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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어려운 길

1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6분

● 연구 범위 : 사 7:14~25, 8:1~22.

● 기억절 :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뉴욕 할렘가의 한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는데, 한 시각장애인 소녀가 4층 창틀에 앉아 있었다. 소방관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사다리 트럭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잘 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그물로 뛰어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그 소녀의 아버지가 도착하여 메가폰을 들고 자기의 지시를 따라 그물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소녀는 뛰어내렸고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친 데도, 삔 데도 없었다. 소녀는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버지가 최선이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신뢰했다.”―Edited by Michael P. Green, 1500 Illustrations for Biblical Preaching, p. 135.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최선의 것을 바라시며 그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처음에 제시하신 잔잔하고 부드러운 길을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굉음 같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셔야 하였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할 대상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눈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행하기 : 현대적인 거짓 영의 활동이나 주술을 배척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증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➋ 위기의 상황에서 아하스는 누구를 믿었습니까? 그가 믿어야 할 분은 누구였습니까?(대하 28:16)
※ 앗수르 왕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➌ 우리는 앗수르 왕을 의지한 아하스의 선택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대하 28:20, 고후 4:18)
※ 우리는 인간을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➍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사 8:12~13)
※ 세상의 것은 공포, 즉 무서움이고 하나님은 경외하는 존경에서 나오는 외경심이다. 
➎ 참선지자의 증언을 거절함으로써 오늘날 세상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까?(사 8:19~20)
※ 강신술적 위험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귀신을 섬기고 있다. 
➏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짓 영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증거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결론 : 이사야서는 아하스의 불신에 대한 경고뿐 아니라 그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까지 예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소망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우리도 아하스가 맞이했던 최후를 모면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1월 17일(일) 예언이 성취됨 (사 7:14~16)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사 7:15).

사 7:14~16에서 임마누엘은 아하스가 직면한 진퇴양난의 상황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임마누엘이 자라서 다른 종류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기 전에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사 7:16) 될 것이었다.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세력이 곧 소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1~2, 4~9절 참고)은 거듭 반복된다.

1. 이사야는 왜 ‘엉긴 젖과 꿀’에 대해 언급했을까?(사 7:15).
[사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답: 유다의 들판이 정복군에게 점령당할 것이기 때문에 농사한 곡식을 식량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래도 굶지 않고 생존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신 것이다. 

유다의 곡식과 들판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될 것이었다(23~25절). 그래서 당시의 임마누엘을 포함하여(14~15절)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유목민의 식사를 해야 할 것이었다(21~22절). 그들은 궁핍해질 것이지만 대신 생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2.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왕하 15:29~30, 16:7~9, 대상 5:6, 26).
[왕하15:29,30]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16:7~9]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대상5:6,26] 그의 아들은 브에라이니 그는 르우벤 자손의 지도자로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로잡힌 자라/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답: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정복당할 때에 성취되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734년경에 주어졌다. 아하스의 뇌물을 받은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어차피 하려 했던 일을 단행했다. 그는 북방의 동맹을 붕괴시켰고, 갈릴리와 요단강 건너편 북방 이스라엘의 지역을 정복했으며, 인구의 일부를 이주시킨 다음, 그 영토를 앗수르의 도(道)에 편입시켰다(기원전 734~733년).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은 베가 왕이 살해당한 후 호세아가 앗수르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자 추방을 면했다. 기원전 733~732년에 디글랏 빌레셀은 수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고 앗수르의 도(道)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사야가 예언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732년까지 아하스를 위협했던 두 나라는 확실하게 멸망했다. 기원전 727년에 살만에셀 5세가 디글랏 빌레셀 3세를 대신하여 즉위한 직후에 이스라엘의 왕 호세아는 앗수르를 배반함으로써 정치적인 자살 행위를 저질렀다.
앗수르는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수천 명을 메소포타미아와 메대로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은 결국 그 지방의 주민으로 흡수되어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사 7:8 참고; 65년 만에 에브라임은 더 이상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다의 원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아하스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요점은 이것은 어차피 벌어질 일이기 때문에 앗수르에게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부가설명>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르다. 때때로 정세를 살피고 사회적 상태를 보면서 예언을 거기 적용하여 멋진 해석을 했어도 완전히 틀린 해석을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해석을 공개하고 주장했다면, 그런 해석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틀렸을 때 그것을 곧 시정하고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공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서 그렇게 하고도 아무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않은가? 우리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한다. 사회현상에 맞추어 예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언에 맞도록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이 이룰 때에’ 믿게 하려고 미리 말씀하셨다고 가르치셨다(요13:19, 14:29). 예언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를 통하여 앗수르가 어떻게 될 것이며, 북방 이스라엘과 아람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연대를 말씀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곧 망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말씀하셨다. 65년을 살지 못할 아하스에게는 그것이 먼 미래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는 당장 자기 통치 기간에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가가 되어서 성경을 이야기하는데 그 해석이 맞을는지 틀린는지는 지내봐야 알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경우든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걸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예언대로 유다의 적들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하스가 앗수르에 의지하지 않았어도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었다.


