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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태도를 기르라

 

829일 안식일

일몰오후 76

 

 연구 범위 : 4:27~30, 39~42, 15:21~28, 살후 1:1~4, 15:7, 4:32, 벧전 3:15

 

 기억절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할수록 우리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시는 그분의 능력에 놀라게 된다. 비록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준엄하게 견책하셨지만 그분은 죄와 씨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저주에 얽매인 자들을 기꺼이 용납하셨다. 그분의 은혜는 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분의 자비는 가장 비열한 죄인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의 깊이는 그들이 저지른 죄의 깊이보다 훨씬 깊었다.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예수님은 일말의 자만심이나 우월의식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보셨다.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그분의 사랑에서 벗어나거나 그분의 은혜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분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셨고 정중하게 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으셨기에 천국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분과 함께할 때 그들의 삶은 변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들을 극진히 돌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학습 목표

깨닫기 : 마음을 얻는 태도란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단점은 용납하며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겸손하게 다가가는 것임을 배운다.

느끼기 : 우리의 죄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한다.

행하기 :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의 태도로 이웃을 가까이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예수님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까? 그분이 그들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칭찬하셨다. 그것은 마음을 열어서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때로 기별의 내용보다 그것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나 자세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기별도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하고 그런 사랑이 발생하게 해주기를 간청해야 하고 그런 사랑이 생기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전도 방식에서 수정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바꿔야 할까요

각 사람과 안교반원들이 의노해보자.

 

결론 : 기별만 옳다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얻기 위해서 긍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단점을 드러내기보다는 장점을 바라보며 긍휼의 정신으로 용납할 때 그들은 우리를 통해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8 23() 복음의 수용성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4:35).

 

1. 4:27~30, 39~42을 읽어보라.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복음의 문이 때로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열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4:27~30, 39~42]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가서 자기의 경험을 고백했을 때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에는 절대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교리와 예배의 문제로 항상 유대인들과 대립했다. 이러한 적대감은 해묵은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이방 민족과의 통혼 그리고 정통성이 없는 신앙관 때문에 그들은 그런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황무지 같아 보이는 사마리아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 곧 수용성 있는 심령들을 보셨다.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일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3~4).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실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예기치 않은 지역에 복음을 받아들일 영혼이 있다고 그분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성령의 기름을 바르면 우리는 난관만 있어 보이는 곳에서도 가능성을 볼 수 있고 황무한 땅처럼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영혼들의 풍성한 수확을 볼 수 있다.

 

2. 8:4~5, 14을 보라. 예수님의 사역은 사마리아에서 어떤 결실을 가져왔는가?

[8:4,5,1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 빌립의 전도로 신자가 생겼고 그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전도하여 많은 사람이 믿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채 그곳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성령께서 한 여인의 마음속에 복음을 수용할 마음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인지하셨다. 그녀의 극적인 회심은 그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우리가 우리의 전도 활동으로부터 항상 즉각적인 결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씨를 뿌려 놓으면 언젠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부가설명> 이런 사건들은 모두 전도는 사람들의 방법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결실이 속히 일어나지 않을뿐만 아니라 완악한 태도로 거절하거나 철저히 무관심한 것을 보며 낙심하지만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실는지 모르기 때문에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짝지어 전도여행을 보내면서 반대하는 동네 밖에 나오거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다(10:14). 그것은 그들에게 받은 대우로 인하여 낙심하는 마음이나 마음의 상처를 다 떨어버리고 다음 마을이나 집에 갈 때에 그런 낙심을 묻혀서 가지말라는 교훈이다. 우리는 한 두 집에서 반대 받고 푸대접을 받으면 그것이 먼지가 되어 발이 무거워진다. 이런 마음을 떨어버리고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것 같이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성령께서 그런 정신을 주셔서 인도하시기를 기도하자.

 

교훈 : 예수님은 일반적인 편견 때문에 신자들이 접근을 꺼리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도 복음을 수용하고 영적인 결실을 맺을 가능성을 보신다

 

 

8 24() 태도 수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6~27).

