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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일 안식일

일몰오후 736

 

연구 범위 : 3:15~20, 9:11~17, 5:17~20, 16:22~26, 15:1~6

기 억 절 :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3:18).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대통령께서는 선거기간 동안 내건 공약을 다 지키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대통령께서는 적어도 지키려고 내건 공약은 다 지키셨습니다.” 파기된 약속의 피해자나 당사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약속을 깼거나 깨진 약속을 믿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때때로 지키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입에서 나오자마자 거짓이 될 게 뻔한 약속을 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다른 질서 속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변함이 없다.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46:11).

이번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43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구원의 약속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이해한다.

느끼기 : 은혜의 약속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율법을 통한 관계의 차이점을 느낀다.

행하기 : 율법으로부터 유익을 얻음과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약속을 받아들인다.

 

인간 상호간의 계약과 하나님의 언약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인간 두 사람이 계약을 할 때 상방이 책임을 지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과 같다. 일방적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율법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언약은 존재와 인격을 걸고 하는 것이다.(6:13) 율법은 그것을 받는 자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지키지 않으면 형벌이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다. 일방적이니까.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으면서 어떻게 율법을 굳게 세울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율법이 생활이 된다.

우리가 더 많은 율법의 지식 또는 바른 진리를 앎으로 유리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때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론 :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와 구속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수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 주고, 우리의 결함을 비춰줌으로써 우리를 의의 근원으로 인도합니다.

 

 

첫째 날() 율법과 믿음 (3:15~18)

730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3:15).

 

아브라함의 생애의 특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바울의 반대자들은 아브라함 이후 약 4백 년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여전히 의아해할 수 있었다. 혹시 율법을 주심으로 앞선 조치들을 무효화하신 것은 아닌가?

 

1. 바울이 하나님의 언약을 사람의 유언에 비유한 목적은 무엇인가?(3:15~18)

[3:15~18]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 언약이라는 말이 디아데케인데 유언과 같은 성질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받는 것 외에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과 유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언약은 둘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상호 합의로서 계약또는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반면 유언은 한 사람의 선언이다.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한 번도 상호협약 또는 계약을 뜻하는 말인 순데케(syntheke)’로 번역하지 않았다. 대신 증언 또는 유언의 뜻을 가진 디아데케(diatheke)’로 번역하였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개인 상호 간의 조약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보다 그분의 뜻에 기초해 있다. 어떤 조건이나 부언 또는 단서도 없다.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언언약의 이중적 의미를 선택했다. 사람의 유언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 즉 특정 수혜자를 두고 있다(12:1~5, 3:16). 그것은 또한 유업을 포함하고 있다(13:15, 17:8, 4:13, 3:29).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함없는 약속의 본질이었다. 사람의 유언도 한번 시행되면 변경될 수 없는 것처럼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이전에 맺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의 약속이다(3:16). 하나님은 결코 약속을 깨는 분이 아니다(46:11, 6:18).

 

<부가설명> 구약에 언약이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베리트이다. 이것은 쪼갠다는 뜻이다. 동물을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게 잘라서 그것을 양쪽에 벌여놓고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그 쪼갠 동물 사이로 지나가는 것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34:18) 이것이 언약 방법이다. 참 무서운 언약이다. 만일 언약을 어기면 그 사이로 지나간 쪼개진 동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런 언약은 예레미야의 기록대로 두 언약 자가 그 사이로 지나가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사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헬라어는 두 사람이 언약을 맺는 것을 순데케라고 한다. 그러나 유언은 디아데게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한 번도 순데케라고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다 디아데케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언이라고 번역한 것은 히브리서에 세 번뿐이다. 이 세 번도 하나님의 언약의 성질을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참 얼마나 고맙고 쉬운 언약인가! 우리는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확실성을 맹세와 언약이라는 두 가지로 굳게 제시하셨다.(6:16~18) 이 약속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교훈 :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 간의 계약과 같지 않으며 다른 조건에 의하여 파기될 수 없다.

 

 

둘째 날() 믿음과 율법(3:31)

7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31).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할례든 어떤 종류의 율법의 행위든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2:16), 신자를 정의하는 특징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이기 때문이다(3:7).

 

1. 구원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폐했다고 말하는가? 다음의 성경절들은 이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3:31을 롬 7:7, 12, 8:3, 5:17~20과 비교해 보라.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7:7,12]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믿음으로 율법이 더욱 굳게 세워진다.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논리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믿음과 율법에 대한 그의 논증과 유사하다. 그의 해석 때문에 믿음을 높이기 위해 율법을 버린다고 결론을 내릴 사람들도 있음을 간파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3:31) ‘파기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카타르게오이다. 바울이 자주 사용한 이 말은 폐하다’(3:3), ‘폐지하다’(2:15), ‘멸하다’(6:6), 심지어 파괴하다’(고전 6:13)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도 있다. 만약 오늘날의 주장처럼 바울이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사상을 지지하기 원했다면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히 그와 같은 정서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의 복음이 율법을 세운다고 천명하기까지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계획은 속죄 희생을 요구하고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드러낸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율법을 폐지시킨다면,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진정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거리낌 없는 자발성을 의미한다”(재림교회 성경주석 11, 608).

