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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선지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

 

10월 3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6분

 

기억절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연구 범위 : 렘 23:14~15, 렘 20장, 행 2:37, 욥 3장, 렘 18:1~10, 렘 18:18~23.

 

누구든지 주를 어느 정도 따르다 보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형통한 삶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하였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몸소 배워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믿음은 시련의 때에 투쟁 중에 있는 삶이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불공평하고 불의한 고통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목적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외톨이가 될 필요가 없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우리는 큰 그림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궁극적인 소망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런 지식과 소망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예레미야도 이런 개념을 잘 알았지만 때로 그것을 잊고 오직 자신의 고난에 치우쳤던 것으로 보인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이 땅의 고통 속에 내재되어 있는 대쟁투의 실체를 인식한다.

➋ 느끼기 : 박해 속에서도 전진한 예레미야처럼 뼛속에서 일어나는 불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큰 계획을 염두에 두고 반대를 당할지라도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로 결심한다.

 

A.

❷ 렘 20:9을 보면 예레미야의 마음속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과 현실적 핍박에 직면했을 때 일어나는 갈등이다.

❸ 슬픔에 압도되고 자기연민에 빠진 선지자의 모습을 통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 선지자도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우리가 이런 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❹ 그대가 남은 교회의 백성으로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은 무엇일까요?

※ 우리의 기별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B.

❷ 바스훌과 유다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의 기별을 거부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자신들의 생활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만 강했기 때문이다.

❸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듣고 싶은 기별만을 바라는 유다 백성의 태도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 우리도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시정해야 할 기별을 외면하면 그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❹ 우리가 절대로 거부하지 말아야 하는 기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 안에서만 구원과 생명이 있다는 기별이다.

 

결론 : 예레미야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가 강하다보니 그는 종종 낙담하여 자신의 삶을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끊임없이 그의 속을 뜨겁게 하여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대쟁투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 있습니다.

 

 

첫째날(일) 경건하지 않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10월 25일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렘 23:14).

 

2천 년 전의 유다 국가의 상황으로부터, 더욱이 그들의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가 예레미야의 시대에 벌어지고 있던 일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백성들에게 가혹한 경고와 위협의 기별을 전하는 하나님이 냉정하며 심술궂고 복수심에 불타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이다. 구약성경이 계시하고 신약성경이 더 확실히 드러내는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며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을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결과뿐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하나님이 다루시려는 유다의 악행들은 무엇이었는가?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악행들은 무엇인가?(렘 23:14~15, 5:26~31)

[렘23:14,15]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렘5:26~31]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29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답: 선지자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그들로부터 악이 나와서 예루살렘을 채운다고 경고하였는데,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악에서 돌이키지 않도록 가르쳤다. 또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권력으로 백성들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악행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빠져 있는 죄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대표해야 할 제사장들과 그분의 대변인이 되어야 할 선지자들이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었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가 상대했던 문제들의 발단이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악행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먼저 영적인 지도자들의 배도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고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렘 23:14)다. 하나님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셔도 그들은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그들은 고아를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라는 훈계를 잊었다(렘 5:28).

모든 면에서 그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들뿐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은 곁길로 빠진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애써 부르신다. 하나님은 여러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치유하며 회복시키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한다면 무엇을 더 해줄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종교 지도자들이 그 종교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죄를 짓는데서 돌이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쳤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악이 나와서 예루살렘을 채웠다. 그러니까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죄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악을 행하기 때문이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근본적인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떠나도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성경의 하나님이 없는 불교나 유교의 도덕적 수준이 엄청 높은 것을 우리도 보고 세상도 그렇게 인정한다. 재림교회가 바벨론이라고 말하는 작은 뿔 세력이 세상으로부터 도덕적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재림교회는 그들을 선하다고 하지 않는다. 모순이 아닌가? 그렇다면 재림신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다는 칭송을 그들만큼 받고 있는가? 우리 목회자들은 신부들보다 도덕적이며 승려들보다 도덕성이 탁월한가? 아마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 못할 것이다. 재림교회 신자들이 목회자들로부터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도 된다는 기별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악이 나와서 교회를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참으로 심히 두렵다.

 

교훈 : 하나님은 백성들이 저지르는 여러 악행을 나열하며 그들이 돌아오도록 호소하셨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하나님을 떠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둘째날(월) 고랑을 찬 예레미야

10월 26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선지자들의 사명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이 기별을 전파할 때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의 숫자는 적었다. 예를 들면 노아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지 모르지만 소수의 사람만 방주에 들어간 것으로 봤을 때에 우리는 대다수가 노아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성경의 역사에는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1. 렘 20:1~6을 읽어 보라. 그의 기별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렘20:1~6]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3 다음 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도 일반이리라 하셨느니라.

 

답: 선지자를 때리고 착고에 채웠다. 즉 기별을 악하게 거절한 것이다.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말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그 말 때문에 그는 그 고관으로부터 곤경을 당하였다. 우리는 예레미야 19장에서 하나님이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3절)고 백성들이 칼에 쓰러지며 들짐승과 새들이 그들의 시체를 먹고(7절)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잡아먹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렘 19:9).