1월 18일(월) 예견된 결과들 (사 7:17~25)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대하 28:20).

1. 사 7:17~25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그 땅에 일어날 일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결과에 대해 우리가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7:17~25]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

답: 그 땅이 가시와 찔레가 나는 땅이 될 것이며 소와 양이 짓밟는 땅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놀랄 이유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께로 돌아와 충성하라고 거듭거듭 초청의 기별을 보내셨다. 선지자들의 호소는 부드러웠고 그들이 백성 앞에 서서 회개와 개혁을 열렬히 권할 때에 그들의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선지자와 왕, 325).
믿음보다는 겁이 많았던 아하스에게 수리아와 이스라엘이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움을 받기 위해 동맹을 맺은 앗수르가 결국 이전의 수리아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원수가 되리라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한량없는 구원을 거절함으로써 아하스의 멸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아하스가 자신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9). 아하스는 어떻게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북방의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유다는 존중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앗수르 왕들의 연대기 외의 문헌들을 보면, 위세를 떨치려는 그들의 욕망은 거의 만족할 줄을 몰랐다.

2. 왕하 16:10~18과 대하 28:20~25을 읽어보라. 아하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영적인 원칙을 보게 되는가? 우리가 그의 행위에 놀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왕하16:10~18]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대하28:20~25]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답: 아하스는 이방 신의 제단을 하나님의 성전에 만들어놓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부수고 마음대로 고쳤다. 결국 그는 믿었던 왕에게 공격당했다. 그가 선택한 결과를 그가 거둔 것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대하 28:20~23은 아하스가 여호와께 의지하는 대신에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부가설명> 보이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오관을 통하여 당장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숨은 속임수를 알지 못한다. 그 속임수는 역시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속이는 자들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구체화 하고 보면 세상에 있는 보이는 것들도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속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이는 잠깐인 것을 이기는 믿음을 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역사적인 사건,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소망으로 살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뿐만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롬8:24,25). 하나님이 약속하신 보이지 않는 것이 소망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아하스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달받았으나 보이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잃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교훈 : 하나님의 애정어린 조언과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월 19일(화) 이름에 담긴 의미 (사 8:1~10)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 8:3).

그대가 이사야의 둘째 아이와 축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마헬살랄하스바스야, 공 이쪽으로 보내!”하는 사이에 그대는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런데 그 긴 이름보다 이름의 뜻은 더 길다. ‘노획물은 신속하고 전리품은 빠르다,’ 또는 ‘빨리 약탈하고, 서둘러 노획하라.’

1. 그 이름이 담긴 기별은 분명히 신속한 정복을 의미하는데, 누가 누구를 정복한다는 뜻인가?(사 8:4).
[사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답: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아람을 정복할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유다의 피해도 포함됐다.

