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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정체성의 위기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525

 

연구 범위 : 1:1~31, 5:1~7

이사야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 책의 저자였다. 아모스의 아들이며 왕족의 후손인 그는 젊은 시절(교회증언, V, 749), 즉 웃시야(아사랴, BC 790~739)의 통치 말엽, 요담의 섭정 기간 중에 선지자로 부름받았다(선지자와 왕, 305). 그 시기는 BC 750년과 739년 사이가 된다. 그의 봉사 기간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에 걸친(1:1; 이 왕들의 통치 연대에 대해서는 제3, 107을 참조하라) 적어도 60년간 계속되었다(선지자와 왕, 310). 이사야가 BC 686년에 단독 통치를 시작한 므낫세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과 므낫세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을 학살할 때 이사야가 먼저 학살당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선지자와 왕, 382; 왕하 21:16)은 그의 봉사가 BC 686년 히스기야의 사망 직후에 끝났음을 암시한다. (본교회 주석 이사야 서론에서)

 

기억절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그대가 아일랜드에서 산울타리를 따라 시골길을 운전해 간다면, 되새김질을 하며 집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는 소떼를 만나 차를 세워야 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을 모는 사람은 없지만 그 소떼는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그래서 그 주인의 우리를 찾아 들어간다.

만일 상점에서 한 소년이 엄마와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 아이는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기 엄마를 금방 알아볼 것이다.

슬프게도 유대인들은 아일랜드의 소떼 또는 엄마를 놓친 소년과 달리 자신들이 하늘 아버지이신 여호와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언약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1:2~3).

이번 주에 우리는 당신의 백성을 자신에게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관계에서 멀어진 유다 백성의 영적인 실상을 이해한다.

느끼기 :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에 감동한다.

행하기 :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유다 백성에게 느낀 실망감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1:2~4)

소와 나귀가 주인과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이 아버지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심.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1:11~15)

제물을 잡아 드리는 것은 부정한 짐승을 드리며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심.

하나님이 죄를 지은 우리와 계속 대화하시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1:18)

그분은 우리 아버지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노력에 비했을 때 우리는 그분께 어떤 결실을 드립니까?(5:4)

현재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사야 1장의 기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효자로 변화해야 한다.

 

결론 : 이사야서는 백성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한 심정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기별의 밑바탕에는 소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함께함으로 살기를 택하든지 그분께 반역함으로 멸망하든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1227() 하늘이여, 들으라! (1:1~9)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1:2).

 

이사야서는 저자(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와 기별의 출처(이상)와 화제(네 왕들이 다스릴 동안의 유다와 그 성읍 예루살렘)를 확인함으로써 간략하게 서론을 대신한다. 그 화제는 또한 이사야의 주된 청중이 당시의 그 나라 백성임을 확인시켜 준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상황과 운명에 대해 말했다.

이사야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의 왕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청중을 한정했으며, 그 책을 특정한 역사와 정치적인 사건들에 연결시켰다. 이러한 시간의 틀은 우리를 왕하 15~20장과 대하 26~32장의 사건으로 인도한다.

 

1. 1:2을 읽어보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기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와 같은 개념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기별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하라(30:19, 31:28 비교). 이것은 하늘과 땅이 정말 듣고 이해한다는 뜻이 아닌, 강조의 표현이다.

히타이트의 왕과 같은 고대 근동 지역의 왕은 약소국의 통치자들과 더불어 정치적인 조약을 체결할 때, 신들을 증인으로 불러 위반 사항이 생길 경우 형벌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왕 중의 왕께서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다른 신들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그분은 유일하신 참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셨다(4:26 참고).

 

<부가설명>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므로 당신께서 친히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 것을 강하게 나타내셨다. 자식된 이스라엘 백성은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그러나 사랑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그드을 불쌍히 보시고 부디 아버지의 말을 들으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신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한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강하게 소개하시고 친히 늘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식된 본분을 드러내어야 하고 그러려면 효도하는 자식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불효막심해서 언제나 아버지를 근심하게 하는 자식이 되어서야 하겠는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분이(9:6)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순종하고 충성하는 아들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시고 그분을 통하여 아들의 신분을 얻은 우리에게도 순종하고 충성하는 효성스러운 아들들이 되라고 하신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우려 듣고 효도하는 자녀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살자.

 

교훈 :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기별을 전하시며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실 정도로 그 기별의 진실성을 강조하신다.

 

 

1228() 부패한 의식주의 (1:10~17)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10).

 

1. 1:10을 읽어보라.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태가 그들과 같았다.

 

2. 1:11~15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왜 유다 백성이 드리는 경배를 거절하시는가?

[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 하나님께 예배는 하는데 완전히 형식이었고 그들의 삶은 예배와 전혀 관계없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며 기도하기 위해 들었던 손에 피가 가득하였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억압함으로 죄를 지었다(1:15, 58:3~4).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언약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학대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을 경멸하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는 곧 하나님에 대한 죄였다.

