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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일 안식일

일몰오후 741

 

기억절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연구 범위 : 15:4~7, 15:11~32, 16:19~31, 18:35~43, 19:1~10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명 진술서를 기록해야 한다면, 별수 없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옮겨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노예가 되고 공포와 실망과 절망에 휩싸인 인류이다. 우리를 위한 대책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가 예수님께 희망을 가져도 되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배반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였고 이 세상은 하늘과 분리되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구렁텅이를 건너서 서로 교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다시 하늘과 연결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로로 죄가 만들어 놓은 구렁텅이에 다리를 놓으심으로써 부림을 받은 천사들로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하고 속절없는 타락한 인류를 무한한 능력의 근원이신 자와 연결시키셨다”(정로의 계단, 20.)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잃어버린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누가는 이런 진리를 세 가지 비유(잃은 양, 잃은 동전, 탕자)를 사용하여 예증하였다(15:4~32).

 

학습 목표

깨닫기 :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한다.

느끼기 : 그들을 효과적으로 찾아 구원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행하기 : 찾아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을 수행한다.

 

A.

하나님이 잃어버린 그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언제 깨달았습니까?

성경을 알기 시작했을 때. 각자 이야기해보자.

탕자의 비유에서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가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우리는 어떻게 동참해야 할까요?

쓸고 찾고 찾을 때까지 찾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B.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놓친 기회는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합니까?

나사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연락을 즐긴 모든 시간들이다.

예수님은 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주목하셨을까요?

누군가 자기들을 거두어줄 수 없을까 하는 그들은 마음에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는 정신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결론 : 예수님의 전도 활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그래서 우리도 이러한 은혜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첫째 날() 잃은 양과 잃은 동전

51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15:4).

 

1. 15:4~7을 읽어 보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15:4~7]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잃은 자를 찾도록 찾으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무관심해 보이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친히 찾아오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바친 영혼은 그가 보시기에 온 세계보다도 더 귀중하다. 한 사람을 구원하여 그의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구주께서는 갈보리의 고통을 당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 사람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떠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들을 꼭 붙잡으실 것이다”(시대의 소망, 483).

15:8~9을 읽어 보라.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있다. 잃은 동전의 비유는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을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 예수님 시대의 유대 땅은 가난한 백성들이 많아 동전 한 닢(드라크마)은 가족을 굶주림에서 겨우 면하게 할 수 있는 정도의 하루 품삯보다 조금 많은 액수였다. 둘째, 어떤 여인들은 유부녀의 징표로 열 개의 동전으로 장식된 머리 덮개를 쓰고 다녔는데 가난한 가정이라면 오랫동안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액수였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동전을 잃은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비유 속의 여인은 매우 당황하고 심히 근심하며 등불을 켜고 (아마도 그 집에는 창이 없든지 아주 작은 창만 있었을 것이다.)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뒤집다시피 하여 마침내 동전을 찾는다. 동전을 찾은 기쁨은 그녀의 마음을 채울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까지 흘러넘친다.

 

<부가설명>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에 대한 세 가지 비유가 있다. 일요일 교과에 그 둘을 취급하고 월요일 화요일 교과에 셋째 비유인 탕자 비유를 취급하고 있다. 처음 두 비유에서 중요한 단어는 찾도록 찾는다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읽은 것을 찾다가 잘 찾아지지 않으면 찾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 목자와 여자는 자기의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은 자를 찾으실 때 포기하지 않고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사랑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고 하셨다. 처음 목자는 예수님을 상징한다면 둘째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예수께서 잃은 양 한 마리, 곧 온 우주 세계 중에서 잃은 지구를 찾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찾도록 찾으시고 찾으셨을 때에 우주에 잃지 않은 세계를 이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나타낼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교회는 이 세상에 있으면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 샅샅이 찾아야 한다. 집은 이 지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이 지구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야 한다. 돈 때문에 구원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돈보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이해시키면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로서 남편 예수님이 주신 면류관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드라크마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선물하는 결혼반지와 같은 것이었고 신부른 그것을 면류관처럼 엮어서 머리에 썼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인 교회에게 영혼을 주셨다. 교회는 이 영혼을 열심히 찾아서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렇게 구원받은 영혼은 구원하기 위하여 애쓴 사람들의 자랑의 면류관이다.

