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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과 재림의 소망을 따라 사는 삶

 

914일 안식일

일몰오후 643

 

연구 범위 : 18:1~8, 24~25, 고전 15:12~19, 8:14, 12:13~14, 21:1~5, 22:1~5

 

기억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실체인 것처럼 선포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파송하셔서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섬김으로, 즉 받은 대로 거저 줌으로써 그들에게 그분의 나라를 보여주게 하셨다(10:5~8 참고).

반면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18:36)며 아직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다른 종류의 나라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출범했지만 주님은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를 완전히 대체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실현될 때를 고대하셨다.

재림신자라는 말을 정의하자면 그들은 이러한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소망의 백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단지 미래에 있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소망은 미래를 바라보는 동시에 현재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미래에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을 오늘 실천하며 산다. 그리고 언젠가 바뀔 세상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것에 적합한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시작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심판이 재창조를 위한 필연적인 단계임을 깨닫고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이해한다.

느끼기 :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는 자들의 고통에 동참한다.

행하기 : 예수님이 가져오실 나라를 소망하고 오늘 그 나라의 일을 실천하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심판을 끝이 아니라 재창조의 과정이라고 할까요?

세상을 처음 창조했을 때처럼 회복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이다. 심판으로 이 일이 확정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아니면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께서 이미 그 나라를 출범시키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나라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생명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까요?

우리도 눈물을 닦아주는 생활로 보여줄 수 있다.

우리 교회는 회복된 세상에 어울릴 만한 어떤 사업을 펼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 이름으로 진심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재창조하실 나라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시면서 이미 그 나라를 출범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행할 때 우리는 지금부터 그 나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통해 이 세상을 재창조하실 만큼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그런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98()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22).

 

성경의 역사를 보면 종살이, 포로, 압제, 빈곤, 부당함과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개입을 바라며 끊임없이 탄원한다. 애굽의 노예였고, 바벨론의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겪는 고통을 보고 들으며 이러한 잘못들을 바로잡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성경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분은 종종 그들의 압제자와 원수들에게 보복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죄악에 종지부를 찍고 억눌린 자들을 일으키실 최후의 개입을 계속 주목했다. 이 선지자들은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예를 들어 한 여호와의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에 대해 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시기를 언제까지 하시려는지 물었다(1:12 참고).

시편을 보면 의인들이 학대와 탈취를 당하고 궁핍할 때 악인들은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현실에 대한 탄식이 자주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현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고 있지 않기에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라고 했던 선지자와 억눌린 자들의 절규를 이어받아 계속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한다(94:3~7 참고).

어떤 의미에서 모든 백성을 위해 공의를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불의한 상황은 더 참기 어려운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세상의 죄악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행동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 또 다른 인내심으로 요구한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입에서 다급한 질문이 새어나온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신약 성경에도 비슷한 탄원이 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재창조를 바라며 탄식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8:19~22 참고).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 하며 부르짖는 탄원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순교를 당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눌리고 박해를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개입해주시기를 요청하는 동일한 절규이다.

 

<부가설명> 오늘 교과는 질문이 따로 없다. 그러나 제목이 질문이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이것은 사망과 죄의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시대의 모든 도덕적인 사람들의 질문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질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세상을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인류의 긴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겠는가? 그러나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유는 죄다. 죄가 세상을 다스리는 한 이런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성경이 계시한 근본적인 죄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생명문제이다. 죄는 사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죄가 왕 노릇하는 것과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5:17,21) 이 말씀은 죄와 사망이 동일한 것임을 잘 가르쳐준다. 사망을 멸망시켜 없애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아담의 후손은 이미 예외 없이 다 사망의 지배를 받는 죽음에 이르는 병자들이다. 그래서 아담의 씨와 상관없이 말씀하나님이 생명의 씨가 되어 동정녀에게 잉태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사망의 지배를 받는 분이 아니다. 생명자체이시다. 그가 십자가에서 아담의 사망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폐하셨다. 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2:14,)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그러면 당연히 사망의 부하들도 없어져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않다. 이유는 처음 아담에게 말씀하신 대로 죄와 상관없는 존재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야 하기 때문에 재림이 지체되는 것이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 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땅에 충만하게 하는 그 일을 해야 한다. 교과 저자가 계속 이야기하는 선행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사업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속히 이르도록 수행하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훈 : 공의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공의롭지 못한 이 세상에서 고통과 억압을 견디고 그분의 개입을 바라며 탄원하는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

 

 

99() 희망이라는 것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24:45~46).

 

종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곳의 삶을 멀리하고 더 나은 내세의 삶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경향 때문에 비판을 받곤 한다.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를 빙자한 일종의 현실도피가 되며 신자들로 하여금 현 세계와 사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때로 신자들 스스로가 이런 비난을 자초하고 심지어 그런 종류의 태도를 발전시키고, 설교하며, 연습하기까지 한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서글픈 현실을 그냥 감내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고 말하는 것은 최악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은 타락하고 망가진 비참한 곳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르게 세우실 때를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분은 불의와 고통과 슬픔을 끝내시고 현재의 무질서를 그분의 영광과 의로운 통치로 바꾸실 것이다. 그런 소망과 약속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이다.

