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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과 예술과 과학 교육

 

1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13

 

연구 범위 : 1:18~21, 19:1~6, 96:9, 3:6, 딤전 6, 1, 38

기억절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

 

교육에는 예술과 과학 분야도 포함된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을 배우거나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를 들어 현대 의학 또는 미술사와 관련된 성경절을 그냥 제시하면 되는가?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용적인 학문들을 지금의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 낸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에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교과서 안에서 성경절들을 취합하는 것은 구원과 구속의 목적을 가진 참교육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르게 기능하는 교육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문학에서부터 분자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가르침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와 유지자이신 하나님의 광대함과 그분의 통치권에 대한 관점을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이 유기적이고 목적으로 가득한 그분의 창조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배움으로써 우리는 어떤 학문 분야를 배워야 하는지와 그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더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을 가르쳐야 하는지와 그것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과 예술은 오류와 허무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이 없는 과학의 발전이 어떤 위험으로 돌아올지 상상해본다.

행하기 : 교회 내의 예술과 과학 교육이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습니까?

무신론을 주장하는 도구가 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물을 창작하는 예술인들이 때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의식 중에도 스스로를 우연의 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과학이 연구되고 예술 활동이 펼쳐진다면 어떤 결과들이 빚어질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창조를 부인하는 사고방식을 조심해야 합니까?

거짓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어무하게 여기게 한다.

우리 신자들 중에서 과학, 예술, 방송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충성할 때 바르게 삶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다.

 

결론 : 우리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예술적인 감각이 풍성한 사회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생의 소망을 모르는 인간 사회는 오류와 허무, 때로는 스스로를 위협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도 창조주의 능력을 인정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1129() 하나님만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모든 곳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이런 진술은 귀가 닳도록 자주 반복되어 왔다. 예를 들어 인간이 세상을 계속해서 파괴시키고 망가뜨릴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예술과 과학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임신 기간을 예로 들어보자. 생물학에 따르면 태아의 생명은 수정된 난소로부터 발생해서 9개월을 채울 때까지 성장한다. 이 기간 내내 사랑이 많은 창조주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태아가 자라는 공간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엄마의 안정적인 심장 박동이 들린다. 태아가 커지면 산모의 복부도 함께 커진다. 출산을 앞둔 산모는 태아를 항상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늘 아버지도 그분의 자녀들을 항상 인식하신다.

 

1. 1:18~21, 19:1~6, 9:6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말해주는가?

[1:18~21]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9:1~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 천연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알게 하고 경배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창조주가 계심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 6천 년이 지났고, 그 이후에 홍수로 황폐화된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능력에 대하여 반박할 수 없이 강력한 증거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증거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바울은 롬 1:18~21에서 이러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 핑계를 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만드신 세상으로부터 그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몰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경배하게 된 이 시대에 기독교 교육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시며 유지자이시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나 가정은 결국 오류로 이어질 뿐이다. 세속적인 교육은 거의 신이 없다는 가정 위에 이뤄진다. 기독교 교육은 그러한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며 신이 없다는 가정을 기초로 한 교묘한 원칙들을 수용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교육은 오류로 끝난다.

 

<부가설명> 사람들이 아무리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도 여전히 창조주는 계시고 우주를 유지하는 일을 주관하신다. 사람들은 인정하든지 부인하든지 이 은혜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창조주를 믿고 경배할 것이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종국에 가서 창조주가 계심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창조주를 부인한 결과인 그들의 존재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창조주를 부인했으니 그들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조주를 힘입어서 살며 활동하며 존재했기 때문이다. 천연계가 이것을 호흡할 때마다 증거 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증거를 무시하고 자신의 무감각하고 무지한 상태를 중심으로 창조주의 증거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은 존귀에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서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되어 사람을 아메바의 후손으로 만들었다(49:20 참고).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1:22~25). 우리가 창조주를 깨닫고 경배하는 사람이 된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비록 죄로 인해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술과 과학에서도 이런 관점을 전제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1130() 거룩함의 아름다움

 

오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분 앞에서 두려워할지어다”(96:9, 한글흠정역).

 

우리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우리가 예술 또는 그것과 관련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가르칠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정결하고 마음에 감동을 깊이 새기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그 눈이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 눈을 지으신 분이 누구신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20:12). 우리는 피조물을 경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하나님과 그분이 보여주시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배워야 한다. 타락한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게 보인다면 타락 이전의 세상은 어떠했겠는가? 이는 하나님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의 창조주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에 더 가깝게 이끌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술작품과 그분이 만드신 과학적인 경이로움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만물을 감상(感賞)하며 또한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단장하여 주신 그분의 단순하고 은은한 미()를 즐기기 원하신다. 그분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성품의 미를 더욱 사랑하신다. 그분은 꽃이 은은하고 우아한 것처럼 우리가 깨끗하고 단순한 성품을 기르기 원하신다”(정로의 계단, 85).