 

교훈 : 하나님은 아끼는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소중한 동전 한 닢을 찾는 여인처럼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둘째 날() 탕자의 비유 1

518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15:13).

 

탕자의 비유(15:11~32)는 용서하는 사랑의 본질을 주제로 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단편으로 사랑을 받는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비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많은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벗어나 율법이 없는 먼 곳을 선택했다. 다른 아들은 집에 머물기로 선택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이 비유는 일곱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네 부분은 탕자에 관한 내용이며 두 부분은 아버지, 나머지 한 부분은 형에 관한 내용이다.

1. “내게 주소서”(12).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기 몫을 요구하기로 한 둘째 아들의 결심은 갑작스러운 충동이 아니었다. 죄는 종종 오랫동안 잘못된 우선순위를 둔 결과로 생긴다. 둘째 아들은 분명 친구들로부터 먼 곳의 화려한 삶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집에서의 삶은 너무 엄격했다. 물론 사랑이 있었지만 우물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반면 먼 땅은 그에게 제재가 없는 인생을 제안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과잉보호처럼 느껴졌다. 아들은 자유를 원했다. 방해받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 속에서 배반의 씨가 자랐다.

2. ‘왜 내게?’(13~16). 아들은 유산을 현금으로 바꿔 먼 나라로 떠났다. 그곳은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그러나 사랑으로 지켜보는 눈과 율법의 보호막 그리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은혜의 품이 그 나라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방탕하게 사는 곳이었다(13). 이곳을 제외하고 방탕을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아소토스는 신약에서 세 번 등장한다. 5:18에서는 술취함으로, 1:6에서는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벧전 4:3~4에서도 나타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하나님 없는 삶의 쾌락은 부와 건강을 소모시켰고, 그는 곧 돈도 친구도 먹을 것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화려한 생활은 시궁창 속에 빠졌다. 절대적인 빈곤의 시점까지 굶주리다가 그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 치는 일자리를 찾았다.

3. ‘나를 품꾼으로 삼으소서’(17~19). 하지만 이런 탕자도 여전히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아들이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 집이라 불리는 자리와 아버지라 일컫는 분, 사랑이라 칭하는 관계의 끈을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간청할 말을 준비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대하시고 단지 아버지의 시선 안에, 그 사랑의 돌봄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더 좋은 집이란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이다.

 

<부가설명> 교과 자체에 설명이 감동적으로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부가설명이 가히 필요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이 아들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초췌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도 자기 체면을 세울 준비를 해가지고 왔다. 그것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5:19)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마음이 사실이겠지만 집을 떠날 때 잘못 판단한 사실에 대하여 무조건 잘못했으니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태도와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변명은 필요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맡기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아들은 아버지를 만날 체면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이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품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렇게 품으신다. , 놀라운 사랑이여! 놀라운 은총이여!

 

교훈 : 자유와 방종을 찾아 하나님의 보호의 품을 떠난 삶에는 잠깐의 행복과 쾌락이 있을 뿐 상실과 공허와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

 

 

셋째 날() 탕자의 비유 2

519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15:20).

 

4. 귀향(15:17~20). 집으로 가는 여정은 회개의 시간이었다. 그 길은 스스로 돌이킴에서 출발했다. 아버지의 집과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그는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갔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 준비한 말은 네 부분으로 나눠지며 이는 진정한 회개를 정의한다.

첫째는 인정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인정한다(18). 그는 이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신뢰하고 의지할 필요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신뢰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고백이다. 탕자가 저지른 일은 단순한 판단착오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버지께 범한 죄이다(18).

