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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일 안식일

일몰오후 517

 

기억절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연구 범위 : 3:13~4:10, 4:6, 5:17, 3:6~10, 20, 19:13~16, 24:3~6.

 

많은 중·대형 회사에는 중간 관리자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이런 태도는 직원들이 그들에게 없는 어떤 권한, 즉 자신에게 더 많은 존경과 급료, 더 높은 지위가 있어야 한다고 느낄 때 생긴다. 이런 건전하지 못한 태도는 승진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발달한다. 이기적인 경쟁의식에 사로잡혀서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바치는 아첨성 발언과 동료에 대한 무례한 행동 등이 대표적인 징후에 포함된다. 어떤 TV 뉴스 앵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높은 자리로 승진하자 한 동료가 감탄하며 평하기를 시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기적인 경쟁의식은 세상 조직에 국한될 뿐 교회는 완전히 다르게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은 너무 자주 세상의 지혜가 신자들 가운데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주 우리는 이런 불행한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기별을 듣고자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지혜란 단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느끼기 :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려는 소망을 가진다.

행하기 :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A.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아이큐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아이큐는 세상에서 지식을 습득할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면 성경의 지혜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우고 나타내는 것을 나타낸다.

그대는 겸손과 참된 지혜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참된 지혜는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능력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계가 있다.

각자 하늘의 지혜를 따를 때 얻기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각자가 이야기해보자.

 

B.

아주 똑똑한 대신 성격이 나쁜 사람과 똑똑하지는 않아도 아주 성격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대는 누구와 사귀겠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성격이 좋은 사람이다. 사귐이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을 만드는 것이 하늘에서 오는 지혜에 속한다.

세상에 속한 지혜와 하늘에 속한 지혜는 각각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세상지혜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투쟁과 시기와 거짓과 불화가 도사리고 있지만 하늘의 지혜는 화평과 관용과 양순함과 순결함이 있고 거짓이 없다.

교회가 세상에 속한 지혜와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을 때 각각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하늘의 지혜를 드러내면 당연히 겸손과 화평과 사랑과 봉사가 넘칠 것이다. 자기주장을 위하여 투쟁과 불화를 일으키면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으려면 어떤 결심이 필요할까요?

자아가 철저히 예수님께 굴복되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까?

 

결론 : 진정한 지혜는 겸손한 생애와 사랑이 담긴 언어와 행동을 통해 실체가 드러납니다.

 

 

첫째 날() 지혜의 온유함

1116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3:13).

 

1. “지혜의 온유함이란 무슨 뜻일까?

 

: 지혜의 온유함은 선행으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을 표현한 말인 것 같다.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예수님을 예수님처럼 살게 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야고보서 3장 전체는 어떤 사람이 교사의 자격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은 훌륭한 교사 후보자들이지만, 그 범위는 회중 전체를 포함할 정도로 모호해 보인다. 야고보가 이 서신을 통해 설명하려는 지혜란 주로 고대 그리스나 현대의 서방 국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를 받는 지적인 박학다식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란 행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나스트로페가 지적하듯이 그 사람의 행실과 삶의 방식 속에서 나타난다(딤전 4:12, 13:7, 벧전 1:15, 2:12 참고). 우리의 행실은 우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증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동일하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

흥미롭게도 지혜와 총명(지식)”이란 표현을 사용한 유일한 구약 성경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율법을 준수하라는 모세의 권면에 나타난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4:6).

반대로 약 3:11에서 언급된 쓴 물은 교회 내에 질투와 이기적인 야망을 생산한다(14). “다툼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리테이아로서 배타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를 의미한다. 그런 태도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사탄과 더 가까워 보인다. 자아에 대하여 죽고 의지를 주님께 굴복시키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야고보가 경고한 그 같은 태도를 보일 위험성이 있다.