 

2. 3:6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아름다움이 필연적으로 선하거나 거룩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쳐주는가?(6:25, 31:30 참고)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6:25] 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사망의 세상의 아름다움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본 아름다움은 순수했다. 그러나 사망의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때때로 전혀 선하지도 거룩하지도 않다.

 

그러나 원수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왜곡하거나 남용한다. 따라서 미 또는 미의 개념이 우리를 반대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특별히 예술 분야에서 성경의 지도를 따르는 기독교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선하거나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게 해야 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의 나무들에 관하여 표현한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3:9)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정서감과 좋은 것을 먹고자 하는 감성을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는 진정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순수한 감성이 있었다.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봤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감성이 나타난 것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먹은 후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떠났고(4:18), 사망이 되었다. 나뭇잎이 시들고 대기의 신선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천연계에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주장하시고 사람들의 눈에 훼손된 천연계이지만 아름답게 보도록 하는 감성을 지니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하지 않은가? 나는 기암괴석을 보거나 굽고 일그러진 나무들을 볼 때에 장엄함과 경탄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 것고 아름답게 느끼도록 하신 하나님께서 변질 되기 전의 세상의 아름다움이 어땠겠으며 죄없는 사람의 감성이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난 눈을 얻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거룩하심을 깊이 바라보며 우리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날마다 닮아가는 삶을 이루도록 기도하자.

 

교훈 :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지만 타락한 이후의 왜곡된 세상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이 필연적으로 선하거나 거룩하지는 않다.

 

 

121() 오류의 전문가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지금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예술과 철학이 대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같이 소문난 텐트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곤 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어떤 제조업에 종사하거나 어떤 시설들을 이용하거나 특정 미디어를 소비할 때 자신의 본분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피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과 설명을 듣는다.

 

1. 딤전 6:9~10에서 바울은 무엇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가? 디모데전서 6장의 남은 부분을 읽어보라. 바울은 무엇을 추구하라고 권장하는가?

[딤전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1~2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빠지게 한다. 또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딤전 6:20에서 바울이 어떻게 거짓 지식에 대해 경고했는지 주목하라. 물론 맥락은 다르지만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 현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완전한 오류로 판명된 정보와 가르침과 신념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인간은 정말 오류의 전문가들인 것 같다.

2천 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 즉 전문가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으며 모든 별과 행성들이 그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매우 복잡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오류라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오류의 전문가들이며 그 가르침들은 명백히 거짓 지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생물학은 수십억 년 전에 신이나 어떤 목적 없이 우연하게 생명이 출현했다는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엄청난 양의 복잡하고 상세한 과학 문헌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가설명> 코페르니크스가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에도 그것이 거짓으로 매도되었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주장했을 때까지 그는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당시 과학이 그렇게 한 것이다. 천동설이 2,000년 세월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풍미했으나 이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것도 이런 경우를 벗어났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우리가 초등하교 중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지구 화성설(火成說)을 가르쳤다. 요즘은 빅뱅설이다. 도대체 누가 그것을 올바르게 안다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추측과 가설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한다. 실험한다지만 가상 실험일 뿐이다. 창조하신 분이 말씀한 것 말고는 대부분 추측과 상상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학설에 열광하고 믿는다. 훗날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판명될 때 오늘날 우리가 천동설에 관하여 가진 생각을 후세대가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참된 진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보다 거짓과 가설이 기초가 된 소위 과학을 믿고 성령으 우습게 여기는 세상이기 때문에 성경은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고 경고하였다.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따라가자.

 

교훈 : 아무리 많은 연구를 통해 체계화시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이 계시하신 진리를 배제한 인간의 지식은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122() 어리석음과 지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

 

잠언 1장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 비춰보면 진정한 기독교 교육이란 어때야 하는가?

성경은 꾸준히 우매함과 지혜를 비교한다. 잠언은 무모한 행위의 위험성을 상기시키며 어리석은 무리를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기별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간직함으로 그들에게 지혜가 풍족하기를 바라신다.

예술과 과학 분야의 학생들은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여 지식을 습득하며 그들의 학업에서 탁월성을 추구한다. 이런 분야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식과 재능 때문에 예술적인 천재성을 발휘하며 과학적인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의 지식이 옳고 그름, 선과 악, 진리와 오류를 아는 지식을 내포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예를 들어 뛰어난 기교와 재능을 가졌다고 반드시 도덕적이고 옳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이들의 삶에 대해 조금만 읽어보면 된다. 대량 살상용 생화학무기 제조에 가담한 과학자들도 고등교육을 받고 지능이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룬 업적의 결과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지식 자체는 필연적으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1. 1:7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진정한 기독교 교육의 열쇠가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는가?

우주와 우주 에너지를 연구했던 어느 무신론자 노벨상 수상자는 우주는 이해되는 것처럼 보일수록 무의미해져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지식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심지어 오류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을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가?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우주는 이해되는 것처럼 보일수록 무의미해진다는 말은 지식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고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사실로 만들 수 있으므로 오류를 만들 수 있다.

