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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3분)

기억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연구범위: 창 50:20, 마 5:5, 11:29, 롬 12:3, 갈 6:1, 빌 2:2~3, 벧전 3:4.

안식일 오후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오늘날의 문화에서 온유는 거의 잊혀져가는 성령의 열매이다. 사람들은 온유를 연약함으로 생각하며, 대부분의 경우 온유한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온유한 사람으로 불려야만 한다.

온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꼬여갈 때에도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닌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연약함과 온유함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연약함은 힘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할 때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기인된다. 연약함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묘사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 온유함이란 사람이 자신의 길로 밀고 나가기로 고집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생겨난다. 따라서 온유는 약함이 아닌 강함에서 오는 것이다.

핵심본문: 마 11:29

학습 목표

깨닫기: 온유함이란 소심함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우리 삶에 실천함으로 쉼과 확신을 경험한다.

행하기: 난관과 투쟁의 순간에도 성숙함을 나타내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A.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험과 도전에 대처하는 용기를 요한다.

1. 온유함은 적대감을 완화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2. 공격적인 행동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어떻게 나타내는가?

II. 느끼기: 온유하게 행동하는 것에서 오는 평온함을 느낌

A. 성나게 하는 상황에서 온유하게 행동하는 것은 공격적인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III. 행하기: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의 낙원에서 사는 것임

A. 온유함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성숙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B.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가?

C. 온유함은 얼마나 하나님께 영예와 찬양을 가져오는가?

D. 지금 이 세상에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은 새 땅에서의 온유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점: 그리스도인들이 화나는 상황에서 온유하게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온유함은 소심함이 아니다.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늘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온유는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화평과 조화를 일으킨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태도에 대한 해독제이다.

일요일(2월 21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 11:29)

1.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쉼을 가져다줍니까?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답: 온유는 전적인 신뢰와도 통한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기고 그분을 신뢰할 때 참다운 쉼이 이르러 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9)

온유함이란 자신의 계획을 위해 투쟁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온유는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때 생겨나며 그분께서 상황을 통제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생겨난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는데(참조 눅 22:42) 이러한 태도가 바로 마음에 쉼을 찾게 하는 열쇠이다. 결국 우리가 겪는 온갖 소란과 소동은 자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이며, 세상이 말하는 유약함이 아닌 참다운 믿음과 용기와 인내심을 갖는 사람이다.

2. 로마서 12:3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온유함의 개념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이것이 온유함의 열쇠가 됩니까?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답: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성경절은 에베소서 4:2이다. 이 구절이 로마서 12:3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해 보라. 이 구절들은 모두 거만함과 이기심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반대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만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 아닌가? 만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었는가? 우리가 호흡하는 매 순간, 심장이 박동하는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와 달란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러진 이 모든 일들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온유와 겸손이 안식을 가져다줌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마음의 온유와 겸손을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면 그분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평화와 안식을 주실 것이다. 우리의 뜻과 방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투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교훈을 배우면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과 야망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뜻은 그리스도의 뜻 안에 삼켜져야 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091)

<부가설명> 온유는 원어로 “프라위테스”인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즉 그것은 ‘부름’(엡4:2)과 ‘선택’(골3:12)의 표이며 성령의 역사(갈 5:23)이다. 이것은 사람의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생활과 행위의 가능성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고후10: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온유)”와 “에피에이케이아(관용)”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나타내면서,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고 가르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프라위테스”는 또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이다.(고전4:21, 갈6:1, 딤후2:25) 약1:20에서 “프라위테스”는 “올게(성내는 것)”와 대조되어 있으며, 19절부터 읽으면 성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고 배우려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온유는 성령의 지혜로 영감 된 의롭다 함을 받은 표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여기서 온유는 의인의 전 행위에서 나타나며, “독한 시기와 다툼”과 반대된다.(약3:14 벧전3:4) 벧전3:15에서 당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이유를 물었을 때 친절하게 온유 겸손히 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비록 부당한 대우로 분개와 성나게 자극할지라도 온유로 대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대와 박해의 상황과 관련하여 가르친 것이다. 온유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범사에 온유한 태도와 언어와 감정을 나타내는지?

교훈: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연약함과 혼동하지만, 참된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과 용기를 가질 때 생겨난다.

월요일(2월 22일) 온유함의 모본들(민 12:3)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더불어 땅을 분배할 때 직면했던 어려운 순간을 기억하는가?(참조 창 13:8~9).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으로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러나 그는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남는 것을 취하겠다고 했다. 이 행동은 온유함에 대한 얼마나 귀한 본보기인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곡식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형제들이 간청하는 장면을 다시 읽어 보라(창 45장). 온유함의 소유자인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만일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창세기 50:20에 나오는 요셉의 온유함은 세상적인 관점의 온유함과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가?