그 같은 예언을 듣고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지만 특별히 지도자로서 바스훌의 심기가 많이 상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즉각적인 반응은 기별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같이 끔찍한 것을 믿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스훌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기별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는 율법에 의거하여 예레미야에게 매질을 하고(신 25:1~3) 그의 몸에 나무 고랑을 채웠다. 바스훌은 선지자를 다음 날에 풀어주었지만 이런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유다에 대해서뿐 아니라 바스훌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였다. 머지않아 바스훌과 그의 가족은 소름끼치는 사례가 될 것이었다. 모두가 그들이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는 모습을 볼 것이었다. 예레미야서의 이 부분에서 바벨론이 포로로 끌려가는 지역으로 처음 언급된다. (물론 예레미야서의 각 장들과 각 장의 문단들이 시간 순서로 배열된 것은 아니다.)

 

<부가설명> 오늘날 교회가 평안의 기별을 좋아한다. 평안의 기별이라고 할 때 오해하지 않아야한다. 괜찮다, 괜찮다 하는 기별만이 평화의 기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의 복음이 빠진 기별도 평화의 기별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은 그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반드시 사망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이끈다. 즉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거듭나는 경험으로 이끌지 않는 기별은 평화의 기별에 속한다. 회개를 외쳐도 회개가 도덕적으로 또는 율법적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는 선에 머문다면 천주교의 고해성사나 불교의 속죄 행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참 회개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데 생명을 얻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천주교나 불교의 회개와 다를 것이 없다. 이 생명을 깨닫게 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과 순종으로 의와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면 그것도 평화의 기별이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심지어 고행에 이르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나아가 참으로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될 것이며 그 생명의 작용으로 빛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의 암울한 예언은 백성들에게 거부를 당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로 인해 바스훌로부터 치욕스런 경험을 했지만 예언을 멈추지는 않았다.

 

 

셋째날(화) 골수에 사무친 불

10월 27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바스훌과 유다 국가에 대한 예레미야의 혹독한 예언은 그의 말이 아니었다(렘 20:4~6). 비록 그 예언으로 하루 동안 고랑을 차야 했지만 그 예언은 선지자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물론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예레미야의 마음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되었지만 성령의 영감하에 기록되었다. 그것은 단지 그 같은 상황을 원치 않는 한 인간의 진심어린 외침이자 절규였다.

 

1. 렘 20:7~14을 읽어 보라. 그는 뭐라고 말하는가?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인간성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렘20:7~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답: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역시 인간의 연약성은 자기를 해하는 자들이 잘못 되기를 원하는 속마음이 있음을 드러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원망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다시 깨달으면 찬양하고 오히려 자기가 태어난 사실을 탄식한다.

 

그의 말은 언뜻 거의 신성모독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에게 맹렬한 반대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하나님에게 속았다는 식으로 말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것이 “파멸과 멸망”뿐이니 사람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불평한다.

 

2. 예레미야가 렘 20:9에서 하는 말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답: 인간적으로는 거부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부득불 말하게 되는 부르심의 사명의식을 나타낸다.

 

그는 사명을 포기하고 말씀 선포를 단념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불같이 뜨겁고 뼛속에 사무쳤다. 이것은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깨닫고 따라야 하는 자를 묘사하는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우리는 비슷한 개념을 암 3:8과 고전 9:16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예레미야가 겪는 갈등뿐 아니라 그의 심령 안팎에서 일어나는 대쟁투를 볼 수 있다. 잠깐 동안 그는 악한 자들로부터 곤궁한 자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곧바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일군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철저한 소명의식(召命意識)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 소명의식이 그의 사명감을 강하게 한다. 이런 진정한 소명의식이 없이 복음에 종사하는 것은 취직하는 것이다. 복음에 종사하는 것은 취직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의식 때문에 부르신 분에게 굴복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예레미야 당시 선지자들처럼 그들로부터 사악이 나와서 교회를 물들일 것이다. 또 신자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지도자와 상관없이 스스로 예수님께 굴복하고 충성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을 얻고 그 생명 작용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이 생명이 없으면 죽은 자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된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란 생명이 없는 믿음을 뜻하는 말이다. 야고보서의 이 표현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사람이 스스로 행하는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행하는 믿음으로 생활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는 자신의 소명으로 인해 큰 갈등을 겪는다. 반대와 치욕을 피하기 위해 사명을 포기하고 싶지만 그의 심령이 뜨거워 멈출 수가 없었다.

 

 

넷째날(수) 그 날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10월 28일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렘 20:14).

 

가장 혹독한 성경의 비평가들이라도 성경이 인간의 약점과 연약성을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죄와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제외하면 성경에 그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 가운데 연약성과 과오를 노출시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선지자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그분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죄인들이었다(롬 3:22 참고). 노아에서 베드로에 이르기

까지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손상을 입은 피조물이며 엘렌 G. 화잇의 말처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구원을 주장할 만한 아무런 공로와 선이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죄를 속죄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하나님 앞에 제시한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탄원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나를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해준다. 그분의 귀와 마음은 나의 가장 연약한 간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열려 있으며, 그분께서는 나의 간절한 필요를 채워주신다”(믿음과 행함, 106).

