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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총론│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님”

세상은 상징으로 넘쳐난다. 우리의 언어와 생각조차도 그 자체보다는 다른 것들을 나타내 주는 상징들이 아닌가. 예를 들면 강아지라는 낱말 자체는 강아지가 아니다. 문자와 음성으로 구성된 활자화된 상징일 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강아지를 의미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와 문자들은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 문화, 사회, 정치 등 모든 것들도 어떤 면에서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형상, 그림, 구호, 경구, 예술, 시, 조각, 춤, 건축물, 의식, 관습과 같은 상징이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많은 것들이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지 모른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7일을 앞선 6일간의 모든 창조의 상징으로 삼으셨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첫 번째 복음의 약속도 씨, 머리, 발꿈치와 같은 상징적인 언어로 계시되었다(창 3:15).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말씀하실 때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며 상징을 사용하셨다(창 4:10).

상징들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다. 홍수 이후에 떠오른 무지개(창 9:13), 요셉의 꿈(창 37:1~11),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 구약 시대에 행해진 모든 성소 봉사(히 9장), 주의 만찬에서 사용된 떡과 포도즙(막 14:22~25) 등등. 이 모든 상징들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실체와 진리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예언적인 상징에 익숙하다. 날개 달린 사자(단 7:4), 철 이를 가지고 있는 짐승(단 7:7),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염소(단 8:5), 다리가 철과 진흙으로 만들어진 신상(단 2:33). 이 모든 것들이 다 더 큰 실체들을 위한 상징인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시적인 상징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사 40:12). 성경에서 사용하는 상징들은 때로 아주 단순하기도 하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예수님도 비유를 말씀하셨다. 잃은 양(눅 15:1~6), 부자와 나사로(눅 16:22~31), 혼인잔치(마 22:1~13), 열 처녀(마 25:1~13).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상징들 가운데서 이번 기에 우리는 옷에 관한 비유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우리는 성경 속 인물들이 입은 옷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진리를 표상하고, 어떤 위대한 실체를 가리키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 다룰 것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루스벨의 옷으로부터 누더기 같은 우리의 의까지,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위한 가죽 옷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사야서에 언급된 “아름다운 옷”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의복을 죄, 교만, 의, 구원, 칭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옷이 우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입는 옷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의복은 그 자체보다 더 큰 실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다.

4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5분

기억절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롬 4:7).

연구 범위 사 64장, 롬 3:21~31, 4:1~7, 6:1~13, 빌 3:3~16.

*모든 성경절은 개역개정판을 인용함. 단, 기억절은 개역성경에서 인용함.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속이요 보증이시다. 그분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분을 믿고, 모든 면에 있어서 그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고, 결국에는 그분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모든 불명예, 수치 그리고 징벌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죄를 짊어지셨지만 영원한 의를 이루시어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도록 하셨다. ‘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뿐이시다.’이다. 그분은 하늘 베틀에서 짠 흠 없는 의의 옷(죄 된 인간은 한 올의 실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자녀들에게 그분의 온전한 의의 옷을 입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 하나님의 왕국에 있을 구원받을 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찬양과 영광은 모두 구원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로만 돌려질 것이다”(엘렌 G. 화잇, 유스 인스트럭터, 1894. 12. 6.). 상징에 주목하라. 의의 옷. 죄 된 인간은 한 올의 실도 수놓지 않은 “하늘 베틀에서 짜여진” 의의 옷.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모든 자들에게 입혀질 예수님의 의에 대한 아주 멋진 상징이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인간의 부패의 깊이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의와 옳은 생활의 완전함을 깨닫는다.

➋느끼기 :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➌행하기 : 날마다 우리의 뜻을 주께 굴복시키면서 덮어주시는 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들을 붙잡고 전진한다.

첫째 날(일)

3월 27일 거울을 바라봄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질문: 이사야 64장을 읽어보라. 어떤 기별이 선포되고 있는가? 인간의 의를 묘사하기 위하여 어떤 의복의 비유가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사 64장에는 어떤 소망이 제시되고 있는가?

[사64:1~12]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답: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과 인간의 의가 어떤 것인지 잘 설명되어 있고, 주님의 긍휼을 따라 죄인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아주 절제된 말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더러운 옷”(filthy rags)이란 월경(月經)으로 오염된 옷을 말한다. 타락 이후 인간의 의를 묘사하기에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한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64장은 바로 우리의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로마서 3장의 선구자인 셈이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옷에 대한 복음적 의미에 대하여 우리는 바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옷은 몸에 걸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은 그냥 두고 그 위에 옷만 걸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복음의 상징으로서 말하는 옷에 대하여 너무 안이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 전에는 스스로 벗은 상태를 몰랐다는 뜻이다. 창2:25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에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3:7) 아담에게 입히신 옷은 오늘날 우리들이 입는 옷과 같지 않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벌거벗은 상태로 못 박히셨다. 겉옷은 나누어가졌고 속옷은 제비뽑아 가져갔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동정하여 옷을 입혀서 못 박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그림은 국부를 천으로 둘러 가려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사실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오해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히 나체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리고 장사할 때에는 세마포로 몸을 쌌고 머리는 수건으로 쌌다.(요20:6,7) 그런데 부활하셨을 때는 그 수의는 무덤에 벗어 두셨다. 예수님은 어떤 옷을 입고 나오셨을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옷이다.