물론 하나님은 친히 예배를 위한 의식(儀式)을 제정하셨다(1~6).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예배에 합당한 장소로 지정하셨다(왕상 8:10~11). 그러나 의식들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과 맺은 언약의 맥락 안에서만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는 성소 또는 성전에 거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행해졌던 의식들과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해 신실함을 나타낼 때에만 유효했다. 언약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괴롭히는 불의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은 채 희생을 드리는 자들은 거짓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희생은 무효일 뿐더러 심지어 죄악이었다. 제사를 드리는 동작은 충실해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그들 스스로가 언약을 파기했음을 증명했다.

 

<부가설명> 이렇게 제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제사로 용서받았다고 헛되게 믿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꼬집어서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7:9,10). 유대인들은 악을 행하고 성전에 와서 제사하면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고도 제사로 용서받았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상태를 잘 보여주는 상태이다. 우리도 안식일에 예배하고 예배당을 떠나면서 곧 성경과 상관없는 생각과 언어를 사용하며 활동하지 않는가? 자신이 엿새동안 하는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지 항상 물어보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사야가 지적한 이런 상태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제사와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은 제사없이 악을 행하는 것보다 더 악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을 잘 반성하고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고후13:8) 삶을 이루도록 주님께 간구하자.

 

교훈 :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유다 백성은 선을 행함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했지만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학대함으로써 모든 제사를 헛되게 했다.

 

 

1229() 용서에 관한 변론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1:18을 반복해서 읽어보라.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 앞뒤 구절도 읽어보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인가?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 하나님의 사랑을 생활에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력이 그렇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을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피고인 유다 백성에게 계약 위반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시면서(1:2~15) 개혁하라고 호소하신다(16~17). 이 호소는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형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에게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분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자기 백성을 여전히 설득하기를 바라시며, 그들이 얼마나 타락해 있든지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 붉은색인가? 왜냐하면 백성의 손에 가 묻어있기 때문이다(15). 흰색은 분명히 피흘림의 죄가 없는 순결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말은 다윗 왕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사용한 언어이다(51:7, 14). 1:18에 나오는 하나님의 논증은 자신의 백성을 용서해주겠다는 일종의 약속이다!

 

3. 용서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자신의 길을 바꾸기 위한 근거로 어떻게 작용하는가?(1:1844:22을 비교해보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은 그들이 담대히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전하는 날카로운 경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그분의 백성을 거절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용서하리라는 그분의 약속은 스스로 깨끗해지라는 호소의 든든한 지지와 근거가 된다(1:16~17). 그분의 용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의 능력으로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렘 31:31~34에서 예언된 새 언약의 씨앗들을 본다. 새 언약 안에서의 용서는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붉은색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용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를 갖춤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모든 것을 받을 준비가 된다.

 

<부가설명> 회개와 용서는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회개가 먼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용서할 당사자가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으면 회개는 용서를 불러내지 못한다. 용서할 자가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회개할 자는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내어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용서가 회개보다 먼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이 세상에 용서를 선포하신 표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고 겸손하게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 자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선포되 않았으면 아담의 후손들은 아무도 회개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먼저 말씀 하나님께서 독생자가 되셔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죄를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므로 우리가 넉넉하게 회개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것이 사랑이다. 은혜이다. 아멘.

 

교훈 :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리라고 약속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설득하시며 돌이키고자 노력하신다.

 

 

1230() 먹을 것인가 먹힐 것인가 (1:19~31)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19~20).

 

1. 1:19~31을 읽어보라.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어떤 주제가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가?

[1:19~31]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 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생명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고통과 사망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와 같은 사상이 성경 전반에 계시되었다.

 

1:19~20의 논리적인 구조를 주목하라. 그 백성이 하나님께 자원하여 순종하면 그들은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다(19). 그러나 용서와 회복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분을 배반하면 칼에 먹힐 것이다(20). 선택은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은 조건적인 복과 저주를 포함하고 있다.

이사야 1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체결할 때 했던 말(30:19~20)을 되풀이하여 적용한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30:19).

모세의 말을 살펴보고 거기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생명이나 사망, 복이나 저주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왜 절충의 여지가 없는가?

