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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일 안식일

일몰오후 649

 

기억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연구 범위: 20:1~3, 4:23~26, 고전 4:5, 20:7~15, 2:9~11, 벧후 3:10

 

사람들은 처음에 왜 죄가 생겼는지 묻곤 한다. 그 대답의 중심에 자유가 있다. 진정한 자유 즉 진정한 도덕적 자유는 위험부담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말 자유롭다면 잘못을 행할 선택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제기할 법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이 잘못을 행했을 때 왜 그들을 바로 처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반역의 끔찍한 결과를 모면하도록 하지 않으셨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대쟁투의 핵심과 닿아 있다. 이번 주에 보겠지만 하나님은 일종의 개방형정부를 운영하신다. 그분과 그분이 택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것들이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자기부인의 정신과 선하심, 공의와 사랑, 율법에 관한 모든 의문에 종지부를 찍는 방식으로 대쟁투를 해결하실 것이다.

적어도 타락한 자들의 운명에 관한 답을 얻는 데만 천 년의 세월이 주어진다. 재림의 사건 후에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심판의 국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다. 이제 대쟁투라는 장편 드라마의 결말을 볼 때가 되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끝나는지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이 모든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끝내시리라고 믿고 기뻐한다.

행하기 : 선택의 자유를 활용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과 함께 왕노릇한다.

 

A.

예수님 재림 후에 어떤 심판의 과정들이 남아 있습니까?

성도들이 하는 심판과 마지막 흰 보자에서 하시는 심판

하나님이 악인들을 바로 처단하지 않고 여러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악의 성질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아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한다.

 

B.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사실에 의하여 짐작할 뿐이다. 완전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악인들이 그 성을 포위하고 전쟁을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르기 전에 지금부터 그 행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예수님께 굴복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뤄 놓으신 승리를 수용할지 아니면 그것을 거절하고 사탄과 함께 멸망할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대쟁투가 끝날 때면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술이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첫째날() 320

사탄을 결박함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20:1~2).

 

1. 20:1~3을 읽어 보라. 어떤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소망을 얻는가?

[20:1~3]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 사단이 잡혀서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갇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악이 최후에 망하고 생명과 의가 영원한 승리를 한다는 소망의 보증이 된다.

 

결박 또는 구속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여러 방식으로 사용된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그것은 죄수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많은 이들을 풀어주셨다. 더욱이 결박하는 행위는 심판의 상징이자 악을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능력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된다.

위험한 범죄자가 체포되면 포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많은 경우에 범죄자가 아닌 사람들이 결박된다. 침례 요한은 왕의 도덕적 죄를 지적해서 사슬에 매였다(14:3~4).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18:12), 재판을 받으실 때(18:24) 그리고 죽으실 때(19:40) 포박을 당하셨다. 바울과 베드로도 포박을 당한 경험이 있다(21:33, 12:6).

예수님은 사탄에게 결박당한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시는 시간이 많았다. 손과 발목에 채운 쇠사슬을 끊었던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5:3~4). 예수님이 그를 마귀로부터 구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여 등이 굽은 여인을 만나 그를 풀어주셨다(13:11~12, 16). 그분은 또한 나사로를 무덤과 수의로부터 풀어주셨다(11:43~44).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덕분에 결박에서 풀려난 바라바라는 인물도 있었다(15:7~15).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사탄이 사람들을 고통에 가둬두거나 악이 창궐하도록 의인들을 가두려는 모습을 본다. 반면 사탄에게 결박된 세상에 자유와 해방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사망의 결박을 깨시는 모습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이 결박되고 바깥 어둠에 던져질 것이다(20:1~3).

또한 제자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신 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예수님이 성취하셔야 할 사명의 일환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강한 자)이 결박을 당하고 그의 집이 강탈을 당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12:26~29). 다시 말해서 사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탄의 결박에서 풀어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목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딤후 2:9)한다. 말씀은 예수께서 사탄을 침묵시키셨던 수단이다(4:4, 7,10). 우리도 동일한 능력으로 그에게 저항할 수 있다.