 

때로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의 태도로 결정된다. 냉정하고 비판적이며 비우호적인 태도는 사람들을 그대로부터 떠나가게 한다. 그럴 때 그대가 전도한다면 그대의 말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극히 적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믿음은 그들을 우리에게 끌어당긴다. 그것은 우정이라는 연대감을 조성한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말로 진술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 친구는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납하며 허물없이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1. 15:21~28과 막 14:6~9을 읽어보라. 이 두 일화는 매우 다른 환경 가운데 있는 두 여인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는 냉정하고 다른 여인에게는 신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은혜로써 접근하시며 신뢰감 형성을 위해 노력하셨다고 볼 수 있는가?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4:6~9]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이 개처럼 취급하는 인종이었다. 그들이 당하는 수모를 말하여 그의 믿음을 나타낼 기회를 주셨고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다. 마가복음의 마리아는 과거의 도덕적 타락으로 지탄을 받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회심한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칭찬하여 그가 충성하는 기회를 확실하게 하셨다.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가나안인이다. 예수님은 우선 그녀의 요청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셨다. 그 대신 그녀가 끈기를 가진다면 그녀의 믿음이 자랄 것이었다. 그분은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당시의 유대 지도자 중 아무도 그같이 가난한 가나안 여인에게 하지 않았던 놀라운 말씀을 주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15:28). 그는 어떤 교사에게도 들을 수 없는 큰 칭찬을 받았다. 그녀가 얼마나 기뻤을지 그리고 그녀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유를 부은 여인은 평판이 안 좋고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며 자주 죄에 빠졌던, 그러나 용서를 받고 변화되어 새 삶을 사는 유대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할 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며 그녀의 행위를 인정해 주셨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14:9)고 선언하셨다.

 

<부가설명> 우리는 예수님 같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시선을 사람들을 바라보고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크게 생각한다. 예수님은 이런 것보다 그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셨다. 복음은 도덕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훌륭한 도덕적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사악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100% 동일한 존재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일 뿐이다. 인간의 성행(性行)이 좋고 나쁜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할 때 그 생명을 얻는다. 이 생명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고(5:24)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그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5:17). 결과로 그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6:3,4). 성도가 거룩한 행동으로 사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거하는 예수님의 생명력이 하는 것이다. 이 생명력은 가장 고상한 도덕성을 드러낸다. 성경이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사랑하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은 죄인인 채로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런 상태에 이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그 사람 안에서 성령의 생명력을 행하여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라고 하는 성경의 뜻이다. 이런 경험이 전도할 때 합당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이 경험을 갈라디아 2:20에 고백하였다. 우리의 고백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 사람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복음으로 이끌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8 25()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제시함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3~4).

 

우정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없다. 함께 어울릴 친구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우정은 영원한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적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울지라도 하나님은 단순한 어울림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정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물론 비우호적인 태도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4:15)을 말하라고 당부한다. 우정이라는 유대감은 우리가 최대한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용납을 표현하며 합당한 지점에서 그들을 칭찬할 때에 형성된다. 그래서 사람들의 단점보다 장점을 찾으려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1. 살후 1:1~4을 읽어보라. 바울이 어떤 구체적인 항목을 들어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칭찬했는지 열거해보라.

[살후1:1~4]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고, 인내와 믿음이 있음을 여러 교회에 자랑했다.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느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점을 잡아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반대였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보았다. 물론 그도 과오를 견책하고 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었다. 그가 취했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이 행한 옳은 일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엘렌 G. 화잇은 긍정적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진술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친절하고 예모 있고 부드럽고 동정적일 것 같으면 오늘날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곳에 일백 명의 사람이 진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9, 189).

 

<부가설명> 인간은 태생이 비교적인 성향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느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점을 잡아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수양(修養)과 도야(陶冶)로 많이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본질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금(鍍金)하는 것일 뿐이다.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성품이 나타난다(2:3). 이렇게 하면 비판하는 정신이나 남의 약점을 잡아내는 버릇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로 아직 육체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울의 고민처럼 지체 가운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할 때 저항하지 못하고 넘어진다(7:23). 그래서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한다. 순간마다 호흡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께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시도록(8:2) 기도하고 굴복해야 한다. 전도하게 되면 성령께서 이런 경험을 풍성하게 하도록 이끄시는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훈 : 우정만으로는 영혼을 구원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정이 없이는 더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람들의 단점보다 장점을 찾아서 그들과의 연대감을 고취해야 한다.

 

 

8 26() 용납의 기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1. 15:7과 엡 4:32을 읽어보라. 그대는 전적인 용납의 기초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용납하는 태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이다. 핵심은 친절, 불쌍히 여김, 용서이다.

 

위의 두 성경절에서 사도 바울은 서로를 용납하는 태도의 바탕을 이루는 원칙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고 용납하셨으니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상대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보라. 그대 자신과 그대가 행한 일들, 특별히 그대가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일들, 그대만 알고 있지만 혹시 다른 사람들도 안다면 정말 곤란해질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납되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어쨌든 우리를 받으셨다. 이는 우리의 선함이 아닌 그분의 선하심을 인함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

여기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있다. 진정한 용납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존재라는 이유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곧 죄의 습관을 가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가 원수였을 때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용납과 용서의 기초이다(5:6~10).