 

<부가설명> 세상의 지식과 학문은 그 자체가 선하고 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그것들은 선의 도구가 되기도하고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은 루시퍼의 교활함을 따라가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기 때문이다(4:22). 존재가 사망이므로 사고방식도 사망적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예외없이 썩어질 씨로 출생했기 때문에(벧전1:23) 그 사고방식과 행위 방식이 사망적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종교들과 도덕과 학문은 가능한 한 이것을 억제하려는 인간 노력의 일환이고 사탄은 그렇게 하므로 도덕적 선과 악이 내세를 결정하는 것처럼 그릇되게 이끌고 있으며, 세상은 그것이 선의 길인 줄 알고 인격을 도야하고 수양하여 현자와 성인의 경지에 으르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썩을 씨로 난 것이 생명의 씨로 바꾸지 않는다. 종내는 썩는 것의 결정판인 사망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존재를 성경은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한다. 성경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들은 미련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과학을 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의 과학이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때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들의 과학이다. 아멘.

 

교훈 : 인간의 지식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 아름다움과 과학적인 발견을 이뤄낸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를 배제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공허할 뿐이다.

 

 

123() 여호와께서 욥에게 대답하심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1. 욥기 38장을 읽어보라. 이것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유지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이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예술과 과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38:1~41] 너무 긴 본문이라서 몇 구절만 올린다.

[38: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 욥은 없었다. 즉 아직도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창조주가 창조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존재 이전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물질이 활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즉 물질에는 어떤 특성들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그의 고유한 에너지로 활동하도록 되어 있으며, 천연계의 운행은 철칙(鐵則)에 따라 행해지고 있으며, 이 법칙은 하나님 자신도 간섭하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거짓 과학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천연계는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종이다. 천연계는 그분의 법 안에서 그리고 그 법을 통하여 일하고 계시는 지성적 존재가 계심을 증언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천연계 가운데서 계속 일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말씀하신다”(부조와 선지자, 114).

앞에서 언급했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과학이 무신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전제 위에 연구되고 있다. 이는 과학자들이 극한의 미와 복잡성 또는 그 둘의 조합 속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보고서도 그것이 사전 계획이나 의도 없이 우연히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것은 과학이 항상 주장하는 말이다. 나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과 그것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과 복잡성은 수십억 년 전 우연한 화학적 결합이 빚어낸 작은 유기물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걸쳐 오늘날 살아 움직이고 숨쉬는 모든 것으로 진화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초자연적인 창조주라는 개념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과학이 다룰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는 과학 자체가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과학자들에 의하여 교육 과정에 삽입된 철학적인 입장이다. (사실 과학은 정반대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과 복잡성은 참으로 어떤 조물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신다고 가르친다. 이는 참기독교의 과학 교육이 일반적인 과학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나며 특별히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부가설명> 창조주가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과학이 다룰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은 소위 과학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십억 년 전에 우연히 먼지가 생겼고 아메바가 생겼고 땅이 생겼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올라가면 오늘날 자여과학이 말하는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똑같이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먼지, , 아메바 이런 것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오늘날 과학자들의 추측이지 어느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는 창조주께서 친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러므로 이름이 여호와라고 선포하셨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 시초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절대적으로 과학적이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발표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고 늘 감사한다.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께서 만물을 있으라고 하시니 비로소 만물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바르게 알지 못하는 욥에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기 어디 있었느냐?’(1:4)라고 물으신 것이다. 욥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1:2)라고 물으신 것이다. 사람들 중에 누가 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론과 주장은 모두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것이다. 사람들은 사탄의 거짓 학문에 최면이 걸려서 거짓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49:20)라는 선언에 빠진 것이다. 스스로 짐승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훈 : 과학이 창조라는 개념을 증명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개념이라고 배척하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무신론이라는 철학적인 가정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124()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과학이 수많은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면서도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천연계를 탐구하는 과학은 해답을 오직 천연계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과학은 천연계의 법칙이 항구적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세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둘 다 잘못됐다.

첫째 이유를 살피자면 과학은 자연적인 결과에 대해 자연적인 원인을 요구한다. 물론 그런 접근은 태풍의 경로를 찾는 데는 적합하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세상의 기원을 밝히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이 전적으로 초자연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자연의 불변성은 또 어떤가? 언뜻 그것은 이치에 맞는 듯하지만 롬 5:12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 과학이 마주하고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비연속적인 천연계의 환경을 가정한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연구하는 세상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실제로 다른 것을 같았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로 이어질 뿐이다.

결국 과학은 창조 세계의 중요한 측면들 곧 그 안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부인하고 최초의 세계와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물리적 불연속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세상의 기원을 오해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와 정의는 비그리스도인의 그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창조주께서 아름답게 하신 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한다. 세상은 창조주를 부인하기 때문에 자연질서에 합당하거나 인간 감성에 느낌을 줄 때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직업적인 교육자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면 어떤 습관을 길러야 할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따른 사고방식과 생활을 하여 삶이 본이 될 때 증언이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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