 

1. 렘 20:14~18을 읽어 보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선지자 개인의 상황과 관련하여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렘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답: 선지자는 사명을 감당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가 존재하게 된 사실을 탄식한다.

 

예레미야의 말은 그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던 욥을 상기시킨다(욥 3장 참고).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통을 겪는 현 시점에서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그의 심령을 불태웠다.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그의 지적인 확신과는 상관없이 현재로서는 그것조차 그의 슬픔에 가려졌다.

종종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지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너무 큰 슬픔과 고통에 압도되면 이러한 약속들은 다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직 눈앞의 아픔만 보인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모두와 비슷한 예레미야의 인간성을 본다.

 

<부가설명> 예레미야의 이런 탄식을 읽으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 것을 짐작하게 된다. 핍박이 심한 역사적 상황에서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당한 경험이다. 지금 우리는 평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특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적 사회적 환경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하는 사회는 아니다. 오히려 대접받는 사회이다. 그래서 믿음이 해이해진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난을 살 필요도 없다. 평안하다 하는 때든지 환난의 때든지 하나님의 백성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시대 환경에 처하여 자기의 생존이 원망스럽더라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요즘은 평안해서 인간의 편리와 재미를 위해서 말씀을 등한히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재림신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할애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진다. 평안이 가져다주는 신앙의 환난이다. 우리는 스스로 평안으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레미야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는 슬픔에 압도되는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다.

 

 

다섯째날(목) 선지자를 죽이려는 계략

10월 29일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7~8).

 

1. 렘 18:1~10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예언 해석의 중요한 원칙은 무엇인가? 또한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중요한 영적인 원칙들이 있는가?

[렘18:1~10]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답: 징벌에 대한 예언은 그들로 회개하여 그 징벌을 면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신다는 원칙을 가르친다.

 

수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여전히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제공되는 것을 본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돌아설 기회가 있었다.

위의 성경절에서 우리는 여러 예언의 조건성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징벌하겠다는 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하면 그분은 자신이 이루리라고 하셨던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행하실 일은 조건적이다. 그것은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하나님이 달리 행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이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훈계하실 필요도, 형벌을 내리실 필요도 없다. 그런 경우라면 그분은 징벌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말씀에서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2. 렘 18:18~23을 읽어 보라.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하려는 일에 대하여 어떤 이유가 있다고 믿었는가? 예레미야는 어떤 식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는가?

[렘18:18~23]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답: 백성들은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라고 믿었다. 그들이 이런 믿음으로 예레미야를 거짓선지자로 몰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당연한 형벌을 내리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율법의 가르침과 지혜자들의 책략 그리고 선지자들의 말씀을 보존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백성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정죄할 때 예레미야가 얼마나 큰 분노를 느꼈겠는가.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자기기만적인가!

 

<부가설명> 성경의 저주하는 예언과 형벌에 대한 예언은 그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기별을 바르게 듣고 깨달아서 그런 저주와 형벌이 임하지 않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이다. 우리가 성경의 모든 예언은 반드시 예언한 내용대로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예언이 있고 이루어지지 않기 위하여 하는 예언이 있다. 이루어지는 예언은 구속사에 대한 예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저주와 형벌에 대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예언이다. 대표적인 것이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예언이다. 성경에 이런 예언이 많다. 예레미야가 유다에 하는 예언들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예언이다.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18:7) 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예언을 우리는 경고라고 표현한다. 성경은 많은 경고를 담고 있다. 유의해서 그 경고가 우리에게 성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을 조건적 예언이라고 표현한다.

 

교훈 : 하나님이 행하시겠다고 경고하신 말씀은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조건적이다. 그분은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으신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30일

 

렘 18:11~17에서 우리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을 중지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11절).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경고와 호소를 듣지 않고 계속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12절)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무엇을 행할지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이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 여러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이 그분께 순종할 자유를 소유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호소하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마찬가지로 그들이 순종할 자유를 소유할 수 없다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을 벌하실 근거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창조되기 전에 그들이 소유한 선택의 자유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예를 들면 이런 중요한 진리는 신 31:16~21에도 나타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신 31:20)길 것을 아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더 분명한 증거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기는 이런저런 일을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선택해 두신 상황 안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의 자유선택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해 두신 사실 중에 인간에 어느 선택에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만 있다. 이것은 필자의 생각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존재와 생명을 선택할 자유가 없고, 우리의 처한 지구라는 환경을 벗어날 선택을 할 수도 없다. 믿음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선택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반응이 아닌가?

 

➋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처럼 뼛속에 사무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불길을 어떻게 간직할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우리 의식을 채울 때 간직할 수 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➌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부흥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십자가와 그것이 약속하는 소망이 부흥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참된 회개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풍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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