셋째는 참회이다. ‘나는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습니다’(19). 하나님의 존귀함과 대비되는 인간의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은 진정한 회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넷째는 간구이다. ‘내게 뜻대로 행하소서’(19).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는 회개의 마지막 단계이다. 아들은 그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5. 기다리는 아버지(20~21). 아버지의 기다림과 잠 못 이루는 밤, 근심과 희망의 시간은 탕자가 집을 나선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 기다림은 아직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보자 끝이 난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20).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품성을 잘 포착한 모습은 없다.

6. 기뻐하는 가족(22~25).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새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잔치를 준비시켰다.

가정이 축제 분위기이다. 집을 떠난 것이 사망이었다면 돌아온 것은 부활과 같기에 당연히 기뻐해야 했다. 그 아들은 탕자였다. 그럼에도 회개한 아들에 대해서 하늘은 기뻐한다(7).

7. 큰아들(25~32). 작은 아들이 집을 떠나 탕자가 되었다면 큰아들은 마음이 떠나 탕자가 되었다. 그의 마음은 분노, 불편, 자기 의로 가득하고 동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생을 돈이나 낭비하는 이 아들이라고 부른다(30). 아버지에 대한 큰아들의 태도는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2)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회개한 모든 죄인을 대하는 하늘의 태도를 나타낸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부가설명> 집을 나간 아들이 마음에 아버지께 할 말을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했다. 월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은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 그에게서 돼지 냄새가 났을 것이다. 그의 옷은 돼지 오물에 더럽혀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의하지 않고 껴안았다. 네가 왜 그따위 짓을 했느냐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돌아온 아들이 있을 뿐이다. 꽉 껴안은 아들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렇게 껴안으시니 눈물이 납니다. 그 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냥 마냥 울고 또 울지 않았을까? 문제는 큰 아들이다.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이 못마땅하다. 그의 태도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어떤 죄인이 교회를 찾아올 때 그의 몰골 때문에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만난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변명하면서 말한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 나는 이 말이 너무 가슴을 친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아버지께는 맏아들도 역시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것이 다 그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 하나님!

 

교훈 : 죄인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를 사랑과 용서로 맞이하시며, 하늘은 돌아온 탕자로 인해 기뻐한다.

 

 

넷째 날() 기회를 놓침

520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예수님이 비록 죄 가운데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시기는 했지만 아무에게도 구원을 받도록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구원은 대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러나 사람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와 같은 경험을 누릴 수 있다. 다른 기회는 없다.

 

1. 16:19~31을 읽어 보라. 이 비유의 중심 기별은 무엇인가?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이 비유의 중심기별은 구원의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목숨이 붙어 있고 정신이 분명한 그 기간뿐이다. 두 번째 기회는 없는 것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구원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진리, 즉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오늘의 중요성과 사후에 구원을 얻을 기회의 부재를 가르친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이 비유는 부에 내재적인 악이 존재한다든지 가난이 필연적으로 선이라는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자로 살아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돈이 많든 적든, 학식이 있든 없든, 힘이 강하든 약하든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다.

현재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구원을 받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 비유는 또한 영원한 상급은 물질적 소유와 상관이 없음을 가르친다. 그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16:19) 즐겼지만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은 잊고 있었다. 하나님을 잊으면 동료 인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부자의 죄는 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영접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것보다 하나님의 가족이 훨씬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데에 있었다.

사후에는 구원받을 두 번째 기회가 없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두 번째 진리는 사후에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이 비유의 또 다른 목적은 하나님을 인정하든지 부인하든지 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현세의 삶에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후에 두 번째 기회가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신학은 모두 큰 기만이다.