 

<부가설명> 지혜의 온유함이란 이 성경구절이 말하는 대로 선행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뜻한다. 생활은 생명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빛의 열매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기록하였다.(5:9) 그런데 빛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고 하였다. 빛의 열매란 생명의 열매이다. 야고보는 1장과 2장에서 산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된다. 행함이라는 것은 생명의 작용이다. 생명 없는 것은 행함이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도 바로 이런 이치이다. 바울이나 야고보나 성경 기자들은 그 기초에 깔아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이다. 지혜의 온유함도 생명의 작용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곧 행함이 있는 믿음으리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원한 생명은 생활로 나타나는 모습이 선행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우리의 믿음은 생명이 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형식뿐인 믿음인가? 죽은 사람도 모양(형식)은 사람이다. 그러나 행동이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교훈 : 참된 지혜는 박학다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겸손함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

 

 

둘째 날() 두 종류의 지혜

1117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3:15~16).

 

1. 3:15~16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세상의 지혜를 어떻게 묘사했는가? 세상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드러나는 이런 지혜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은 어떤 것인가?

[3:15,16]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 세상의 지혜는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했다. 그 모습은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교회내부에 이런 모습을 보면 교회를 마귀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저절로 얻는 지혜는 세속적이며 심지어 사악하고 악마적이며 성령과 무관하다. 오래전에 솔로몬도 사망의 길이지만 바르게 보이는 길에 대해 말했다(14:12, 16:25). 이런 지혜는 뿌리까지 파괴적이다. 시기심이 가득한 이기적인 야망이 자라나고 드러나면, 그 결과는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비슷하게 무질서, 불화가 될 것이다(고후 12:20).

 

2. 3:17~18, 3:3~7, 3: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 말씀은 하늘의지혜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3: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하늘의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는데 이것은 위로부터 태어날 때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야고보는 직접적으로 성령을 언급하지 않지만, 중생의 개념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 대신 사도는 복음의 기별을 들을 때 마음에 파종되는 말씀에 대해 언급하셨던 예수님의 비유를 기초로 삼아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농경 사회의 상징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13:3~9, 18~23 참고). 하늘의 지혜는 긍휼뿐 아니라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앞서 보았듯이 야고보서가 믿음의 열매로서 순종과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2:13). 요컨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할 뿐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고, 친절하며, 자비롭고, 용서하며, 기꺼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간과하되 그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부가설명>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위로부터 날 때, 즉 거듭날 때 발생하는 지혜이다. 3:3에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이다. 거듭이라고 번역한 헬라어가 아노덴인데 이 말은 요3:31에 위로부터라고 번역되었다. 3:1에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을 때 아노이다. 3:17위로부터 난이라는 말은 아노덴인데 요3;3거듭이라고 번역된 말과 같다. 요한은 아노덴 게나오라고 썼는데, “게나오는 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게나오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로부터의 지혜라고 했는데 우리말은 위로부터 난이라고 번역했다. 의미는 확실히 그렇다. 이 말은 거듭난 사람의 지혜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때문에 야고보가 열거한 8가지 사실은 결국 성령의 열매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그 열매는 갈5:21,22에 기록된 9가지 맛을 낼 뿐만 아니라 야고보가 기록한 8가지 성질도 함께 가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맛을 내는 열매이다. 우리부터 난 지혜는 성령의 지혜이며 그것은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한다. 다툼과 시기와 요란한 곧 시끄럽게 만드는 것과 악한 모습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탁월한 방법이라고 마귀적인 지혜라고 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좋은 일을 위하여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고 교회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고 무겁게 하는 것은 마귀적이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하겠다.

 

교훈 : 세상의 지혜는 마귀와 같이 이기적이며 파괴적이지만 하늘의 지혜는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령의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셋째 날() 갈등과 다툼의 원인

1118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4:1).

 

1. 4:1과 갈 5:17을 비교하며 읽어 보라. 두 성경절은 기본적으로 어떤 갈등에 대해 설명하는가?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와 거듭난 사람의 소욕 사이에 투쟁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야고보서 41절은 내부의 심각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진 신자들을 묘사한다. 교회에서 겉으로 드러난 다툼에는 쾌락의 탐닉(이 그리스 원어에서 쾌락주의라는 의미의 영어 ‘hedonism’이 유래함)이라는 내적 원인이 있다. 바울이 은유적으로 육체로 일컬었던 이런 악한 욕망들은 더 상위의 영적 동기와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인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로부터 난 지혜”(3:17)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교회에 벌어지는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 영적 상처의 원인이 되는) 끈질긴 투쟁에 연루된다.

