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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쉼, 관계, 그리고 치유

(81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26)

 

연구 범위: 42:7~20, 25:41~46, 42:21~24, 45:1~15, 23:34, 50:15~21.

 

기억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한 남자가 죠앤”(Joan)을 성폭행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가 범인 식별 절차에서 죠니”(Jonny)라는 남자를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DNA 조사를 통해 14년 만에 그가 범인이 아님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죠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에 대하여 깨달았다.

죠니가 석방 되었을 때,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여인을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과연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녀는 방에서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와 마침내 서로 눈을 마주 보았을 때,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죠니가 제 곁으로 다가와 제 손을 잡고 저를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토록 증오했고 죽기를 바랐던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제 곁에 다가와서 오히려 저를 용서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치유와 참된 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며 그것이 모든 인류의 쉼 없는 마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함께 공부할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 모두에게는 용서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경험한다.

행하기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손을 내민다.

 

2. 요셉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42:15~20)

그들의 마음과 그간의 삶의 상태를 알아본 것이다.

3. 요셉의 형들은 노예상에게 요셉을 판 후에 어떤 삶을 살았나요?(42:21~24)

쉼이 없는 삶을 살았다.

4.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8:21~35)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5. 누군가를 용서하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왜 그럴까요?(23:34)

언제나 용서해놓고 살아야 한다. 특별한 때가 없다.

6. 요셉이 형들을 재차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50:20~21)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겼던 요셉은 형들을 충분히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마음에 남아 있던 죄책감과 두려움마저 말끔히 씻어 준 요셉은 형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모두 참된 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88() 과거를 마주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요셉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준 후에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41). 결혼도 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41:50~52). 애굽의 곡식 창고들은 가득 차 있었고 마침내 예견했던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찾아 애굽에 왔다.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후에 요셉과 형들의 첫 만남을 기록하고 있는 창 42:7~20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요셉이 그렇게 정교한 계획을 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첫 만남을 통해 요셉은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42:7~20]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 부모의 안부와 자기 동생의 안부를 확인하고 형들의 성질이 우애로 변했는지 확인하려는 배려로 그렇게 했다.

 

당시 요셉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원하기만 했다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 없이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고향에 남아 있는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아직 살아 계실까, 아니면 돌아가셨을까? 내 동생 베냐민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내가 떠난 후에 형들의 위험한 질투심이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아들이 되었을 베냐민에게 옮겨 가지는 않았을까?’ 요셉은 이제 그의 가족 중에 있는 연약한 존재들을 보살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그 일을 했다.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 속에서 성경의 원칙들을 실천한다는 것이 학대를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사람을 학대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시는가? 25:41~46을 읽어 보라.

[25:41~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피로 산 바 된 자들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타인을 학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소유를 공격하는 것이다.

성적인 학대나 정서적 또는 육체적 폭력은 가정 내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가정 내부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은 외부의 도움과 중재를 필요로 한다. 만일 당신이나 가족 중 누군가가 이런 문제들로 고통당하고 있다면, 반드시 신뢰할 만한 외부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묵상>

그대가 지금 가족 관계에 관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든지 간에, 그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의 원칙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이렇게 계시하였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12).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 사실을 비유로 확실히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 사탄은 우리의 육신에 갈고리를 걸고 끌고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예수께서 사탄의 이런 공격을 아시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님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도록 하신다(8:2).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도덕적 표현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왔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확언했다(요일3:14).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망에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요일3:14).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지식으로 알아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성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감성이 성령의 역사에 젖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로 열거된 9가지도 모두 감성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의 성품이 변한다는 말은 우리의 감성이 변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예수님이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의 성질이 바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했는지 여부는 형제를 사랑하는 여부로 나타난다. 마음에 진정한 원이 있으면 육신이 약해도 그런 사랑을 나타내려는 애씀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주님은 받으신다.

 

 

<교훈>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피로 산 바 된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다. 따라서 비록 가족 관계 내에서라 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어떤 학대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89() 무대를 준비하다

 

요셉은 형들을 이미 용서했다. 요셉이 정확히 언제 형들을 용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은 요셉의 마음속에서 형들이 애굽에 나타나기 한참 전에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애굽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해결되지 못한 분노와 비통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연구에 의하면 타인에 의해 비참한 취급을 받으며 삶의 큰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핵심은 바로 용서였다고 한다. 서의 경험이 없이는, 우리는 항상 피해자로 남아 있게 된다.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기보다는 나 자신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요셉은 어떤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가? 42:21~24을 읽어 보라. 그의 형들에 관하여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42:21~24]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 요셉을 해하려고 할 때의 사실을 듣고 알게 되었다. 형들이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려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의사소통이 통역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말을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요셉은 형들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형들은 고자질쟁이 요셉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기만 하면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요셉만 사라지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철없는 동생의 꿈 이야기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쉼을 얻기는커녕, 기나긴 세월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 마음에 불안감을 키웠고 하나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다. 요셉은 형들이 지내온 고통의 순간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아팠고, 그들을 위해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요셉은 기근이 몇 해 더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번에 곡식을 사러 올 때 막내동생 베냐민을 꼭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42:20). 그리고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두었다(42:24).

