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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0 17:24

제5과 죄책감(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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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안식일 일몰: 5시 52분

기억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연구 범위: 창 3:8~13, 요일 1:9, 시 32편, 딤전 4:1~2, 마 26:75, 롬 8:1.

죄책감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죄책감은 수치심, 두려움, 슬픔, 분노, 고뇌, 심지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정들을 이용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끄시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로 인도하신다.

한편 바람직한 죄책감은 선량한 양심으로 작용한다. 죄책감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것은 유다의 경우처럼 매우 파괴적일 수도 있고, 베드로의 경우처럼 매우 긍정적일 수도 있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죄책감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건강한 반응과 건강하지 못한 반응을 대조한다.

➋느끼기 : 겸손한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갖는다.

➌행하기 :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자유와 기쁨을 누린다.

결론: 죄책감은 고백하지 않은 죄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으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일요일 1월 23일

수치심

죄책감은 인류가 경험한 첫 번째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범죄한 직후, 아담과 하와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 이전에 없었던 이러한 반응은 아버지이자 친구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분을 대면하기 꺼려하는 그들의 수치심을 의미했다. 소중한 친밀감이 깨졌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뿐 아니라 슬픔까지 느끼게 되었다.

질문 1. 창 3:8~13을 읽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있는 죄책감을 어떤 식으로 표출하였습니까? 아담이 반응이 더욱 나쁜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3:8~13]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답: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주었기 때문에 먹었다고 핑계를 했다. 솔직히 자기의 허물을 시인하지 않았다. 사람이 타인에게 이유를 두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잃고 사망에 이른 자들의 일상적인 상태이다.

죄책감은 자동적으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런 반응을 ‘투사(projection)’라고 불렀다. 이렇게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은 인간관계에 좋지 못한 작용을 하고, 하나님의 용서에 장애가 된다.

진정한 해결책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부가설명> 죄책감은 건전한 양심에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사람이 부주의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르친 일이 죄책감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침착하게 현재 상황에서 바른 길을 가도록 올바른 모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허물에 대하여서는 핑계하지 말고 솔직하게 시인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그 용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죄책감 때문에 현재를 고통으로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회개한 모든 죄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지도 않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 것을 내가 스스로 기억하여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훈: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월요일 1월 24일

요셉의 형제들

질문 1. 어떤 기억이 요셉의 형제들의 양심을 계속 괴롭혔습니까? 창 42:21.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심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답: 요셉을 팔아버린 사건이 양심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말씀의 표현은 그들이 요셉을 판 이후에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사실의 전말을 정직하게 고하지 못하고 지낸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허물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그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그때의 전말을 고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셉이 살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죄책감은 과거의 특정 사고, 때로는 정신적으로 재연되는 어떤 형상이나 사건과 관련이 있다. 죄책감은 때로 짧은 회상이 삽입되어 나타나는 꿈이나 악몽을 동반하기도 한다. 목숨을 애원하는 어린 요셉의 모습은 형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 2. 죄책감은 요셉의 형제들에게 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창 45:3.

[창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답: 두려워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건과 관련된 어떤 기억이 떠오르면 놀랐다. 해결되지 못한 죄와 죄책감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후회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에 상관없이 과거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하다.

질문 3. 다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죄책감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어떤 도움을 줍니까? 약 5:16, 요일 1:9.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답: 허물이 있는 사람끼리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서로 죄를 자백하면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18:23~35) 주기도문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우리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경험한 사람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확인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18:23절 이하의 비유의 내용이다.

모든 죄는 죄인과 하나님께 고통을 가져온다. 또한 대부분의 죄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5:16은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에게 더욱 그리해야 한다.

<부가설명> 얍복 강가의 야곱은 자기의 과거와 씨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형을 속인 사실이 늘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돌아오는 길에 형의 동태를 유의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의 허물이 현재의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다 과거의 잘못에 족쇄를 차고 있다. 그 족쇄를 스스로 벗을 기회가 올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족쇄를 벗을 수 없는 것도 많다. 그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현재를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허물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올바르게 사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구원은 능히 그렇게 이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을 구원을 이루는 기회로 삼으시는 분이시다.

교훈: 과거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가지고 과거의 잘못에 몰두하기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화요일 1월 25일

진액이 빠짐

질문 1. 시 32편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죄책감과 고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입을 열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말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윗은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시32:1~1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답: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상태의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복함으로 용서를 받았다. 하나님 안에 피난처를 얻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확인하였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할 것이다. 즉 주님을 만날 기회에 만나야 한다.

다윗이 입을 열지 않았을 때 마음의 상태는 어땠는가? 정직한 고백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에도 유익하다. 죄책감을 품고 있었을 때 다윗은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지는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질문 2. 딤전 4:1~2을 읽어 보십시오. 양심에 화인 맞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답: 외식(外飾)함으로 거짓말하는 것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복음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즉 미혹하게 하는 영을 좇고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귀신은 자기가 귀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속인다. 그런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바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이다.

양심이 화인을 맞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불이 신경의 끝을 태우면 신체의 일부가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1) 아무 가책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옳은 원칙들을 범함으로, 2) 또는 잘못된 것을 구별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선하게 보는 환경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을 때에 양심도 무뎌질 수 있는 것이다.