 

<부가설명> 죄가 왕 노릇하는(5:21) 세상에서는 의인이 결박당한다. 사망의 권세는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도 일시적으로 사망의 무덤 안에 결박한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수께서 그들을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사단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죄로 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적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망의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될 때 사단은 사망의 속박을 당하게 된다.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갇힌 후에 마침 내 영원한 불 못에서 불에 온전히 살라지고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무저갱에 가두는 것은 영원히 정죄 되었고 집행을 기다리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사건이다. 계시록의 계시를 통하여 성도들은 영원한 승리를 소망 중에 확인하는 기회를 확인할 수 있다.

 

교훈: 사탄은 우리를 결박하여 죄 속에 가두었지만 예수님은 그 결박을 풀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오히려 사탄을 결박하여 가두실 것이다.

 

 

둘째날() 321

라는 의문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20:4).

 

창세기 1장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1:2)했다. 예레미야는 칠 재앙과 재림 후에 멸망한 지구를 묘사하면서 여호와 앞에서 무너진 모든 성읍에 이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4:26). 예레미야는 그때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묘사한다(4:25). 요한도 사탄이 속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기술했다(20:3).

여기서 계시록은 전 세계에 미칠 재림의 극적인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예수님은 지구를 떠나 한 장소를 예비하여 그곳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셨다(14:1~3). 바울은 여기에 구체적인 정보를 더한다. 그 제자들 중에는 살아있는 자들뿐 아니라 무덤에서 부활한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살전 4:16~17). 요한은 또 다른 사실을 덧붙인다. 재림의 날 첫째 부활이 있은 후에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죽은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20:5).

 

2. 20: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어떤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가?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한 모든 성도들이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제사장이 되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아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것이다.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그들은 지금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정보 없이는 심판하는 권세를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악인들이 최후의 멸망을 맞이하기 전에 구원받은 자들이 품고 있는 수많은 의문들이 해소되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멸망할 자들을 심판하는 역할까지 감당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율법전(律法典) 곧 성경에 비추어 그들의 행위를 조사하여 육신의 행위에 따라 모든 사건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따라 악한 자가 받아야 할 형벌이 정해져서 사망책에 있는 그들의 이름 아래 기록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661).

기록을 펼치는 이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사랑과 친절의 언어로 멸망할 자들을 손짓해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그분이 인내심을 가지고 아무리 강권해도 그 호소가 이 세상이 뽐내는 사물들의 잡음에 묻혀 버린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은 자신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무한한 대가를 치른 분으로 알려질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묵묵히 기다리셨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의 삶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은 것이 있는가? 그분은 아직도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러니 생명을 선택하라.

 

<부가설명> 성경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들을 심판한다고 가르쳐준다.(고전6:2,3) 그러나 그 심판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계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시록 20장에 책들을 가지고 심판한다는 말은 없다. 심판 장면에 책들이 있다는 말은 다니엘 7:9,10과 계시록 20:12에 만 있다. 성도들이 심판할 때 그 책들을 보고 판결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고 왕 노릇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세한 것을 몰라도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충성하는 믿음으로 살다가 그날 이 자리에 앉는 은혜를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구원받은 자들은 천 년 동안 왕노릇하면서 하나님이 멸망당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쏟으신 사랑을 확인하고 그들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다.

 

 

셋째날() 322

최후의 심판

 

성경 시대에는 재판에 두 단계가 있었다.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왕의 보좌 앞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이다. 성문에 앉은 장로들은 각종 작은 사건들을 판결했다. 반면 왕은 큰 사건들을 판결했다. 왕의 판결은 곧 정의를 보장하는 최종적인 권위였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을 보좌에 앉아 공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하는 우주의 왕으로 묘사한다(20:11~15).

 

1. 20:7~1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중대한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0:7~15]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 사실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대쟁투의 최후의 결과를 보여준다.