베냐민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요셉은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보다 각별하게 대우하는 큰 잔치를 베풀어서(43:34) 형들 마음 가운데 여전히 질투의 마음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였다. 형들은 어떤 질투심도 보이지 않았으나 요셉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전에 형들이 마을 전체를 속였던 일도 있었고(34:13), 자신을 애굽으로 판 후에 요셉이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37:31~34). 그래서 요셉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큰 시험을 더 하기로 했다(참조, 44).

 

<묵상>

45:1~15을 읽어 보십시오. 요셉은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나요? 그가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45:1~15]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 형들을 대접하고 마음을 열고 환담하며 사랑의 정으로 울고, 그들의 허물을 전혀 탓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부가설명> 용서는 예수님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시고 사형수들을 용서하셨다. 그가 부활하셔서 용서받은 모든 사형수들이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종교는 용서가 기초가 되어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은 사탄의 궤계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용서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깨달았을 때 사탄의 계책을 아는 성도들이 된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고 버티는 것른 사탄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사탄을 이긴 승리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형들의 그 엄청난 죄를 마음에 벌써 용서하고 있었다. 아담이 사망의 존재가 되었을 때 말씀 하나님께서 그 사망을 친히 담당하시겠다고 의논하고 창세기 3:15에서 용서를 이미 선언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용서를 실천하시고 부활하여서 확정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용서를 경험하고 마음이 쉼을 얻는다. 그러므로 내게 허물 진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마태18장에서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비유로 이 용서의 도리를 잘 가르쳐주셨다.

 

<교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관계의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마음에 참된 쉼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이다.

 

 

810() 용서하고 잊는다?

 

용서는 부당하게 행동하는 개인이나 그룹을 향해 억울함과 정죄하고 싶은 마음과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던 가정 상담치료사 마릴린 알모어(Marilyn Armour) 박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의 의도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용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도록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의 억울함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18:21~35을 읽어 보라.

[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증명이 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용서를 경험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다.

모든 죄는 결국 우리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그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우리가 그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그 용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용서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용서를 경험했으며, 우리도 그런 용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아닌가?

우리가 본 것 같이, 요셉은 가족 관계의 회복을 위해 형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그는 원한을 품지도 않았고,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는 일에 전문가가 된다면 가족 문제를 해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과거를 잊고 사랑과 포용의 마음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만약 요셉이 이와 다른 태도를 품었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묵상>

4:7, 8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이 약속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나요?

[4:7,8]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져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복을 누린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

 

<부가설명> 우리는 아담 안에서 사형수이다(고전15:22). 사형수이기보다는 시체다. 생명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이 송장을 살려주시려고 한다. 그냥 두면 그대로 시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시체들에게 은혜의 날과 구원받을 때를 주셨다. 이 기간을 바르게 활용해야 한다. 바울은 고후 6:1,2에서 이 사실을 강하게 가르친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 일만 달란트, 즉 사형을 대신 당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는 빚을 진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기껏해야 일백 데나리온이다. 만 단란트를 탕감받고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못한댜면 그는 만 달란트를 스스로 갚아야 하는 자리에 떨어진다. 주님의 용서를 크게 느끼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그 용서를 대수롭제 않게 여기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수롭지 않게 된다(7:47). 사람을 용서하는 정도가 주님께 용서 받은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된다. 어떤 허물이라도 상대가 잘못했다고 빌기 전에 이미 마음으로 용서하고 살 때 쉼이 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쉼을 누리기를 기대하신다. 아멘.

 

<교훈>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용서를 경험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811() 구체적으로 용서를 실천하기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감정을 덮어 버리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상처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억울함과 분노를 인정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본다. 내가 경험한 어떤 일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표현하거나, 내가 당한 부당한 대우가 나를 슬프게 또는 화나게 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려도 괜찮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형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 앞에서 울면서 과거의 감정의 일부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용서의 선언이 언제 용서할 것인가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 23:34을 읽어 보라.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 항상 용서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당장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그 현장에서 용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우리를 공격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나의 용서를 받아 주든지, 그렇지 않든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상대방을 먼저 용서할 수 있다.