시104:2은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라고 계시한다. 그런데 요1:4은 빛은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영생의 생명은 빛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빛을 옷 입으신 것이다. 성경이 구원의 복음과 관련하여 옷을 입는 문제를 말할 때에 그것은 부활의 생명을 입은 것을 가르친다.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침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함께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예수와 함께 부활한 것을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입는 의의 옷은 예수님의 도덕적 율법적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뜻하는 말이기보다는 예수의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옷을 입는 것이 부활을 뜻하는 것은 고후5:2~4에 잘 계시되어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벗는 것은 죽은 것을 덧입는 것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하였다. 아담이 벗을 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은 것은 도덕적 삶으로 잃은 생명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의 상징이며,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부활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실 것을 나타내는 복음의 표상들이다. 옷을 벗고 입는다는 말의 구원의 복음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을 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앞에서 더러운 옷과 같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둘째날(월)

3월 28일 입혀 주시는 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

었느니라”(롬 4:3).

질문: 롬 4:1~7을 읽어보라.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가 어떻게 전가된 의(입혀주시는 의)를 예증하고 있는가?

[롬4:1~7]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답: 육체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 그들은 불법을 사함 받고 죄를 덮어진다.

<부가설명> 여기 가리움을 받는다는 말은 에피칼룹토인데 덮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속죄소와 연관된 말이다. 속죄소라는 히브리어는 카포레트인데 덮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뚜껑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가파르한다는 것은 속죄 받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속죄 받기 전에 자기의 행한 의가 아무리 탁월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지 않는다. 속죄 받는 다는 것은 조를 처리해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의 죽음을 죄인의 죽음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겨주시는 의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죽으신 사실을 죄인 내가 죽은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기록한 것이 롬4:17이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그가 믿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장차 오신 구주 예수 안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시고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 곧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으니 의로 여겼다는 말씀의 참 뜻이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하나님의 의, 특히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의와 비교했을 때, 심히 추악함을 느끼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더러운 옷 외에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 우리에게는 신학적으로 ‘입혀 주시는 의’라고 불리는 큰 소망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이다. 하늘 베틀에서 짜여지고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의이다. ‘입혀 주시는 의’는 그리스도의 죄 없는 생애가 우리의 죄 된 생애를 대신하였음을 말한다. 그 의는 우리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를 완전하게 덮어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언제나 온전히 순종한 의롭고 거룩한 자로 여겨진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의 의에 대한 관념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도덕적 행위에 두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깨닫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으로 볼 때 이상한 말 하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지금까지 들어왔던 고정 관념을 벗어놓고 자세히 성경 자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부활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선하고 의로운 행위가 나의 것으로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더러운 몸, 사망의 생명으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인격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예수님의 선한 행위를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주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다. 당연히 예수님의 행위가 나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은 끝 날까지 자기 행위가 예수 안에서 완전하여지게 되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믿음의 삶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 우리가 믿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생애와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신다.

셋째날(화)

3월 29일 율법 외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

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

이 없느니라”(롬 3:21~22).

한 설교자가 청중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내가 25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말씀과 경험을 통해 배운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끝까지 견뎌서’ 마지막에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늘 베틀에서 짜여진 의, 즉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나를 완벽하게 덮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여러 차례 죄를 이기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품성의 결점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여전히 배워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물론 나는 어느 하나도 완전에 근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율법에 대한 순종과 상관없이 믿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지 않는다면 천년기 끝에 당신은 거룩한 도시의 성벽 위에서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과 함께 거기 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당신과 함께 거기 있지 못할 것입니다.”

롬 3:21~31을 읽어보라. 우리를 구원하는 의, 죄인인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옷은 “율법 외”(율법과 상관없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예수의 의로서 우리에게 “구원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져다주는 의이다. 구원은 예수 안에 있고 그의 안에서 발견된다. 구원은 우리 안에 또는 율법 준수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된다.

질문: 롬 3:21~31을 읽어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성경절들은 위에 인용된 설교자의 말에 반영된 주제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습니까?

[롬3:21~3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답: 믿음으로 얻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것은 사람이 행한 율법적 도덕적 의가 아니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으며 설교자는 이 사실을 깨달은 것 같이 설교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예수님의 행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의 모든 사언행(思言行)이 다 의롭고 선하고 완전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는 이런 예수님의 행위의 의가 아니다. 그것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완전했다.(빌3:6)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해로운 것이었다. 그것이 완전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울을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위에 기초하여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생명과 존재에 기초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이 믿은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곧 창조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겼다. 그래서 롬4:17은 이 사실을 이해하는데 키워드이다. 이 문제를 제쳐놓고 믿음의 의를 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 위주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이다. 지면 관계로 이 사실을 다 쓸 수 없어서 유감이다. 일요일 부가 설명을 다시 참고하기 바란다.

