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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일 안식일

일몰오후 630

 

기억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연구 범위: 5:12~21, 고전 3:12~17, 고전 12:14~26, 6:11~17, 고전 15:12~18

 

바울의 글은 대쟁투 주제로 넘쳐난다. 바울은 사탄의 존재뿐 아니라 기만과 죽음을 야기하는 인간의 행위가 실재함을 확신했다. 여러 곳에서 바울은 사탄의 간계(6:1)와 속임수(고후 11:14)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살후 2:9)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을 읽는 자라면 그가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궁극적인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탄이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을 정복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예수님께 패했다. 그분 안에서 모든 언약이 성취되었으며 결국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과 순종으로 간구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구원이 보장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사탄의 궁극적인 종말(2:14)과 대쟁투의 결말을 보증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바울이 대쟁투의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몇 가지 비유와 상징들과 함께 이 우주적인 전쟁에 개입되어 있는 우리가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로서 선을 위해 협력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교회, 구원,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하여 바울의 서신에 기록된 대쟁투 주제를 살펴본다.

느끼기 : 주의 재림으로 우리에게 임했던 저주가 사라진다는 소망을 갖는다.

행하기 : 다가오는 영적 투쟁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로 결심한다.

 

A.

바울은 어떻게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설명했습니까?(5)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생명을 받아 의롭게 된다.

부활이 대쟁투 주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활이 승리의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진리를 확실히 깨닫고 부활의 능력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B.

교회에 대한 주님의 관심은 어떠하며,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이 교회에 집중되어 있고, 교회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울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말씀을 잘 듣고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말씀인 것을 확실히 기억해야 한다.

지금 교회가 사탄과 투쟁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영적인 무장은 무엇일까요?

진리의 검을 잘 갈로 닦아야 하고 교회가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결론 우리가 부활을 통해 갖게 된 소망을 불행과 고통과 죽음이 널려 있는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마귀와 죽음의 권세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날() 228

아담과 예수님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바울은 복음에 대한 명쾌한 해설로 유명하지만 대쟁투에 대한 그의 설명도 그에 못지않다. 그는 복음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주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5:1).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고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다(2). 환난도 더 이상 우리를 불안하게 할 수 없다(3~5). 그는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5:8)셨으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을 제시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피하며(9~10), 그분과의 화목의 관계를 누린다(11).

 

1. 5:12~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대쟁투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5:12~21]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 사단이 아담을 범죄하게 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망이 되게 하였으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대쟁투는 아담과 사단 사이에서 예수님과 사단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말한 다음 바울은 예수님이 어떻게 그 일들을 행하셨는지 설명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야기한 상처를 고치지 않았다면 영원한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었을 것이고 사탄은 대쟁투에서 승리하였을 것이다. 아담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지고 왔다(5:12). 시내산에서 주어진 십계명으로도 죄와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할 뿐이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죄와 사망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풀릴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이라는 은혜로운 선물로 인류의 빚을 갚으셨다(5:15~16).

그렇게 해서 인류는 회복될 수 있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했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이 왕노릇한다(5:17). 우리가 아담 때문에 낙원을 상실했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우리는 그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이 없으나 그 결과로 고통을 받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낙원을 소유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어떤 도움도 드리지 않았다. 바울은 롬 5:18~21에서 자신의 논증을 요약한다. 첫째 아담이 정죄와 죽음을 불러왔고 둘째 아담은 화목과 생명을 가져왔다.

 

