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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그대의 세계가 무너질 때

 

116일 안식일

일몰오후 538

 

연구 범위 : 7:1~14

 

기억절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7:9).

 

어느 안식일, 예배를 마친 코니와 로이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고에 들어설 때 키우던 닭이 마당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장 속에 있어야 할 애완용 새들은 밖에 나와 있었다. 재빨리 살펴보니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웃집 작은 강아지 베토벤이 그 집 마당에서 뛰쳐나와 연못가에서 데이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데이지는 알을 잘 낳는 흰 깃털 꼬리를 가진 암탉이었다. 코니는 데이지를 구해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귀여운 암탉은 목이 물렸기 때문에 곧 죽고 말았다. 코니는 마당에 주저앉아 죽은 암탉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다른 동물도 크게 신경이 예민해졌다. 웨들스워드라고 이름 붙인 흰 오리는 코니가 암탉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코니가 암탉을 죽인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후 몇 주 동안 코니를 볼 때면 거칠게 공격하고 강한 부리로 아프게 쪼아댔다. 때로 우리는 누가 나의 친구이고 적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유다의 한 왕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가 왜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임을 배운다.

느끼기 :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행하기 : 어려움이 닥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도움보다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왕하 16:7~9)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앗수르 왕을 의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확실해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우리의 삶이 굳게 서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7:9)

하나님을 신뢰할 때 신앙이 굳게 되고 영생의 소망이 확실해진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라는 제의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7:11~12)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국이 강해보인 것이다.

임마누엘이라는 아이의 탄생은 그 당시 어떤 의미였을까요?(7:14)

하나님께서 유다를 돌보신다는 의미였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뜻오 있다.

 

결론 :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세상은 거의 확실해 보이는 것들에 의존하지만 우리는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과 귀를 활짝 열고 그분의 뜻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110() 북쪽에서 몰려오는 위험 (7:1~9)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어떤 사람이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7:2).

 

1. 아하스 왕이 그의 통치 초기에 직면했던 무서운 위기는 무엇이었는가?(왕하 15:37~38, 16:5~6, 7:1~2)

[왕하15:37,3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16:5,6] 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6 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7:1,2]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하는 위기였다.

 

북방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수리아(아람)는 연합하여 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유다를 침공하려 하였다. 이 일은 유다가 에돔과 블레셋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을 때에 일어났다. 과거에도 유다는 이스라엘과 싸웠으나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동맹은 압도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스라엘과 수리아는 계속 그들을 위협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오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왕하 15:19에는 로 불렸음)의 막강한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도 함께 동맹을 맺자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스라엘과 수리아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적대관계를 접고 더 큰 위험을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만일 그들이 유다를 정복하고 그곳에 꼭두각시 통치자를 세울 수 있다면(7:5~6), 유다의 자원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하스는 그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을 때에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가?(왕하 16:7~9, 대하 28:16)

아하스는 하나님만이 그와 그의 나라를 구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심을 인식하기보다는 그의 적들의 적인 디글랏 빌레셀 3세와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앗수르 왕은 수리아와 이스라엘을 대항하도록 도와달라는 아하스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디글랏 빌레셀은 아하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리아를 침공할 좋은 구실을 얻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왕하 16:9).

수리아와 이스라엘의 동맹 세력은 무너졌다. 짧은 기간 동안 아하스는 유다를 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하스의 이러한 행동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때까지 있었던 유다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다(왕하 16:3~4, 대하 28:2~4 참고).

 

<부가설명> 아하스의 통치를 보면 역대 유다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므낫세가 악의 정점을 찍었지만, 므낫세는 나중에 회개했다. 그러나 아하스는 회개한 기록이 없다. 그는 성전 제단을 다메섹 신전의 제단 규모로 바꾸었고 아들을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 악을 저질렀다. 그러고도 이사야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아하스만 그렇게 악할까?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현실적으로 눈앞에 압박하는 위기를 보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인간적 대처를 하는 우리의 상태도 아하스가 생각하는 것과 과히 구별될까 하는 생각을 가슴에 치받는다. 눈앞에 닥치는 현실적 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상태를 반성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으로 반성해도 막상 그 위기가 현실적으로 눈앞에 닥치면 육신이 약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우리의 상태가 아닌가? 교과 저자의 말대로 아하스가 그렇게 된 것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되는 과정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호흡마다 걸음마다 주님 편에 서도록 훈련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를 주장하셔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에 예수님께 굴복하는 삶이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교훈 : 하나님은 악한 왕 아하스에게도 이사야를 보내어 용기를 주셨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보다 다른 나라의 왕을 의지함으로써 그릇된 선택의 예가 되었다.

 

 

111() 저지하려 하심 (7:3~9)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7:3).

 

아하스가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적인 선택을 저울질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아하스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계셨다. 아하스를 연단시키고 그에게 곤경이 이르도록 허락하셔서 그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대하 28:5, 19). 더군다나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는 논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으나, 하나님은 그 일이 유다 왕국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아셨다. 즉 그 나라는 이제 이방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게 설득하려고 이사야를 보내어 그의 계획을 저지하고자 하셨다. 마침 왕은 포위에 대비하여 예루살렘의 물 공급을 조사하고 있었다.