모세의 이 말들은 신명기 27~30장에 나오는 언약(26장과 비교)을 마무리하면서 일련의 경고와 복과 저주를 요약하고 있다. 이 언약의 요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언급하고, 언약이 유지되기 위해 준수해야 할 조건 또는 규정(계명)에 대해 진술하며, 증인들을 언급하고, 그들이 언약의 조건을 지킬 때와 어겼을 때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경고하는 복과 저주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히타이트와 같은 이방 국가에서 정치적인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같은 순서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언약 관계의 성격과 그 결과에 대해 가능한 한 구속력을 갖게 하고자 이러한 언약의 형태를 취하셨다. 언약의 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나, 만일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이전보다 더 못 할 것이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친히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그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맺은 생명 언약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은 회수하실 수밖에 없다. 아담은 언약을 어겼다(6:7).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생명, 영생하는 그 생명을 하나님께 반납하게 되었고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당장 존재자체를 잃을 것이지만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고 자손들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할 기회를 허락하셔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는 희생으로 뱀의 머리를 상할 때에 아담의 자손들은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조치해주셔서 우리는 생명과 저주라는 두 사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립지대에서 생명이나 저주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사망의 저주에 빠져 있는데, 거기서 나와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생명을 얻지 않으면 사망의 저주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마치 사람이 사망도 생명도 아닌 상태에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스스로 택할 때 택한 상태에 이른다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오해이다. 이런 오해하는 사람이 이외로 많다. 바른 이해로 확실한 진리에 서도록 하자.

 

교훈 :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 앞에 제시된 결과는 분명하다. 순종에는 생명과 복이, 불순종에는 사망과 저주가 따른다.

 

 

1231() 불길한 사랑의 노래 (5:1~7)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5:1).

 

1. 5:1~7에 나오는 노래를 읽어보라.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5:1~7]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유대인들의 상태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은혜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부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7절에서 설명하신다. 그분은 이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들의 상태를 인정하도록 도와주셨다. 하나님은 다윗 왕에게 접근하실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삼하 12:1~13 참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의 노래라고 부르심으로 백성을 향한 그분의 동기를 나타내셨다. 그들과 그분의 관계는 그분의 성품 곧 사랑에서 비롯된다(요일 4:8). 그분은 사랑의 반응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바라던 포도대신에 히브리어로 역겨운 것을 뜻하는 들포도가 맺혔다.

5:4에서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5:5~6).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분의 보호를 제거하고 우리를 파괴함으로 우리를 그분으로부터 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끈기 있게 용서받을 기회를 제공하신다(벧후 3:9 참고). 그분은 그분께 반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계속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그분은 어떤 응답의 요청도 즉각 거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지하고 죄로 말미암아 속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강제하시지 않고 대신 우리의 선택을 인정하시며 우리가 있고자 하는 자리에 머물도록 허용하신다(22:11 참고). 그러나 성령을 통해 호소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계속 거절하면 우리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게 된다(12:31~32).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6:4~6). 하나님이 그토록 하실 일이 많은 이유는 우리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의 자유와 선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은 결코 없다. 자유는 생명이 있을 동안에 할 수 있는 지극히 제한된 것인데,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유를 말하면서 사람들이 중립지대에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인생에게 중립은 없다. 이미 어느 편에 속해 있을 뿐인데, 속해 있는 쪽밖에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선택도 자유도 없다. 사람은 존재와 생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나는 자유가 없고, 출생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존재가 되어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는다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결론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조치를 해주지 않았으면 생명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감사하고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호소에 반응하는 한 우리를 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성령의 음성에 거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11()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4의 문맥 속에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를 잃고 그들의 이해력은 왜곡되어 버렸다. 그들은 원시(遠視)치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옛 죄의 씻어버림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갖고 있던 자유와 확신과 행복의 기억을 마음에서 지워 버리고자 애쓰면서 어둠 속에서 초조하고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파렴치하고 무모한 죄악 속으로 뛰어들어 미친 짓을 자행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는 정반대 편에 자신들을 두었다. 그리고는 이미 그들 위에 있는 죄를 더 깊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참소하는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 하나님을 자비도 용서도 없는 분으로 나타냈다”(화잇주석, 1: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씻을 수 있습니까?(1:16) 그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2:12~13 참고)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스스로 씻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노래를 어떻게 확대하여 적용하셨습니까?(21:33~45, 12:1~12, 20:9~19) 거기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을 위한 어떤 교훈이 담겨 있습니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두 아들의 태도와 포도원을 세로 빌린 악한 농부의 비유로 확대하여 적용하셨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용서와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일으키시는 변화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옵니까? 변화가 오고 나서 용서가 옵니까, 아니면 용서가 있고 나서 변화가 옵니까? 어느 것이 먼저 오느냐 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당연히 용서가 먼저이다. 용서가 없으면 하나님의 용납이 없고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당연히 변화하지 못한다. 변화는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력의 활동의 결과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정반대 편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죄의 지배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기회를 악을 자행하는 기회로 삼았다.

 

요약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잊고, 주어진 복을 당연시할 때, 그들이 그분과의 언약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분은 자비롭게도 그들의 상태를 지적하시고, 그분의 보호를 거부하여 이르러 온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 경고하시며, 그분께 나아와 고침과 정결함을 받으라고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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