이렇게 용납과 돌봄의 관계가 형성된 다음에는 사랑으로 성경의 진리와 대면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기를 게을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영원한 진리를 나눌 만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의 태도는 네 마음대로 행동해라. 그래도 나는 너를 용납하노라는 식이 아니라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나는 너를 용서하며 대신 너에게 변화의 능력을 주겠노라는 식이었다. 그리스도의 심령과 사랑과 겸손의 태도로 제시된 성경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부가설명> 위의 설명에 용납이 어려운 이유이다. 죄 있는 그대로 용납하는데, 죄를 그대로 지속해도 되는 상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죄를 버리고 생명을 얻어서 생명력의 경험으로 예수님처럼 변화하는 경험을 원하는 용납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이런 사건이 있다. 미키 코헨은 1940년대 LA의 유명한 폭력배였다. 어느날 감리교회에 찾아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신앙고백을 했다. 교회는 그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예증이라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날이 지나면서 그가 여전히 폭력배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다. 교회가 그의 생활을 보고 수군거리고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자, 그가 왜 그런지 물었다. 그러자 교회 친구들이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에 나오면서 왜 폭력배 생활을 그대로 하는지 의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코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내 직업을 그만 둬야 한다고 말하지 안핬지요. 기독교인 영화 배우가 있고, 기독교인 운동선수가 있고, 기독교인 사업가가 있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 폭력배가 왜 문제가 됩니까? 만일 내가 내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라면 내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은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며 전도 대상을 바르게 대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기초로 서로를 용서하며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할 만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8 27() 사랑으로 제시된 진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예수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제시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상대를 위해 최선의 것을 추구한다. 사랑과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겸손하고 친절하게 제시된 진리는 일종의 사랑의 진술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다(4:12).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그분의 진리를 알고 그분의 생명을 누린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영적인 삶을 질식시키는, 숨 막히는 율법주의로 이어진다. 반대로 진리가 없는 사랑은 내용이 없는 허용적인 감상주의로 이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확실성의 바다를 표류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사랑으로 제시된 진리는 분명한 방향, 목적 그리고 확실성을 제공하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 체험으로 이어진다.

 

1. 벧전 3:15, 딤후 4:2, 3:4~5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은 성경의 진리를 제시하는 일과 겸손하고 용납하는 정신을 품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벧전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온유와 두려움과 오래 참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자비와 사랑으로 하라.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태도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다. 태도가 진를 망가지게 하지 않는 것이 균형이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절대 사랑을 진리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과 진리, 은혜와 율법 그리고 긍휼과 정직을 정교하게 결합시킨다. 베드로는 동료 신자들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벧전 3:15)라고 권면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고 그것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모든 답을 알고 우리의 신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온유와 두려움으로즉 사안의 중대함을 인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고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젊은 후배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조언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 안에서 중생한 자들을 구원한 것은 그분의 온유와 사랑이라는 점을 디도에게 상기시켰다(3:5). 우리도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우리의 주께서는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세상을 위하여 사랑과 용납의 태도로 마지막 시대의 기별을 전하는 일에 그분과 협력하라고 우리에게 권유하신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도덕정 도정이나 인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고전13:3).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는가(15:13)?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도덕과 윤리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계시한 말씀이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사람을 살려주려는 정신과 태도이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상대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영생의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영생의 생명을 얻은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은 영생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자기 몸을 내어준 이유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었다. 전도는 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멘.

 

교훈 :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진리를 전하는 것이 순리이다. 하나님은 온유와 겸손의 태도로 그리스도의 기별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8 28()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는 목자의 부드러움과 부모의 애정과 동정심이 많은 구주의 비할 데 없는 은혜가 있다. 그분은 가장 매혹적인 말로 자신이 주실 복을 표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을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셔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받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신다. 이와 같이 그분의 종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의 부요한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마음을 녹여서 굴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리들을 무미건조하게 되풀이 한다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 9~11)”(시대의 소망, 826~82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주의해야 할까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순간마다 주님께 굴복해야 한다.

 

그대의 친구가 숙모의 장례식에서 돌아와서 숙모가 하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한 교리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그 친구에게 그 주제에 대한 성경 공부를 제안하는 것이 시의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슬픈 경험에 빠져있고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다. 영혼불멸을 믿으므로 위로를 받고 있는 순간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를 화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는 상황을 고려해서 다음의 진술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악행을 살핌으로 인해 그 살피는 자의 안에 또한 악이 자라나게 되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사랑과 그 성품의 완전하심을 이야기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우리가 그런 형편에 있으면, 우리에게서 빛이 나서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복음교역자, 479).

우리는 상대의 좋은 점을 드러내어 칭찬하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태도로 대화해햐 한다. 서로 토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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