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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일 안식일

일몰오후 534

 

기억절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

 

연구 범위 : 2:1~13, 2:16, 19:17~18, 13:8~10, 12:48.

 

처음에는 제사장이, 그다음에는 레위인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길가에 쓰러져서 거의 죽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비록 그들의 종교적 의무가 방금 끝났다 할지라도 그 둘 중에 아무도 그들의 의무를 부상당한 사람에 대한 책임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그곳을 지나쳐 버렸다. 결국 이방인과 다름없는 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나 그 사람을 가엾이 여겨서 상처를 감싸주고, 그가 회복될 때까지 여관에 머물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값을 지불하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약속했다(10:30~37).

예수님은 영생에 대하여 묻는 한 법관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법관에게 더 열심히 해라!”, “더 많이 해라!”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한 장면을 묘사하셨다. 즉 우리는 잠재적으로 위험하거나 내키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사랑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쉽지 않고 우리의 본성을 거스른다 할지라도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으며 교회의 내외에서 사람들을 분리시켜 놓은 장벽들을 허물도록 요구한다. 이번 주에는 이런 중대한 진리에 대하여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느끼기 :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의 지혜와 인도가 필요함을 느낀다.

행하기 :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가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과 섬김에 관심을 가지기로 결심한다.

 

A.

차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의 이상과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차별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교회가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역사로 운영되고 교인들이 성령의 인도로만 살아가면 그렇게 된다.

교회는 사회 계층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

 

B.

그대가 안식일 예배 설교자인데 교회 가는 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

율법에 대하여 자기중심의 순종관계중심의 섬김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자기중심은 자기의 의를 쌓으려는 정신이고, 관계중심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긍휼은 우리의 구원과 이타적인 섬김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까?

사람을 살리는 영향을 미친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결론 : 사랑과 율법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심판과 자비가 조화를 이룹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의롭게 될 자들은 그분의 사랑의 율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나타내는 그분의 대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첫째 날() 금가락지를 낀 사람

1026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2:1).

 

2:1~4을 읽어 보라. 이는 다른 것들과 대비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멋진 옷을 입은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반면 다른 사람은 가난하고 누추한 옷에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보인다. 한 사람은 극진한 환영을 받고 다른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는다. 한 사람에게는 편하고 높은 자리에 앉으라 하고, 다른 사람은 어디에 서 있거나 바닥에 앉으라고 한다.

상황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예배 시간에 벌어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절에 나오는 회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쉬나고게이다. 이 말은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행해진 유대인 기독교도 안식일 예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8:7~8, 참고).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한 사람의 공적 이미지와 지위는 매우 중요했다. 부와 학식,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개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그러한 유·무형의 자산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대중적으로 또는 종교적 행사에서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물의 수여자에게 은혜를 갚아야 했다. 총애는 충성으로 관용은 대중의 인정으로 보답을 받았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에 참석한 소수의 상류층은 특별한 대접을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무시했다가는 교회에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옳지 않거나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공격의 빌미를 사거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1. 2:16과 눅 11:43을 읽어 보라.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사회적 기대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복음의 원칙과 어떻게 상충하는가?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1: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우대하는 것이 사회적 기대이다. 그러나 복음의 원칙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부하거나 가난한 것이 죄는 아니지만, 나이와 재물, 교육과 심지어 종교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을 다루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한 척도이다.

우리는 사회적 신분이 우리보다 높아 보이는 자들을 더 존중하고 낮아 보이는 자들을 덜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르기 쉬우나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행동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2:2 참고).

 

<부가설명> 죄의 세상은 계급사회이고 신분사회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계몽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전제군주 정치에서 민주정치 체제로 전환하는 세기에 접어들어서 서민들의 인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이 말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신분과 계급이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지배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로 생각하는 미국에도 인종차별은 여전하다. 한국에서도 똑같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태도는 별로 다르지 않다. 성경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섬기는 자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한 것이다. 즉 서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재산과 학벌, 학력과 지위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도덕적 선악으로 평가하지만 성경은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 평가한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산 자이고 예수가 없는 자는 죽은 자이다. 그리고 산 자들은 섬기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교훈은 산 자가 되어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섬기라고 가르친다. 그들을 산 자가 되도록 섬기라고 가르친다. 자신이 산 자가 아니면 결코 타인을 섬길 수 없다.

 

교훈 : 사회에서는 부와 학식, 권력에 따른 계층이 존재하지만 교회에서는 사회적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날() 계급투쟁

1027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2:5~7).