 

6:28과 마 5:44의 말씀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그들을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 시작된다. 정서적으로 힘든 일이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용서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0:27)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 없이 용서는 항상 쉽지만은 않다. 우리가 받은 고통과 충격이 너무 참담해서 상처 입고, 넘어지고, 완전히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치유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씁쓸함과 분노와 억울함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으면 그 치유의 과정이 훨씬 더 더뎌질 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는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실례이다. 만일 우리의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거절할 줄을 알면서도 그 일을 감당하실 수 있으셨다면, 우리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묵상>

용서가 어려울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 도움을 주나요?

 

: 하나님의 용서, 만 달란트 이상을 탕감받은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백 데나리온도 안 되는 것을 탕감하지 못하는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사유를 간구하고 넉넉히 탕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용서는 관계의 회복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죄요, 생명을 돌려드렸으니 생명없는 존재 곧 사망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독생자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이 회수당한 생명을 대신 지불하게 하셨다. 그래서 독생자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그 생명을 주님께서 대신 지불하셨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아담 후손들을 용서하셨다. 이제 이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담 후손들이 할 일인데 그것이 회개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이제는 사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요일5:11,12).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지킬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용서가 이룬 결과이다.

 

<교훈>

용서는 우리의 선택으로 시작되는데,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812() 용서한 후에 얻게 되는 쉼

 

마침내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에 도착하였다. 이제 더 이상 가족 안에 감추어진 비밀은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 요셉이 지금 애굽의 총리로 살아 있다고 아버지에게 설명해야 했을 때, 형들은 예전에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던 것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거나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부둥켜안고 함께 흐느껴 울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여러 방법을 통해 상대방을 용서했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이를 통해 치유를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50:15~21을 읽어 보라. 요셉의 형들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가? 그들의 두려움은 그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

[50:15~21]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낯을 보아 용서하는 것 같은 줄 착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별세하신 후 다시 용서를 확인했고 요셉은 간곡한 말로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 것을 믿게 하였다.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살게 된 지 어느덧 십칠 년이 되었다(47:28).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죽었을 때,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다시 한번 그들이 요셉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 한번 그가 형들을 용서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용서를 확인하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상처가 깊다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용서해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다면, 우리는 곧장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고 다시 한번 용서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요셉은 그의 삶이 자신의 가족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했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성취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형들의 악한 계획들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했다.

 

50:20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이 자신에게 죄를 지었던 형들을 용서하고자 하는 요셉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요셉은 자기가 겪은 일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묵상>

3:12~14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기록해 보십시오.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간곡한 말씀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부가설명>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항상 용서하고 계신다. 우리는 호흡하듯이 사죄의 호흡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용서하는 은혜의 대기(大氣)가 없으면 우리는 질식하여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생명의 사랑이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언제나 용서해 놓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언제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사상으로 주님의 뜻을 대체하는 일을 잘 하지 않는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사죄의 호흡으로 깨끗함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언제나 용서를 선택하고 있는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지각에 넘치는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을 주장할 것이다(4:7). 그때는 하늘의 쉼을 누릴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놓아줌으로써 치유를 위한 여정을 시작하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다.

 

 

813()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요셉이 그의 친형들에 의하여 이방인에게 팔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가장 극악한 원수들에게 팔리셨다. 요셉이 그의 결백 때문에 거짓으로 고소당하여 투옥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의로운 극기의 생애가 죄에 대하여 견책이 되었기 때문에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다. 정죄받을 만한 죄가 없으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여 정죄를 당하셨다. 요셉이 불공평과 압제 하에서도 참고 온유하게 행한 일과 인륜을 어긴 그의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고 고상한 자비심을 베푼 일은 구주께서 악인들의 악행과 능욕을 불평 없이 참으시고 당신을 살해한 자들뿐 아니라 당신께 나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을 예표한다”(부조와 선지자, 239, 240).

 

어떤 것으로도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용서를 체험하게 되면 죄인의 마음은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크신 마음에 가까이 끌리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조류는 죄인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에게서 다시 다른 사람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 친히 나타내신 동정과 자비는 또한 그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서도 나타날 것이다”(실물교훈, 25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 죽기를 바라면서 독약은 자신이 마시는 것과 같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2.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전에 정교한 계획을 통해 형들을 살폈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이 일이 요셉 자신과 형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들의 마음과 삶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다.

 

3.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이 형들에 대해 꾸몄던 계획에 함께 참여하였다(44:1~12). 용서의 경험이 그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사랑과 우정을 깊이 느끼고 용서하는 삶의 실상을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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