 

2. 4:2~3을 읽어 보라. 어떤 악한 욕망이 언급되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교회에 영향을 미쳤는가?

[4:2,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정욕이 욕망으로 언급되었다. 이것이 교회에 다툼과 싸움을 일으켰다.

 

이 성경절은 직접적으로 십계명을 언급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4:2). 질투, 탐심, 욕망 등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문제는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비슷한 관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외적인 행위보다 내적 동기를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인에 대한 언급은 넓은 의미에서 분노를 포함하는 뜻일 것이다. 초기 교회에는 서로를 죽이는 신자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야고보가 있었던 예루살렘에서는 종종 배신이 신자들의 체포, 투옥, 처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부가설명> 야고보는 싸움이 너희 지체 중에 있는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나온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7:22,23)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지체 속에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는 싸우는 정욕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야고보가 지적한다. 싸우는 정욕은 욕심, 시기, 살인하는 정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정신은 우리의 속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깃들인 정신은 지체이다. 이런 것들은 다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난 결과물들의 잔재(殘在)들이다. 이것이 경험의 결과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사망의 경험을 한 상태로 태어난다. 썩어질 씨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벧전1:23 참고) 거듭나기 전에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 썩어져가는 구습을 행한다.(4:22) 이것이 경험의 법이 되어 지체 속에 도사리고 있다. 이것과 거듭난 마음의 법이 충돌한다. 이것을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소욕 곧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있다.

 

교훈 : 신자들이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교회는 각자의 욕망 때문에 분열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넷째 날() 세상과 벗됨

1119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4).

 

1. 4:2~4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왜 그들의 독자들을 간음한 자라고 부르는가?(3:6~10, 20, 54:5, 2:2, 16:13 참고)

[4:2~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3:6~10,20]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 패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2: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이기 때문에 한 남편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한 것을 간음하는 여자에 비유하였다. 교회는 예수의 신부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명심해야 한다.

 

야고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라는 성경적 개념을 암시하며 신자들이 세상의 풍습을 따르며 세속적 태도에 영향을 받는 상태를 영적 간음에 빗대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주()를 택하고 있었다.

그다음 약 4:5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신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절이라고 일컫는다. 원어의 모호함은 번역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어떤 성경은 성령으로 간주한다. 어떤 성경은 그것을 인간의 영으로 여긴다. 후자가 문법과 문맥에 가장 적합하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구문법과 전후문맥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기초로 5~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아니면 너희는 성경이 시기심에 대하여 헛되게 말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영은 동경하지만 그분은 더욱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1~4절에서 밝힌 것처럼 원래 악하지 않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뒤틀리고 악한 길에 빠진 인간의 영(마음)은 정욕에 물들었다. 은혜는 우리의 곤경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들은 그런 은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입장에 서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폭포 앞에서 작은 찻잔을 들고 있는 거지가 받는 만큼의 은혜만을 얻는다고 말했다. 오직 겸손하고 온유하며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과 의존성을 깨닫는 자만이 가당치 않은 자들에게 부여되는 은혜와 호의에 마음을 연다.

엘렌 G. 화잇은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것뿐이다”(시대의 소망, 317)라고 말했다.

 

<부가설명>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을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나타낸다.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철저히 믿음으로 거듭난 사실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재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생명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만이 그 생명으로 행함을 이룬다는 것을 가장 지초로 깔고 말씀을 전개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5절이 어려운 구절이라고 했는데, 잘 연구해서 번역해본 말씀이라고 적어놓은 구절이 이해가 쉽지 않다. 학자들은 [‘성령의 헬라어 프뉴마에 대한 해석을 1) 인간의 영이라고 하는 사람과 2) 성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1)로 보는 학자들은 시기(猜忌)’라고 번역한 헬라어 프도논의 사용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프도논은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으며 시기선한 행위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본문에서 프도논이 수식하는 프뉴마인간의 영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로 보는 학자들은 프도논젤로스(열심)’와 혼용되어 질투 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개역성경에는 하기까지로 번역된 프로스가 본 절과 앞 절이 연관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프뉴마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 나는 성령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하여 시기하기까지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하고 감사하고 감사한다.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염려를 잘 표현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교훈 : 세상의 풍습과 태도를 따르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정욕에 쉽게 물들지라도 겸손한 자는 부족을 깨닫고 은혜를 구한다.