 

<부가설명> 여러 교단의 신자들이 이 비유를 영혼불멸을 가르치는 교훈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유 중에 영혼이라는 단어는 결코 없다. 또 지옥이라는 단어나 천국이라는 단어도 없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을 생각하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어 선택이 분명하다. 음부 불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곳을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음부는 무덤이고 불꽃은 심판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과 저자가 말한 대로 구원의 기회는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뿐이고 죽은 후에는 결코 두 번째 기회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칠 뿐만 아니라,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전도해 주도록 요청했을 때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되고 그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전할지라도 듣지 않는다고 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유일한 도구임을 가르쳐주셨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이 있을지라도 기록된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바른 구원의 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비유를 하신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유대 당국자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고 죽였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는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살아 있을 때만 유효하고 죽은 뒤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다섯째 날() 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봄

521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8:39).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사명 진술은 전인적인 사역에 대한 확증이다. 예수님은 남녀를 온전하게 하시고 그들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다. 누가는 예수님이 병든 두 사람을 어떻게 온전하게 회복시키셨는지 보여준다. 한 사람은 신체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영적으로 맹인이었다. 거지와 세리 그 둘은 모두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선교의 대상이었고 모두 그분의 마음과 손길 안에 있었다.

 

1. 18:35~4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의존성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 중에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18:35~43]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하나님께서 보게 해 주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마가에 따르면 그 맹인의 이름은 바디매오이다(10:46). 그는 여리고 외곽에서 구걸하던 사람이다. 신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사회적인 인맥도 없이 가난에 찌들었던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하늘의 은총이 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18:37). 그는 믿음이 요동치며 절규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8:39).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눈도 귀도 그리고 손과 발도 아니고 오직 세상을 만드신 분과 연결된 마음이다.

 

2. 19:1~10을 읽어 보라. 이 기사에서 눈이 먼 사람은 누구인가?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이 사건에서 눈 먼 사람은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눈을 떴다.

 

예수께서 만나셨던 사회적 낙오자 중 마지막 인물, 삭개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누가밖에 없다.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사명은 삭개오와의 이 만남을 통해 멋지게 성취된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자 그 도성의 바리새인들에게 비난받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구주가 찾아서 구원할 죄인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그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한 장소와 방법은 다소 이색적이다. 뽕나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은 궁금증 많은 남자 그리고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하시는 사랑 많으신 주님. 그분은 삭개오와의 식사에 스스로를 초청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식사보다 그에게 전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삭개오는 이 음성을 듣기 전에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했다(8).

 

<부가설명>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마음으로 예수라는 분을 한 번 보고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세리 마태가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태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여행길이었다. 그런데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방형이 아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곳을 스스로 찾아 방문하신 것이다. 그 길에는 소경 바디메오도 있었다. 그들을 찾아 가셨다. 삭개오가 그 찾는 대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삭개도는 미리 자기 이름을 예수께 알려드린 일이 없다. 또 나무에서 예수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고 통지한 일도 없다. 모두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 삭개오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다. 그리고 그날 삭개오와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께서 이렇게 찾아오신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확인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영육간의 밝은 시력을 갖도록 하자.

 

교훈 :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낙오된 자들, 낙인찍힌 자들까지 구원하심으로써 우리를 전인적으로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그분의 사명을 성취하셨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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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은 한 사람의 죄인뿐 아니라 하나님께 배도하여 죄로 멸망하게 된 한 세계(世界)를 대표한다”(실물교훈, 190).

 

한 영혼의 가치를 누가 능히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그 가치를 알고자 하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몹시 고민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목하여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보라.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간다면 거기서 그대는 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실물교훈, 19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모든 종교는 하나님을 찾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오히려 인간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삭개오에게 내려오라”(19: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어떤 경험을 통해 그대를 찾고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말씀을 배우며 연구하며 말씀 안에서 성경의 하나님을 만났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무엇입니까? 그의 태도에는 어떤 영적 결함이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생각보다 그와 동일한 태도를 보이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20:1~16을 참고하십시오.

[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자기의 행한 일을 크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아우를 평가하였다.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의 보상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이 다 그의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일부의 반응을 어떻게 예언하였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복음을 전할 지라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면 가운데 하나는 그분이 거지 맹인, 삭개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등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만민의 평등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특히 그들의 정치 성향, 문화, 윤리성 때문에 이전에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합니까?

구원과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탕자의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어떻게 서로를 보완합니까?

탕자는 돌아와 아버지 집에 거하게 되었고 부자는 아버지를 올바르게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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