젊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울 왕은 수년 동안 다윗을 질투하여 그를 잡아 죽이려고 뒤쫓아 다녔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삼상 24:3~7, 26:7~12). 만약 다윗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울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면서 영적으로 변명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민수기 12:3에서 모세는 당대에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강력한 말과 행동으로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했을 때 그는 ‘대노’하여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마시게 하였다(출 32:19~20). 우리는 모세의 온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예수님은 온유함의 가장 위대한 모본이시다(마 11:29). 다음에 열거하는 사례들은 그분의 온유하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를 들어 요한복음 18:21~23에서 그분의 온유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또한 마태복음 26:39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한편 그분의 행적 가운데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견책하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온유함과 단호함의 조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원칙에 관해서는 바위와 같이 변함이 없되,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증언보감, 2권, 423)

<부가설명> 성령의 열매에 나타나는 아홉 가지 성질은 모본을 따라 훈련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들의 성질을 본본다는 것은 소위 도야(陶冶)나 극기(克己)나 수신(修身)이 도움이 되고 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철저히 성질에 관한 것이다. 성질은 본성이다. 훈련으로 본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이런 성질이 되게 하신다. 이것은 말한 대로 예수님의 성질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면 이런 성질이 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이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기록된 아홉 가지는 모두 성질 또는 감정적인 것과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은가. 감정은 그 사람의 성질이 나타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잘 내든지, 항상 우울하든지, 내정하든지 등등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흔히 그 성질 한번 더럽네.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생겨나는 성질이 바로 성령의 열매의 성질이다. 위에 모본으로 든 사람들은 바로 예수의 마음을 얻는 사람들이다.

교훈: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특히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온유함의 모본들이다. 온유함에는 담대함과 정의로움이 배제되지 않는다.

화요일(2월 23일) 온유함의 중요성(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온유의 반대는 교만이다. 오늘날 자긍심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자긍심이 그 도를 넘어 교만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왜 그런가?

온유는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데 필수적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다른 이에게 끼치는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사람 됨됨이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하나의 능력이 된다.”(시대의 소망, 141~142)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고의 미, 즉 썩지 아니할 것을 먼저 사랑하고 찾기를 바라신다. 어떤 외모의 단장도 가치나 사랑스러움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이 입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인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과 비교할 수 없다(계 19:14). 이 세마포 옷은 이 세상에서도 그들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약속하신다.”(사도행적, 523~524)

하나님이 쓰시는 온유한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크게 존귀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 까닭은 그가 애굽의 궁정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와 담론하시기를 사람이 친구와 말하듯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높임을 받기 원하는가? 그러면 겸손하게 되라. 하나님의 사업을 추진해 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겸비함으로 모든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야 한다. 뛰어나게 겸손한 사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그를 통하여 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가 있겠다. 그는 단 한 올의 이기심의 실도 그 피륙에 짜 넣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내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을지라도 그에게는 내 자신을 나타내겠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1권, 1113)

<부가설명> 성경의 언어로는 온유의 반대 개념이 교만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어로 보면 온유의 반대는 냉엄(冷嚴)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온유이니 차갑고 혹독한 것이 그 반대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냉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에는 굳게 선다할지라도 사람을 대할 때에는 성경의 원칙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사람을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복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와 관용을 나타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용기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다. 모세가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줄 알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교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게 하며,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수요일(2월 24일) 온유의 열매를 실천함(마 5:39)

온유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실제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말과 태도와 행동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온유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천되는 온유함이 진짜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온유함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까?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온유함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악한 자가 오른편 뺨을 칠 때 왼편도 돌려대려면 온유가 필요하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범죄한 자를 다룰 때는 온유한 심령으로 하고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빌 2:2~3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화합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존중해야 한다.

딤후 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모든 자들 중에서 특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아무와도 다투지 말고 범사에 모든 사람에게 온유를 나타내야 한다.

