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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일 안식일

일몰오후 528

 

기억절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1).

 

연구 범위 : 4:3~7, 21:1~9, 29:16, 9:18~21, 19, 5:14, 13:1~11

 

모든 성경 연구자들은 성경이 어떤 개념이나 사상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지상 성소 봉사는 전체적으로 구원의 계획을 예언하는 상징이었다. “유대인의 제사 제도의 의의(意義)는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으나 넓고 심오한 진리가 그 예식과 표상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복음은 그 오묘를 푸는 열쇠이다. 우리는 구속의 경륜을 앎으로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실물교훈, 133). 하나님은 지상 성소 또는 예언서(, 2, 7, 8장과 계시록)뿐 아니라 여러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상징을 사용하셨다. 예수님도 심오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와 실물교훈에서 상징을 사용하셨다.

예레미야서에도 상징과 비유는 풍성히 사용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 상징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그 의미와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상징들과 상징적인 행동들을 이해한다.

느끼기 : 심판을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의 죄를 심각하게 인식한다.

행하기 : 하나님이 우리의 길에 두신 신호와 기별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결심한다.

 

A.

재림교회를 상징하는 로고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습니까?

성경을 기초로 하여 진리의 횃불을 비추되 세 천사의 기별로 그 빛을 비추는 상징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사랑이 담겨 있는 구약의 상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성소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 요셉 사건, 출애굽사건 등등, 많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상징적인 행위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간단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하도록 현재 하나님이 보내시는 특별한 신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인을 치는 사건이 아닐까?

 

B.

그대는 토기장의와 옹기의 비유들을 통해서 어떤 경고 또는 소망을 발견합니까?

각자가 대답해보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전적이 주권을 가지신다는 것과 그것을 거절할 때 우리는 깨어지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면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은 세마포 띠의 비유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깨닫기 바라실까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세 천사의 기별을 말이 아닌 우리의 삶과 행동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기별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결론 : 상징과 상징적인 행위는 기별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예레미야는 상징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깨진 옹기와 썩은 허리띠는 위로를 주는 장면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우리를 가까이하시려는 그분의 열망을 긍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첫째날() 상징에 담긴 진리

111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3~5).

 

성경에서 상징은 매우 풍성하게 사용된다. 여러 종류의 상징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그 자체보다 더 큰 진리를 설명한다.

 

1. 4:3~7을 읽어 보라. 두 제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4:3~7]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참 신앙과 불신앙을 상징한다. 가인은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믿지 않았고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믿었다.

 

우리는 성경의 서두에서부터 스스로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시도(가인의 제사)와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아벨의 제사)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2. 21:4~9을 읽어 보라. 장대에 달린 놋뱀은 무엇을 상징하는가?(12:32 참고)

[21:4~9]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참고[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십자가에서 죄를 처리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이 쳐들린 뱀을 쳐다봄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원했다. 쳐다보는 것은 믿는다는 의미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준비된 방법을 의지하여 생명을 구원했다”(부조와 선지자, 431).

구약성경에서 지상 성소 봉사는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는 가장 구체적이며 상징적인 설명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대속적인 희생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즉 그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대속물이 그들 대신 죽어야 했다(고전 5:7 참고).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의식들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우리는 성소 봉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뿐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대제사장 봉사와 재림전 심판 그리고 죄의 최종적인 처결에 관한 상징을 볼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의 서두에서부터 스스로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시도(가인의 제사)와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아벨의 제사)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교과 1문의 설명 글이다. 가인의 제사는 스스로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시도를 상징한다는 가르침이 우리교회의 기본적 가르침이고 증언의 말씀에도 있다. 그렇다. 그러나 구속의 복음의 시각으로 보면 좀 더 넓고 근본적인 사실이 보인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자기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드린 제사이다. 그러나 가인이나 아벨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고 성경은 단언한다.(고전15:22) 하나님은 가인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러나 죽은 상태로 받으실 수 없다. 살려서 받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다.(4:7) 죄를 다스리는 것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인정을 받는 것이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속죄제를 드렸다. 그것은 자신이 구주의 속죄 공로 없이는 죽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구주의 속죄로 비로소 자신이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았고 구주의 속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구주의 속죄를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을 받으시고 가인을 받지 않으신 것이다. 이유는 가인은 죽은 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하나님께 갈 수 없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12:27)

 

교훈 : 성경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심오한 진리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특별히 지상성소봉사는 거대한 구원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둘째날() 토기장이의 진흙

112

 

1. 아래 성경절이 사용하는 상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핵심 진리는 무엇인가?(2:7)

[18:1~10]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29:16]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45:9]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64:8]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9:18~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또 창조주께서는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예레미야는 계속되는 거절과 박해로 인해 포기하고 싶었다. 이런 백성들을 위해 씨름하고 싸울 가치가 있는가? 그는 종종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토기장이의 손을 보면서 하나님이 인간 진토를 가지고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관한 상징과 비유를 발견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에 어떤 다른 진리가 있든지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가르친다. 즉 예레미야의 관점에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토기장이와 진흙의 상징은 백성들의 과오와 심지어 고집스럽고 그릇된 결정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진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능력과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현 상황이 어떻든지 결국 그분은 승리하실 것이다.