 

<부가설명>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마치 유언처럼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 주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이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받아들인 사람의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이란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즉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이것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이행하여 받는 것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생명을 받기 전에 인간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썩는 것뿐이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순데케를 요구하실 수 없다. 그는 디아데케를 선언하셨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살아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살아 일어난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이제는 살아났으니 내가 산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구원이다. 얼마나 쉬운가! 복음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진정한 믿음으로 생명을 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언약과 믿음이다. 생명이 있으니 활동하는 것처럼 예수 생명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율법이 생활되는 것이다.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굳게 세우는 이유이다.

 

교훈 :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율법을 파기하는 길이 아니라 율법을 세우는 길이다.

 

 

셋째 날() 율법의 목적

81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3:19).

 

3:19~29에서 바울은 여러 차례 율법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율법이란 어떤 것인가? 19절에서 오시기까지라는 말이 율법의 한시성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본문이 의식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식법은 십자가에서 성취되고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름 일리 있게 들리긴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담긴 바울의 요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범죄함 때문에 시내산에서 더해진 율법은 의식법과 도덕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질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법이 도덕법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1. 바울이 정말 율법이 더해졌다고 말했는가? 어디에 율법이 더해졌는가? 무엇 때문에 더해진 것인가? 3:19과 롬 5:13, 20을 비교해 보라.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5:13,20]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범법했기 때문에 율법이 더해졌다.

 

바울은 율법이 마치 본래의 유언을 수정하기 위해 첨부된 부록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더해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시내산 이전부터 존재했다. 바울은 율법이 완전히 다른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음을 밝힌다. 율법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이끌고,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은 우리의 죄 많은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모종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하”(5:20)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율법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주기 위해 주어졌다(7:13).

의식법은 메시아를 가리키며 거룩함과 구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도덕법은 죄가 우리의 자연적 상태의 일부분일 뿐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임을 보여 준다(3:20, 5:13, 20, 7:7~8, 13). 바울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부가설명> 죄와 율법 문제는 쉬우면서 어려운 문제로 제기된다. 죄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곧 죄와 율법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9,10,19) 여기 말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알았지 온 세상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죄를 말할 때 율법은 온 세상에 보편적이고 전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세의 율법, 혹은 성경의 율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항의할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심의 법을 거론한다. 그것도 일리 있는 생각이다. 성경을 유심히 살피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 있는 율법은 사망의 법이다. 사람들은 지금 예외 없이 다 사망한다. 사망은 죄의 삯이다. 죄는 불법이다.(6:23, 요일3:4)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그 아래 있는 율법은 생명의 법을 범하여 사망이 된 것이다. 생명의 법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그 말씀이다.(4:13, 32:46,47, 7:38) 이것은 아담에게 주신 법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사망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자는 다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그 정죄는 사망이다. 하나님께서 더해준 법은 범법했기 때문에 준 것이다. 범법한 법이 바로 이 생명의 법이다. 이것을 범해서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법을 더해준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가!

 

교훈 :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은 의식법뿐 아니라 도덕법도 포함된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넷째 날() 율법의 지속성

82

 

그런즉 율법은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1. 율법이 시내산에서 더해졌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전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면 시내산 이전과 이후의 율법의 차이점은 무엇인가?(9:5~6, 18:19, 26:5, 39:7~10, 16:22~26)

[9:5,6]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6: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39:7~10]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6:22~26] 제 육 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26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 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 시내산 전에도 율법이 존재한 것을 아는 바울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일 수 없다. 시내산 전의 율법은 첫째 명문화 되지 않았다. 시내산에서 명문화하여 주신 율법은 사람들이 보고 읽고 자신들의 처지가 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이제 명문화 된 속죄법과 성소봉사를 통하여 사망에서 놓이는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율법이 복음인 이유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둥과 번개, 죽음의 형벌로 율법을 제시하실 필요가 없었다(19:10~23).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율법을 주셨는가? 왜냐하면 애굽의 속박을 받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은 도덕적 표준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죄성의 정도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함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다. 시내산의 계시는 정말 그런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는가?(3:16~19) 많은 사람은 이 말을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이 임시적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아브라함 이후 430년 뒤에 주어졌던 율법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말이나 마 5:17~19과 같은 다른 성경절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 본문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까지라는 말을 제한된 시간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묘사하면서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의 대적들을 이길 때까지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112:8, ESV). 이 말은 그가 승리하면 두려워하겠다는 말인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25)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오시면 더 이상 믿음을 굳게 잡을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의 초림이 인간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즉 진정한 죄의 해결책을 제공하셨다. 그분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그의 영으로 그들 가운데 율법을 이루셨다(8:3~4).

