우리는 절대로 가인 같이 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가져온 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가인의 마음과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2()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랍비들의 판단에 의하면 항상 활동으로 크게 소동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였다. 그들은 그들의 경건의 우월성을 보이기 위하여 어떤 외적인 행위에 의존하였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저희 심령을 하나님과 분리했으며 자기 만족 위에 자신을 세웠다. 그와 같은 위험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활동이 증가하고 하나님의 어떤 사업을 행함에 있어서 사람이 성공을 하게 될 때에 인간의 계획과 방법에 의뢰할 위험이 있다. 기도를 더 적게 하고 믿음이 퇴보하는 경향이 생긴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잊어버리고 우리의 활동을 구주로 삼으려고 힘쓰는 위험이 있다. 우리는 항상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며 일을 성취하는 것은 예수의 능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동시에 명상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기도를 함으로써 성취되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성결함을 받은 사업만이 결국에는 선을 위해 효력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3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항상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하고, 모든 상황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을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그대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말씀을 따라 균형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 연구와 그 뜻에 따르는 활동으로 주님의 뜻을 준행하도록 할 때 쉼이 있다.

 

2. 하나님을 위한 좋은 일을 하면서도 과도하게 분주한 삶을 살 수 있는가? 6:30~32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서 같은 반에 속해 있는 성도들과 함께 토의해 보라.

하나님을 위한 좋은 일을 위하여 싸움도 하고 양보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위하여 고집을 부린다. 옳은 태도일까? 토의해보자.

 

3. 오늘날 우리가 누리며 사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의 속도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빨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분주하고 쉼이 부족한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계명에까지 포함할 만큼 쉼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셨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쉼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굴복하는 정신이다. 인간이 분주하게 활동하면서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자기의 활동을 주시하게 되면 사망으로 나간다.

 

4. 죄가 생기기 전의 에덴에서도 안식일의 쉼이 제정되어 있었음을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죄 없이 완벽했던 세상에도 쉼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성경의 쉼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교과 내용과 설명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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