 

1.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는가?(7:3)

[7: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 스알야숩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별의 상징이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다.

 

이사야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그의 아들을 소개했을 때, 아하스는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누구의 남은 자란 말인가? 무엇으로부터 돌아온단 말인가? 그 소년의 아버지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 이름은 마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가리라는 예언의 기별처럼 들렸다. 아니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인가?(‘돌아오다라는 동사는 회개의 의미도 담고 있음)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주신 기별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이다! 죄로부터 돌아서지 아니하면 포로로 잡혀 갈 것이고, 그 후에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결정은 너의 몫이다.”

 

2. 왕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기별을 주셨는가?(7:4~9)

[7:4~9]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이스라엘과 아람의 침공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로 가라는 기별을 주셨다.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위험은 지나가고 유다는 위기를 넘길 것이었다. 아하스는 그들의 힘을 크게 보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7:4)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서기 위해서 그에게 믿음이 필요했다(7:9). 히브리어로 믿다라는 말과 서다라는 말은 진리’, ‘아멘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그는 믿음을 주기 위해 믿어야 했고, 신뢰를 주기 위해 신뢰해야 했다.

 

<부가설명> 아하스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별을 직접들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현실적 판단을 따랐고 선지자의 기별을 듣지 않았다. 오늘날 재림교회 현실은 어떤가? 선지자가 조사심판에 대하여 확실한 기별을 전했는데, 국제적 현실을 바라보는 인간적 시각으로 그것을 믿지 않는 풍조가 재림교회 안에 번지고 있다. 므낫세가 이사야를 죽인 것처럼 오늘 재림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므낫세의 일을 하고 있지 않나하는 생까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예언한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도 연기 나는 부지깽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와 비밀 조직들의 활동이라는 것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베가와 르신일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증언의 기별에 귀를 기울이고 확실한 말씀 진리의 반석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교훈 : 인간의 눈에 커 보이는 장애도 하나님의 눈에는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보다 더 크시다.

 

 

112() 또 다른 기회 (7:10~13)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7:13).

 

아하스는 이사야의 초청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셔서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7:11) 한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류에게 주어졌던 가장 위대한 믿음으로의 초대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당신의 제의에 대해서 인간 통치자들처럼 나라의 절반까지’(5:6, 7:2, 6:23 참고)라는 관대함의 상한선도 정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한 악한 왕이 오직 믿기만 한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기꺼이 비워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다. 아하스는 금과 은으로 덮인 산이나 지중해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곡식을 징조로 구할 수도 있었다.

 

1. 그런데 아하스는 왜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반응했는가?(7:12)

[7: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핑계였다.

 

얼핏 보기엔, 아하스의 대답은 경건하고 공손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수백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할 때처럼(17:2, 6:16)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와 다른 점은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을 시험해보라고 허락하셨다는 것이었다(비교, 3:10). 하나님께 다함없이 풍성한 선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믿음을 몰아내고 마음문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말았다.

 

2. 7:13에서 이사야는 뭐라고 말했는가?

[7: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분을 괴롭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분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가장 안타까운 요소는 이사야가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할 때에는 네 하나님’(11)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점이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한 제안을 거절한 것은 마치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한 것과 같았다. 여호와는 이사야의 하나님이시지 아하스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자기 마음에 흡족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려고 한다. 그것은 보기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아도 실은 자기를 공경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과시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믿음이 있고 헌신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을 교회가 하면 삐친다. 협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나이다라는 식으로 대한다.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정직하고 면밀하게 살펴서 이런 의식을 회개하고 진정으로 굴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험해보라고 하시면 시험하면 된다. 내가 스스로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해보라고 친히 말씀하시니 말씀대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많은 이유가 있고 이론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사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말라고 하시면 안 하면 된다. 아주 단순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둥, 이것은 옛날 시대의 기별이라는 둥, 이렇게 주장한다. 들으면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다 우상 숭배가 아닐까?

 

교훈 :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은 결코 그분께 괴로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지 않는 것이 그분께 괴로움이 된다.

 

 

113() 아들의 징조 (7:14)

 

스올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은 징조를 구하라는 제안도 아하스를 감동시키지 못했다(7:11).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한 징조를 제시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것이 신적인 상상력만으로 착안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리라고 기대한다(55:9, 고전 2:9 비교).

 

1.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징조는 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를 임신한 젊은 여인과 그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이 징조가 될 수 있는가? 7:14에 등장하는 여자는 누구이며 그 아이는 누구인가?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그 여자는 예언 성취상으로 동정녀 마리아이다.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 어디에서도 이 중요한 징조의 성취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만 기초하여 그 성취의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처녀는 결혼 연령에 있는 젊은 여인을 가리키므로 많은 사람은 그녀가 예루살렘에 사는 결혼한 여인, ‘어쩌면 이사야의 아내가 아닐까하고 추정한다. 이사야 8:3에 이사야의 아내(‘선지자의 아내또는 여선지자로 읽을 수 있음)가 아들을 낳은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7:3, 8:18 참고). 그러나 그 아들의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8:1~4)이지 임마누엘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리라(7:16, 8:4)는 징조는 매우 비슷하다.