<부가설명>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인이 되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의 진실을 도덕적인 죄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아담의 죄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타락한 도덕성을 타고 태어나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가르쳐서 그것을 원죄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후 기독교는 이 원죄설을 수용하였다. 도덕적 타락이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을 도덕적으로 결코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어서 죄를 짓는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반박한 동시대 사람이 펠라기우스이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 의인이 된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선하게 살 수 있는지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것을 도덕적 모범론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두 주장은 다 성경적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도덕적 타락성을 물려받은 것이 원죄라고 하는 주장은 그 배후에 영혼불멸설이 있다. 도덕적 모범론은 십자가의 필요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로마서 5장은 죄와 구원을 밝히 설명해준다. 아담 안에서 아담의 후손이 다 죄인이 된 것은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이 다 사망이 된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도덕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존재 문제인 것이다. 아담의 후손은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과 존재를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했다.(고전15:22) 아 지구의 인류는 하나님의 안목에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죽었으니 생활이 없다. 당연히 썩는다. 이것을 썩어져가는 구습이라고 말하고(4:22) 베드로는 썩어질 씨로 태어났다고 가르친다.(벧전1:23) 이것이 죄이다. 사망이 되었으니 썩어져가다가 마침내 썩어 없어진다. 그것을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은 영원한 죽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할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수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명이 있는 기간이 유일하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아담에게 선고된 사망 곧 영원한 사망을 십자가에서 당하셔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 잡은 마귀가 죽어 없어지게 되었다. 대쟁투에 마지막 승리의 실상이다.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 대쟁투는 도덕적 투쟁 이전에 생명과 사망의 세력의 투쟁이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이고 믿지 않는 자는 루시퍼에게 속하여 사망을 그대로 당하는 자들이다. 생명이 당연히 이긴다.

 

교훈: 바울은 대쟁투에 대해서 중요한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담의 불순종은 세상에 죄와 사망의 문제를 가져왔고 예수님의 순종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왔다.

 

 

둘째날() 229

교회 건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

 

교회는 아무리 연약하고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최고의 관심을 쏟으시는 이 지상의 유일한 대상”(가려 뽑은 기별 2, 396)이다.

엘렌 G. 화잇의 이 진술을 고린도전서만큼 잘 예증하는 곳도 없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작물에 비유하였다. 한 사람은 씨를 심고 다른 사람은 물을 주지만 그것이 자라고 성장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전 3:4~9).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설명을 이어간다. 어떤 사람이 기초를 놓고 그다음 여러 사람이 그 위에 집을 짓는다(고전 3:10). 기초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고전 3:11), 뒤를 이어 일하는 자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에 매우 유의해야 한다. 다가올 심판은 건축 재료의 적합성과 부적합성의 차이를 분별해낼 것이다(고전 3:12~15).

 

1. 고전 3:12~15을 읽고 마 7:24~27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대쟁투에서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밝히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고전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어떤 말씀이 이어지는지 보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위 말씀의 내용은 교회와 그것이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주로 건강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쁜 생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자들을 멸하시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이 자신을 파괴할 뿐이다. (나중에 바울은 고전 6:15~20에서 우리의 도덕적인 선택과 관련하여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둘째, 이 두 절에서 말하는 너희는 그리스어로 모두 복수 형태이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에 대한 말씀이다. 따라서 누군가 교회를 해하는 일을 한다면 그는 심각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은 교회를 해하려는 자를 멸하겠다고 경고하신다.

 

<부가설명>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고 듣고 그대로 준행하는 사람들이다. 듣기만 하고 준행하지 않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건물은 교회가 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교회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이다. 둘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교회이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와서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족교회가 된다. 교회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성전이 된 사람들은 자기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사상과 언어와 감정과 태도가 다 진리로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것과 함께 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정결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 생각과 말과 감정과 행동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도 정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에 대한 말씀 끝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거룩함에는 먹는 것이 포함된 것을 확인시킨 것이다.(11:44,45) 재림성도들은 정말 성도가 되어야 하고 성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 식생활은 어떤가? 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단과 그의 무리들을 대항하는 보루이다.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조심스럽게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자를 멸하겠다고 경고하셨다.

 

 

셋째날() 31

한 몸으로서의 교회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1~12).

 

교회의 역할과 기능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비유된다. 각 지체들은 역할이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고 조화를 이룬 한 몸으로 서로 협력한다(고전 12:12).

 

1. 고전 12:14~2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핵심 기별은 무엇인가?

[고전12:14~26]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인들은 그 몸의 각 지체로서 유기적 관계로 건강한 지체노릇을 할 때 건강한 교회 힘센 교회가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몸의 지체는 서로 반목하지 않고 서로 협력한다. 이것을 전적을 주장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로 유지된다. 그러나 몸은 오직 하나이다.