세상 종말에 대한 설교(24~25장 참고)에서 예수님은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24:22)이라고 말씀하시며 도피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데 설교의 반을 할애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이다. 도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요점 없는 소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24~25장을 읽어보라.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시는가? 그대는 그분의 명령을 어떻게 요약하겠는가?

 

: 24장은 재림의 때를 위하여 온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25장은 기름을 준비한 신앙생활과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복음을 실천하라고 하시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달란트를 바르게 활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믿는 것들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세상의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건전한 신앙은 적극적인 참여의 기폭제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풍요롭고 심오한 삶의 불꽃이 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마태복음 24,25장의 말씀들은 다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이 있다. 재림으로 이 세상 사망과 죄의 권세가 완전히 박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사망과 죄의 장본인인 사탄과 그 부하 천사들과 그를 추종한 모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28에 말씀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한 그 사람들이 충만하게 될 때 재림이 있을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어떻게 더 많아지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사망의 존재들의 충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그런 사람들로 충만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다.(고후5:17, 4:23,24) 이런 사람들로 충만하게 되지 않으면 재림을 지연될 것이다. 불공평 불평등의 세상 역사는 지속될 것이고 사망과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속히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런데 교회가 도리어 사망의 세력의 하수인이 되어 세상보다 더 부패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을 일으키셨는데 이 남은 자손의 현실은 어떤가? 올바르게 깨닫고 정신 차려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의 삶과 나라는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무엇을 실천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910() 부활의 소망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단지 밝은 미래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은 재림의 약속에 확고한 현실성을 부여했다. 누군가는 직접 목격했던 것처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다면 분명히 죄와 그 영향력을 제거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겠다는 계획도 완성하실 것이다(고전 15:22~23 참고).

사도 바울에게 부활은 재림의 소망에 확신을 불어넣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모든 것의 신뢰성을 예수님의 이 기적적인 사건에 걸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고전 15:17). 바울의 설명을 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필수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라.

 

1. 고전 15:12~19을 읽어보라. 부활의 진리가 왜 기독교 소망의 핵심이 되는지에 관심이 많은 비신자가 있다면 그대는 그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고전15:12~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을 정복한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 안에서 이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사망과 고통과 상관없는 세상을 이루고 영생하게 된다고 증거 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첫 제자들은 변화를 경험했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송하셨다(10:5~8 참고). 그러나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용기는 꺾였고 희망은 뭉개졌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셨다(28:18~20 참고). 그 사명은 성령 강림으로 힘을 얻게 된다(2:1~4). 그러자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이 수립하신 나라를 보여주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죽음의 권세와 공포에서 벗어난 초기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전 15:30~31 참고). 죽음을 야기한 죄악은 세상에 온갖 종류의 고통과 불의, 빈곤과 억압을 야기하는 죄악과 동일하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승리로 말미암아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26)이다.

 

<부가설명> 히브리서 612절에는 초대교회에서 가르친 여섯 개의 기초교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고 표현했는데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초보적 교리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회개, 신앙, 침례, 안수, 부활, 심판인데 놀랍게도 십자가는 없다. 초대 교회에서 십자가는 초보 교리에 속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자 기초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그것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초대교회의 가장 핵심 되는 교리는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고백했다. 아마도 십자가는 부활을 가르칠 때 부활에 속한 교리로 말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 부활 증거 행전이다. 사도행전에 십자가라는 말은 두 번 밖에 없다. 초대교회에 부활이 교리의 기본이었다면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역사가 흘러오면서 영혼불멸설이 교회의 교리로 자리 잡으면서 부활은 밀려났다.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재림의 소망도 뒤로 밀려났다. 죽어서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이 소망이 되었다. 만일 영혼이 있어서 죽은 다음 천국을 간다면 부활이 없어도 믿음의 헛되지 않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십자가 로고 대신 부활을 나타내는 멋진 로고가 없을까? 생명의 부활 그것이 진정한 소망이다.

 

교훈 :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수립하신 나라가 미래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이 실현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911() 심판의 소망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8:14).

 

1. 8:14을 읽어보라. 그대는 여기서 말하는 냉혹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 죄의 세상의 부조리이다.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정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고난과 억압, 비극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무의미하거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처와 모욕은 더 감당하기 힘들다. 슬픔이 무의미해지면 이전의 짐보다 더 버거워진다. 증거와 최후의 심판이 없는 세상은 잔혹함과 불합리함의 극치이다. 20세기의 무신론자들조차 자신들이 믿는 것은 인간의 불합리한 상황이라고 한탄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정의에 대한 희망도, 심판에 대한 희망도, 세상이 옳게 되리라는 희망도 없기에 이 세상은 정말 불합리한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 8:14의 절규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논증 끝에 돌연 방향을 전환한다. 그는 허무함의 애가를 읊조리다가 진지하게 말한다. ‘잠깐 기다려보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테니까. 그러면 만물이 허무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모든 것이,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하다.’