 

모든 문서전도자가 아는 것처럼 기꺼이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대개 극빈한 자들이다. 부자가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책을 팔기가 까다롭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므로 가난한 사람만큼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이 광범위하게 감지된다. 교회는 경제와 사회가 어려움을 겪는 지역 또는 그런 시기에 가장 빨리 성장했다. 그렇다면 큰 문제로 씨름하는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제시된 소망에 더욱 개방적이라는 말인가?

 

1. 2:5~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야고보는 앞선 네 절에서 설명한 것을 어떻게 확대하는가?

[2:5,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이 말씀에서 판단해 보건대, 교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는 거부당했지만 믿음은 부유한 가난한 자들을 선택하셨다. 반면 부자들은 그들의 부를 사용해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였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문제는 당시에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심지어 로마법은 부자 편에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법을 성문화했다. “경제적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겨졌기에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고소할 수 없었다. 법은 높은 계급의 범법자보다 유죄 선고를 받은 낮은 계급의 사람에게 더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였다.” -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3), 694.

 

2. 2:7을 읽어 보라. 이런 적절치 못한 행위의 영향에 대해 야고보가 지적한 요점은 무엇인가?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 아름다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빈부를 차별하면 예수 이름이 훼방을 받게 된다.

 

 

그들의 부적절한 행위는 예수님의 선한 이름에 대한 모독이었다. 나쁜 행위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나쁜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심지어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부와 권력을 사용해 다른 이들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그 결과 분열과 다툼이 생긴다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지지하는 선한 이름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얼마나 조심해야겠는가?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믿음과 세상의 부귀는 사회와 좁게는 사람의 마음에서 자주 충돌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소유로 여기는 사람들은 재물이 신이 된다. 그러나 재물을 도구(道具)로 여기는 사람에게 재물은 자기와 주위에 복이 된다. 성경은 재물은 도구라고 가르친다. 그 도구를 사용하여 필요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여 고치고 수리하고 만들고 한다. 그처럼 재물로 고쳐야 할 사람을 고쳐주고 수리해야 할 것을 수리하고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소유로 생각하면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남에게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또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희생으로 생각하고 또 생색을 내는 선행으로 생각한다. 선행이 맞지만 도구노릇을 한 것은 아니다. 야고보 2:5을 개역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개정판이나 기탄 번역들은 세상의 가난한 자라고 번역하였다. 또 어떤 번역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라고 번역했다. 원문을 엄밀히 따지면 개역판이 틀린 번역인 것 같다. 그러나 사상은 개역판이 옳은 것 같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이 있다. 이들의 재물은 세상을 복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들의 심령이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재물을 소유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세상에 대하여 부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나는 개역을 좋아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믿음에 부요하기 바란다. 이 사람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예수의 생명을 나누어주려는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교훈 :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그들에게 이득을 취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셋째 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10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2:8~9).

 

1. 2:8~9을 레 19:17~18, 5:43~45과 더불어 읽어 보라. 어떤 중요한 기별이 여기에 제시되었는가?

[2:8,9]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그리스도인은 이방인들, 불신자들보다 더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최고의 법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법을 최고의 법이라고 칭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왕의 왕”(19:16)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산상설교에서 자세하게 제시되었다(5~7). 산상설교의 첫 아홉 절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5:3~11).

5:43의 말씀은 레 19:18이 당시에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암시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선 명령에서 레위기는 이웃과 같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동료 이스라엘 동포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금지되었다(19:17~18).

아마도 어떤 이는 이 명령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화를 내거나 그들을 미워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레위기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수로 간주되었다. 최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던 경건한 유대교 쿰란 공동체에서 그러한 태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어둠의 자녀들또는 지옥의 사람들로 분류하고 미워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많은 사람이 있다.그들은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시대의 소망, 504).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자기 살고 있는 지역의 근방 사람들이 이웃이거나 아니면 자기 민족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이웃을 정의를 하셨다. 사전적으로 이웃은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이좋게 지내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꾸기도 하고 꾸어주기도 하면서 오순도순 살면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었고 율법서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 이웃노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이웃이다. 고난당하는 사람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우리도 이런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내 집 근방에 살든지 아니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기를 내미는 사람들이 이웃인 것이다. 구약의 이웃이라는 표현과 예수께서 이웃이라고 한 표현이 서로 바뀐 상태 같이 느껴진다. 사전적 의미의 이웃도 이웃이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이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이웃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과 형제로 여기고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넷째 날() 온 율법

1029

 

예수님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23:2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야고보는 예수님이나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는 무엇이든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해한다.

따라서 나쁜 짓보다 선행을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순종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공허한 순종일 뿐이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타인에 대한 섬김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요성과 함께 그것의 핵심인 사랑을 강조하셨다. 율법의 준수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2:10~11).