교훈: 우리가 만약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 덕분이다.

넷째날(수)

3월 30일 옷이 사람을 만든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질문: 롬 6:1~13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예수의 의를 덧입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롬6:1~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답: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롬 6:1~13을 읽어보라. 예수의 의를 덧입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여기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에게 일어날 급격한 삶의 변화를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비유를 주목하라. 중간지대는 없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옛 사람은 죽었다. 이제 예수의 의,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덧입은 새 사람이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 가운데(새 생명 가운데) 있게 됐다. 이 새로움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용납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승리에 대한 약속은 많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약속을 스스로 주장하겠냐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 즉 그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삶은 입고 있는 옷에 걸맞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태가 생명에 관한 것임을 설파한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장사되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사용되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생의 생명, 부활한 사람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렇게 된 것이 의의 상태이다. 바울은 고후5:21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당연하다.마치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훈: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는 그분의 의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다섯째날(목)

3월 31일 값싼 은혜와 율법주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빌 3:3~16을 읽어보라.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위대한 진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구원받는 자의 삶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빌3:3~16]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답: 바울은 여기서 다신 인간의 신분과 율법을 잘 지킨 의의 행위가 얼마나 해롭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며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뒤의 것을 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린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푯대를 향하여 달리는 사람들은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전진한다. 이렇게 전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온전히 이룬 자들인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여기서 다시 구원과 의가 생명과 연관된 사실을 가르친다. 부활의 생명이 바로 구원의 실상이요 그 생명을 가진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요 율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가 없고 오직 창조주이시며 재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암시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푯대를 향하여 올바르게 달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내는 성질이다. 언젠가 이미 지나간 어떤 교과에서 순종의 의미를 부가설명으로 기록한 기억이 있는데, 독자들은 기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순종과 교회론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님은 그 몸의 머리이기고 교인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 지체들은 몸을 위하여 자기 기능을 가장 완전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지체 자체가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체이기 때문에 머리의 지시를 따라 당연히 자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했다고 지체가 자랑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이 이와 같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강한 지체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르침과 우리가 그 지체라는 사실과 순종을 함께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지체가 병들지 않고 신경이 잘 통하고 마비되지 않았으면 자기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순종을 구원의 공로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그가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 기능을 행하는 것뿐이다. 순종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성령은 지체로서의 우리가 머리의 지시를 바르게 전달받고 바르게 반응하도록 하는 일을 행하신다. 머리와 지체가 교통을 잘 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축도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으라고 한 것이다.(고후13:13) 교통이 두절되고 통신이 막히면 아무것도 못한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그 지체는 신경이 끊어진 지체이며 불구이고 죽은 지체이다. 썩기라도 한다면 잘라내어야 한다. 잘려나가면 이미 지체가 아니다.

영감 받은 성경의 기자들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순종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우리의 행함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계신다면 선한 행실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순종함으로(선한 행실을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치명적인 오류이다.

교훈: 순종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절대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예비일(금)

4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교회증언 4권, 88~89 “시험하는 과정”, 복음 교역자, 16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정로의 계단, 49~55 “믿음과 받으심.”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사람들의 생명을 대신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관용하심을 통하여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품성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영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훌륭한 구조가 되도록 지으신다. 그리하여 바로 이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롬 3:26)실 수 있으시다”(시대의 소망, 7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을 때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후 3:18).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 주의 영광은 부활하신 사실이다. 물론 영광은 여러 경우에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본다고 했을 때 그 영광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지적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1:11) 이 말씀에서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이라고 했을 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1)라고 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다는 말은 부활을 영광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1:17)고 하여 변화산에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변화산 사건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재림하시는 사실을 축소하여 나타내신 다목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을 소유할 때 그 생명이 생활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 곧 부활로 드러내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➋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신 일(즉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일)과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시는 일을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약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생명을 더 풍성하게 얻게 된다.(요10:10)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성화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르게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칭의와 성화를 다른 단계로 구분한다. 그래서 칭의는 입혀주신 의, 성화는 나눠주신 의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를 얻었으니 성화는 내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논리에 빠진다. 사실 우리 교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할 때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순종하여 완전한데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와 쌍을 이루어서 강론된다. 이렇게 하면 몸인 교회와 지체인 교인의 관계를 가르치는 성경의 교회론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칭의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고, 성화는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것이 성화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칭의이다. 로마 4:23~25을 자세히 읽어보라. 그러면 이 이치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의의 옷을 입히신다는 것이 다 부활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복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선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과 썩지 않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딤후1:9~11) 그리고 도덕적, 율법적 선과 완전은 이 생명이 나타내는 자연스런 열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 제7과 주의 날개 그늘(질문, 대답, 부가설명)05/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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