사 8:1~10은 7장의 기별을 보완해 준다. 아이가 어떤 단계에 이르기 전에 앗수르는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수도에서 전리품을 취할 것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보증의 기별을 거절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잔잔한 실로아 물결로 대표되던 유다는 유브라데 강의 흉용하고 창일한 물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막강한 세력에 압도될 것이었다. 아하스가 앗수르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사야의 아들들의 이름은 북방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다도 가리킨다. ‘노획물이 신속하고 전리품이 빠르다,’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그럼에도 어떻게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는가? 비록 앗수르가 임마누엘의 땅에 편만할지라도(사 8:8),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10절)는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에 스며있다. 곧 유다와 그 밖의 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심판이 임할 텐데 그것은 전쟁, 고난, 포로의 형태로 이르러 올 것이고,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2. 이사야는 왜 자기 아이의 이름이 합법적으로 등재된 사실과 아내와의 부부관계에 대해 언급하는가?(사 8:1~3).
[사8: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답: 예언이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 아들의 출생 시점은 징조의 핵심 부분이다. 그 아이가 잉태되어 태어나서부터 초기 성장 과정을 거쳐 엄마, 아빠를 부를 줄 알기 전에 앗수르가 수리아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었다(사 8:4). 이사야는 그 아이를 임신하기도 전에 그 이름을 등재함으로 그 아이와 그 이름을 향후 일어날 사건들에 의해 증명될 공적인 예언으로 삼았다.

<부가설명> 아하스와 유대 국민들의 답답한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가족 사항을 통하여 기별을 전하셨다. 선지자는 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일이 어렵더라도 전적으로 순복하고 수행했다.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통하여 기별을 나타내셨고 또 뒤에는 아내가 죽은 일을 통하여 기별을 전했다. 그래도 유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이 잘못 걷기 시작하고 그런 수렁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의 흐름이 돌아오지 못할 자리로 줄달음을 치는 것 같다. 우리는 진리의 바른 흐름을 따라 흐르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키고(고후10:5), 예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는 경험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굴복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신자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이사야의 아들들에게 그들의 이름과 삶은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기별이 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기별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월 20일(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사 8:11~15)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2~13).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대공황으로 낙담한 국민들에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했다. 낙심한 백성을 향한 이사야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훈계하셨다(사 8:12~13). 이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예를 들어, 계 14:6~12에서 세 천사가 전 세계에 선포하는 기별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짐승의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비추어 볼 때 그분을 ‘두려워하라’는 개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마 22:37)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답: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믿고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주의 궁극적인 주권자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이긴다. 만일 그분이 우리 편이시라면,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배반함으로 그분의 반대편이 된다면, 달아나봤자 숨을 곳이 없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다음의 성경절과 모순되지 않는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敬畏)를 뜻하는 말이다. 경외는 공경할 경자와 두려워할 외자이다. 공경해서 두려워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공포(恐怖)가 아니다. 