예레미야 이후 수백 년이 지나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구약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동일한 교훈을 가르쳤다. 사실 바울은 롬 9:21에서 직접 렘 18:6을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선택권 그리고 그것을 남용함으로 빚어지는 불행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절대 군주이시며 자기를 희생하시는 분임을 믿을 수 있다. 죄악은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이 이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절대권을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을 파괴하는데 사용하지 않으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잘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그릇이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되면 목적에 맞게 사용될 수 있도록 새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임 딱딱하게 굳어져서 깨어진 조각은 다시 진흙으로 돌려서 그릇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버릴 수밖에 없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권도 그와 같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을 예수 안에서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사람 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대신 죽게 하셨고 부활하여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새로운 그릇이 될 수 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하면 새로운 피조물 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끝까지 그렇게 남아 있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을 불가불 그 결심대로 처리하신다. 그것이 불 못이다.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의 손에서 다시 지음 받도록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맡겨야 할 것이다.

 

교훈 : 토기장이의 비유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게 한다.

 

 

셋째날() 한 민족의 나락

11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19:4).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유다를 엄습한 죄악들 중에 몇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것으로 모자라서 그 땅을 낯설게 했다. 히브리어로 그 말은(불결하게 라는 말은, 나카르) ‘이국화하다’, ‘낯설게 하다’, ‘세속화시키다라는 뜻이 있다. ‘이곳이 성전인지 예루살렘인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핵심은 그 나라가 주변 국가들과는 뭔가 다르고 구별되는 거룩하고 특별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19:5~6 참고).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증인으로 만들어 줄 고유한 특성과 독특성을 상실했다. 그들은 그냥 다른 민족과 같이 되었다.

 

1.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이방인처럼 만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참 교회를 배도한 교회처럼 만들어도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19:5).

고대 세계에는 인간 제물의 개념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금지된 행습이었다(18:10). “이는 내가뜻한 바가 아니니라고 번역된 구절은 원어로 그것이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러한 행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타락하고 강퍅한 우리가 보기에도 혐오스럽다면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라.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 부패한 문화의 힘에 압도되어 백성들은 이렇게 끔찍한 의식을 행할 정도로 타락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말씀에 생각이 맞춰져 있다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서리칠 법한 그러한 행습들을 유행하는 문화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얼마나 쉽게 용납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우리가 이런 사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5:14 참고)

 

<부가설명> 오늘날 교회는 성경이 계시한 대로 성별하지 않는다. 성별하지 않는 것을 문화추세로 생각하여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대예배 시간에 복장을 갖추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정신과 음식을 구별하여 먹는 생활과 예배순서를 올바르게 하는 사상이 바르게 서지 못하는 것 같다. 개신교회의 예배문화가 우리교회 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설교도 진리의 말씀을 성경복음 그대로 증거 하지 못하고 개신교 설교를 모방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재림교회인지 일반 개신교회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상태가 아닌지? 우리는 홀로 처할 백성이다.(23:9) 열방 중에 하나로 여김을 받는 교회가 아니다.(삼상8:20)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서서 일반 기독교 같이 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계시대로 깨달은 우리의 진리를 따라 우리는 홀로 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들어서는 것이 낯선 땅에 있는 것 같이 되어서 되겠는가. 우리는 예레미야의 기별을 잘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유다는 이방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과 친밀했다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의식을 행할 정도로 타락하였다.

 

 

넷째날() 옹기를 깨뜨림

114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19:10~11).

 