2:10~11을 읽어 보라. 표 안에 있는 성경절을 찾아 읽고 각 성경절이 온 율법사랑의 법중에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니면 둘 다 강조하는지 구분하라.

온 율법 사랑의 법

[5:18~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온 율법이 강조되어 있다.

[22:36~40]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둘 다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둘 다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온 율법이 강조되어 있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온 율법.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온 율법과 사랑의 율법 둘 다 강조한다.

※※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물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온 율법은 그 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온 율법을 강조하거나 사랑의 율법을 강조하거나 사실을 똑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오늘날 여러 신자들도) 모세의 책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충성스럽게 지키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어려웠다. 지켜야 할 조항이 613개에 이르기 때문이다(248개는 긍정적인 법이고, 365개는 부정적인 법이다).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지 묻는 질문은 아마도 예수님께 덫을 놓으려던 목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 모두 중요하다고 단언하셨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른 모든 율법을 요약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순종이 주변과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순종은 언제나 관계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즉 내가 구원받지 못할까봐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관계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 내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면 나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23:2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야고보는 예수님이나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는 무엇이든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해한다. 따라서 나쁜 짓보다 선행을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순종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공허한 순종일 뿐이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타인에 대한 섬김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부가설명> 성경의 율법은 도덕적 종교적 계율이 아니다. 이것은 생활법칙이다. 생명체들은 그 생명이 살아가는 생리와 생태가 있다. 소나무는 소나무처럼 살아가고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처럼 살아간다. 소는 소처럼 살고 돼지는 돼지처럼 산다. 그렇게 사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돼지가 소처럼 살아질 수 없고, 아카시아가 소나무처럼 살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체만이 살아가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거듭난 생명체가 된 것이다. 거듭난 생명체는 거듭난 생명체는 거듭난 생명체가 살아가는 법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은 이론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관계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거듭난 생명체의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한다. 거듭난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법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론이 실제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혼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계명이 생활이 된다. 이 중생의 생명을 가진 것이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상태인 것이다.

 

 

다섯째 날()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음

1030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2~13).

 

1. 2:12~13과 요 12:48, 2:12~13, 고후 5:10, 20:12~1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심판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2:12,13]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20:12,13]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우리가 행한 대로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가르침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 그와 함께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를 입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의를 입는 과정은 두 가지 즉, 용서(칭의)와 순종(성화)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2: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

우리가 행한 일뿐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은 일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이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 의미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떤 일을 더 많이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길이다.

야고보가 213절 전반부에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주목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2:13).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행함에 대한 관계적인 정의이다.

만약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면 우리는 심판에 대하여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절망하며 구원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14:7)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의를 의지해야 한다. 그분의 공로는 심판의 날에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의 부르심대로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은 우리를 그분의 의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의 경고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평안하다는 잘못된 판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을 이”(2:13)긴다고 했다. 우리는 특히 가장 심각한 죄에 빠진 자들을 대할 때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부가설명> 심판 문제는 당연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심판의 표준이 하나님의 계명인 것은 성경이 확실히 계시하고 있다. 세상에 살 때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심 같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하며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려는 심정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모신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은 심정으로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 스스로 심판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37)고 하셨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심판을 이기는 삶으로 이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삶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는 자는 심판을 이긴다.

 

 

여섯째 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31

 

<각 시대의 대쟁투>, 479~491 “하늘에서 행하는 조사 심판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셨으므로,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2:7) 손상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산상보훈, 10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의의 그 드높은 거룩함을 단 한 점도 손상시킴이 없이 용서가 가능케 되었다”(화잇주석, 2: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저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너무 다릅니다.”라고 말한 간디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불행히도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행했는지 볼 수 있지만, 그보다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위의 세상에 그분을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면 그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될 것이다. 빛으로 세상을 비치면 빛이신 예수님을 잘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출석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배경, 사회적 지위, 기이한 특징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을 받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각자가 자기 교회 상태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고 오직 성령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전통이나 사회 법률 가운데 성경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명확한 것은 무엇이고 미묘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의 길을 제공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성경의 원칙대로 살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것은 일요일이 정기 공휴일인 것이다. 지금은 5일 노동제가 되어서 법적으로 안식일 지키는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국가시험 등 이런 것들은 다 안식일에 행하는 경향이다. 재림성도들은 자기가 처한 곳에서 빛으로 원칙을 생활하며 사람들에게 빛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예를 들면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자들을 대해야 할 때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할까요?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잘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불쌍히 여겨서 잘못하는데서 해방되도록 진심으로 도우는 태도를 가리킨다.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려는 정신이 바로 긍휼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바로 이런 긍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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