두려움에도 종류가 있다. 만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친구이고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혹시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능력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기에 존경하는 의미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부가설명> 공포(恐怖)와 경외(敬畏)는 전혀 다르다. 두렵다는 말은 같이 붙었지만 그것은 무서워 벌벌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공경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그 앞에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말을 함부로 천한 말을 쓰지 않고 존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 앞에 설 때에 몸가짐과 언어 활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분의 위상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사원이 사장을 사장답게 대접하는 태도, 국민이 대통령을 대통령답게 대하는 언사, 이런 것들이 그분의 위상을 인정하고 대하는 태도이다.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게 처신한다면 국민이 존경하지 않는다. 권력을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경외하는 두려움은 없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는 첫 걸음이다. 그래서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디다. 그분을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한 것이다. 경외하는 믿음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교훈 :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할 때 지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1월 21일(목)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운명 (사 8:16~22)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1. 사 8:16~22을 읽어보라. 이것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하스 왕과 어떤 관계인가?
[사8:16~22]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답: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흑암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아하스가 하는 일이 그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하스는 주술과 매우 밀접한(신 32:17, 고전 10:20 참고; 그들은 마귀에게 제물을 바쳤음) 이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왕하 16:3~4, 10~15, 대하 28:2~4, 23~25). 성경 외의 고대 문헌들이 증언하듯이, 현대 주술의 다양한 면들은 놀랍게도 고대 근동지방의 의식들과 유사하다. 심지어 오늘날의 여러 뉴에이지 행습들도 고대 이교의 행습들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아닌 영들을 의뢰하는 바람에 빚어진 참담한 결과를 묘사하는데(사 8:21~22) 이는 아하스에게 잘 들어맞는다(대하 28:22~23과 비교). 이사야는 왕에게 분개하고 저주를 내뱉는 백성에 대해 언급한다(사 8:21). 이것은 아하스가 백성을 이교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저주하리라는 경고였다. 실제로 아하스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으로 그의 장례에 예외적인 경우가 적용되었다. 즉 백성은 그를 “이스라엘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대하 28:27)했다.

2. 다음 구절들은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르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레 20:27, 신 18:9~14).
[레20:27]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신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답: 그런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고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주술로부터의 분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문제이다. 이 원칙은 사울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 10:13~14).

<부가설명> 마지막 때의 사회적 종교적 특징 중에 하나가 강신술과 일요 성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일요일 공휴일은 오랜 전통으로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여 변경하기 불가능한 사회적 관습이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향이고 사회에 대한 공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7일에 안식하셔서 안식일을 제정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가장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또 영혼불멸설은 강신술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가 다 강신술을 선전하는 매개체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현상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세 천사의 기별의 내용을 바르게 깨닫고 증거 해야 한다. 그 기별으 핵심은 이러 두 가지 오류에서 나오라는 것이 핵심이다. 아하스가 그랬고 사울왕이 그랬고 므낫세 왕이 그랬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조심해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

교훈 :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만연한 주술과 거짓 영들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의 증언을 따라야 한다.


1월 2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구약 시대에도 오늘날의 강신술자들과 같이 죽은 자와 교통하노라고 주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접한 자’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자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성경은 ‘귀신의 영’이라고 말한다(참조, 민 25:1~3, 시 106:28, 고전 10:20, 계 16:14). 신접한 자의 행위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라고 선언되었고, 그것은 죽음의 형벌에 해당되는 것으로 엄하게 금지되었다. 박수라는 이름이 오늘날은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악한 신과 교통한다는 주장은 암흑시대에 지어낸 이야기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수백 명, 수천 명, 아니 수백만 명의 신봉을 얻어 과학계와 일반 종교계에 침투해 들어가고, 법조계에서도 호감을 얻고 심지어는 궁정에까지 들어가 있는 이 강신술의 큰 기만은 옛날에 금지되고 정죄되었던 ‘신접한 자’가 새로운 탈을 쓰고 부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 시대의 대쟁투, 5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강신술은 오늘날 영화와 서적과 TV 등 대중문화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강신술을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멈출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해악에 대한 경각심이라도 심어줄 수 있을까요? 이런 기만에 대응하기 위해서 죽은 자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사후에 영혼이라는 활동하는 존재가 있다는 영혼불멸설이 태초에 말한 사탄의 거짓말로 오늘까지 형태를 바꾸면서 만연해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도록 증거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대중문화는 이것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흥미에 부응하여 선전하고 있다. 

➋ 사 8:20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굳게 서서 속지 말라는 것이다. 

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사상을 좀 더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어떻게 두려움에서 사랑이 생겨날 수 있으며,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 공포와 경외를 깨달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약 : 하나님은 이사야의 말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의 행위를 통해서 경고와 희망의 기별을 강조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안전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다른 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불행이 있을 뿐입니다.제4과 어려운 길

1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6분

● 연구 범위 : 사 7:14~25, 8:1~22.