어제 보았듯이 유다는 깊은 배도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기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상징적인 행동을 하게 하셨다. 그것은 다가올 위험에 대하여 백성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1. 19:1~15을 읽어 보라. 예레미야는 어떤 행동을 해야 했으며 그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19:1~1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케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6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7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 이 성으로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을 인하여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모욕할 것이며 9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 곳과 그 중 거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곧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 예레미야는 토기를 완전히 깨뜨리는 행동을 해야 했다.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들 앞에서 그렇게 하였다. 그것은 유대민족이 이렇게 깨어진 토기 같아졌기 때문에 버려질 것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 다시 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행할 일을 정확히 목격할 증인을 데리고 갔다. 증인들은 유다에서 온 장로와 제사장들이었다(19:1). 그들은 지도자로서 나라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가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기별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가 옹기를 깨뜨릴 장소였던 하시드(질그릇 조각) ”(19:2) 근처에는 토기장이들의 공방이 있었고 그들은 문 밖으로 깨진 그릇 조각들을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징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깨진 토기에 무슨 쓸모가 있는가? 만약 토기에 금이 갔다면, 본래의 계획은 아닐지라도 적당한 용도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것을 금가게 할 생각이 없다. 대신 완전히 쓸모없게 부술 작정이다. 그의 행위와 이어지는 말씀까지 접하고서도 백성들이 경고의 기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경고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행위의 명백한 최후이다. 누가 깨진 옹기를 고칠 수 있겠는가? 비록 하나님은 그 민족에게 미래의 소망을 주셨지만,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 이상 지금 당장은 유다 민족과 그의 자손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가증한 죄로 부정해진 곳들은 곧 그들의 시체로 더럽혀질 것이었다. 그들의 부패의 깊이는 아마도 그들의 부패가 가져온 징벌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기를 열망하신다. 그렇기 위해서 창조주이신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사망을 처리하셨다.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모든 종들을 보내어 이 생명을 받으라고 호소하신다. 눈물로 호소하신다. 그래도 그들은 거절한다. 그들이 살아 있는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선을 행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모든 도덕적 선악에 대하여 공평하게 대우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부터 잘못 되었다. 아담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선은 방부제를 치는 것과 방취제를 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정하기를 거절한다. 이미 그들에게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거짓이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민답게 생활하지 않고 열방 같이 생활한다. 사상과 신앙도 열방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용납하실 수 없어서 버리시기로 하셨다. 그들은 깨어진 토기같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교훈 : 선지자로부터 기별을 들으려 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옹기를 깨뜨리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와 징벌의 심각성을 경고하셨다.

 

 

다섯째날() 세마포 띠

1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3:11).

 

1. 13:1~11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신 상징적인 행위는 무엇이며 그것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13:1~1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같이 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세마포 허리띠를 띤 후에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 가에 묻고 오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썩어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상징적인 행위는 주석가들에게 몇 가지 곤란을 야기한다. 왜냐하면 유프라테스강(해당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필연적으로 하나의 강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예루살렘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편도로만 넉 달을 여행해야 했다(7:9). 기별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 거리를 두 번 왕복하게 하셨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 강이 지리적으로 다른 곳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가 여행해야 했던 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먼 곳까지 포로로 붙잡혀 갈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그처럼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온 예레미야는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유다 자손들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 허리띠는 부름을 받았던 시절의 순수하고 흠이 없던 이스라엘과 유다를 상징한다. 허리띠를 찬 인물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보여준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 허리띠가 제사장복의 재질과 동일한 세마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다(16:4). 어쨌든지 유다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19:6).

허리띠가 썩은 것처럼 유다의 자존심도 썩을 것이었다. 허리띠가 사람의 허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이 백성은 한 때 여호와께 고정되어 있었고 그분의 기쁨과 자랑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주변 문화와 접촉하면서 그들은 부패하고 해어졌다.

 

<부가설명> 허리띠가 사람에게 속하였지만 진흙에 떨어져서 묻히면 썩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준행하지 않으면 허리띠가 진흙에 떨어져 묻히는 것과 같이 될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 믿고 그 백성노릇을 하지 않으면 허리에서 떨어져나간 허리띠와 같이 된다. 허리띠가 허리에 잘 붙어 있으면 사람이 가는대로 가게 된다. 허리띠가 스스로 일하지 않아도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가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허리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허리에서 떨어져나와서 스스로 행동하려고 하면 흙에 묻힐 것이고 썩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들이 묻힌 유프라테스의 진흙은 이방의 문화를 나타낸다. 재림교회가 일반개신교 분화에 묻히는 것이 바람직할까?

 

교훈 : 유프라데스 강에서 썩은 예레미야의 허리띠는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되어야 할 유다 백성의 영적 타락과 그들의 포로 생활을 상징하였다.

 

 

여섯째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로마서 9장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에 대하여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사실 우리는 종종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 놀랍지도 않다. 55:8을 읽어 보라.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인가 아는 데에 대단히 한계가 많다. 특별히 하나님의 길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인간 지식의 한계는 소위 자기지시적인 문제로 드러났다. 다음의 문장을 보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자들을 면도한다.’ 그렇다면 세비야의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할까? 만약 그가 스스로 면도한다면 그는 자신을 면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자들을 면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면도할 수 있다. 이유는 같다. 그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을 면도하기 때문이다. 무슨 답이든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불가해한 역설을 만든다. 인간의 이성이 세비야의 이발사의 면도 대상과 같은 일상적인 문제만으로도 뒤엉킬 수 있다면 세상을 대할 때 하나님의 취하시는 방법의 본질과 범위 같은 심오한 것들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는 풍성한 이유를 제공한다.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49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제시합니까? 대쟁투 시나리오는 부분적으로나마 그같이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거부한데서 발생한 것을 성경이 계시한다. 왜 거부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성적인 피조물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악이 발생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문제를 이미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발생한 원인을 원망하고 있을 이유와 필요가 없다. 해결한 길을 받아들이면 마사형통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거절하면서 발생한 사실을 트집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성경에는 또 어떤 상징들이 있습니까? 상징을 사용하는 이점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상징은 많다. 다니엘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것들, 성소구조와 봉사, 예수님의 비유 등등. 그것은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사실을 깊이 설명하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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