 

<부가설명>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망의 법아래 있는 것 외에도 어쩔 수 없이 다 법아래 있다. 천연계의 법을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물속에서는 호흡할 수 없다. 높은데 올라가면 떨어질 위험이 있다. 아무도 인력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도 천체 운행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법에는 저항할 수 없다. 때가 되면 죽는다. 아무리 저항해도 죽는다. 생물학적 사망의 법이 그를 주관한다. 높은 곳에 그냥 허공을 뛰면 땅으로 떨어진다.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일 때 안심한다. 물속에 들어가면 호흡할 수 없다. 호흡을 못하면 죽는다. 이런 것들이 다 법이다. 밤이 오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깬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사람이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도덕법이고 생명관리법이다. 사람의 의지로 도덕을 훼손한다. 또 자기 기호로 생명관리법을 어긴다. 곧 건강법이다. 아무렇게 먹고 입맛을 따라 산다. 입맛도 하나의 법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생의 생명을 얻으면 그날에 예수님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도덕법이 그의 생활법이 된다. 천연법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십계명이 아주 당연히 자연스럽게 생활될 것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예수님의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8:2)

 

교훈 : 율법은 아브라함 전부터 시내산까지 그리고 그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존재하였고 그 이후로도 존재할 것이다.

 

 

다섯째 날() 약속의 우월성

83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7:38).

 

3:19~20에서 바울은 율법이 은혜의 언약을 폐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이어 가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반대자들의 신학이 옳다면, 언약이 율법에 의하여 파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율법의 준수에 의지해야 할 경우 죄인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 결과적으로 소망을 잃게 될 것이다.

3:19~20에 나오는 바울의 해설이 까다롭긴 하지만 요점은 분명하다. 율법은 언약에 비하면 부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사들과 모세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는 율법을 내리는 과정에 천사가 개입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33:2, 7:53, 2:2). 바울은 딤전 2:5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며 중보자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갈 3:19~20에서 바울은 신 5:5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5:5).

셀 수 없는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는 장면은 장엄하였고, 율법을 전하는 모세의 역할도 중요했다. 하지만 율법의 전달 과정은 간접적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직접 맺은 언약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치 않았다. 따라서 율법이 중요하긴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율법의 역할은 그 약속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다.

 

1.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의 특징을 설명해 보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15:1~6, 18:1~33, 22:1~18)

[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8:1~33] 너무 길어서 올리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만나서 롯을 염려하는 내용이다.

[22:1~18]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는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언약을 하셨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중보가 없었다. 믿음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의 차이이다. 이것이 언약의 우월성이다.

 

<부가설명>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인데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하여 중보가 필요 없었다. 율법과 믿음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다른 중보가 필요 없다. 예수님이 중보이시고 또 심판자이시다. 중보는 변호하는 자리이다. 중보자와 변호사는 같은 직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께서 재판장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변호사이니까 그 재판은 이미 승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가 필요 없다. 예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 히브리서의 기록대로 예수 안에서 지성소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중보자 없이 직접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 언약에 참여한 언약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율법보다 훨씬 우월한 언약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언약 밖으로 나가지 말자. 언약 밖으로 나간다는 말은 예수님 밖으로 나간다는 말과 같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멘.

 

교훈 : 율법은 언약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천사와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 반면 언약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4

 

<화잇 주석>에서 고후 3:6~9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어 보라.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71).

시내산에서 두려운 위엄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에 대한 정죄의 말씀이었다. 정죄하는 것은 율법의 섭리이지만 그 속에는 용서하거나 구속할 힘은 없다”(화잇주석, 고후 3:6~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어떤 사람이 그대와의 약속을 깼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약속을 지키려고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경우와 애초에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경우와 얼마나 다릅니까? 약속을 어긴 사람에 대한 그대의 신뢰심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그대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가장 신뢰할 수 있게 됩니까?

약속이 깨지면 유쾌하지 않다. 고의로 약속을 깨려고 약속했다면 사기를 당한 것이고 그는 사기꾼이다. 하나님은 친히 약속하시고 예수님으로 그 약속을 확실하고 완전하게 지키셨다. 당연히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진리를 잊어버리기까지 우리는 어떤 경로와 환경을 통해 타락하게 됩니까? 부패한 감화력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런 영향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자기가 구원받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자기가 무력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 낙심한다. 오직 믿음으로 말씀에 굳게 서서 다른 복음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바르게 깨달을 때 바른 대응을 할 수 있다.

 

요약: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폐하지 않았으며, 약속의 내용을 수정하지도 않았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죗된 본성의 깊이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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