● 기억절 :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뉴욕 할렘가의 한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는데, 한 시각장애인 소녀가 4층 창틀에 앉아 있었다. 소방관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사다리 트럭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잘 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그물로 뛰어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그 소녀의 아버지가 도착하여 메가폰을 들고 자기의 지시를 따라 그물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소녀는 뛰어내렸고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친 데도, 삔 데도 없었다. 소녀는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버지가 최선이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신뢰했다.”―Edited by Michael P. Green, 1500 Illustrations for Biblical Preaching, p. 135.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최선의 것을 바라시며 그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처음에 제시하신 잔잔하고 부드러운 길을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굉음 같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셔야 하였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할 대상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눈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행하기 : 현대적인 거짓 영의 활동이나 주술을 배척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증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➋ 위기의 상황에서 아하스는 누구를 믿었습니까? 그가 믿어야 할 분은 누구였습니까?(대하 28:16)
※ 앗수르 왕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➌ 우리는 앗수르 왕을 의지한 아하스의 선택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대하 28:20, 고후 4:18)
※ 우리는 인간을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➍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사 8:12~13)
※ 세상의 것은 공포, 즉 무서움이고 하나님은 경외하는 존경에서 나오는 외경심이다. 
➎ 참선지자의 증언을 거절함으로써 오늘날 세상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까?(사 8:19~20)
※ 강신술적 위험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귀신을 섬기고 있다. 
➏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짓 영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증거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결론 : 이사야서는 아하스의 불신에 대한 경고뿐 아니라 그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까지 예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소망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우리도 아하스가 맞이했던 최후를 모면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1월 17일(일) 예언이 성취됨 (사 7:14~16)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사 7:15).

사 7:14~16에서 임마누엘은 아하스가 직면한 진퇴양난의 상황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임마누엘이 자라서 다른 종류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기 전에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사 7:16) 될 것이었다.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세력이 곧 소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1~2, 4~9절 참고)은 거듭 반복된다.

1. 이사야는 왜 ‘엉긴 젖과 꿀’에 대해 언급했을까?(사 7:15).
[사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답: 유다의 들판이 정복군에게 점령당할 것이기 때문에 농사한 곡식을 식량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래도 굶지 않고 생존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신 것이다. 

유다의 곡식과 들판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될 것이었다(23~25절). 그래서 당시의 임마누엘을 포함하여(14~15절)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유목민의 식사를 해야 할 것이었다(21~22절). 그들은 궁핍해질 것이지만 대신 생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2.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왕하 15:29~30, 16:7~9, 대상 5:6, 26).
[왕하15:29,30]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16:7~9]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대상5:6,26] 그의 아들은 브에라이니 그는 르우벤 자손의 지도자로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로잡힌 자라/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답: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정복당할 때에 성취되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734년경에 주어졌다. 아하스의 뇌물을 받은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어차피 하려 했던 일을 단행했다. 그는 북방의 동맹을 붕괴시켰고, 갈릴리와 요단강 건너편 북방 이스라엘의 지역을 정복했으며, 인구의 일부를 이주시킨 다음, 그 영토를 앗수르의 도(道)에 편입시켰다(기원전 734~733년).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은 베가 왕이 살해당한 후 호세아가 앗수르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자 추방을 면했다. 기원전 733~732년에 디글랏 빌레셀은 수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고 앗수르의 도(道)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사야가 예언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732년까지 아하스를 위협했던 두 나라는 확실하게 멸망했다. 기원전 727년에 살만에셀 5세가 디글랏 빌레셀 3세를 대신하여 즉위한 직후에 이스라엘의 왕 호세아는 앗수르를 배반함으로써 정치적인 자살 행위를 저질렀다.
앗수르는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수천 명을 메소포타미아와 메대로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은 결국 그 지방의 주민으로 흡수되어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사 7:8 참고; 65년 만에 에브라임은 더 이상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다의 원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아하스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요점은 이것은 어차피 벌어질 일이기 때문에 앗수르에게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부가설명>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르다. 때때로 정세를 살피고 사회적 상태를 보면서 예언을 거기 적용하여 멋진 해석을 했어도 완전히 틀린 해석을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해석을 공개하고 주장했다면, 그런 해석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틀렸을 때 그것을 곧 시정하고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공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서 그렇게 하고도 아무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않은가? 우리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한다. 사회현상에 맞추어 예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언에 맞도록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이 이룰 때에’ 믿게 하려고 미리 말씀하셨다고 가르치셨다(요13:19, 14:29). 예언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를 통하여 앗수르가 어떻게 될 것이며, 북방 이스라엘과 아람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연대를 말씀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곧 망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말씀하셨다. 65년을 살지 못할 아하스에게는 그것이 먼 미래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는 당장 자기 통치 기간에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가가 되어서 성경을 이야기하는데 그 해석이 맞을는지 틀린는지는 지내봐야 알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경우든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걸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예언대로 유다의 적들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하스가 앗수르에 의지하지 않았어도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었다.