<부가설명> 사람이 근심에 잠기면 여러 가지 신체의 이상이 일어나게 된다. 진액이 마르는 현상은 내분비선에 이상을 초래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같다. 입이 마르고 눈이 피곤해지고 신체에 반응이 일어난다. 마음과 몸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화인은 맞았다는 것은 양심이 불에 데어서 감각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선악 간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상태에 빠진 양심은 죽은 양심이다. 성령의 권고를 계속 무시하면 그렇게 된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양심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가 해결의 길이다. 그 앞에서 자아가 죽는 경험에 이르도록 하자.

교훈: 죄책감을 품고 있으면 병이 되지만,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자는 건강을 잃지 않는다.

수요일 1월 26일

통곡함

질문 1. 마 26:75에는 가장 심하게 죄책감에 시달린 경우가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그토록 죄책감에 시달렸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다시는 유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답: 예수를 저주하면서 부인하였는데, 자기 자신을 과신한 사실을 생각할 때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과신을 나타낼 경우가 많지 않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자아를 낮추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현재의 안전을 크게 기대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커진다.

두 번에 걸쳐 베드로는 자신의 신념은 확고하기 때문에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만에 베드로는 자신을 알아본 두 여인들에게 각각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그를 알아보자, “나는 아니라”고 맹세하였다(요 18:25). 그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과 종들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사실이 베드로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더했을 것이다.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베드로의 통곡은 마음의 변화와 진정한 회개로 그를 이끌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볼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베드로는 자기의 실상을 몰랐다. 그런 상태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가장 잘 모른다. 스스로는 얼굴이나 등이나 신체 전체를 볼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신체의 생김새를 설명해야 자기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감정과 정서에 대하여서는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남이 나에게 느끼는 것이 나의 바른 상태일 가능성이 많다. 성경은 우리를 올바르게 보도록 하는 거울이다. 성경에 비추어 자기를 확인하고 예수의 속죄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진정 변화된 새 생명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진정한 회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기를 찾았다.

교훈: 죄책감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회개와 변화로 이끌기도 한다.

목요일 1월 27일

완전한 용서

질문 1. 롬 8:1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약속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답: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 받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로 나의 죄가 처리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을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 받지 않는 사람은 날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롬8:2)

질문 2. 아래의 말씀들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까?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미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답: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보증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의 변론을 하고 용서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

이 약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용서는 너무 크고, 깊고, 넓어서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우리를 위한 약속들을 주장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예비해 두신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용서가 이루어진다.

<부가설명> 대체적으로 사람 사이에서는 용서를 비는 것이 먼저 있고, 용서할 사람이 그 용서를 간구하는 말과 태도를 인하여 용서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실에 의하여 죄인이 회개할 수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그는 두려워하여 숨었다. 감히 회개할 엄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주적 용서의 선포이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십자가가 있었고,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여 회개한 허물을 다시 기억하지도 않으신다.(사43:25, 44:22, 렘31:34) 그런데 우리는 자기 허물을 계속 기억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우리의 상태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속죄일에 이런 모든 기억을 도말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완전히 기억하지 않으시는 그것을 우리도 기억하지 않도록 처리하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도 그렇게 완전히 용서받고 용서하자.

교훈: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금요일 1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죄가 마음을 지배하고자 다투고, 죄책감이 영혼을 짓누르며 양심을 무겁게 하고, 불신이 정신을 어둡게 할 때, 빛을 비춰 주실 분이 누구인가? 누가 죄를 정복하기에 넉넉한 은혜를 베풀며,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하며 소중한 용서를 주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소망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가? 바로 죄를 사하시는 구주 예수시다. 그분은 하늘 법정에서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하나님 안에 보관해 둔 자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일어나 그들에게 비추기 때문이다”(엘렌 G. 화잇, 바이블 트레이닝 스쿨, 1915년 5월).

“만일 그대가 친구나 이웃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대는 그대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그대를 거리낌 없이 용서해 주는 것은 그의 의무이다. 그 후에 그대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상처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에게 손해를 입힘으로 그의 창조주요 구속주에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교회증언 5권, 12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도 과거의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주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의 용서를 확신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도와야 할 것이다. 용서받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용서를 받아들임으로 부활의 생명이 확실해진다. 부활을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에게 이르는 새로운 생명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바로 용서를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부활의 생명이 그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➋이번 과 목요일 소지를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를 묘사하고 있는 여러 표현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깊이를 묘사하는 자신만의 표현이 있다면 반생들과 함께 나눠 봅시다.

*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 전에 이미 용서하셨다. 그분의 용서 때문에 우리가 담대히 회개할 수 있다. 용서의 확실한 선포가 없을 때는 나의 회개가 받아들여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아신다. 그래서 먼저 용서하시고 용서를 선포하셨다. 이제 그분께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완전한 용서를 경험하게 된다.

➌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회개에 이르도록 죄책감을 이용하십니다. 죄책감의 긍정적인 역할이 또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도록 마음을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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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5 제9과 모세와 아론의 죄(11/28/09) 김명호 2009.11.17 19165
954 제4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7/24/10) 김명호 2010.07.15 19158
953 제5과 속제 : 정결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02/13 김명호 2013.10.25 19155
952 2009년 6월 20일 공동체 소라 2009.06.03 19145
951 영상 교과해설 - 김은배 목사님 제12과 초대교회의 예배 usjoy 2011.09.13 19144
950 06 엘리야와 엘리사의 외투 소하 2011.04.26 19144
949 제9과 여호와의 날(스바냐)(질문, 대답, 부가설명)06/01/13 file 김명호 2013.05.24 19137
948 하늘타리 방송 - 제3기: 6과 믿음을 설명함 소하 2010.08.01 1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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