 

2. 12:13~14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 마지막 심판의 자료가 된다.

 

심판의 소망이란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로 요약된다. 이미 보았듯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고 아끼시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세상이 잘못되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재창조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을 수행중이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이다.

세상의 온갖 불행을 감수해야 했던 자들 곧 소외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억눌리고, 수탈을 당한 자들에게 심판의 약속은 진실로 복음이다.

 

<부가설명> 심판은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심판에 대한 진리를 창세기 3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한다는 말씀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만일 심판이 없다면 이 예언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심판의 핵심은 뱀을 없애는 것이다. 즉 사탄을 없애기 위하여서는 사탄이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시인해야 한다.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결코 억울한 것이 아니고 당연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하고 선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시인하도록 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서는 사탄이 입도 벙긋할 수 없도록 그가 정죄되거 없어져야 한다는 분명한 자료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탄에게만 아니고 온 우주에 공개되고 모든 악인들과 악한 천사들에게도 공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심판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의롭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판단 받으시는 것이라고 했다.(3:4) 이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게 된 모든 원인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에게 있다는 것이 온 우주에 명백하게 증거 되게 하는 것이 심판이다. 성도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영원한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교훈 : 정의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소망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마침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912()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1. 21:1~5, 22:1~5을 읽고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라. 죄와 죽음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22:1~5]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결코 경함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경은 죄가 없는 세상의 삶을 그린다. 그 모습은 매우 놀랍고 눈부시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을 정확히 대변한다. 성경은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말하며 그곳에 무엇이 없을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설명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고통과 아픔, 죽음과 공포, 불의와 빈곤이 없는 그곳의 삶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때에는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 게다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21:4)겠다는 주님의 개인적인 약속이 더해진다. 구원받은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 역사를 통해 고난을 당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은 이 한 문장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분은 그들의 고통을 끝내실 뿐 아니라 직접 각자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불행과 불의의 세상에서 죄의 삶을 살면서 수많은 이유로 죄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계시록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치유의 과정을 엿본다. 요한은 생명나무를 묘사하면서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2:2)고 설명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죄악을 느끼고, 경험하며, 목격하고, 심지어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그분의 계획 속에는 우리 각 사람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일도 포함된다.

우리의 몫이 미미할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위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친절한 말, 따뜻한 식사 한 끼, 의료적인 도움, 치과 진료, 의복, 상담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헌신과 절제와 희생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그 일들을 행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할지라도 세상은 계속 악화될 것이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분의 봉사를 중단시키지는 못했고, 마찬가지로 우리를 막을 수도 없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하신 사탄의 일을 멸하는 활동을 한다고 해도 세상은 아직도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이다. 그리스도인도 죽는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죽게 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만 가진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있다고 해도 죽는 생명을 가진 상태로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죽어도 영생으로 사는 생명을 가진 사람은(11:25,26) 사망이 두렵지 않다. 죽는 것은 밀실에서 잠시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57:1,2, 26:20) 그 밀실의 문이 열릴 때 결코 죽을 수 없는 불멸의 생명으로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되어 부활한다.(20:36, 3:21) 그렇게 될 때까지 이 세상은 아직도 사망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고 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 땅에 충만할 때까지 그렇다. 그래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8:23) 그날이 속이 이를 것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호흡이 끊어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그날 아침 생명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망이 없기 때문에 사망의 부화들이 당연히 없다. 그곳을 산 자의 땅이라고 했다.(27:13) 거기 꼭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이 하신 일에 열심히 동참하자.

 

교훈 : 하나님은 죄와 고통을 제거하며 친히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기를 원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913()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도행적>, 309~322 ‘높은 표준에 도달하도록 부르심’, <각 시대의 대쟁투>, 653~661 ‘지상의 황폐를 읽어보라.

하나님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힘에서 돌이키실 때 인생의 큰 싸움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은 무서운 각성을 할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사탄의 속임수에 눈이 멀었으며, 그들은 죄악의 길을 정당화했다. 부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의 우월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써 얻은 것이었다. 그들은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기를 등한히 했다.그들은 세상의 부와 향락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팔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하게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그들의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의 향락은 이제 쓴 것으로 바뀌고 그들의 재물은 썩어 버렸다”(각 시대의 대쟁투, 65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지금 이곳의 삶이 중요하다는 이번 주 교과의 내용을 그대는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시고 재창조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생과 현재의 세상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등한히 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주의해야 합니까? 이런 논리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의 삶은 심판을 거쳐 미래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 심판에서 의롭자는 판결을 받으려면 의롭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사신 것이 제시된 모범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이해하는 성경 예언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죄악과 환난, 고통은 증가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종종 마태복음 24장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극들을 어떻게 마태복음 25장에 비춰서 봐야 합니까?

그럴수록 재림성도들은 마25장에서 주님의 오른편에 선 사람들의 삶을 더 부지런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요약 : 우리 하나님은 죄악이 영원히 존재하도록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죄악을 끝내고, 불의를 치유하며, 원래의 계획에 맞는 새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한 이러한 소망은 현재를 변화시키며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우리의 봉사에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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