1월 18일(월) 예견된 결과들 (사 7:17~25)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대하 28:20).

1. 사 7:17~25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그 땅에 일어날 일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결과에 대해 우리가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7:17~25]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

답: 그 땅이 가시와 찔레가 나는 땅이 될 것이며 소와 양이 짓밟는 땅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놀랄 이유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께로 돌아와 충성하라고 거듭거듭 초청의 기별을 보내셨다. 선지자들의 호소는 부드러웠고 그들이 백성 앞에 서서 회개와 개혁을 열렬히 권할 때에 그들의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선지자와 왕, 325).
믿음보다는 겁이 많았던 아하스에게 수리아와 이스라엘이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움을 받기 위해 동맹을 맺은 앗수르가 결국 이전의 수리아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원수가 되리라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한량없는 구원을 거절함으로써 아하스의 멸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아하스가 자신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9). 아하스는 어떻게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북방의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유다는 존중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앗수르 왕들의 연대기 외의 문헌들을 보면, 위세를 떨치려는 그들의 욕망은 거의 만족할 줄을 몰랐다.

2. 왕하 16:10~18과 대하 28:20~25을 읽어보라. 아하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영적인 원칙을 보게 되는가? 우리가 그의 행위에 놀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왕하16:10~18]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대하28:20~25]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답: 아하스는 이방 신의 제단을 하나님의 성전에 만들어놓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부수고 마음대로 고쳤다. 결국 그는 믿었던 왕에게 공격당했다. 그가 선택한 결과를 그가 거둔 것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대하 28:20~23은 아하스가 여호와께 의지하는 대신에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부가설명> 보이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오관을 통하여 당장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숨은 속임수를 알지 못한다. 그 속임수는 역시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속이는 자들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구체화 하고 보면 세상에 있는 보이는 것들도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속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이는 잠깐인 것을 이기는 믿음을 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역사적인 사건,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소망으로 살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뿐만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롬8:24,25). 하나님이 약속하신 보이지 않는 것이 소망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아하스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달받았으나 보이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잃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교훈 : 하나님의 애정어린 조언과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월 19일(화) 이름에 담긴 의미 (사 8:1~10)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 8:3).

그대가 이사야의 둘째 아이와 축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마헬살랄하스바스야, 공 이쪽으로 보내!”하는 사이에 그대는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런데 그 긴 이름보다 이름의 뜻은 더 길다. ‘노획물은 신속하고 전리품은 빠르다,’ 또는 ‘빨리 약탈하고, 서둘러 노획하라.’

1. 그 이름이 담긴 기별은 분명히 신속한 정복을 의미하는데, 누가 누구를 정복한다는 뜻인가?(사 8:4).
[사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답: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아람을 정복할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유다의 피해도 포함됐다.