 

바울은 만약 발이나 귀가 자기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소 재밌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만약 온 몸이 눈이나 귀라면 어떻게 될지 묻는다(고전 12:17). 큰 귀가 사무실을 가로지르면서 우리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교회를 좌지우지하려고 할 때에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앞서 바울은 교회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활동들을 요약하면서 각각을 성령의 은사로 설명하였다. 지혜의 말을 하는 자와 성경 지식에 해박한 사람도 있고(고전12:8),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사람과 치유의 손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9), 기적을 행하는 자들, 예언적인 통찰력을 가진 자들, 선과 악을 확실하게 분별하는 사람들,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도 있다(10). 그런데 우리는 해당 신자가 자신의 능력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교회를 세우고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배경에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님이시다(11~13). 이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각 지체에게 최적의 위치를 결정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한다(18).

여러 지체가 있지만 몸은 하나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각 지체는 심지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지체라 할지라도 다른 지체들과 서로에게 불가결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전 12:20~24).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각 지체의 안전과 건강을 보증하기 위한 내적인 방어막이 된다. 이런 상호의존성은 상처와 기쁨을 나눌 때에 작동한다(26).

 

<부가설명> 성경에 교회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였다. , 여자, 예루살렘 등등. 그 중에 가장 좋은 비유가 몸으로 설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5,16)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2:19) 몸은 머리로부터 지시를 받아 기능을 수행하지만 지위가 없다. 다 지체들이며 각각 지체로서 맡은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그렇게 하면 몸이 성장하고 건강하고 몸이 하는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기능을 맡은 지체들은 있어도 계급이 없다. 직위가 없다. 직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교회가 사망과 생명의 대쟁투의 첨병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는 사망의 세력을 꺾고 생명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교두보이다. 우리 각자는 건강한 지체인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지체인지 확인하고 충성해야 할 것이다.

교훈: 성령은 그분의 뜻대로 각 신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목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협력한다.

 

 

넷째날() 32

하나님의 갑옷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6:11).

 

에베소서 6장을 보면 바울이 전쟁과 관련하여 사용한 표현들은 대쟁투의 실재성과 우리가 원수와 벌이는 대결 상황을 사실 그대로 드러낸다.

 

1. 6:11~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 전쟁은 얼마나 실재적이며 개인적인가?

[6:11~1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악한 자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을 공격한다. 진리를 확실히 깨달아 알지 않으면 싸움에 힘을 쓰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으며 복음이 평안으로 이끌지 않으면 걸음걸이가 위태롭고 올바를 믿음으로 서지 않으면 사단의 공격하는 불화살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입지 않으면 우리의 지성은 사단에게 유린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마하지 않으면 진리를 올바르게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갑옷의 각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울은 우리가 선택한 일부분이 아닌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심판을 견딜 것이다(6:13). 즉 승리할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은유적인 표현은 심판 날의 무죄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5과 비교).

허리띠는 갑옷을 붙잡아 준다. 그것은 진리를 상징한다(6:14). 즉 진리는 우리의 영적 방어벽을 제 위치에 놓는다. 예수님도 자주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1:14, 17, 4:24, 8:32, 14:6). 그다음은 호심경이다(6:14). ‘는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신 또 다른 핵심 단어이다(, 5:6, 10, 6:33). 구약 성경에서 의는 정의를 지탱해 주고 모든 사람이 공정한 대우를 받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군화는 평화의 복음을 상징하는데(6:15) 이는 예루살렘이 재건되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자유를 회복시키셨다는 사실을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자들에게 관해 예언한 사 52:7의 말씀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전쟁에서 승리하셨으며 백성들이 이제 사람과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악에 대항하는 싸움의 일부임을 말해 준다.

믿음의 방패(6:16)는 불화살이 목표물을 타격하고 대량 파괴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구원의 투구(6:17)는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에 씌워주시는 면류관과 비슷하다(1:6, 2:10). 그리고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사용하셨던 것처럼(4:4, 7, 10) 우리 자신을 방어할 때 사용해야 할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

 