 

계시록 20장은 천년기를 다룬다. 따라서 이 특정 심판은 그러한 시간의 틀 안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4절에서 묘사되어 있는 장면과 같지 않다. 4절에서는 많은 보좌가 있지만 11절에는 한 보좌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자는 천년기 시작 때의 일이지만 후자는 천년기 끝, 즉 둘째 부활 이후에(20:5)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설득하여 거룩한 성을 포위하는 사건 다음의 일이다(20:7~9). 그때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가 도성 위에 나타난다.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 앞에 선다. 어떤 이들은 도성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밖에 있다. 왜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지 묻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예수님이 언급하신 때가 바로 이때이다(7:22~23). 그리고 바울이 어느 날 모든 이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고 했던 때도 바로 이때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2:9~11).

이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께 그분이 아직 모르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신다. 이 심판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심판하시는지 그 이유를 모든 사람이 정확히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천사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16:5)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 악인, 천사 모두가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볼 것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과 더불어사망과 음부가 파멸되는 장면이다(20:14~15).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셨다(1:18). 그 둘 모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르침과 달리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은 멸절된다. 영원한 생명과 정반대로 그들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마지막 심판 광경에 대하여 그림을 잘 그려 우리 앞에 제시하였다. 우리는 지금 이 저자처럼 계시록을 통하여 종말을 다 보는 사람들이다. 종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생활하는 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다. 성경에 계시한 구원의 복음의 진행과 결말을 알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예언의 지도를 받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되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바른 길을 걸으며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이미 예수께서 이기신 싸움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승리의 자리에 서서 방어하는 싸움일 뿐이다. 방어할 때도 예수께서 도우시고 성령이 인도하시며 거룩한 천사들이 거들고 있다. 우리가 질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능히 악한 자를 대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대쟁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십자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고 사망 집행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단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있다.(12:12) 그래서 분을 내어 최대한으로 성도들을 공격한다. 이왕 죽을 것 성도들을 싫건 괴롭히다 죽는 속셈이다. 이런 분노에 우리가 겁을 먹거나 속을 필요가 없다. 예수 안에서 담대히 서서 성령의 검 곧 말씀으로 이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무장을 잘 갖추고 인간의 내면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단의 충동을 넉넉히 이겨야 한다.

 

교훈: 천년기가 끝나고 둘째 부활 후에 하나님은 멸망할 자들과 사망과 음부를 영원토록 멸절시키실 때에 모든 이가 그분의 공의를 인정할 것이다.

 

 

넷째날() 323

새 하늘과 새 땅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죄와 반역은 초청하지 않은 침입자들이었다. 그것들은 원래 있지 말아야 했다.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상처의 원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시간만 남았다. 그 일이 일어난 뒤에야 대쟁투는 끝날 것이다.

 

1. 21:1~2, 9~10, 22:1~3을 읽어 보라. 요한이 묘사하는 장면의 주요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21:1,2, 9,10]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2:1~3]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베드로의 말과 비슷하다.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벧후 3:10). 잘 알다시피 지구는 단순한 변모 이상의 필요가 절실하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지구상의 만물이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한다.

요한은 더 이상 바다가 없다고 말한다(21:1). 그는 지금 이 장면을 바다로 둘러싸인 밧모섬에서 기록했다. 오늘날의 선박으로도 요한이 이 말을 기록한 섬까지 가려면 몇 시간이 소요된다. 새롭게 된 지구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사랑하는 자들을 보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어떤 형태의 장애물도 없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놀라운 광경을 보는 듯하다. 성경 시대에 예루살렘은 한 도시를 일컬었다. 그것이 요한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1세기 로마 건축양식으로 새 예루살렘을 묘사했던 예술가들의 상상도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력을 저해한다. 왜냐하면 그 성의 설계자와 건축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11:10).

우리의 지력으로는 그러한 묘사를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를 위하여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텐데 우리는 그런 상상을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 도성의 거대한 규모로 미루어 보건대 그곳에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공간이 넉넉할 것이다.