사 8:1~10은 7장의 기별을 보완해 준다. 아이가 어떤 단계에 이르기 전에 앗수르는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수도에서 전리품을 취할 것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보증의 기별을 거절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잔잔한 실로아 물결로 대표되던 유다는 유브라데 강의 흉용하고 창일한 물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막강한 세력에 압도될 것이었다. 아하스가 앗수르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사야의 아들들의 이름은 북방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다도 가리킨다. ‘노획물이 신속하고 전리품이 빠르다,’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그럼에도 어떻게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는가? 비록 앗수르가 임마누엘의 땅에 편만할지라도(사 8:8),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10절)는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에 스며있다. 곧 유다와 그 밖의 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심판이 임할 텐데 그것은 전쟁, 고난, 포로의 형태로 이르러 올 것이고,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2. 이사야는 왜 자기 아이의 이름이 합법적으로 등재된 사실과 아내와의 부부관계에 대해 언급하는가?(사 8:1~3).
[사8: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답: 예언이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 아들의 출생 시점은 징조의 핵심 부분이다. 그 아이가 잉태되어 태어나서부터 초기 성장 과정을 거쳐 엄마, 아빠를 부를 줄 알기 전에 앗수르가 수리아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었다(사 8:4). 이사야는 그 아이를 임신하기도 전에 그 이름을 등재함으로 그 아이와 그 이름을 향후 일어날 사건들에 의해 증명될 공적인 예언으로 삼았다.

<부가설명> 아하스와 유대 국민들의 답답한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가족 사항을 통하여 기별을 전하셨다. 선지자는 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일이 어렵더라도 전적으로 순복하고 수행했다.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통하여 기별을 나타내셨고 또 뒤에는 아내가 죽은 일을 통하여 기별을 전했다. 그래도 유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이 잘못 걷기 시작하고 그런 수렁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의 흐름이 돌아오지 못할 자리로 줄달음을 치는 것 같다. 우리는 진리의 바른 흐름을 따라 흐르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키고(고후10:5), 예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는 경험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굴복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신자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이사야의 아들들에게 그들의 이름과 삶은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기별이 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기별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월 20일(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사 8:11~15)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2~13).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대공황으로 낙담한 국민들에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했다. 낙심한 백성을 향한 이사야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훈계하셨다(사 8:12~13). 이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예를 들어, 계 14:6~12에서 세 천사가 전 세계에 선포하는 기별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짐승의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비추어 볼 때 그분을 ‘두려워하라’는 개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마 22:37)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답: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믿고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주의 궁극적인 주권자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이긴다. 만일 그분이 우리 편이시라면,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배반함으로 그분의 반대편이 된다면, 달아나봤자 숨을 곳이 없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다음의 성경절과 모순되지 않는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敬畏)를 뜻하는 말이다. 경외는 공경할 경자와 두려워할 외자이다. 공경해서 두려워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공포(恐怖)가 아니다. 