지금까지 계속 말해 왔듯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온유함을 연약함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구절들을 보면, 온유함에는 힘이 요구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온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물론 온유함이 성령의 열매라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자신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온유가 나타나려면 날마다 믿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유와 겸손을 실천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고 그 거룩한 원칙을 우리의 생애에 실천 하자. 하나님 앞에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며 날마다 우리의 허물을 고치자. 이기적 교만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하나님과 분리시키지 말자. 스스로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높은 우월감을 가지지 말자.”(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73)

<부가설명> 겨울에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양지쪽 담 밑에 앉아서 서로 손을 내밀고 자기 손이 가장 예쁘게 생겼다고 자랑을 하고 있었다. 길손이 그 옆을 지나면서 흥미 있게 보았다. 한 아이는 손을 내밀지 않고 잠자코 동무들의 손을 보기만 하였다. 다른 아이들이 손을 좀 내밀어보라고 해도 웃기만 하고 손을 뒤로 감추고 있었다. 그때 한 아기가 사립문 밖으로 뒤뚱거리면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가 아직 서툰 아기가 사립문 밖으로 나오다가 돌부리에 걸리면서 넘어졌는데, 그 집 담 밑으로 흐르는 시궁창에 나뒹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예쁜 손 자랑을 하던 아이들이 울음소리를 듣고도 움직일줄 몰랐다. 예쁜 손을 그 찬 시궁창에 어떻게 넣겠는가. 그때 손 자랑을 하지 않던 그 아이가 튕기듯 일어나면서 잽싸게 달려가서 그 아이를 안아 일으켰다. 한가한 길손이 그 모양을 보면서 손 자랑을 하는 아이들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한 마디 했다. “얘들아, 저 아이의 손이 제일 예쁘구나.”

우리의 온유는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론으로 공부로 얼마든지 온유를 논할 수 있다.

교훈: 온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참된 능력의 근원되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자아를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목요일(2월 25일) 온유에 대한 보상(시 25:9)

헐스(E. D. Hulse)는 이런 말을 했다. “겸손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겸손은 사라진다.”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시민을 찾아내어 상을 주기로 했다. 그 작은 공동체는 조사를 실시하여 마침내 적합한 사람을 찾아냈다. 모든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가장 겸손한 사람도 가슴에 리본을 달고 참석하였는데 그 리본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장 겸손한 사람’의 자격을 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리본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1. 다음 구절들에 언급된 약속과 보상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겸손한 자는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찬송할 것이다.

시 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는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

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다.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사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겸손한 자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을 더하게 된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린다.

온유한 자가 상급을 받을 때가 있음을 말해 주는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부를 통해서 배웠듯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대신에 하나님을 높인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와 같은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확실히 받게 된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함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3:21).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때(시 37:11),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산상보훈, 17)

<부가설명> 안교 반생들은 생각해보라. 우리 주님이 얼마나 빈축을 샀겠는가? 아직도 젊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마11:29)고 하셨으니 말이다. 위에 예화에서 그 마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겸손하다는 글이 적힌 리본을 달았기 때문에 그의 겸손이 박탈당했다는데, 우리 주님은 공개적으로 자기를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했으니 듣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건방지고 주제넘다고 생각했겠는가. 온유와 겸손이 바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그 보좌를 떠나서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과 같이 되셨으니 당연히 온유라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진짜로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 자기를 겸손하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은 정말 겸손이 아니다. 겸손이나 온유는 참으로 이런 기이한 특성을 가진 성질이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분명히 보상해 주신다.

금요일 (2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탐스런 보화처럼 오직 자신만 즐기기 위해 마음속에 감추어두고 자물쇠로 채워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생하도록 솟아나고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샘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용감하게 고백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분의 성결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까지 그분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우리의 품성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마치 향기가 나가지 못하도록 병을 밀봉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보존하는 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다.”(엘렌 G. 화잇, 건강에 관한 권면, 400)

“돈으로 살 수 없고 빛나는 재능이나 지성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한 원칙들이 매일의 삶에 실천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종교가 얼마나 큰 손실을 당하는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그것은 지적인 능력으로 고안할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이다. 사람들이 갈구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 중에 순결한 마음, 곧 감사와 평화가 깃든 품성만큼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것은 없다.”(엘렌 G. 화잇, 건강에 관한 권면, 4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의 삶에 기쁨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온유를 증대시킬 수 있을까요?

* 온유하기 위하여 항상 온유를 연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가설명에서 말한 것처럼 온유는 성질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생명의 성질이다. 성령으로 새 생명의 능력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까? 자신의 답을 교과반에서 나누십시오.

* 그리스도인은 권리를 주장하되 온유하게 해야 한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온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장하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3. 니체(1844~1900)는 “그리스도교는 힘이 없는 유약한 자들에게서 나온 종교다. 그들은 자신을 좋게 보이려고 온유와 겸손을 나타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 초인 사상을 주장한 니체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성경의 온유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온유는 참으로 실력이 있을 때 나타낼 수 있는 성질이다. 실력이 없으면 초조하고 두려워서 결코 온유할 수 없다. 우리의 실력은 영생의 생명이다. 죽어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협 앞에서도 온유할 수 있는 것이다.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온유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는 성질이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였다. 그것이 성질이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생명이 그런 성질을 나타낼 수 있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거듭난 생명뿐이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매일을 살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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