 

 

다섯째 날() 하나님께 복종함

1120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여기서 명령의 순서에 주목하라. 만약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하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성공의 기회가 있을까? 사도행전을 보면 일곱 명의 유대인 퇴마사가 주술의 일종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귀신들린 사람이 덮치자 그들은 옷을 벗고 피를 흘리며 달아난다(19:13~16). 결국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실제로 그런 단계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마귀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의 첫 독자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공공연한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고 시험이 올 때마다 마귀를 대적하는 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1. 4:8~10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무엇을 명령했고,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는가? 또한 그것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굴복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가?

[4:8~10]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2. 손을 깨끗이 하라. 3. 마음을 정결케 하라. 4.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라. 5. 웃음을 애통으로 6.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7.주 앞에서 낮추라. 이렇게 일곱 가지 명령을 했다. 이것은 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회개와 용서와 은혜와 관련이 있다.

 

야고보가 약 3:13 이후로 제시했던 모든 기별은 변화를 호소하는 이 말씀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가 이번 주 공부했던 본문은 하늘의 지혜와 마귀의 지혜 그리고 마귀가 그랬던 것처럼(14:12~14 참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과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들을 대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잘못도 언급되고(4:4), 두 마음을 품은 잘못도 반복된다(4:81:8 비교).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부르심은 도덕적 훈계를 초월하여 예수님께서 호소하셨던 것과 같이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라는 부르심이다(5:3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야고보는 시 24:3~6을 기초로 하는 단계를 제시한다. (1)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2)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즉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3) 자신의 부족에 대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고 자신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임을 다시 깨달으라.

 

<부가설명>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직시하고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며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함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거듭남과 직결되어 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생명을 얻도록 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11:18, 2:4 참고)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을 얻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경험에 이르도록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인식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러면 마귀를 대적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기쁨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즐거운 생활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성령 안에서 친교하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게 된다.(요일1:1~7)

 

교훈 :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마귀를 대적한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슬퍼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121

 

세상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써 근심의 짐에 눌려 상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섬기기로 택하였고 세상의 괴로움을 받아들였으며 그 관습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품성은 훼손을 당하고 생애는 곤고하게 된다. 그들은 야망을 만족시키고 세속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양심을 상하게 하여 가책의 짐을 얹어 짊어진다. 끊임없는 근심은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우리 주께서는 그들이 이 속박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받으라고 그들을 초청하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허락하셨다”(시대의 소망, 33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월요일 소지에서 나눈 두 종류의 지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각각의 지혜와 관련 있는 사고의 목록을 만드십시오. 지난주에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조치를 취했던 때가 있었다면 그때 어떤 종류의 지혜가 사용되었습니까?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편벽됨이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면 하늘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 지혜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지혜를 사용한 것이다.

 

일요일 소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준수하면 주변 백성들이 그들을 지혜와 총명이 있는 백성으로 존경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교만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겸손으로 이끄는 하늘의 지혜와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의 실수를 피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소 봉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어떻게 교만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십자가는 어떻게 교만을 피하는 궁극적인 대비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도록 한 것을 성별된 특별한 백성이 된 특권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특권의식으로 대하며 우쭐댔다. 성소봉사는 회개와 희생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것을 특권행사로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데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며 겸손하게 굴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무한히 낮추심과 복종하심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위의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세상의 기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까? 그런 기준은 언제나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나 삶은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이것은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기만적인지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거짓 약속에 쉽게 사로잡히는 청년들이 이런 덫에 걸리지 않도록 돕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교우들 사이에 만연한 영적 질병이다. 학위를 사모하는 풍조,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과를 택하는 심리, 이런 것 때문에 성경의 원리와 먼 거리로 가는 풍조가 만연하다. 우리는 자신과 자녀들이 성경말씀에 충성하는 정신을 기르고 부모는 본을 보이고 자녀들은 본을 따르는 경건의 풍조를 일으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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