두려움에도 종류가 있다. 만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친구이고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혹시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능력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기에 존경하는 의미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부가설명> 공포(恐怖)와 경외(敬畏)는 전혀 다르다. 두렵다는 말은 같이 붙었지만 그것은 무서워 벌벌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공경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그 앞에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말을 함부로 천한 말을 쓰지 않고 존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 앞에 설 때에 몸가짐과 언어 활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분의 위상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사원이 사장을 사장답게 대접하는 태도, 국민이 대통령을 대통령답게 대하는 언사, 이런 것들이 그분의 위상을 인정하고 대하는 태도이다.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게 처신한다면 국민이 존경하지 않는다. 권력을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경외하는 두려움은 없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는 첫 걸음이다. 그래서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디다. 그분을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한 것이다. 경외하는 믿음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교훈 :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할 때 지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1월 21일(목)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운명 (사 8:16~22)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1. 사 8:16~22을 읽어보라. 이것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하스 왕과 어떤 관계인가?
[사8:16~22]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답: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흑암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아하스가 하는 일이 그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하스는 주술과 매우 밀접한(신 32:17, 고전 10:20 참고; 그들은 마귀에게 제물을 바쳤음) 이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왕하 16:3~4, 10~15, 대하 28:2~4, 23~25). 성경 외의 고대 문헌들이 증언하듯이, 현대 주술의 다양한 면들은 놀랍게도 고대 근동지방의 의식들과 유사하다. 심지어 오늘날의 여러 뉴에이지 행습들도 고대 이교의 행습들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아닌 영들을 의뢰하는 바람에 빚어진 참담한 결과를 묘사하는데(사 8:21~22) 이는 아하스에게 잘 들어맞는다(대하 28:22~23과 비교). 이사야는 왕에게 분개하고 저주를 내뱉는 백성에 대해 언급한다(사 8:21). 이것은 아하스가 백성을 이교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저주하리라는 경고였다. 실제로 아하스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으로 그의 장례에 예외적인 경우가 적용되었다. 즉 백성은 그를 “이스라엘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대하 28:27)했다.

2. 다음 구절들은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르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레 20:27, 신 18:9~14).
[레20:27]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신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답: 그런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고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주술로부터의 분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문제이다. 이 원칙은 사울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 10:13~14).

<부가설명> 마지막 때의 사회적 종교적 특징 중에 하나가 강신술과 일요 성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일요일 공휴일은 오랜 전통으로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여 변경하기 불가능한 사회적 관습이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향이고 사회에 대한 공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7일에 안식하셔서 안식일을 제정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가장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또 영혼불멸설은 강신술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가 다 강신술을 선전하는 매개체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현상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세 천사의 기별의 내용을 바르게 깨닫고 증거 해야 한다. 그 기별으 핵심은 이러 두 가지 오류에서 나오라는 것이 핵심이다. 아하스가 그랬고 사울왕이 그랬고 므낫세 왕이 그랬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조심해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

교훈 :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만연한 주술과 거짓 영들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의 증언을 따라야 한다.


1월 2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구약 시대에도 오늘날의 강신술자들과 같이 죽은 자와 교통하노라고 주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접한 자’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자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성경은 ‘귀신의 영’이라고 말한다(참조, 민 25:1~3, 시 106:28, 고전 10:20, 계 16:14). 신접한 자의 행위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라고 선언되었고, 그것은 죽음의 형벌에 해당되는 것으로 엄하게 금지되었다. 박수라는 이름이 오늘날은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악한 신과 교통한다는 주장은 암흑시대에 지어낸 이야기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수백 명, 수천 명, 아니 수백만 명의 신봉을 얻어 과학계와 일반 종교계에 침투해 들어가고, 법조계에서도 호감을 얻고 심지어는 궁정에까지 들어가 있는 이 강신술의 큰 기만은 옛날에 금지되고 정죄되었던 ‘신접한 자’가 새로운 탈을 쓰고 부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 시대의 대쟁투, 5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강신술은 오늘날 영화와 서적과 TV 등 대중문화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강신술을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멈출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해악에 대한 경각심이라도 심어줄 수 있을까요? 이런 기만에 대응하기 위해서 죽은 자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사후에 영혼이라는 활동하는 존재가 있다는 영혼불멸설이 태초에 말한 사탄의 거짓말로 오늘까지 형태를 바꾸면서 만연해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도록 증거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대중문화는 이것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흥미에 부응하여 선전하고 있다. 

➋ 사 8:20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굳게 서서 속지 말라는 것이다. 

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사상을 좀 더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어떻게 두려움에서 사랑이 생겨날 수 있으며,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 공포와 경외를 깨달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약 : 하나님은 이사야의 말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의 행위를 통해서 경고와 희망의 기별을 강조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안전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다른 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불행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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