2. 어떤 이들은 임마누엘이 아하스에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히스기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히스기야에게 적용한 곳은 없다.

3. ‘임마누엘은 좀 신비스럽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번역되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는 이사야 9장과 11장에서 예언된 특별한 아들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비록 선한 왕이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9:6)이새의 뿌리”(11:10)라는 고귀한 묘사를 그에게 돌리기에는 과하다.

4.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불법적인 관계를 통해 출산한 사생아일 수도 있다(22:20~21 참고). 하나님이 그러한 아이를 징조로 주셔서 믿음을 고취시키고자 하실 리는 없다. 한편 신약에 따르면 정혼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시다(2:21~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9:6, 3:17), 이새의 이요 뿌리이시다(11:1, 10, 22:16). 아하스에게 예언적인 성취의 시의성을 증명했던 이전의 임마누엘은 어쩌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4:4)셨던 것과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의 임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세상에 오실 때, 국제 사정이 아하스 왕 때와 비슷했을까? 임마누엘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성소라는 말이다(25:8).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아하스 당시에는 기록상으로 이런 아들이 태어난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예언으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 처녀라고 번역한 말이 알마인데, ‘젊은 여자라는 뜻이다. 반드시 처녀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처녀라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처녀만을 뜻하는 말은 베툴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23에 마태가 기록할 때 처녀를 헬라어 파르데노스처녀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7:14알마가 처녀라고 믿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 탄생할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들에게 왕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의 봉신국(封臣國)이었을 뿐이다. 아하스가 앗수르의 봉신국으로 전락한 사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사야의 권고를 받아서 유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전적으로 굴복했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 지구는 현재 사탄이 통치한다. 그래도 우리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성하면 그날 영원한 세계에서 진정으로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산 자의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로 살아갈 것이다.

 

교훈 : 7:14에 나오는 임마누엘이 당시에 누구였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셨다.

 

 

114()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1).

 

이사야의 아들들의 이름처럼(스알야숩: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마헬살랄하스바스: 노략이 신속함), 임마누엘이란 이름에도 뜻이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인데,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다른 히브리 이름들과 같이 이 이름에도 동사가 빠져 있는데, ‘있다라는 동사를 더해야 한다. 그래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8:10 참고)로 번역해야 한다. ‘예수라는 그리스식 이름도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의 단축형인데 여기서는 여호와구원이라는 말에 이다를 덧붙여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 된다. ‘이사야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추상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어떤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일종의 주장이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약속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분이 우리 모든 것에 동참하시고 보증이 되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보증과 위안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시련과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라고 했다.

하나님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43:2)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 사람들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그들과 함께 계셨다(3:23~25). 야곱이 날이 밝도록 씨름하던 고뇌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야곱의 팔 안에,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계셨다(32:24~30).

비록 육신의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그들의 경험을 겪으신다. 폭도들이 스데반을 정죄할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나님 우편에 서’(7:55) 계셨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1:3). 그러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왜 예수님은 서 계셨는가? 모리스 벤덴의 말처럼 예수님은 도저히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다!’ ”로이 게인, 하나님의 허물 많은 영웅들, 리뷰 앤드 헤럴드, 1996, 66.

 

<부가설명> 임마누엘은 성소제도로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어 하신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고 싶은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된 우리가 죄인, 곧 사망의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순결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만날 때에는 소멸하는 불이 되신다(12:29). 그러므로 우리를 속죄하여 정결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함께 거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의 사망을 처리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이렇게 하는 과정을 구속 사업이라고 한다. 그때는 우리가 다 이긴자들이 된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긴 자들이 된다. 그때 우리는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산 자의 땅에 거할 것이다(27:13). 그곳이 새 하늘 새 땅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계시록은 가르친다(21:3). 임마누엘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죄와 사망이 의와 생명이 되어 주님을 찬양하며 그곳에 있도록 하신 주님께 감사하면 경배할 것이다. 지금 그 훈련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아멘.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15()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나타났다.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하심의 모습이며 그의 영광의 광채이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려고 오셨다”(시대의 소망, 19).

만일 아하스가 이 기별을 하늘에서 온 기별로 받아들였다면 유다 나라에는 행복이 이르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물질의 힘에 의지하기로 결정하고 이방인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는 절망 중에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기별을 보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왕하 16:7). 그는 이 요청과 함께 왕의 보고와 성전 곳간에서 값진 예물을 보냈다”(선지자와 왕, 3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것은 적절한 일입니까? 그런 시도에는 어떤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습니까?

성경과 일치하는 상태에서는 가능하다. 지금은 성경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답을 얻는 것이 성경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하스의 말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하면 그것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할 때 한계에 이른다(2:22).

 

러시아의 작가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친구에게 이런 글을 보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은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라는 것과 삶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러한 진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에서는 틀린 것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행복한 중에 영생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약 :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왕 아하스를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으로 이끄셨습니다.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오직 거룩한 지혜로 고안해 낼 수 있는 징조를 제안하셨으나, 그는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그 이유를 설명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조차도 거부했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지원자로 앗수르 왕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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