 

<부가설명>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의하여 처음 창조된 이 지구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추측할 수 있다. 새로 창조된 세계가 더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죄 없는 세상도 이보다 못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에는 바다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 창조를 복원하는데 처음에 바다를 만드신 분이 바다를 없애버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없는 바다는 처음 바다이다. 처음 하늘, 처음 땅, 처음 바다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바다라는 말 앞에 처음이라는 말이 없지만 바다는 땅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땅과 바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처음 바다를 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의 아름다움이다. 새 예루살렘의 치장을 자세히 소개한 것은 그 예루살렘에 거하는 성도들의 아름다움이 그처럼 완벽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소개하는 것이기도 한다.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열 두 기초석에 새겨지고 열 두 성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을 기초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이 사는 도성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마침내 완전하고 충만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로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런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날마다 보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교훈: 만물이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며 우리는 거대하고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다섯째날() 324

다시는 눈물이 없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21:3).

 

1. 21:3~5을 읽어 보라. 여기서 눈물은 어떤 의미인가?

[21:3~5]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말씀은 다시 눈물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고 또 구원이 너무 감격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씻어주신다는 표현이기도 하며, 그러나 악인이 성 밖에서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우는 의인들의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서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는 행동에 익숙하다. 엄마가 아이를 달래거나, 친구를 위로하거나, 마음이 상하거나 시련을 겪는 배우자를 위로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이 그것이다. 반면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얼굴을 만지신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와 우리 창조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죽음과 슬픔과 눈물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고통, , 눈물, 죽음은 타락 이후에 일상이 되었다(3:16~19). 그러나 그때부터 벌써 하나님은 인류에게 실패와 상실이 없는 하늘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훗날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어떻게 우리와 함께 거할지를 작은 표징들과 함께 제시해 오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구주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3:15). 그리고 성소에 임하겠다고 약속하셨고(25:8),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겠다고 약속하셨으며(1:14), 언젠가 우리를 그분 곁에, 우주의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21:3).

많은 성경절이 그 같은 약속을 요약하여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는 말씀이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깨진 언약의 결과를 막기 위해 오셨다. 예레미야는 깨진 언약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30:15). 그러나 예수님 덕분에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21:3은 성경의 마지막 장면을 제시한다. 어쩌면 멸망하는 자들의 최후를 보고 우리는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불행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아는 대로 창세기 1, 2장은 처음 창조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창세기 3장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사실을 기록하였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마지막 21, 22장은 새 창조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20장은 죄가 소멸되는 것을 기록하였다. 요즘 흔히 말하는 카이즘적 기록이다. 창세기 4장부터 계시록 19장까지는 구원사업이 진행되는 기간에 일어나는 생명과 사망의 투쟁의 양상을 기록한 것이다. 2122장에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을 기록하였다. 아직 우리에게는 미래의 일이고 예수께서 재림이 지체되면 우리도 죽음의 잠을 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잠들기 전에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복음 사업이 생활에 드러나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머지않아 예수께서 오실 것이고 우리가 잠든다면 잠이 깰 때 예수님의 영광의 재림을 맞을 것이다.

 

교훈: 죄인들이 영원히 멸망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 후에는 다시 눈물과 아픔이 없겠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영원한 언약 관계가 확립된다.

 

 

여섯째날() 325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천년기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려해 보라.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안다. 첫째, 악인들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기 전에 천년기가 먼저 시작된다. 둘째, 구원 받은 자들은 이 시기 동안 여러 의문을 해소한다. 그리고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이 심판할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3). 그뿐 아니라 천년기 동안 그들에게 즉 성도에게 심판하는 권세”(20:4)가 위임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진리를 설명한다. 천년기가 끝날 때까지, 다시 말해서 구원 받은 자들이 악인들의 멸망 사유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감당할 때까지는 아무도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늘 정부의 개방성에 대해서 이것이 말하는 바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에게 임하는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공의롭고 정당한지를 명명백백하게 이해하기 전까지는 단 한 사람도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겠지만 모든 것이 끝날 때 우리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16:5)라고 외칠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비록 아직도 많은 의문들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우리 주변에 고통과 죽음이 널려 있는 이유를 깨닫는 데 대쟁투가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생명과 사망의 대쟁투로 인하여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성경을 읽고 배우고 깨닫고 기도와 말씀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하늘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하신 그 생명으로 날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답을 찾고 있는 의문들은 무엇입니까? 답을 알 때까지 이처럼 슬픔이 많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움을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달으면 의문이 풀리고 대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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