<부가설명> 에베소 6장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그리스도인이 현 세상에서 전투하는 군병들임을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대적하는 세력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곧 마귀이다. 또 악의 영의 능력을 배후에 받는 정사와 권세들이다. 이런 세력들과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전쟁 무기가 아니다. 전적으로 영적 무기인데 그것을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 당시에 세상 나라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장을 비유적으로 영적 무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는 것이다. ‘전신갑주는 싸움에 나아가는 군인이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허리 띠, 흉배, 군화, 방패, 투구, 검은 갑옷을 입은 다음에 갖추는 무기들이다. 전신 갑옷은 모두 일곱 부분이라는 것을 일 수 있다. 갑옷은 의의 옷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이 이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악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진리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여섯 가지 구체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무기에는 공격용이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은 멀리서 활로 공격하는 적군에게는 공격용이 아니다. 사단은 불화살을 쏜다. 활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무장에서 활이 없다. 승리는 이미 예수께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방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미 얻은 승리를 끝까지 잘 지켜야 할 것이다.

 

교훈: 바울은 엡 6:11~17을 통해 대쟁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대적해야 함을 강조한다.

 

 

다섯째날() 33

최후의 원수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고린도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부활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 요소인 부활의 중요성을 조심스럽게 설명한다(고전 15:1~4). 죽은 신자들의 운명에 대해 다소간의 오해가 있었고(고전 15:6)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15:12).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살전 4:13~17).

 

1. 고전 15:12~18을 읽어 보라.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고전15:12~18]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는 말로 논증의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전 15:20).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담과 비교하였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고 그분이 강림하실 때에”(고전 15:23) 일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는 같은 장에서 계속하여 두 아담을 비교한다(고전 15:45~49). 첫째 아담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오셨으며 언젠가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 의미는 재림의 날에 벌어질 일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설명되어 있다. “나팔 소리가 나매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2~53).

처음에 아담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인류는 곧 매우 짧은 세월만 살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는다면 영원히 살도록 재창조될 것이다.

 

<부가설명> 부활은 성경신앙의 가장 핵심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속죄와 구원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속죄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헛것이다. 속죄가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망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7,18)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성경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많이 강조한다. 강조할 만하고 해야 한다. 바울도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만큼 부활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의 부활을 믿고 동시에 우리도 예수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이 바로 사망과 생명의 대쟁투에서 승리한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는가?

 

교훈: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는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 모두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여섯째날() 34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간뿐 아니라 지구도 죄로 말미암아 악한 자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됐지만 구원의 계획에 의해 회복되어야 한다. 창조 시에 아담은 지구를 다스릴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혹에 굴복함으로 그는 사탄의 권세 아래 놓였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통치권은 그의 정복자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 되었다. 그는 원래 아담에게 부여된 지구 통치권을 찬탈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죄의 값을 지불함으로써 사람을 속량할 뿐 아니라 사람이 박탈당한 통치권도 회복하길 원하신다. 첫째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은 둘째 아담을 통해 회복될 것이다”(The Signs of the Times, 1908114).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는 사탄이 패배하였고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12:12 참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로 인해 죄악과 죽음과 불행이 사라지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 만연하다. 만약 현시점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제지하지 않으셨을 때에 우리가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는 한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오직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우리에게 약속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비록 약하고 결함이 있고, 끊임없는 경고와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최고의 관심의 대상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은혜의 실험을 하고 계시며 품성의 변화에 너무도 큰 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천사들은 놀라서 찬양의 노래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들은 죄와 실수가 많은 인간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한다”(교회증언 7, 16).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또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변화될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변화된다.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얻을 때 그 생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역이나 세계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고 약화시키며 분열시키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루시퍼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악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아주 선하게도 만든다. 덕적으로 선을 행하여 사후에 좋은 곳에 간다는 것은 생명의 길을 막는 악인데, 그 악을 막을 길이 없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는 것이 세상과 종교이고, 종교와 신앙으로 행하는 악은 더더욱 막을 길이 없다. IS가 잘 보여주고 있다. 사단은 이 두 가지, 사람이 보기에 선한 것으로 생명의 길을 막고 소위 종교로 생명의 길을 막는 철벽을 너무나 튼튼하게 쌓아올렸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자손으로 자처하는 이 교회가 생명과 사망의 기별을 모르고 루시퍼가 도덕성의 악을 조장하는 장본인쯤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언제 온 세상을 환하게 하는 생명의 빛을 전파할 것인가. 교회 자체가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이권과 직위를 두고 다투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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